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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공검제-62화 (62/508)

62. 기울어진 땅

무림맹 승천각 후원에 산해진미가 가득 차려졌다.

남궁천을 비롯해 사차 시에 오른 열여섯 명의 생도들이 후원에 모였고, 맹주를 포함한 수뇌 인사들도 몇 명 보였다.

오늘 이 자리는 무연회 삼차 시를 통과한 열여섯 명의 생도들을 축하하는 자리이자, 이후에 치러질 비무 대회를 설명하고 대진표를 작성하는 자리이기도 했다.

올해 무연회 진행을 담당한 적랑단주 당예설이 후원의 정자 위로 올라서서 생도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다들 주목! 우선 삼차 시를 통과한 걸 축하한다. 여기 이 자리에 오기까지 고생이 많았다. 그러나 아직 모든 대회가 끝난 것이 아니다. 며칠 후에 치러질 사차 시는 다들 알다시피 공개 비무 방식으로 치러진다. 승자결 방식인 만큼 지금부터 추첨을 통해 대진표를 작성하겠다. 질문?”

생도들이 서로 눈치를 보면서 쭈뼛거리는데, 윤종승이 슬그머니 손을 들었다.

“말해.”

“여기…… 음식들은 먹어도 됩니까?”

그 말에 몇몇 생도들이 키들거렸고, 몇 명은 노골적으로 한심하다는 시선을 보내왔다.

당예설이 잠깐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가 곧 피식 웃었다.

“먹어도 되지만, 우선은 집중하도록. 나중에 너희들끼리 즐길 시간을 충분히 주겠다.”

“식으면 맛없을 텐데…….”

윤종승이 뒤통수를 긁적이며 말하자, 다시 몇 명의 생도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분위기가 조금 누그러지는 효과가 있었기에 당예설도 더는 잔소리 하지 않았다.

“다른 질문은?”

윤종승 덕분인지 쭈뼛거리던 생도들이 이젠 편하게 질문을 이어가기 시작했다.

“혹시 패자부활전 같은 건 없습니까?”

“없다.”

“혹시 기권하는 자가 나타나면 부전승으로 올라가는 겁니까?”

“그렇다.”

“이제 대진표가 작성되면 열여섯 명이 동시에 비무를 치르게 됩니까?”

“각 비무별로 시간차를 두겠지만 하루 안에 치러질 거다. 십육 강이 끝나면 사흘 후에 팔 강전을 치를 거다. 그리고 다시 사흘 후. 이렇게 사흘 간격으로 결승까지 치러진다.”

“만약 그사이에 심각한 부상이 발생하면요?”

“그럼 기권을 하든가?”

당예설이 냉랭하게 반응하자 처음으로 생도들 사이에서 멈칫하는 반응이 나왔다.

당예설이 생도들을 한 번 훑고는 말을 이었다.

“비무 기간 중에 부상을 입지 않는 것도 무인으로서 갖춰야 할 자질이자 능력이다. 이런 수준 낮은 질문은 삼가면 좋겠군.”

훈풍이 불던 후원에 갑자기 칼바람이 부는 것만 같다.

생도들이 그제야 서로를 경쟁상대로 의식했는지 조금은 껄끄러운 표정이 됐다.

봇물 터지듯 쏟아지던 질문도 뚝 끊어졌다.

당예설이 희미하게 웃었다.

이것도 나쁘진 않다.

너무 기강이 해이해지면 오히려 예상치 못한 사고가 생기기 쉬우므로.

적당히 조였다가 풀어주길 반복해야 긴장을 놓지 않을 것이다.

특히나 강호 경험이 일천한 생도들이라면 더욱 긴장을 놓쳐선 안 된다.

“질문은 더 없나?”

당예설의 말에 생도들이 한동안 침묵을 유지했다.

“질문이 없다면 이제 대진표를…….”

“승패는 어떻게 결정됩니까?”

질문을 던진 사람은 모용강이었다.

모용강은 무표정했으나, 내심에 깃든 독기가 여실히 느껴질 정도로 팽팽한 기도를 드러내고 있었다.

‘독이 올랐군.’

하긴. 남궁천에게 제대로 한 방 먹었으니 그럴 수밖에.

게다가 삼차 시에서는 정협관 생도들이 작정을 하고 덤볐는데 오히려 개박살이 났으니 겉으로 내색은 하지 않아도 어지간히 부아가 치밀었을 것이다.

그 바람에 지금까지와는 달리 이번 무연회에서 정협관 생도들이 대거 탈락해 버렸고.

당예설이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한쪽이 패배를 인정할 때까지다.”

“인정하지 않으면 어떻게 됩니까?”

“전투 불능이 될 때까지.”

“그 말은 불구가 되거나 죽어도 상관없다는 건지요?”

굉장히 노골적인 질문이 튀어나오자 생도들 사이에서 술렁임이 일어났다.

당예설이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모든 결과에 대한 책임은 본인이 져야겠지. 그게 두렵다면 패배를 인정하면 되는 것이고. 용기와 객기를 구분하는 것도 배워야 할 테지.”

“잘 알겠습니다.”

모용강이 차갑게 미소 지으며 답하자 당예설이 한마디 덧붙였다.

“단, 패배를 시인하지 않아도 심사관이 보기에 승패가 명확하다 판단되면 도중에 개입하여 판정을 내릴 수는 있다.”

그 말인 즉슨 어지간하면 사망자나 불구자가 나오지 않도록 맹에서 개입할 것이라는 완곡한 표현이다.

모용강의 무거운 질문을 끝으로 더 이상 손을 드는 생도는 없었다.

당예설이 눈짓을 보내자, 적랑단 부단주가 검은색 목함을 들고 걸어왔다.

“그럼 이제부터 대진표를 작성하겠다. 먼저 삼차 시까지 종합 성적이 가장 우수했던 남궁천이 나와서 뽑도록.”

남궁천이 걸어 나가 부단주가 든 검은 목함에 손을 넣고 목패 하나를 뽑아 들었다.

목패에는 ‘병(丙)’ 자가 새겨져 있었다.

“남궁천, 병 조! 참고로 대진표와 비무 순서는 무관하다. 공정성을 위해서 당일 비무 순서는 제비뽑기로 정한다. 다음은 모용강.”

모용강이 앞으로 나가서 목패를 뽑자, 당예설이 다시 한번 큰 소리로 알렸다.

“모용강, 정(丁) 조!”

모용강이 혀를 한 번 차고는 남궁천을 힐끔 쳐다보았다.

남궁천과 같은 조가 되지 않은 것이 아쉽다는 표정이 역력했다. 하루라도 빨리 지난번의 수모를 되갚아주고 싶다는 눈치였다.

곧이어 유현이 나와서 패를 뽑았고, 종남파 제자인 운경도 차례로 나갔다.

팽수혁과 진소홍도 차례를 기다려 패를 뽑았고, 마지막으로 윤종승이 남은 패로 자연스럽게 대진표 한 자리를 차지하게 됐다.

모든 대진표가 완성되고 나니 생도들은 저마다 자신의 비무 상대를 은밀히 살피면서 내심 긴장을 다졌다.

혹자들은 만만한 상대가 걸렸다며 내심 즐거워했고, 어떤 생도들은 운이 나쁘다며 투덜거렸다.

남궁천의 첫 비무 상대로 정해진 사람은 바로 화산파의 제자 주연화였다.

그녀는 남궁천을 찾아와 해맑은 미소를 지으며 포권했다.

“삼차 시까지 일 위로 통과하신 남궁 소협과 한 조가 되어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그날 한 수 배울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명랑하게 말을 뱉는 주연화를 보면서 남궁천이 잠시 멍한 표정을 지었다가 피식 웃었다.

‘확실히 이게 명문정파의 흔한 태도인가?’

생소하면서도 나쁘진 않다.

싸울 상대에게 늘 송곳니를 드러내며 으르렁거리던 세계에서만 살다가 이런 건전한 느낌도 나름 신선했다.

남궁천이 뭐라고 대답을 하려는데, 모용강이 불쑥 나타나더니 노골적으로 적대감을 드러냈다.

“남궁천, 시답잖은 상대는 빨리 정리하고 올라와라. 대진표를 보니 그다음 상대는 내가 되겠군. 기다리고 있겠다.”

그러자 주연화가 이맛살을 슬쩍 구기며 모용강을 노려보았다.

“이봐요. 전 보이지도 않나요? 이건 예의가 아닌 것 같은데요.”

“예의……?”

모용강이 차가운 표정으로 돌아보자, 주연화가 마른침을 꿀꺽 삼키고는 움찔거렸다.

모용강의 표정이 너무나 살벌했기에.

‘내가 잘못한 것도 없는데 왜 쫄아야 해?’

괜히 심술이 난 주연화가 다부진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남궁 소협이 강하긴 하지만 비무 당사자인 저를 앞에 두고 그런 말을 하시는 건 무례하군요.”

“글쎄…… 거짓말은 못하는 성격이라서. 보이는 그대로 말했을 뿐이오. 기분 나빴다면 미안하오.”

‘아니, 그 말이 더 기분 나쁘잖아!’

주연화가 발끈해서 더 따지려는데, 모용강이 예의 그 차가운 시선을 던지며 물었다.

“아니면…… 정말 소저가 남궁천을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요?”

“그건……!”

“설마 그 정도로 안목이 없진 않겠지. 강호에서는 상대를 파악하는 눈도 실력 중 하나요. 만약 그런 생각을 행여나 했다면 기권하는 걸 추천하겠소. 강호인이 되려면 모름지기 자기 주제를 알아야 오래 살아남는 법이니까.”

주연화가 입을 딱 벌리고는 말을 잇지 못했다.

정말이지 너무 무례해서 기가 막혔지만, 모용강의 말을 반박할 자신도 없긴 했다.

사실 모용강의 말대로 남궁천이 상당히 강하다는 건 인지하고 있었기에.

그렇다고 해도 이렇게 노골적으로 자신을 무시하다니!

모용강이 피식 웃고는 걸어가려는데, 남궁천이 입을 열었다.

“나도 궁금해졌는데.”

“……?”

모용강이 멈칫거리고 돌아보자 남궁천이 씨익 웃으며 물었다.

“나 역시 거짓말을 못하는 성격이라서 말이야. 혹시 기분 나빠질 거라면 미리 사과하고 말할게.”

“무슨 소리냐?”

“정말 네가 날 이길 수 있다고 이러는 거야?”

“……!”

“설마 그 정도로 안목이 없진 않겠지. 강호에서는 상대를 파악하는 눈이 실력 중 하나거든. 만약 그런 생각을 행여나 했다면 기권하는 걸 추천하지. 강호에서는 주제 파악을 해야 오래 살아남거든.”

“너…….”

“혹시 기분 나빴나? 그래도 미리 사과했으니까 좋게 넘어가자고.”

아주 짧은 순간 모용강의 전신에서 살기가 휘몰아쳤다.

하나 도중에 끼어든 유현 때문에 흉흉한 분위기도 더는 이어지지 않았다.

“화야! 너 여기서 뭐 하는 거니? 괜한 분란 일으키지 말고 어서 이리 와라.”

“사형, 분란을 일으킨 건 제가 아니라…….”

“그만. 혹시 사매가 결례를 저질렀다면 너그러이 양해 부탁드립니다.”

유현이 얼른 포권하자, 남궁천이 손을 저으며 웃었다.

“별말씀을. 주 소저는 누구와 달리 매우 바람직했소.”

“예?”

“별건 아니오. 주 소저, 비무 기대하겠소.”

“감사합니다, 남궁 소협! 한 수 잘 배우겠습니다!”

주연화가 싱글벙글 웃으며 대답했고, 유현은 그런 사매를 억지로 끌고 가다시피 데려갔다.

한편 조금 떨어진 곳에서 이 상황을 묵묵히 지켜보던 당예설은 희미하게 웃었다.

‘모용강을 저렇게 누를 수 있다니. 남궁천, 너란 아이는 참 재미있구나.’

그렇잖아도 그녀는 모용강의 형인 청랑단주 모용신과 맹 내에서 은근한 패권 다툼을 벌이는 사이였다.

한데 남궁천이 모용신의 동생을 저렇게 자근자근 밟아주니 그녀로서는 묘한 대리만족을 느끼고 있었다.

뭐, 동생 당우기마저도 밟혔다는 게 썩 유쾌하지 않지만, 애초에 그녀가 동생에게 끈끈한 정을 가진 적은 없었기에.

오히려 남자로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소가주가 된 동생이 영 못마땅했다.

상념을 거둔 당예설이 입을 열었다.

“자, 모두 주목! 맹주님의 말씀이 있겠다.”

술렁거리던 생도들이 동작을 멈추고 이목을 집중했다.

맹주가 정자 위로 올라서서는 생도들을 한 차례 둘러보며 사람 좋은 미소를 그렸다.

“모두들 삼차 시를 통과한 걸 축하한다. 이 자리에 오기까지 고생 많았다. 너희들은 누가 뭐래도 무한 제일의 후기지수들이다. 물론 너희 중에는 동료의 도움으로, 혹은 운이 좋아서 이 자리에 있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윤종승이 괜히 자라목을 움츠렸다.

그 와중에도 맹주의 목소리는 담담하게 이어졌다.

“하나 그 또한 실력이니라. 세상은 모두에게 공평하지 않다. 하나, 본 맹은 그런 세상을 공평하게 만들기 위해 존재한다. 불공평함 속에서도 이 자리까지 오른 너희들은 그 세상을 균형 있게 맞출 능력이 있다. 모두 준비를 잘 해서 후회 없는 마무리가 되길 바란다. 특히 사차 시에는 가족들까지 초빙하는 행사가 될 테니 힘을 내도록. 모두의 무운을 빈다.”

맹주의 말이 끝나자 생도들이 감동한 표정으로 일제히 박수를 쳤다. 물론 단 한 사람, 남궁천만을 제외하고.

맹주의 시선이 그런 남궁천과 딱 마주쳤다.

맹주의 눈매가 부드럽게 휘었다.

‘알겠느냐? 세상은 처음부터 기울어진 땅이다. 그 기울어진 땅을 평탄하게 만들기 위해서라도 너는 우승을 해선 안 될 아이다. 그러니 너는 이 대회에서 절대 우승할 수 없을 것이다.’

속내를 갈무리한 맹주가 온화한 목소리로 말했다.

“오늘만큼은 마음껏 즐겨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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