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파공검제-113화 (113/508)

113. 시험은 찢어발기는 것

손우곤이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삿대질을 했다.

“너 같은 놈이 여긴 왜 온 것이냐?”

“거, 초면에 말이 심하네.”

그러자 복성이 얼른 다가와 속삭인다.

“공자님, 초면은 아닙니다요.”

“아, 그래?”

“예, 오래전에는 종종 뵈었습니다요.”

“그렇군.”

남궁천이 고개를 들고는 말을 정정했다.

“거, 구면이면서도 말이 심하네.”

“뭐라는 거냐? 당장 내 아내한테서 떨어지지 못할까!”

“그러잖아도 그러려고. 가자, 복성아.”

“예. 예? 어어?”

무심코 대답하던 복성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창응대주를 만나려고 왔으면서, 창응대주를 보자마자 돌아가자니?

“저어…… 저분이 손우곤 창응대주입니다요.”

“알아.”

“그런데 왜 그냥 돌아가십니까요? 설득하셔야 하는 것 아닙니까요?”

어차피 설득은 글러먹은 것 같지만.

그래도 말은 해봐야 할 일이 아닌가?

한데 남궁천의 입에서 뜻밖의 대답이 튀어나왔다.

“저딴 인간을 휘하에 두느니 차라리 네가 창응대를 맡는 게 낫겠다. 오늘부터 네가 창응대주 해라.”

“끙. 알겠습니다…….가 아니잖아욧! 지, 지금 뭐라고 하신 겁니까?”

“말 그대로다. 저런 형편없는 인간보단 네가 낫단 뜻이야. 가자. 창응대주.”

“아이고, 공자님! 정말 왜 이러십니까요?”

복성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뒤를 따르는데, 손우곤의 입에서 나직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기다려.”

“……?”

“방금 한 말 다시 해보아라. 뭐라고 했지?”

남궁천이 미간을 찌푸리고는 돌아서서 손우곤을 응시했다.

“뭐, 굳이 또 듣고 싶다면야. 이딴 형편없는 인간보단 복성이 낫겠다고 했지. 됐나? 전 창응대주.”

“이런 미친……! 가주님이 네놈에게 남궁의 성씨를 물려줬다고 아주 가문에서 인정이라도 받은 것처럼 구는 모양인데…….”

“당연하지. 소가주가 될 거니까.”

“뭐, 뭣?”

“나는 소가주가 될 거다. 그래서 창응대를 재소집하기 위해서 찾아온 거고. 하지만 넌 내 휘하에 있을 자격이 없다.”

“지금 누가 누굴 판단한다는…….”

“당연히 내가 널 판단하지. 세상에 부하가 주인을 판단하는 경우도 있나?”

“노오오옴!”

스르르릉!

참다못한 손우곤이 허리춤에서 검을 뽑아 들고는 남궁천을 겨눴다.

남궁천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갈수록 가관이군. 마누라는 병에 걸려 오늘 내일 하고 있는데, 서방이라는 작자는 밖에서 술이나 퍼마시다가 나타나서는 다짜고짜 칼춤을 추려고 하고. 뭐, 위아래 구분 못하는 건 기본이고. 복성아, 내가 이런 놈을 휘하에 두면 제 명에 못 살 것 같다. 열 받아서 죽을 거야. 그만 돌아가자.”

눈앞에서 엄청난 모욕을 들어 버린 손우곤은 이제 눈알이 뒤집히기 직전이었다.

남궁천이 막 싸리문을 벗어나려는데, 손우곤이 발악하듯 외쳤다.

“멈춰라!”

“또 왜?”

남궁천이 짜증스러운 표정으로 돌아보자, 손우곤이 뺨을 씰룩이며 말을 이었다.

“내가……! 우리가 누구 때문에 이렇게 살고 있는데! 감히 네놈이 뭐가 어쩌고 어째? 네놈은 누가 뭐래도 대살성의 사생아다! 네놈은 세상이 남궁세가를 버렸다는 증거물이다! 한데 그 증거물 따위가 뭐가 어째? 이노오오옴!”

찰나 손우곤의 단전에서 한 줄기 공력이 거칠게 올라오면서 전신 혈맥을 따라 빠르게 흐르기 시작한다.

남궁천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오행이 파악되지 않는 걸 보니 초절정의 영역에 올라섰군.’

하면 방심은 금물.

일단 격장지계가 통하긴 했으나, 보기 드문 고수인 만큼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파바바밧!

손우곤이 창궁무애검법을 펼치면서 현란하게 짓쳐들어온다.

남궁천으로서는 너무나 익숙한 상황.

타닷!

일순 무한보를 밟으면서 짓쳐드는 검신을 아슬아슬하게 비껴 지나갔다.

순간 손우곤의 눈동자가 커졌다.

빠아악!

남궁천의 주먹이 그대로 손우곤의 안면에 작렬했다.

“크억!”

비명이 터져 나오기가 무섭게 남궁천이 그대로 보법을 밟으면서 왼 주먹을 옆구리에 꽂았다.

뻐어억!

“끄어억!”

손우곤이 그대로 허리를 비틀며 접었다.

지독한 통증.

정말이지 아랫배가 끊어질 것만 같은 통증이다.

그는 도무지 이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이놈이 정말 남궁천이라고?’

자신이 기억하는 남궁천은 늘 기가 죽어서 주변인들을 눈치만 보는 아이였다.

그 꼴이 더 보기 싫었다.

한때 자신이 존경하던 남궁선의 아이가 그토록 형편없는 모습을 보인다는 게 답답하고 화도 났다.

무엇보다 그 아이가 대살성의 자식이라는 점이 가장 마음에 안 들었지만.

어쨌든 그랬던 아이가 결국 삶의 무게를 견디지 못해 자살을 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땐 내심 비웃었다.

한데 이건 뭔가?

죽음에서 돌아온 아이가 뭔가 달라진 것 같다는 이야기는 들었다.

그리고 얼마 후 놀랍게도 그 아이가 무연회 우승했다는 소식도 들었다.

하지만 그래 봐야 후기지수일 뿐이다.

강호는 다르다. 세상은 다르다. 실전은 다르다.

대살성의 사생아 따위를 받아들일 세상은 존재하지 않으리라.

그렇게 무시하던 중이었다.

한데 지금 내가 그 아이에게 이렇게 처맞는다고?

그럴 수야!

“끄아아아압!”

기합성을 터뜨리는 것과 동시에 주기(酒氣)를 확 몰아내자 정신이 맑아졌다.

‘건방진!’

손우곤의 눈에 핏발이 섰다.

마침 안면을 향해 날아드는 주먹이 보인다.

‘어딜!’

손우곤이 얼른 보법을 밟으면서 훌쩍 물러났다.

대신 왼발을 지지대로 삼아 검을 내던지고는 오른손을 다시 빠르게 뻗어냈다.

단전에서 일어난 한 줄기 공력이 혈맥을 따라 오른팔을 타고 뻗어나간다.

이 모든 과정이 남궁천의 눈에 고스란히 들어왔다.

‘천뢰삼장(天雷三掌)이로군!’

단숨에 무공과 초식마저 파악한 남궁천이 그와 상극을 이루는 구벽신권(口壁神拳)을 펼쳤다.

쒸아아아앙!

장법을 피하지 않고 마주쳐오는 남궁천을 보면서 손우곤이 눈을 치떴다.

‘제대로 붙어보자는 거냐? 애송이!’

그는 남궁천이 펼치는 무공이 구벽신권이라는 것을 알아보았다.

확실히 구벽신권이라면 천뢰삼장을 막을 권법으로는 손색이 없다.

‘나름 머리는 썼구나. 하나 아직 어리긴 어리구나. 네놈이 모르는 세계를 보여주지.’

기껏해야 후기지수에 불과한 남궁천이 자신의 내공을 이길 수는 없으리라.

이 순간 권장이 부딪치면 남궁천은 주먹과 손목이 으스러질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마침내 손바닥과 주먹이 부딪친 순간,

꽈앙!

폭음 같은 소리가 터져 나오면서 사방으로 기풍이 훅 불어나간다.

‘크흣!’

손우곤의 표정이 격하게 흔들렸다.

뭐지? 이건?

분명 자신의 장법이 우위를 점하고 남궁천의 주먹을 으깨야 했다.

실제로 공력도 자신이 우월한 상황.

한데 남궁천의 주먹에서 뻗어나온 공력이 장심(掌心)을 뚫으며 손목까지 파고드는 게 느껴진다.

‘이, 이게 뭐야! 젠자앙!’

자신이 휘두른 천뢰삼장이 해일처럼 휘몰아쳤다면, 남궁천의 구벽신권은 송곳처럼 뾰족하다.

하지만 구벽신권은 그래서는 안 된다.

말 그대로 구벽신권은 하나의 막을 형성해야 한다.

때문에 공격보다도 방어 위주로 만들어진 권법이다.

그런데 오히려 공력을 한 곳으로 집중해서 장심을 파고들다니?

세상에 이런 식으로 싸우는 법이 어디에 있나?

이것이야말로 공력을 자유자재로 다스리는 괴물이 아닌가?

인체 혈맥과 공력의 흐름이 눈에 훤히 보이지 않고서야 어찌 이런 식으로 응용한단 말인가?

생각은 거기에서 더 이어지지 않았다.

파가가가각!

“끄아아아악!”

마침내 끔찍한 고통을 참지 못한 손우곤이 비명을 지르며 튕겨져 나갔다.

조금만 더 늦게 물러났더라면 손목부터 어깨까지 뼈째 가루가 되었을 지도 모를 일.

쿠당탕탕!

손우곤이 마당 한쪽에 쌓인 잡기를 부수며 나뒹굴자, 지켜보던 복성이 입을 척 벌렸다.

“이, 이겨 버렸어…….”

남궁천이 이겨 버렸다.

저 창응대주를!

창응대주가 누군가?

남궁세가의 권세가 막강하던 시절에도 무위로는 열 손가락에 꼽히던 자였다.

한데 남궁천에게 이토록 빨리 패하다니!

아무리 방심했다고 한들 이게 말이 되나?

“공, 공자님…… 정말 무연회 우승자였군요?”

“무슨 말이 그래? 설마 그동안 못 믿은 거냐?”

“아, 아뇨. 그거 아니지만 눈앞에서 직접 보니까 너무 놀라워서…….”

남궁천이 피식 웃고는 한쪽 구석에 쓰러진 손우곤을 빤히 보았다.

마침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서 있던 여인이 이내 허물어지듯 의식을 잃어버렸다.

“앗! 정신 차리세요!”

복성이 화들짝 놀라서 여인에게 달려갔다.

* * *

“드시오.”

손우곤이 어딘지 뚱한 표정으로 찻잔을 건넸다.

남궁천이 입매를 비틀었다.

“하여튼 사람이든 짐승이든 처맞아야 말을 좀 듣는다니까.”

“거, 말을 좀!”

손우곤이 발끈해서 소리치다가 어깨의 통증을 느끼고는 이맛살을 팍 구겼다.

남궁천이 싱글싱글 웃었다.

“조심해. 다 나으려면 닷새는 지나야 할걸.”

“구벽신권을 그런 식으로 펼칠 줄은 상상도 못 했소.”

“세상에 법칙 따위는 없어. 뭐든 비틀고 뒤집어야 살아남는 법이지.”

“나이도 어린 분이 인생 다 살아본 것처럼 말하는구려.”

“꿈에서 아버지가 알려준 거야.”

“꿈……?”

“됐고. 대충 넘어가자고.”

남궁천이 건성으로 답하는 말에 손우곤이 한숨을 내쉬고는 창밖을 보았다.

“사정은 잘 알겠소. 하나 나는 창응대를 맡을 생각이 없소. 공자께서 저 시종을 창응대주로 써도 말리지 않을 생각이오.”

“설마 그 말에 삐쳤어?”

삐치긴 뭘 삐쳐! 미친놈아!

손우곤이 내심 발끈하는 마음을 억누르고는 답했다.

“그게 아니라 지금 난 창응대로 돌아갈 여유가 없단 말이오.”

“봉급은 줄 수 있어.”

“봉급 문제가 아니오.”

“하면?”

손우곤이 잠깐 망설이다가 고개를 모로 돌리고는 침실 쪽을 힐끗 보았다.

남궁천이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내 때문인가?”

“공자께서 하신 말대로 집사람이 오늘 내일 하고 있소. 그래도 사람 된 도리로 마지막까지 곁에 있어 줘야 하지 않겠소?”

“흐음. 하긴 그게 사람 된 도리지.”

남궁천이 의외로 순순히 인정하며 고개를 끄덕이자 손우곤이 흠칫거리고는 바라보았다.

아직 어려서 그런가?

이렇게 순순히 인정하고 물러날 줄은 몰랐…….

“그렇다면 더욱 창응대주를 맡아야겠네.”

“뭐요? 지금 내가 한 말 못 들었소? 공자께서 생각보다 무공이 막강하다는 건 인정하오. 하나, 이건 그런 문제가 아니라…….”

“초열병(焦熱病). 언젠가 자네 아내가 무인들과의 싸움에 휘말린 적이 있나? 초열독(焦熱毒)에 당한 모양인데. 어지간해선 약도 없지. 시도 때도 없이 열이 펄펄 끓고, 증세가 심하면 헛것을 보기도 할 테고. 특히 목구멍이 마른 논바닥처럼 쩍쩍 갈라져서 침도 삼키기 어려운 경우가 허다하지.”

“어, 어째서 그런 걸……?”

어째서긴.

전생에 초열독 가지고 다니던 흑도 녀석들을 어디 한둘 봤어야지.

남궁천이 속내를 갈무리하고는 말을 이었다.

“내가 그 병을 고쳐주면? 충성할 거야?”

“지금…… 농담하시오? 공자께서 말하지 않았소! 어지간해선 약도 없…….”

탁!

남궁천이 탁자 위에 목함을 올려두자, 손우곤이 눈썹을 꿈틀거리고는 물었다.

“이게 뭐요?”

“만년설삼(萬年雪蔘).”

“만년설…… 뭐, 뭐라고욧!”

손우곤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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