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 중검 대 중검
파앙!
응축된 공기가 터지는 소리와 함께 팽수혁이 후원을 빠르게 가로지른다.
쑤아아앙! 쑤아앙!
시퍼런 도신이 허공을 쪼개 버릴 듯 사방팔방 그어진다. 일도에 목숨 하나씩 날아간다. 복면을 쓴 자들이 몸을 뒤집으며 쓰러지고, 어떤 이는 상반신이 양단 된다.
물론, 모두 가상의 적이다.
하나 분노에 찬 팽수혁의 눈에는 실존하는 자들만큼이나 생생하다.
감히 남궁천을 죽인 자들!
파바바밧!
어기신풍을 펼치니 몸이 그야말로 날아가는 것만 같다.
팽수혁은 도신일체가 된 기분으로 후원을 끊임없이 누볐다. 그 서슬 퍼런 기세에 피비린내마저 나는 듯하다.
‘내가 죽였어야 할 남궁천을 죽인 놈들!’
분노가 차오르니 도격은 오히려 섬세하면서도 패도적으로 변해간다. 실전에서 발전하는 하북팽가의 특성이다.
쑤아아앙! 쑤아앙!
빠르고 강하다.
이전에는 느껴보지 못했던 감각이다.
남궁천이 실마리를 던지지 않았더라면 십 년이 흘러도 눈치채지 못했을 감각들이 온몸을 지배하고 있다.
남궁천은 이미 죽고 없는데도 마치 이 수련을 옆에서 지켜보고 있는 것만 같다.
그래서 기분이 더욱 더럽다.
‘제길! 남궁천! 넌 내가 죽였어야 했는데!’
자신의 무공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준 남궁천을 죽인 놈들!
“제기라알!”
쑤쑤쑤아아앙!
철혈적성도를 연환식으로 펼치자 세 줄기의 붉은 예기가 거미줄처럼 퍼져 나간다.
팽수혁의 눈가가 촉촉하게 젖어들었다.
짧은 시간 맺어진 인연이 이토록 강렬한 인상을 남길 줄이야.
‘니미럴, 그래. 이건 보고 싶은 게 아니다! 남궁천! 하늘에서 혹시나 착각하지 마라! 나는 네가 보고 싶은 게 아니라! 널 직접 죽이고 싶은 것일 뿐이라고! 그런데…… 그런데 왜 죽은 거냐?’
죽은 남궁천이 너무 원망스럽다.
감정이 극에 달하자, 단전에서부터 고함이 터져 나오며 마지막 일격에 실린다.
“왜애애애앳!”
쒸아아아앙!
무아지경 속에서 도를 휘두르던 팽수혁이 순간 눈을 부릅뜨고는 최대한 공력을 회수하며 멈췄다.
하나 관성을 이기지 못한 대도가 그대로 날아가면서 전각 기둥에 처박혔다.
콰작!
대도가 박힌 기둥 아래에는 거의 실성 직전인 주연화가 새파랗게 질린 표정으로 주저앉아 있었다.
“아으…… 죽, 죽는 줄 알았잖아요!”
주연화가 눈물을 찔끔하고는 버럭 소리치자, 팽수혁이 얼른 대도를 기둥에서 뽑아내고는 마주 소리쳤다.
“아니, 갑자기 나타나서 큰 소리요? 자칫하면 살인자가 될 뻔했잖소!”
“그 와중에 본인 중심적인 사고방식이군요. 팽 소협이 살인자가 되는 문제보다 제가 살해당할 뻔했다는 게 더 큰 문제 같지 않아요?”
“그러게 누가 귀신처럼 몰래 지켜보랬소? 남의 무공 수련을 엿보는 건 실례라는 것도 모르오?”
“제가 그렇게 얌체는 아니거든요? 몇 번이나 불렀는데 들은 척도 하지 않고 혼자 귀신에 홀린 사람처럼 중얼거리면서 그 흉측한 칼이나 휘둘러댔잖아요!”
“커험! 기, 기척을 내셨다고?”
“그래요. 얼마나 불렀다고요. 뭐, 나중에는 나도 포기하고는 그냥 넋 놓고 지켜보긴 했지만.”
“그랬다면 뭐…… 미안하오.”
팽수혁이 뒤통수를 긁적이며 말하자, 주연화도 머쓱한 표정으로 사과했다.
“저도…… 뭐 본의 아니게 엿보게 돼서 미안해요. 그런데 무공이 전보다도 더 발전한 것 같네요.”
“그렇게 보였소?”
“네.”
“또 죽은 귀신이 도와준 모양이지.”
“그거 혹시…… 남궁천 소협 말하시는 건가요?”
“별로 자세히 말하긴 싫소.”
팽수혁이 시큰둥하게 대꾸하자, 주연화가 생글 웃으며 말했다.
“가요.”
“어딜?”
“남궁천 소협 만나러.”
“시체를 찾았소?”
“아뇨. 살아 있는 사람을 찾았죠.”
“그게 무슨 소리요?”
“남궁천 소협이 돌아왔어요. 진소홍 소저도 함께. 지금 대연무장에서 비무하는 중이랍니다.”
팽수혁이 바위처럼 굳어 있자, 주연화가 피식 웃으며 말을 이었다.
“저도 첨엔 믿을 수가 없었어요. 그런데 사형이 거짓말할 리가 없으니까요. 제일 먼저 팽 소협에게 알려준 거예요. 자, 어서 가요.”
“정, 정말 남궁천이 살아서 돌아왔다고?”
“네!”
“하, 하하. 하하하하!”
한참이나 웃어대던 팽수혁이 순간 살벌한 표정으로 돌아오더니 씨익 입매를 틀었다.
“그래야지! 너는 내가 죽여야지! 남궁천! 으하하하!”
이해할 수 없는 소리에 주연화가 눈살을 슬쩍 찌푸렸다.
‘사이좋은 친구 아니었나?’
* * *
팽수혁과 주연화가 관전석으로 들어섰을 때는 이미 비무가 한창 진행 중이었다.
비무를 지켜보는 사람들이 연신 감탄을 터뜨렸다.
“우오오오! 엄청나다!”
“저게 바로 종남의 검인가?”
“중검에 자존심을 걸 만하네!”
이제 막 도착한 팽수혁도 눈을 부릅뜨고는 비무대를 보았다.
‘정말…… 저 녀석 멀쩡하게 살아 돌아왔잖아?’
반가운 마음과 함께 밀려드는 모종의 경쟁의식.
그래, 이런 느낌이다.
이 느낌이 팽수혁의 심장을 마구 뛰게 만든다.
‘정말로 돌아왔구나!’
팽수혁이 입매를 비틀며 주먹을 콱 말아 쥐었다.
마침 남궁천은 운경의 검을 막는 중이었다.
‘운경…… 내게 보인 게 전부는 아니었군.’
확실히 남궁천을 상대하는 운경은 그때보다 한 단계 높은 수준의 무공을 구사하고 있었다.
한데도 남궁천은 잘 버티고 있었다.
자신이라면 가능할까?
모르겠다.
하지만 하나는 분명하다.
남궁천이 버틴다면, 언젠간 자신도 버텨내고 말리라.
쩌엉!
폭음과 같은 금속성이 일어나더니, 운경이 다시 달려들면서 검을 수직으로 내려친다.
쑤아아아아앙!
마치 철혈적성도를 보는 것만큼이나 거칠고 패도적이다. 그만큼 검의 무게가 엄청나게 느껴진다.
흐르는 강물을 쪼개 건너갈 길까지 만들 수 있다는 무극검의 검초, 단류도하(斷流渡河)!
꽈자자자자앙!
비무대가 박살 나면서 그 여파가 일직선으로 뻗어나간다.
하나 남궁천은 벽라검을 거꾸로 세워 검격을 완벽하게 틀어막았다.
“와…… 정말 대단하네요. 역시 남궁 소협이에요. 그런데 저 운경 도장은 왠지 화가 많이 난 것 같네요.”
주연화의 천진한 소리에 팽수혁이 피식 웃어 버렸다.
어쩐지 운경의 기분을 이해해 버릴 것 같기에.
‘화가 날 만하지.’
왜 화가 나지 않겠나?
남궁천과 싸우다 보면 나의 특기가 하찮은 재주에 지나지 않다는 걸 느끼게 된다.
그 상황에서 화가 나지 않을 인간이 얼마나 될까?
게다가 내가 펼치는 무공을 나보다 더 잘 안다는 듯이 상대해 오면 그 기분은…….
“정말이지 거지 같지.”
“네?”
“아, 아무것도 아니오.”
팽수혁이 피식 웃고는 말을 이었다.
“하지만…… 그래서 저 녀석을 다시 보게 된다니까.”
팽수혁이 말을 뱉는 사이 운경은 무극검의 절산뇌운(絶山雷雲) 초식을 펼치고 있었다.
짜르르르르릉!
검이 공명을 일으키면서 무거운 뇌기를 일으킨다.
사선으로 떨어지는 검이 마치 벼락같다.
찰나지간이지만 관전자들 모두가 호흡을 멈추고 눈만 부릅떴다.
떠어어엉!
고막을 터뜨려 버릴 것만 같은 소리에 이어 남궁천의 전신이 격동한다.
하나 더 이상의 반응은 없다.
대신 남궁천 뒤쪽 바닥이 갈라지면서 파편이 사방으로 튄다.
마치 충격을 그대로 뒤쪽으로 흘려보낸 것만 같지 않은가?
운경은 이제 눈이 완전히 뒤집혔다.
“으아아아아압!”
그가 처절한 기합성을 터뜨리면서 검을 사선으로 휘둘렀다.
무극검의 절초, 단천파세(斷天破世).
하늘을 가르고 세상을 부순다는 절초 중의 절초!
꽈자자자앙!
세상이 공멸할 것만 같은 폭음이 터지면서 비무대 전체가 뒤흔들렸다. 동시에 사방으로 파편이 튀어 오르고 먼지가 풀썩 일어나면서 다시 한번 안개가 휩싸였다.
지켜보는 사람들이 술렁인다.
“어, 어떻게 된 거야?”
“제길, 뭐가 보여야 말이지.”
팽수혁 역시 마른침을 꿀꺽 삼키고는 비무대를 지켜보았다.
조금 전의 일격은 정말이지 대단했다.
과연 자신이라면 막을 수 있었을까?
막을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지만, 그게 진짜인지 자존심인지 모르겠다.
‘너는. 너는 어떠냐? 남궁천! 막아낸 것이냐?’
때마침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왔구나, 화야. 오셨습니까? 팽 소협.”
“덕분에 늦지 않게 왔소.”
팽수혁이 유현을 돌아보며 포권했다.
주연화가 유현에게 투덜거렸다.
“바닥이 왜 저 모양이에요? 좀 더 단단하게 만들지.”
“일부러 그렇게 만드는 거란다. 극적 효과를 더하기 위해서. 그리고 그래야 비무하는 무인이 더 강해 보이는 효과가 있으니.”
“한마디로 꼼수네요?”
“그 꼼수가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안정시켜 준다면 나무랄 일만은 아니지 않겠느냐?”
“흐음. 그럴지도 모르겠네요. 아! 이제 보여요!”
주연화의 말대로 이제 비무대의 상황이 조금씩 보이고 있었다.
놀랍게도 조금 전의 일격은 남궁천에게 통하지 않았다.
검과 검이 맞닿은 채 바닥을 찍고 있었고, 남궁천의 왼손이 운경의 왼쪽 손목을 낚아챈 상황.
“아앗! 조금 전과 똑같다!”
“뭐야? 같은 수법에 두 번이나 당한 건가?”
“남궁천, 대단하다! 멋지다!”
사람들의 환호성이 차오른다.
한편 팽수혁은 눈썹을 사정없이 꿈틀거렸다.
‘뭐? 같은 수법? 하면 조금 전에도 저런 수법으로 운경이 당했단 말인가? 저 운경이……?’
자신은 운경과 손을 섞어봐서 잘 안다.
운경은 강하다.
결코 같은 수법에 두 번 당할 위인이 아니다.
한데도 당했다는 건…….
팽수혁이 남궁천의 등을 쏘아보았다.
‘도대체 넌 얼마나 강하다는 거냐?’
지금 이 순간, 누구보다도 환장할 노릇인 건 바로 운경이었다.
‘똑같은…… 수법에 또!’
정말이지 미치고 팔딱 뛸 지경이 아닌가?
“환장하겠지?”
“……!”
남궁천이 속삭이듯 뱉은 말에 운경이 움찔거리고는 노려보았다.
남궁천이 씨익 웃었다.
“검의는 무겁게, 하나 검술은 조금 가볍게 가져가는 게 어떨지?”
“지금…… 종남이 추구하는 바를 거스르라는 말인가!”
“종남이 추구하는 바가 뭔데?”
“그건……!”
“중검? 그놈의 중검, 중검. 검에 실은 뜻이 무거워야 한다는 거야? 아니면 무거운 검을 들고 다녀야 한다는 거야? 아니, 왜 그럼 철퇴를 들고 다니시지 그러나?”
“……!”
“검 끝에 실린 목숨 하나하나가 무겁다는 뜻. 잘 알아들었어. 하여 본 가는 그 무게를 견디기 위해 더욱 부지런해져야 한다고 생각했지.”
파앗!
남궁천이 다시 한번 손을 뿌리치자, 운경이 멀찍이 떨어졌다.
남궁천이 천천히 움직이며 기수식을 취했다. 놀랍게도 남궁천의 움직임에 잔상이 남으면서 그 무게감이 더해졌다.
“마지막 일격.”
“뭐……?”
운경이 눈썹을 꿈틀거렸다.
지켜보는 모든 이들이 그 말을 들었기에 저마다 숨마저 멈추고 지켜보았다.
남궁천이 히죽 웃었다.
“어디 막아보시오. 그 묵직한 검으로.”
찰나,
파아아앙!
남궁천이 바닥을 차며 화살처럼 날아갔다.
쒸에에에엑!
그야말로 한 줄기 빛처럼 날아가는 남궁천.
그 모습을 본 팽수혁의 동공이 무한 확장했다.
‘저 미친……! 빠, 빠르다! 빠르지만…… 무겁다! 아니, 빨라서 더 무겁다! 미치도록 무겁고 빠른 일격!’
쑤아아앙!
쩌어어어엉!
비무대에 폭음과 함께 한 차례 광풍이 휘몰아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