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 기울어진 땅
자축 연회나 다름없는 분위기이긴 하지만, 승천각 후원에는 묘한 기류가 흘렀다.
아무 생각 없이 술 한 잔씩 나누면서 웃으며 떠드는 것 같아도 생도들 저마다 대진표를 의식하지 않을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중에서도 가장 걱정이 태산인 생도가 바로 윤종승이었다.
남궁천 덕분에 어찌어찌 기적처럼 이 자리까지 올라왔지만, 하필이면 첫 비무 상대가 정협관의 악굉이 될 줄이야.
내심 정협관 생도들만은 피해달라고 기도를 올렸건만 하늘도 무심하시지.
특히 악굉은 황보승과도 친분이 두터운 만큼 복수를 위해 단단히 벼르고 있을 터였다.
황보승을 이기긴 했지만 어디까지나 부상을 입었던 몸이었다.
한데 사지육신 멀쩡한 악굉을 상대로 과연 이길 수 있을까?
게다가 악굉의 무공은 황보승보다 더 높은 수준으로 알려져 있는데.
‘하아, 산 너머 산이라더니.’
할 수만 있다면 당장 대진표를 바꾸고 싶다.
‘아냐! 언제까지 이렇게 쫄 거냐? 윤종승! 넌 더 이상 용천관 호구가 아니다! 할 수 있어!’
스스로를 달래듯 다짐하며 손바닥으로 양 뺨을 찰싹찰싹 때리니, 인근의 생도들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쳐다봤다.
윤종승이 괜히 자라목을 움츠리고는 어색하게 웃다가 마침 당우기와 눈이 마주쳤다.
뭘 쳐다보냐는 듯 으르렁거리는 시선에 얼른 고개를 돌렸더니, 공교롭게도 당우기와 비무하게 된 무맹관 생도가 보였다.
이름이…… 백무극이었던가?
그에 대한 자세한 정보는 없지만, 유현과 주연화가 같은 조였으니 큰 힘을 들이지도 않고 이 자리에 올라왔을 터.
어쩐지 동질감을 느낀 윤종승이 백무극과 눈이 마주치자 싱긋 웃어 보였다.
하지만 백무극은 뚱한 표정으로 술잔만 내려다볼 뿐이었다.
‘쯧…… 어지간히 긴장했나 보네.’
하긴.
상대는 성질 더럽기로 유명한 당우기가 아닌가?
‘차라리 내가 백무극의 비무 상대였더라면 좋았을걸.’
상대가 비록 무맹관이긴 하지만 지금까지 보인 성적도 무난한 데다 저렇게 긴장하고 있는 것만 봐도 왠지 만만해 보이는 게 사실이었다.
그렇다고 대진표를 조작할 수도 없는 노릇.
어쩌겠나? 운명을 받아들일 수밖에.
‘잠깐…… 그러고 보니……?’
당우기가 저 맹해 보이는 생도를 꺾고 올라온다면?
그리고 자신이 운 좋게 악굉을 꺾고 팔 강전에 오른다면?
‘으악! 그럼 난 또 당우기와 싸워야 하는 거야?’
산 너머 산 너머 태산이로구나!
눈앞이 캄캄해진 윤종승이 한숨을 길게 내쉬는데 마침 등 뒤에서 서늘한 기척이 느껴졌다.
돌아보니 악굉이 한쪽 입매를 치켜 올린 채 바라보고 있었다.
“윤 형과 첫날 비무를 하게 되어서 기쁘오. 이번 기회에 동기가 진 빚을 반드시 갚아드리겠소.”
말투는 정중했지만, 눈빛과 표정만큼은 ‘어디 뒈져봐라’는 감정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윤종승이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뭐라고 대답할까?
일단 정중하게? 아니면 강하게?
만약 남궁천이라면 어떻게 했을까?
여기까지 생각이 미친 윤종승은 어디서 그런 용기가 솟았는지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놀라운 목소리가 튀어나갔다.
“쉽지 않을 거요. 내 빚은 꽤 무겁거든.”
“호오. 대단한 자신감이시군. 부상당한 황보 형을 운 좋게 이기더니 기고만장하셨구려.”
“모름지기 진정한 친구라면 아픔을 나누어야 하지 않겠소? 황보 형의 아픔을 함께 느낄 수 있도록 해드리리다.”
남궁천을 떠올리고 자연스럽게 말을 뱉었지만, 윤종승은 곧 후회했다.
‘내가 미쳤지. 어쩌자고 이런 말을…….’
지금이라도 사과를 해야 하나, 생각하는데 악굉이 입매를 비틀며 눈을 날카롭게 빛냈다.
“이제 보니 윤 형은 아주 재미있는 사람이군. 기대하겠소. 용천관 공식 호구들에게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내 손으로 직접 확인해보리다.”
그러더니 악굉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걸음을 옮겼다.
윤종승이 그 뒷모습을 보며 주먹을 꽉 말아 쥐었다.
마지막 순간, 악굉의 눈빛은 그야말로 매서웠다.
절로 오금이 저릴 정도로.
그래도 이 정도면…….
‘잘 버텼어. 어차피 난 바닥을 찍은 몸. 여기서 더 비참해질 것도 없잖아?’
윤종승이 스스로를 다독이는데, 팽수혁이 다가와 어깨를 툭 쳤다.
“뭘 그리 심각하게 서 있어?”
“응? 아…… 너구나.”
“넌 운이 나쁘다? 하필 우리한테 이를 빠득빠득 가는 놈과 첫 비무라니.”
“그러게.”
“쫄았냐?”
“아, 아냐.”
“아니긴. 쫀 것 같은데.”
“그, 그러는 넌 비무 상대가 누군데?”
팽수혁이 미간을 슬쩍 모으더니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가 곧 뒤통수를 벅벅 긁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무맹관 생도인데 이름은…… 까먹었다.”
“허! 관심은 있는 거야?”
“뭐, 어차피 누가 되든 최선을 다해 이기면 그만이지. 넌 산 정상을 오르면서 중간에 지나쳐 가는 언덕 이름까지 하나하나 기억하냐?”
“……!”
“어차피 상대가 누구든 정상을 노리는 이 몸에게는 그저 지나칠 언덕일 뿐이다.”
윤종승이 뒤통수라도 맞은 표정으로 팽수혁을 보았다.
왠지 팽수혁이 오늘따라 다르게 보인다.
분명 팽수혁의 사고방식을 무조건 옳다고 볼 수는 없지만, 자신이 배워야 할 점이 있었다.
‘그래. 정상을 향하는 자에겐 한낱 언덕이겠지.’
괜히 가슴이 두근거린다.
윤종승이 가슴 위로 손을 얹었다.
지금 심장을 뛰게 하는 건 두려운 감정인가?
아니다. 분명 묘한 기대와 설렘이 공존한다.
혁련장을 완성한 후 윤종승은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일취월장하고 있었다.
본디 무공은 계단식으로 성장하는 법인데, 지금 윤종승은 벽 하나를 깨고 그 계단을 오른 셈이었다.
그러다 보니 성장한 자신을 시험해보고 싶은 충동이 든다.
‘그래, 강해지기 위해 넘어야 할 언덕일 뿐이다.’
윤종승이 다소 상기된 표정으로 미소를 짓자, 팽수혁이 이맛살을 슬쩍 구겼다.
“너 지금 완전 변태 같다. 혼자 얼굴 발그레져 가지고.”
“무, 무슨 망발을……!”
윤종승이 버럭 소리치자 다시 생도들이 쳐다보았다.
* * *
먼발치에서 윤종승과 팽수혁을 보던 진소홍이 싱긋 미소를 짓고는 남궁천을 돌아보았다.
“인피면구는 잘 사용했어?”
“덕분에.”
남궁천이 가볍게 대답하고는 술잔을 들었다.
“이제 내가 보상을 받을 차례네?”
“내일부터 내 숙소로 와. 무공을 손봐줄 테니까.”
“그래. 그런데 난 사실 당장은 아무래도 상관없어. 물론 도움은 받겠지만.”
“무슨 말이지?”
“내가 투자한 사람은 너란 말이지. 남궁천, 이번 대회에서 우승할 수 있겠어?”
이게 가장 중요하다.
남궁천이 주변을 한 차례 둘러보더니 오히려 되물었다.
“못할 것 같나?”
그 말투가 듣기에 따라선 몹시 광오해 보였으며, 또 한편으로는 정말 궁금해서 물어보는 것처럼 순진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잠깐 머뭇거린 진소홍이 입가에 미소를 그렸다.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단지 너의 입으로 듣고 싶었을 뿐.”
하지만 이젠 듣지 않아도 좋다.
이미 눈빛과 표정에서 충분히 대답이 됐으니까.
그것만으로도 진소홍은 가슴 가득 설렘이 충만했다.
‘그래, 넌 분명 잠룡이니까.’
장차 강호 무림의 정상에 오를 인물.
일찍이 자신이 가장 먼저 알아보고 투자를 시작한 인물!
처음에는 의외성에 이끌려 호감을 가지게 됐고, 이후에는 확실한 능력을 인정하고 신뢰하게 됐다. 그리고 금혈서와 마주쳐서 위기에 빠졌을 때 남궁천이 구해준 후부터는…….
‘그땐 정말 놀라웠지.’
진소홍이 멍하니 바라보고 있자, 남궁천이 눈살을 슬쩍 찌푸렸다.
“내 얼굴에 뭐 묻었어?”
“응? 아, 아니. 잠깐 생각 좀 하느라…….”
진소홍이 얼른 낯빛을 붉히고는 고개를 홱 돌렸다.
남궁천이 시큰둥하게 쳐다보다가 술잔을 들이켰다.
사실 남궁천도 진소홍을 다시 보긴 했다.
어린 나이임에도 강남 최대 상회주의 유일한 혈육답게 강단이 있다.
하긴 어쩌면 때 묻지 않은 나이여서 가능할지도 모른다.
이런 시기에는 자신의 신념에 따라 무모한 짓도 곧잘 하니까.
하나 적어도 진소홍의 무모함은 결실을 거두게 되리라. 자신이 그렇게 만들어줄 것이다.
‘내가 받은 만큼은 되돌려 주는 인간이지. 나쁜 것도, 좋은 것도.’
남궁천이 술잔을 내려놓는데, 진소홍이 슬그머니 물었다.
“윤종승이 많이 불안해하는 것 같은데 첫 비무에서 이길 수 있겠지?”
“아마도.”
“역시 그렇지?”
남궁천의 대답에 진소홍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웃었다.
하지만 곧 안타까운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살래살래 저었다.
“윤종승이 악굉을 이길 정도로 성장은 했지만 역시…… 당우기는 어렵겠지? 팔 강전에서는 당우기와 비무하게 될 것 같던데…….”
“글쎄…… 그건 어떨지.”
“응? 무슨 말이야? 설마 윤종승이 당우기도 이길 만큼 강해졌다는 뜻이야?”
“그럴 리가.”
“그럼?”
진소홍이 미간을 곱게 찡그리며 물었지만, 남궁천은 대답 대신 눈을 가늘게 뜨고는 한 곳만 뚫어지게 보았다.
진소홍이 무심결에 그 눈길을 따라 시선을 옮겼다.
‘저 생도는……?’
두 사람의 시선이 닿은 곳에 당우기의 첫 비무 상대인 백무극이 조용히 음식을 먹고 있었다.
어딘지 초점을 잃은 듯 보이는 눈동자.
지나치게 긴장한 것처럼 보이기도 했고, 세상사엔 무관심하다는 태도처럼 보이기도 했다.
하여튼 묘한 분위기였다.
남궁천이 착 가라앉은 눈빛으로 중얼거렸다.
“두고 보면 알겠지.”
* * *
“앉아라.”
맹주 묵천악이 자리를 권하며 부드럽게 웃었다.
백무극은 예의 그 무덤덤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여 보이고는 탁자를 사이에 두고 앉았다.
“그래, 저녁 자리는 즐거웠느냐?”
“그냥…… 그랬습니다.”
백무극이 시큰둥하게 대답하자, 묵천악이 껄껄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녀석, 여전히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구나.”
“죄송합니다.”
백무극이 머리를 긁적이며 대꾸하자, 맹주가 손을 내저었다.
“죄송할 일은 아니지. 어딘지 맹해 보이는 네 모습이 오히려 장점이 될 수도 있으니.”
“제게 하실 말씀이라도……?”
“내 너에게 거는 기대가 크다.”
“감사합니다. 문주님도 맹주님께 감사하다는 말씀 전해달라고 하셨습니다.”
“내게 감사할 게 뭐가 있느냐? 다 네가 기특하고 재능이 있어서 지원하는 것일 뿐.”
“감사합니다.”
“녀석, 여전히 재미없구나.”
“죄송합니다.”
백무극의 거듭된 대꾸에 맹주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이내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확실히 백무극은 독특한 분위기를 풍겼다.
무채색 같은 얼굴은 감정이 전혀 담기지 않은 것처럼 맹하기만 하다.
모용강이나 모용신이 얼음장처럼 차가운 표정으로 감정을 숨기는 거라면, 백무극은 원래부터 감정이라는 게 없는 아이 같다.
묵천악이 입매를 슬쩍 말아 올리고는 물었다.
“이번 대회에서 최대 강적은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남궁천입니다.”
백무극은 망설임 없이 대꾸했다.
묵천악이 희미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길 자신은 있느냐?”
“이길 생각입니다.”
“혹여나 방심하지 마라. 맹수는 토끼를 사냥할 때도 최선을 다하는 법이니.”
“명심하겠습니다.”
“또한…… 최선을 다하다 보면 토끼를 의도치 않게 물어 죽이는 일도 생기는 법이지.”
백무극의 눈빛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백무극이 묵천악을 가만히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그래도 괜찮은…… 건지요?”
“심사관은 청랑단주가 맡게 될 것이다. 때론 그 친구가 둔할 때가 있어서 말이야. 어쩌면 자네의 손이 더 빠를 순간이 오지 않겠는가?”
“맹주님의 뜻…… 잘 알겠습니다.”
“그래, 비무 중에는 어떤 일이든 일어날 수 있는 법이니까.”
말을 마친 묵천악이 기분 좋게 웃었다.
확실히 백무극은 겉으로 맹해 보이지만, 실제론 그렇지 않다.
묵천악은 백무극을 돌려보낸 후 총관을 불렀다.
“비무 대회 참가 생도 지인들에게 초청장은 모두 보냈는가?”
“예, 지금쯤 대부분 도착했을 겁니다.”
“거기엔 남궁세가도 포함됐겠지.”
“분부하신 대로.”
“오랜만에 그 얼굴을 보게 되겠군.”
묵천악의 입가에 어딘지 야비한 미소가 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