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 귀빈
달그닥.
“남궁세가라고 했느냐?”
금왕 진득랑이 찻잔을 내려놓으며 한쪽 눈썹을 성큼 치켜 올렸다.
오랜만에 만난 딸의 입에서 남궁세가라는 말이 나올 줄은 꿈에도 몰랐다.
딸은 어려서부터 영민한 아이였다.
하나를 가르치면 열을 아는 아이가 바로 딸 소홍이었다.
물론, 모든 부모가 고슴도치 사랑을 베푼다지만 소홍은 객관적으로 봐도 무척 똑똑했다.
해서 딸이 굳이 용천관으로 가겠다며 고집을 부릴 때도 애써 만류하지 않았다.
진주를 발견하기 위해서는 진흙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것을 그 역시 잘 알고 있었기에. 아니, 오히려 그런 것들을 가르친 것이 바로 자신이었기에.
소홍이 네 살 때였나?
상단이 매우 위험한 지역을 지나게 되어 호위무사들을 급히 고용할 일이 생겼다.
그때 평소보다 많은 지원자를 보면서 딸은 이렇게 물었다.
“아빠. 저 아찌들은 왜 무서운 일을 하려고 해요? 큰일 나면 하늘나라 갈 수도 있는데.”
“홍아, 원래 위험한 일일수록 대가가 큰 법이란다. 이 세상은 안전하면서 좋은 것만 누릴 수가 없는 법이란다. 한마디로 공짜가 없다는 뜻이지. 저들은 그걸 잘 알고 있는 것이다.”
“그럼 소홍이가 오늘부터 호랑이를 잡으러 산으로 갈게요!”
“뭐? 하하하!”
문득 옛 생각이 떠오른 금왕이 빙그레 미소 짓다가 다시 정색을 했다.
지금은 과거를 떠올릴 때가 아니지.
어쨌거나 그날 이후로 딸은 고위험에는 고수익이라는 개념을 확실히 익힌 게 틀림없다.
단, 그만큼 위험한 일에 관한 지식이 해박해야 한다는 것 또한 잘 교육시켰다.
그 일환으로 용천관으로 가는 것조차 마다하지 않은 것인데 하필 남궁세가라니…….
‘이건 너무 진흙인데…….’
진흙이면 그나마 다행이리라.
자칫하면 늪이 될 수도 있다.
진흙에서는 진주를 찾을 수 있을지 모르지만 늪에서는 빠져 죽는 수밖에 없다.
한데 소홍의 눈빛이 결연하다.
이미 마음을 굳혔다는 게 여실히 보인다.
“그곳에 진주가 있더냐?”
“진주라기에는 글쎄요. 잠룡이 똬리를 틀고 있던데요?”
“잠룡……!”
금왕이 눈썹을 꿈틀거렸다.
잠룡이라는 말이 가지는 파급력은 크다.
해서, 함부로 그 단어를 입에 올려서도 안 된다.
특히 금왕이 생각하는 잠룡은 운명을 걸어볼 만한 상대로 봐야 한다.
한데 대살성의 사생아가 잠룡이라고?
이걸 어찌 해석해야 하나?
사실이든 아니든 그 파급력은 상상을 초월할 것이다.
사실이면 그 자체로 강호가 뒤흔들릴 일이고, 사실이 아니라면 딸은 큰 대가를 치르게 될 테니까.
‘위험하군. 위험해.’
딸을 키우면서 처음으로 든 생각이다.
그래도 사리분별이 어느 정도 된다고 생각했는데…….
’너무 도전 정신만 지나치게 키운 것일까?
금왕이 가늘게 한숨을 내쉬고 입을 열었다.
“홍아…….”
“알아요, 아버지.”
“응? 뭘 말이냐?”
“아버지가 어떤 생각을 하고 계시는지.”
“그걸 알면서 이 아비에게 그런 말을…….”
“제 자신을 믿기로 했으니까요. 남궁천을 믿는 게 아니에요. 저는 아버지가 가르쳐 주신 대로 저를 믿는 거예요.”
“하나 스스로를 과신해도 문제가…….”
“생기겠죠. 하지만 아버지는 제가 스스로를 과신하는지 아닌지 알지 못하시잖아요?”
“그야 아직…….”
“남궁천을 보지 않았으니까요. 본다고 해도 그냥 봐서는 아무것도 모르시겠죠.”
“녀석, 학관에 다니더니 아비 말 끊는 것만 배웠느냐?”
“죄송해요.”
소홍이 혀를 살짝 빼물고 배시시 웃었다.
인피면구를 벗은 본연의 얼굴이었기에 금왕은 그 모습이 너무나 사랑스럽기만 했다.
‘나도 어쩔 수 없는 딸 바보로구나.’
이 금왕이 딸만 앞에 있으면 정말이지 바보가 되는 것 같다.
하기야 저리 예쁜 얼굴로 애교를 부리면 누구인들 넘어가지 않을까?
금왕은 일찍이 인피면구를 착용하도록 한 게 정말 잘한 일이라며 스스로를 칭찬했다.
“그래, 계속 말해보아라.”
“전 아버지를 설득하지 않을 거예요. 그러니 아버지도 확실한 판단이 서기 전에 절 설득하지 말아주세요.”
“…….”
“아버지는 그런 분이 아니시잖아요? 그저 위험하다는 이유로 명확한 근거도 없이 괜한 걱정과 우려를 앞세워 자식이 가려는 길을 막으려는…… 그런 여느 부모와는 다른 분이시잖아요?”
“학관에서 말 잘하는 법도 가르치는 것이냐?”
“아버지 닮아서 그래요.”
“그건 인정.”
진소홍이 기분 좋게 웃어 보이고는 말을 이었다.
“비무 대회 동안 그를 한번 지켜봐주세요. 그리고 아버지가 판단을 내려주세요. 제가 저를 믿고 결심을 내렸듯이, 아버지가 아버지를 믿고 판단을 내리셨다면…… 그땐…….”
“……내 말을 따르겠느냐?”
“네.”
“호오?”
“그래도 그땐 아버지의 연륜을 믿어야죠.”
흔들림 없는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소홍을 보니 금왕은 왠지 모르게 가슴이 벅차올랐다.
‘언제 이렇게 컸을꼬.’
금화로 탑 쌓기 놀이를 하면서 깔깔거리던 시절이 엊그제 같은데…….
마침내 금왕이 빙그레 웃었다.
“오냐, 비무 기간 동안은 네게 그 어떤 말도 하지 않으마. 그리고 이 아비는 그 어떠한 편견도 없이 그 아이를 관찰할 것이다.”
“역시 아버지.”
진소홍이 활짝 웃는데, 금왕이 정색하고서는 말을 이었다.
“이 아비 말을 잘 알아들어야 한다. 그 아이가 대살성의 자식이라는 편견도 가지지 않겠지만, 내 딸이 ‘잠룡’이라 부른다는 편견도 가지지 않을 거라는 말이다.”
“피이. 절 못 믿으시는 거죠?”
“아비는 스스로를 믿고 싶을 뿐이다.”
그래야 내 딸인 너를 지킬 수 있을 테니까.
진소홍이 밝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거면 됐어요.”
* * *
남궁검은 미간을 좁히고는 금왕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갑자기 자리를 양보하는 이 상황에 의구심을 품는 눈치였다.
금왕이 뒤늦게 자신의 실수를 알아채고는 포권하며 말했다.
“아, 경황이 없어서 인사가 늦었습니다. 만금상회주 진 모입니다. 남궁대협의 존성대명은 오래전부터 익히 들으며 흠모해 오고 있었습니다.”
“금왕……?”
남궁검이 눈을 가늘게 여미고 중얼거린 말에 금왕이 고개를 숙였다.
“하찮은 재주만 보고 세인들이 붙인 과분한 별명이지요.”
표정에서는 조금도 드러나지 않았지만 남궁검은 내심 의외라는 생각이 들었다.
금왕이 왜 자신에게 자리를 양보한단 말인가?
오히려 입장만 놓고 따지자면 형편이 궁한 남궁검이 금왕을 먼저 찾아가 인사할 일이었다.
그런 생각은 남궁검뿐만 아니라, 귀빈석에 있는 모든 무인들도 같았다.
어째서 금왕이 남궁검에게 저리도 몸을 낮추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이를 가만히 지켜보던 윤첨산이 분위기 파악도 하지 못한 채 불쑥 끼어들었다.
“허허허! 아무래도 만금진인께서 최근 남궁가의 상황을 듣지 못하신 모양입니다. 사실 남궁가는 요즘 좀…… 사정이…… 예, 좀 그렇습니다.”
윤첨산의 말에 몇몇 귀빈들이 키들거리며 조소를 지었다. 대부분 체면치레를 하느라 나서진 않았지만, 윤첨산의 말에 속이 시원하다고 느끼는 중이었다.
맹주 묵천악 역시 꽤나 흐뭇한 표정으로 윤첨산을 보았다.
하나 금왕의 반응은 이번에도 뜻밖이었다.
“지금 윤 가주께서는 이 진 모가 세상사에 어둡다고 면박을 주시는 건지요?”
짐짓 날카로운 눈매로 따져오자 윤첨산이 딸꾹질을 하며 멈칫거렸다.
지금까지 사람 좋은 미소를 짓던 금왕의 표정이 완전히 다른 사람처럼 싸늘해진 것이 아닌가?
당황한 윤첨산이 손을 내저었다.
“아니, 저어…… 그, 그게 아니라…… 그러니까 제 말은…….”
“남궁세가의 사정이 여기서 왜 나오는 건지요? 나는 남궁검 대협의 존성대명을 얘기했을 뿐입니다. 내가 비록 무림을 동경하는 하찮은 범부일 뿐이지만, 남궁검 대협이 무인으로서 훌륭한 경지에 오른 분이라는 건 잘 알고 있습니다.”
“아…… 예…….”
“혹시 윤 가주께서는 이 진 모가 세간에 떠도는 소문처럼 그저 금전만 밝히는 속물로 보이셨는지요?”
“아니…… 그, 그런 뜻은 전혀…….”
“예, 아니길 바랍니다.”
금왕이 딱딱하게 말을 끊고 돌아서자, 윤첨산은 거의 울 것 같은 표정이 되어버렸다.
이제 귀빈석의 분위기는 묘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맹주도 함부로 대할 수 없는 금왕이 저렇게 까칠하게 나오니 누구도 함부로 나서지 못했다.
단 한 사람만 빼고.
“금전을 잘 다루신다더니, 내 얼굴에 금칠도 잘 하시는군.”
냉랭하기 짝이 없는 소리.
남궁검의 싸늘한 목소리에 금왕이 잠시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이내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확실히 보통이 넘는 분이군.’
남궁검의 명성은 실제로 많이 들었다.
대나무로도 모자라 그 대나무가 그대로 얼어버린 것만 같다는 성격.
실제로도 보니 딱 그렇다.
아무 말이나 내뱉었다간 그 말이 얼음이 되어 뚝뚝 떨어질 것만 같은 분위기다.
금왕이 얼음도 녹여 버릴 것처럼 화사하게 웃으며 말했다.
“제 딸이 대협의 손자 덕분에 비무 대회까지 올라왔습니다. 대회 기간 중 많은 도움을 받았다고 전해 들었습니다. 하여 이리 감사하는 마음으로 나섰습니다. 혹, 기분이 언짢으셨다면 오해를 풀어주시지요.”
금왕이 다시 한번 정중히 허리를 숙이자, 남궁검이 눈썹을 슬쩍 모았다. 곁에선 남궁화는 참지 못하고 나서며 물었다.
“우리 천이가 따님을 도왔다고요?”
“그렇습니다. 어찌나 귀가 닳도록 칭찬을 하던지. 하하. 아비 된 도리로서 어찌 감사 표현을 하지 않겠습니까? 제가 이래 봬도 딸 바보라서 말입니다.”
‘세상에…… 천이가……!’
남궁화는 한껏 고무된 표정으로 남궁검을 슬쩍 돌아보았다.
그녀는 알 수 있었다.
남궁검이 겉으로 내색하진 않지만 내심 놀랐다는 것을.
남들이 보면 여전히 얼음장 같은 표정으로 보이겠지만, 지금 남궁검의 눈빛에는 분명 온풍이 불고 있었다.
하나 그렇다고 자리를 양보받는 건 다른 문제다.
남궁검이 미련 없이 돌아섰다.
“그렇다고 하여 남의 자리를 빼앗을 생각은 없소. 그만 가자, 화야.”
“아, 네…… 아버지.”
남궁화가 얼른 남궁검의 뒤를 따랐다.
그제야 다른 귀빈들도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다소 불편한 표정을 짓던 맹주 역시 한시름 놓았다는 반응이었다.
한데 이변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그럼 저도 함께 가시지요. 제가 좋은 자리를 한번 마련해 보겠습니다. 부디 대협께서는 제 호의를 물리치지 말아주십시오.”
“어째서 이렇게까지?”
“말씀드렸다시피 딸이 입은 은혜를 아비 된 도리로서 갚고자 할 뿐입니다.”
남궁검이 눈살을 가만히 구겼다.
도대체 무슨 꿍꿍이지?
하나 딱히 꿍꿍이가 있을 것도 없지 않은가?
오히려 금왕의 딸이 남궁천과 각별한 모양이니…….
이 순간, 남궁검과 금왕은 서로를 보며 같은 생각을 떠올렸다.
‘가까이에서 지켜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터.’
남궁검이 냉랭하게 돌아서며 말했다.
“좋을 대로 하시오.”
“감사합니다, 대협.”
금왕이 자리를 박차고 걸어가자, 주변의 귀빈들이 술렁거렸다.
“저, 저……! 그냥 저렇게 가면……!”
“하아…… 금왕이 왜……?”
어떻게든 금왕과 연을 맺으려던 귀빈들은 발을 동동 구르며 한숨을 내쉬었다.
한편 이 모든 상황을 지켜본 맹주는 흙이라도 씹은 표정으로 변해 버렸다. 물론 누구도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찰나에 지나지 않았지만.
남궁세가를 확실히 고립시키려다가 오히려 중요한 인물을 바짝 붙여준 꼴이 되지 않았나!
그것도 하필 금왕이라니!
그가 어금니를 지그시 깨무는데, 마침 북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두웅! 두웅! 두웅!
“와아아아아!”
관람석에서 고막을 찢을 것만 같은 함성이 뇌성처럼 차올랐다.
마침내 첫 비무가 시작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