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파공검제-111화 (111/508)

111. 시험은 찢어발기는 것

모처럼 남궁세가 사람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무릇 일가친척이 모인 자리라면 시끌벅적한 분위기 속에서 그간의 소식을 묻고 답하게 마련이건만, 회의실 분위기는 찬물이라도 끼얹은 것처럼 냉랭했다.

가세가 기울고 나서는 서로 왕래도 없었던 데다, 하필이면 세가의 체면을 세운 사람이 남궁천이라는 게 영 마음에 들지 않기 때문이다.

남궁천이 누군가?

대살성의 핏줄을 이은 사생아가 아닌가?

한때 천하를 호령하던 남궁세가가 이토록 쇠락의 길을 걷게 된 것이 다 그 대살성 때문이 아니던가?

그러니 아무리 고운 눈으로 보려고 해도 도무지 곱게 보이지 않는다.

한데 그 아이가 하필이면 무연회 우승이라니.

그야말로 기뻐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슬퍼할 수도 없는 상황.

사정이 이러니 저마다의 머릿속은 괜히 복잡하게 굴러가고 있었다.

‘허어, 어쩌다 본 가의 분위기가 이리 되었을꼬.’

금정각주 남궁효는 시름 잠긴 얼굴로 회의실에 앉은 이들의 면면을 살폈다.

나이 많은 원로들은 없다.

그들은 정회에 참여하지 않는다. 혹여 가주의 의사결정에 지나치게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이유로 관례처럼 지켜오는 일이다.

그러다 보니 상석은 남궁검 가주의 남매 집안이 차지하고 있었다.

먼저 무한에 터를 잡은 남궁표와 그의 아들 남궁필이 나란히 앉아 있었고, 그 맞은편에는 가주의 여동생인 남궁설희가 고집스러운 표정으로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그녀의 나이가 이미 칠순을 넘었는데도 얼핏 보면 중년의 여성으로 보일 정도로 정정했다.

그리고 그 옆에는 넷째인 남궁원과 아들 남궁현도가 앉아 있었는데, 남궁원의 손자인 남궁진은 어디서 얻어맞고 온 것인지 객당에서 앓아누운 상태라고 들었다.

‘쯧쯧. 그러잖아도 세간에 손가락질을 받는 입장인데 칠칠치 못하게 맞고 다니다니.’

남궁효가 혀를 차고는 다시 시선을 옮겨 맞은편의 장원식을 보았다.

그는 남궁검의 막내 여동생과 결혼한 방계 쪽 사람이었는데, 막내 여동생이 병사했기에 아내를 대신한 그가 아들 장손덕과 함께 참여한 상황이었다.

그 외에도 멀고 가까운 친인척들이 모였고, 가문에 몇 남지 않은 수뇌 인사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래 봐야 스무 명이 되지 않는다.

‘과거 정회를 열면 쉰 자리가 비좁을 지경이었는데, 이젠 박박 긁어모아도 스물이 안 되는구나.’

가세가 기울면서 가내의 요직들이 대거 사라졌기 때문이다.

시름 섞인 한숨이 절로 나온다.

때마침 문이 열리면서 남궁화와 남궁천이 들어왔다.

순간 사람들이 눈을 휘둥그레 뜨고는 남궁천을 보았다.

‘아니, 저 아이가 왜 이 자리에?’

제일 먼저 남궁원이 영 못마땅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오랜만이구나, 화야.”

“그간 강녕하셨습니까? 숙부님.”

“그래, 한데 그 아이는 왜 데리고 온 것이냐?”

남궁원의 눈빛에 노골적인 적대감이 묻어난다.

남궁화가 그 낌새를 눈치채지 못한 척 대꾸했다.

“가주님의 뜻입니다.”

“형님이?”

남궁원이 이맛살을 더욱 찡그렸다.

그때 지켜만 보던 남궁설희가 눈을 가늘게 뜨며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남궁천에게 물었다.

“네가 무연회에서 우승했다는 게 사실이더냐?”

“사실이죠, 그럼.”

남궁천이 뻣뻣하게 대꾸하자, 남궁설희가 눈살을 구겼다.

“너는 예의를 모르느냐? 어찌 나를 보고도 인사조차 하지 않는 것이냐?”

“할머니가 누구신데요?”

“뭐, 뭐라?”

상황이 요상하게 돌아가자, 남궁화가 얼른 나섰다.

“고모님, 이 아이는 현재 기억을 잃은 상태입니다.”

“기억을 잃어?”

“네, 일전에 사경을 헤맨 이후로는…….”

“하! 그러고 보니 그런 일이 있었더랬지. 못난 놈.”

남궁설희가 차갑게 냉소를 짓는다.

스스로 목숨을 끊었던 이야기를 전해 들은 기억이 이제야 났기에.

한데 자살을 시도했던 아이가 무연회에서 우승이라니.

그녀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세상이 요지경이구나. 도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원.”

“허허, 너무 그렇게 까칠하게 보실 것 없습니다, 누님. 그래도 저 아이가 무연회에서 우승하는 바람에 본 가가 조금이나마 위신을 세웠으니까요.”

남궁표가 어울리지 않게 칭찬을 하자, 남궁설희가 기가 찬다는 표정으로 대꾸했다.

“너는 속도 좋구나. 본 가가 이 지경이 된 게 다 누구 때문인데?”

“뭐, 그렇긴 합니다만.”

아니, 그렇긴 뭐가 그렇다는 거야?

참다못한 남궁화가 불쑥 끼어들었다.

“본 가가 이 지경이 된 게 천이 때문은 아니지요.”

“뭣이?”

남궁설희가 눈썹을 성큼 치켜 올렸다.

하나 남궁화도 이번만큼은 물러나지 않았다.

“본 가가 힘들어진 것은 비열한 세상에 맞설 힘이 없었기 때문 아닌가요?”

“너, 네가 지금 무슨 소리를……!”

“고모님, 이 아이가 무슨 잘못을 저질렀는지요? 태어난 것이 잘못인지요?”

“그런……!”

“세상이 본 가를 매도하고 손가락질을 해도 꿋꿋하게 버틸 힘이 있었더라면 이렇게까지 몰락했을까요?”

“화야. 네가 어리구나. 아주 한참 어리구나. 세상과 싸워 이길 수 있는 가문이 어디 있는 줄 아느냐? 황제조차도 세상과 척을 지면 폐위가 되는 법이다.”

“아무리 그래도……!”

“시끄럽다! 애초에 네 언니가 그 입에 담기도 역겨운 대살성 놈과 정분만 나지 않았어도 본 가가 이리 쇄락할 일은 없었을 것이야!”

“고모님!”

남궁화가 입술을 콱 씹고는 눈물까지 글썽였다.

남궁설희는 더 할 말이 없다는 사람처럼 눈을 감고 고개를 홱 돌렸다.

남궁화가 그런 그녀를 노려보며 씹어뱉듯 말했다.

“그럼 속이 편하신가요?”

“……?”

“그렇게 모든 이유를 한 사람 탓으로 몰아두면 속이 편하신가요?”

“감히 지금 네가…….”

“겨우 한 사람에게 휘둘릴 정도면 본 가도 문제가 있었던 게 아닐까요?”

“그 한 사람이 세상을 흔들어 놓았다는 사실을 모르느냐!”

“그럼 본 가가 그 한 사람보다 더 대단했으면 될 일이죠!”

“도대체 지금 네가 무슨 말을…….”

“제가 다소 억지를 부린다는 건 압니다. 하나 천이는 아직 약관도 지나지 않은 아이에요. 게다가 본 가가 이 지경이 된 것에 이 아이의 책임 같은 건 없지 않나요? 그러니 저는…….”

그때였다.

“그만해라.”

묵직한 음성이 들려오면서 장내가 물속에 가라앉은 것만 같은 분위기가 만들어졌다.

단 한마디였지만 거역할 수 없는 힘이 느껴진다.

가주 남궁검이었다.

뚜벅뚜벅 걸어온 남궁검이 상석에 앉으며 남궁화를 물끄러미 보았다.

“네 말을 들으니, 가문의 힘을 키우지 못한 아비가 반성할 일이로구나.”

“아버지, 저는 그런 뜻이 아니라…….”

남궁화가 사색이 되어 변명을 늘어놓으려 했지만, 남궁검이 가만히 손을 들어 제지했다.

그가 형형하게 빛나는 눈초리로 좌중을 훑는다.

눈이 아니라 예리한 얼음 조각이 박혀 있는 것만 같다.

서슬 퍼렇게 소리치던 남궁설희도 감히 남궁검 앞에서는 찍 소리도 내지 못했다.

남궁검이 남궁화와 남궁천을 향해 무뚝뚝한 목소리로 말했다.

“앉아라.”

“예, 아버지.”

“…….”

남궁화와 남궁천이 자리에 앉자, 남궁검이 잠깐 좌중을 둘러보고는 입을 열었다.

“소가주를 정하려고 한다.”

앞뒤 다 자른 말에 가인들이 흠칫거리고는 서로를 보았다.

워낙 무뚝뚝한 성격이라 대충 예상은 했지만, 이렇게 다짜고짜 본론부터 꺼내 들 줄은 생각지도 못했기에.

가장 먼저 반응을 보인 사람은 남궁표였다.

“형님…… 아니, 가주님, 설마 저 아이를 염두에 두고 하시는 말씀은 아니시겠지요? 아무리 무연회 우승자이지만 이건 아닙니다.”

그러자 장내가 삽시간에 술렁였다.

이번에도 남궁설희가 불쑥 나섰다.

“아니, 저 아이라면 남궁천을 말하는 거냐? 도대체 넌 무슨 생각으로 그런 망발을 떠드는 거냐? 아무리 오라버니 속내를 짐작하기 어렵다지만 그런 말도 안 되는…….”

“표의 말이 맞다. 나는 소가주로 남궁천을 염두에 두고 있다.”

“……!”

순간 장내는 다시 얼음장에 갇힌 분위기가 되고 말았다.

바늘 떨어지는 소리마저 들릴 것 같다.

모든 이의 표정에 경악이 서린 가운데, 남궁천만이 그저 잔잔한 미소를 머금었다.

‘영감, 역시 이럴 땐 시원시원해서 좋아.’

탕!

결국 남궁설희가 탁자를 부술 듯 내려치며 벌떡 일어났다.

“오라버니!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저 대살성의 사생아가 본 가를 이을 소가주라니! 지금 제정신으로 하시는 말씀…….”

막말까지 뱉던 남궁설희가 남궁검의 차가운 눈초리를 받고는 움찔 자라목이 되었다.

“정말…… 전 이해가 너무 안 되네요. 도대체 왜 이러세요?”

조금 누그러진 목소리에 남궁검이 예의 그 칼날 같은 눈초리로 좌중을 훑으며 말을 잇는다.

“하나 묻지.”

“……?”

“그간 소가주 자리에 뜻을 둔 이가 있었더냐?”

“……!”

“정녕 오늘날까지 소가주 자리가 공석인 이유를 다들 모르는 것은 아닐 터.”

사람들 모두 입을 꾹 다물고 미동도 없다.

긴 침묵 끝에 남궁표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하지만 지금은 분위기가 달라졌습니다. 남궁세라가라면 손가락질부터 하던 시기와 다르지요. 이런 시기에 굳이 대살성의 사생아에게…….”

“대살성의 사생아가 아니라, 분명한 본 가의 일원이다.”

“물론 그렇습니다만…….”

“달라진 분위기를 만든 것 또한 저 아이다.”

사람들의 시선이 자연히 남궁검을 따라서 이동한다.

모두의 시선이 집중되자, 남궁천이 씨익 웃어 보인다.

남궁표가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저었다.

“가주님, 재고해주십시오. 아무리 그래도 이건 아닙니다. 제가 소가주 자리를 욕심내는 것은 아닙니다. 차라리 막내에게 기회를 주심이 어떻습니까?”

막내라하면 바로 남궁원을 말하는 것이었다. 막내라고는 하나 남궁원도 예순을 훌쩍 넘긴 나이였기에 소가주라는 자리에 어울리진 않았다.

남궁원이 헛기침을 하고는 반응했다.

“이왕이면 나이로 볼 때 저보단 제 아들이나 손자 녀석이 낫겠지요. 그게 아니면 필이나 혁이도 괜찮고요.”

“그렇습니다. 지금이라면 혁이도 관심을 보일 겁니다.”

남궁혁은 바로 남궁표의 손자를 말하는 것이었다.

남궁검이 피식 웃었다.

그 냉소에 남궁표를 비롯한 가인들의 안색이 눈에 띄게 굳었다.

좋지 않다.

남궁검이 저런 웃음을 짓는 것은.

아니나 다를까, 남궁검의 입에서 칼바람처럼 삭막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이리가 먹이를 잡아놓으니 승냥이 떼가 득실거리는구나.”

“가주님! 승냥이 떼라니요! 하면 남궁천이 이리고, 우리는 승냥이라는 말씀입니까? 말씀이 지나치십니다.”

“무림맹에서는 신룡이라 인정한 아이다. 이리도 한참 낮잡아 부른 것이다만.”

그러자 이번에도 입심이 센 남궁설희가 나섰다.

“오라버니! 아무리 운이 따라서 무연회 우승을 했다지만, 한 가문을 이끄는 건 또 다른 문제예요. 소가주가 정해지면 직속으로 편성되는 창응대(蒼鷹隊)는 지금 뿔뿔이 흩어진 상황이죠. 한데 저 아이를 필두로 창응대가 규합될 수 있을까요? 그 자존심 강한 대원들이 저 아이를 진정 주인으로 인정할까요? 당장 다음 세대의 가주가 추진해야 할 이현(黟县)의 상권을 수복하는 것도 난제죠. 거긴 누가 멍청한 짓을 하는 바람에 그리 된 것이긴 하지만.”

남궁설희의 눈길이 맨 마지막엔 장원식에게 향했다.

장원식이 면목 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주억거리며 어색하게 웃었다.

그녀가 말한 이현이 바로 방계인 장원식의 관할지였기에.

남궁표가 남궁설희를 두둔하며 나섰다.

“누님의 말이 맞습니다. 가주는 운으로 해결할 수 없는 영역이 많습니다. 아니, 백번 양보해서 운이 아니라, 저 아이가 고강한 무위를 지녔다고 해도 가문을 이끄는 건 다른 문제지요.”

“저도 형님과 누님의 생각에 동의합니다. 당장 창응대가 저 아이를 인정하지 않을 겁니다.”

장내가 순식간에 술렁거렸다.

모두들 남궁설희의 말에 동조하는 분위기.

남궁검은 눈을 가늘게 뜬 채로 남궁천을 보았다.

그의 눈은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보아라.

이것이 세상이다.

이 작은 방 안에서도 이리도 모진 풍파가 일어난다.

너는 이 풍파를 어찌 헤쳐 나갈 생각이냐?

너에게는 이에 맞설 방도가 있더냐?

‘있지요. 뭐, 이 정도쯤이야.’

남궁천이 입매를 비틀더니 벌떡 일어나며 포권했다.

일순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 쏠렸다.

남궁천이 희미하게 웃으며 말했다.

“좋습니다. 그럼 말씀하신 부분들을 제가 해결하면 소가주의 자격이 되는 것으로 인정해주시겠습니까?”

“해결이라니?”

남궁설희의 말에 남궁천이 어깨를 폈다.

“창응대를 규합해서 그들을 이끌고 이현의 상권 수복 문제를 해결하고 오지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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