114. 집에 갈 시간이다
만년설삼이라니!
손우곤이 믿을 수 없는 표정으로 고개를 들자, 남궁천이 턱짓을 했다.
“의심되면 열어 봐도 돼.”
“그, 그럼 실례하겠소.”
딸깍.
부들부들 떠는 손으로 목함을 열어보니 과연 싱싱한 만년설삼 한 뿌리가 떡하니 자리를 잡고 있다.
상자 안에서 빛이 난다는 게 이런 걸까?
‘진, 진짜로 만년설삼!’
이미 덮개를 여는 순간 알 수 있었다. 그 향기만으로도 머리가 쾌청해지는 것을 느꼈기에.
손우곤의 손이 달달 떨렸다.
“이, 이 귀한 걸 어찌…….”
“무연회에서 우승해서 부상으로 받았지. 알고 있을 텐데? 무연회 우승자에게는 부상으로 만년설삼 한 뿌리가 수여되는 전통이 있다는 걸.”
“물, 물론 그건 알지만…… 이걸 내게 준단 말이오?”
“미쳤어? 뭐 예쁜 구석이 있다고 주겠어?”
“그, 그럼?”
“아내를 치료하란 말이야. 네가 처먹지 말고.”
“아, 나도 내가 먹을 생각은 없었소!”
“그럼 정확히 말해야지. 오해하잖아.”
“끄응. 한데 정말 이걸 준단 말이오?”
남궁천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만년설삼이 가진 극음의 기운이면 초열병의 극양 기운을 충분히 상쇄하고도 남겠지. 잘 소화하기만 한다면 이전보다 훨씬 건강해질 테고.”
“하, 하지만 이리 귀한 걸 정말 아무 조건 없이 준단 말입니까?”
“그럴 리가. 충성을 대가로 받겠다는 거지. 적어도 은혜를 아는 인간이라면 그 정도는 납득할 테니까.”
“겨우 충성 맹세 정도로 이 귀한 걸 내놓겠다는 겁니까?”
손우곤의 말투가 어느 순간부터 바뀌어 있었지만 정작 그 자신은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겨우 충성 정도라니. 세상에서 가장 얻기 힘든 게 바로 사람 마음이다. 내가 그 만년설삼으로 충성을 사지만, 그 충성이 영원할 거란 생각은 하지도 않아. 뭐든 약발이 떨어지는 순간이 오는 법이니까. 다만 만년설삼이 꽤나 귀한 영초인 만큼 한동안은 약발이 유지되겠지.”
“나는 은혜도 모르는 짐승이 아니오!”
“그건 겪어보지 않아서 모르겠고.”
손우곤이 멍한 표정으로 남궁천을 보다가 다시 목함에 든 만년설삼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만년설삼.
헛웃음이 나올 지경이다.
그 언젠가 아내를 진맥했던 의원이 무심히 중얼거린 말이 있었다.
“마음의 준비를 하셔야겠네. 초열병일세. 만년설삼 정도의 영초가 아니면 가망이 없네.”
그 말을 듣는 순간 하늘이 무너지는 것만 같았다.
만년설삼이라니.
만년설삼이 뉘 집 똥개 이름도 아니고.
집을 내다 판다고 해도 만년설삼 잔뿌리도 만지지 못하리라.
그나마 시시 때때로 얼음을 먹이고 냉찜질을 하면서 지금까지 목숨을 겨우 연명할 수는 있었다.
하나 한여름에는 얼음을 구하기도 쉽지 않은 일. 무지막지한 자금이 지출됐다. 그깟 얼음을 구하기 힘들어서.
한데 만년설삼이라니.
‘그 만년설삼이 이리도 구하기 쉬운 거였나? 이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척 내놓을 그런 물건이었나?’
아니다.
만년설삼은 절대 이렇게 가볍게 던져줄 수 있는 약초가 아니다.
사시사철 눈이 녹지 않는 고지에서 저 홀로 뿌리 내려 최소 일만 년 동안 사람의 손을 타지 않은 영초다.
귀한 걸로 따지자면…….
‘내 충성? 사람의 마음?’
허! 당신이란 인간은 도대체…….
손우곤이 남궁천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이렇게 눈빛이 깊었던가?
끝을 알 수 없는 심연을 들여다보는 기분이다.
마주 보는 것만으로도 혼이 빨려들어갈 것만 같다.
‘도대체 당신 눈은 무엇을 보고 있는 거요? 당신의 그 눈길은 어딜 향하고 있는 거요?’
자신을 마주하고 있지만, 남궁천이 보는 것은 그 너머의 무엇이다.
훨씬 높고, 훨씬 아득하며, 훨씬 위대한 것.
‘아…….’
왠지 모르게 납득이 된다.
단지 눈을 마주 본 것만으로 저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이토록 먼 곳을 바라보는 자에게 눈앞에 놓인 만년설삼이 대수랴.
그가 바라보는 곳에 가기 위해선 만년설삼 열 뿌리도 대수롭지 않으리라.
‘단지 눈빛에 제압당한다는 것이 바로 이런 것이로구나.’
살면서 눈빛만으로 사람을 굴복시킨다는 표현은 다 거짓말이라고 생각했건만.
‘이 어린 나이에 어찌 저런 눈을…….’
남궁천의 심안(心眼)을 마주한 손우곤은 가슴 한구석에서 무언가 울컥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목구멍까지 타고 올라온 감정은 하나의 단어로 떠올랐다.
‘잠룡…… 이로다.’
한편 남궁천과 손우곤을 바라보던 복성은 내심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까부터 두 사람이 단 한마디 말도 없이 서로를 바라보기만 하지 않는가?
마치 눈싸움이라도 하는 것처럼.
다만 둘 사이에 흐르는 팽팽한 긴장감은 섣불리 끼어드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기에 숨만 죽였다.
기분 나쁜 긴장감은 아니지만, 몹시나 진중한 분위기인 것만은 틀림없었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이 흐르고 나서 갑자기 손우곤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곧이어 털썩 무릎을 꿇으며 포권을 하더니 지붕이 떠나갈 정도로 우렁찬 소리로 외쳤다.
“창응대주 손우곤이 예비 소가주님을 뵙습니다! 속하, 결과와 상관없이 공자님께 목숨 바쳐 충성하겠습니다!”
쩌렁쩌렁 울리는 목소리가 복성의 가슴마저 뒤흔들었다.
충성 맹세를 받은 사람은 남궁천인데 왠지 곁에 있는 자신의 가슴이 뜨거워져 온다.
그만큼 손우곤의 표정과 눈빛은 진심을 담고 있었기에.
그 숨 막히는 눈싸움 속에서 두 사람은 어떤 대화를 나눈 것일까?
확실한 건 알 수 없지만, 창응대주는 단지 만년설삼에 충성을 판 것이 아니다.
그는 분명 남궁천을 보면서 무언가를 느낀 것이리라.
남궁천이 희미하게 웃었다.
“손 대주. 잘 부탁한다.”
“감사합니다!”
남궁천을 바라보는 손우곤의 두 눈동자는 유난히 반짝이고 있었다.
그것이 결의 때문인지, 감동으로 젖은 눈물의 흔적인지 알기 힘들었다.
* * *
황산 서남쪽에 위치한 송백관.
개관한 지 오 년이 채 되지 않았지만, 최근 황산 인근에서는 가장 많은 사람들이 찾는 무관이었다.
무관의 현판은 과연 최근의 기세를 자랑하듯 유난히 크고 웅장했는데, 그 아래에는 체격이 건장한 사내 둘이 장승처럼 버티고 서 있었다.
기실 무관이라는 곳이 문지기를 항시 세워둘 필요까지는 없지만, 굳이 이렇게 문지기를 세워둔 이유는 일종의 홍보 효과를 노리는 것이기도 했다.
송백관의 문지기들은 상당한 덩치를 자랑하는 데다 눈만 마주쳐도 오금이 저려올 만큼 부리부리한 인상이었다.
그런 송백관의 관주실에서 지금 두 사내가 마주 앉은 채 차를 마시고 있었다.
그윽한 향기를 뿜는 차는 중원 십 대 명차로 꼽히는 황산모봉이었는데, 맛이 신선하고 향이 높은 것으로 보아선 가히 최상급임이 틀림없었다.
송백관주 이세적이 마주 앉은 사내를 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맛은 괜찮은가?”
“괜찮다는 표현으로 되겠습니까? 최상품의 황산모봉이 아닙니까? 늘 그렇지만 귀한 대접을 받고 있습니다.”
“하하, 사람이 귀하니 이 정도는 해드려야지.”
“과찬이십니다.”
“자자, 들게나.”
“감사합니다.”
사내가 찻잔을 들어 올리는데, 이세적이 넌지시 말을 꺼냈다.
“남궁세가주가 정회를 열었다지.”
멈칫.
사내가 미약한 반응을 보이자, 이세적은 모른 척 말을 이어갔다.
“아무래도 소가주를 정할 모양이더군. 지금 남궁세가에 일가친척이 다 모였다는 이야기가 돌고 있네.”
“…….”
결국 사내는 차를 한 모금도 마시지 못한 채 도로 찻잔을 내려놓았다.
사내가 잔잔하게 파문이 일어나는 찻잔을 보며 시큰둥하게 대꾸했다.
“이젠 저와 상관없는 일이지요.”
“정말 그러한가?”
“그렇습니다.”
“하나 자네는 창응대 부대주이지 않았나?”
“예전엔 그랬지요. 하나 지금은 아닙니다.”
“하면 지금은…….”
“어디까지나 전 송백관의 사범입니다. 이젠 여기가 제가 있을 곳이지요.”
그제야 송백관주의 입이 길게 찢어졌다.
사내의 말이 흡족한 듯.
“자네가 마음을 확실히 다잡은 듯하니 다행일세. 혹여나 자네가 어리석은 짓을 하진 않을까 했지.”
“걱정 마십시오, 관주님.”
“하긴. 사실 나는 자네가 돌아가겠다고 해도 딱히 말리진 않을 생각이야. 다만 계약은 계약이고, 또 위약금이라는 게 있으니 말일세.”
그러자 젊은 사내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매달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송백관주는 입매를 비튼 채 말을 이어갔다.
“사실 은자 이천 냥이라는 돈이 적은 액수가 아니잖은가? 우리로서도 최소한의 안전장치가 필요했었던 거고. 뭐, 자네가 본 관에서 딱 십 년 만 머물러주면 이천 냥을 물어낼 일도 없고 말일세. 벌써 일 년이 지났으니 이제 구 년밖에 남지 않았군.”
“그렇군요.”
“차 사범을 보고 오는 아이들도 꽤 된다더군. 우리 앞으로 잘해보세. 자네만 믿고 있네.”
“알겠습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이지만 소가주가 정해지고 그들이 자네를 찾아오기라도 한다면…….”
사내가 쓴웃음을 지으며 찻잔을 들었다.
“걱정 마십시오. 그들은 절 빼낼 수 있을 정도로 여유가 넘치지 않습니다. 아마 절 찾아오지도 않을 겁니다.”
* * *
“일단 여기까지 찾아오긴 했군요.”
손우곤이 객점에 앉아서 맞은편의 송백관 정문을 보며 중얼거렸다.
마주 앉은 남궁천이 술을 한 잔 마시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집 나간 자식을 데려오려면 어딘들 찾아가야지.”
그 말을 하기엔 너무 젊은 것 같은데…….
손우곤이 머릿속에 떠오른 말을 얼른 지우고는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아마 쉽지 않을 겁니다. 제가 알기로 차무진 그 녀석은 이미 계약까지 한 걸로 압니다. 무엇보다 무진이가 완전히 마음을 정리한 것으로 보였습니다.”
“본 가에 충성을 맹세해놓고 마음을 정리해?”
손우곤이 쓴웃음을 지었다.
“주군께서 그러시지 않았습니까? 약발도 떨어지는 순간이 있을 거라고. 무진이 기준에서 그 약발이 다 떨어진 셈이겠지요.”
“그럼 다시 약을 치지, 뭐.”
“쉽지 않을 겁니다. 이미 송백관에서 약을 먼저 쳤을 테니까요.”
“그럼 방법은 하나밖에 더 있나?”
“무슨 방법입니까?”
남궁천이 씨익 웃으면서 술병을 들었다.
손우곤이 얼른 술잔을 들어 올리다가, 남궁천이 자작하는 것을 보고는 머쓱해져서는 손을 내렸다.
남궁천이 술잔을 입에 털어 넣고는 말했다.
“처맞아야지. 말을 안 듣는데 별수 있어?”
“설마 강제로 끌고 오겠단 말씀입니까?”
“그럼 또 만년설삼을 던져줄 줄 알았어? 설마 내 몸에서 막 만년설삼이 자란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
“그, 그런 건 아니지만…….”
탁!
남궁천이 술잔을 탁자에 내려놓고는 벌떡 일어났다.
“자, 가자고.”
“예? 지금요? 바로?”
“시간 없어. 보름 만에 해결해야 할 일이 많아.”
“아, 창응대를 보름만에 재소집해야 하는군요?”
“아니. 이현의 상권도 수복해야 해.”
“그렇군요…… 가 아니라! 뭐라고요?”
손우곤이 기겁을 하며 되물었지만, 남궁천이 들은 척도 하지 않고선 자기 할 말만 했다.
“어쨌든 부대주까지만 엮어내면 다른 대원들은 두 사람이 해결할 수 있단 거지?”
“그, 그렇습니다만 진심으로 충성할지는…….”
“됐어. 그거면 충분해. 충성심이란 저절로 우러나야 하는 법이지.”
‘역시 생각 자체가 다른 분.’
“우러나오지 않으면…….”
“……?”
“잡아 족쳐서 쥐어짜면 돼.”
달라도 너무 다른 분…….
마침 남궁천이 송백관 정문 앞에 다다랐다. 체격 건장한 문지기들이 앞을 막아섰다.
“멈추시오. 여기는 송백무관이오. 어디서 오셨소?”
“우리 애 좀 찾으러 왔다.”
“애? 혹시 동생이 여길 다니는 건가?”
“아니. 우리 애가 여기 사범이라던데.”
“사범?”
문지기들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보는데, 남궁천이 귀를 파며 말했다.
“들어가서 차무진 사범 나오라고 해. 이제 집에 갈 시간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