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 등하불명(燈下不明)
한바탕 싸움이 끝나면 의원들의 전쟁이 시작된다.
때에 따라선 타인의 생사를 책임져야만 하기에 일할 때만큼은 그 누구보다 냉엄하다.
“여기! 서둘러!”
“어허! 갑자기 들면 어떡하나? 환자가 다치잖나!”
“죄, 죄송합니닷!”
“정신 안 차려? 힘 안 들이고 사람 죽일 수 있는 게 우리 의원이라는 걸 모르느냐!”
“네, 넵!”
의원들의 고성이 연공실 곳곳에서 울리고, 의생들이 연신 굽실거리며 쩔쩔맸다.
당예설을 따라 연공실로 제일 먼저 들어섰던 의원은 의생 하나의 뺨을 거칠게 올려붙였다.
짜악!
“방해만 된다! 썩 꺼져라! 무인은 실수를 스스로 책임지지만, 의원은 실수를 환자에게 떠넘기게 된다고 하지 않았느냐! 네놈의 실수를 엄한 환자가 목숨으로 책임지게 된단 말이다!”
“죄, 죄송합니다!”
결국 의생은 울면서 쫓겨나고, 의원은 무서운 표정으로 혀를 찼다.
그는 연공실 가득한 부상자들을 둘러보며 혀를 내둘렀다.
‘어찌 이리도 손속이 잔인할꼬…….’
사실 생명에 지장은 없다.
하나 의원으로서 마음가짐을 제대로 가르치지 않으면 안 되기에 이런 일에는 누구보다 냉정하다.
‘그렇다곤 해도…… 역시 참혹한 광경이구나.’
부상당한 생도들이 하나같이 극렬한 고통을 호소하고 있다. 완치가 된다 해도 그 고통에 대한 기억만큼은 쉬이 떨쳐내지 못하리라.
쉽게 말해 아픈 곳만 골라 때린 격이다.
의원은 고개를 돌려 이 모든 일의 화근인 한 사람을 바라보았다.
남궁천.
대살성의 자식이라…….
편견을 가지지 않으려고 해도 이 사달이 난 걸 보면 저절로 떠오르는 생각은 어쩔 수 없다.
지금까지 무연회에서 이토록 참혹한 현장을 본 적이 있던가?
몇몇 생도들은 지나치게 공포에 질려서 자칫 주화입마에 들어서기 직전이다.
“허참. 대살성의 자식이 호구라더니. 소문이라는 건 정말 믿을 게 못 되는구나.”
혼잣말처럼 중얼거린 의원이 그제야 눈길을 거두고 다른 부상자들을 살폈다.
한편 남궁천을 예의주시하는 자는 또 있었다.
분주하게 움직이는 의원들 사이에서 남궁천만 지그시 바라보던 당예설이 천천히 걸음을 옮겨 다가갔다.
“너는 이번에도 날 놀라게 하는구나.”
남궁천이 당예설을 힐끗 보더니 어깨를 으쓱였다.
“제가 좀 놀라운 사람이긴 합니다.”
“한 가지 궁금한 게 있는데.”
“네.”
“어떻게 갑자기 강해진 거냐? 용천관 공식 호구라는 소리를 들었는데.”
남궁천이 피식 웃었다.
“실은 제가 힘을 숨긴 호구라서요.”
“그렇다면 왜 그간 힘을 숨긴 거냐?”
“그게 강호를 살아가는 법 아닙니까?”
“너는 삼 할을 숨긴 게 아니라, 전부를 숨긴 것 같은데.”
“원래 날아오르기 전에는 바짝 웅크려야 하니까요.”
“그럼 지금은 날아오르기로 한 것이냐?”
“글쎄요. 그 전에 뛰는 단계라고 해두겠습니다.”
“여전히 삼 할은 숨기고 있다?”
남궁천이 대답 대신 당예설을 물끄러미 보았다.
아주 짧은 순간에 지나지 않았지만 그 순간 당예설은 전신을 훑고 지나가는 묘한 감각을 느꼈다.
‘뭐지……? 한낱 생도가 보는 시선에…….’
등줄기를 타고 소름이 오싹하게 돋아난다.
기도에 눌렸거나 살기에 반응한 것도 아니다. 뭐라 표현하기 애매하지만 묘한 이질감이 남궁천에게서 느껴진다.
단순한 죽음의 기운 같은……?
나름 칼밥을 먹고 살아온 그녀의 경험에 의하면, 겉으로 보이는 게 다가 아닌 부류는 항상 조심해야 한다.
그녀의 무의식은 지금 경고를 보내고 있다. 남궁천이 어쩌면 그런 부류일 수도 있다고.
마침내 남궁천이 입을 열었다.
“저한테 궁금한 게 많으시네요. 혹시 저 좋아하십니까?”
당돌한 반응에 당예설이 잠시 멍한 표정을 짓다가 이내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 네가 마음에 드는구나. 진심으로.”
남궁천의 대답이 의외였던 것처럼, 당예설의 대답도 충분히 의외였다.
어…… 이게 아닌데?
남궁천 역시 왠지 모르게 오싹한 느낌을 받고는 슬그머니 물러났다. 평범한 적에게서 느껴지는 그런 경계심이 아니었다.
그보단 뭐랄까…… 괜히 엮이기 싫은?
남궁천이 잠깐 떠오른 생각을 털어내듯 고개를 휘젓고는 진중한 표정으로 물었다.
“시험은 공정하게 치러지는 걸로 믿어도 되겠습니까?”
이런 질문을 던지는 이유는 단 하나.
연공실 문을 열 때 발사된 강궁 때문이다.
만약 연공실 문을 다른 사람이 열었다면 그 강궁을 막아낼 수 있었을까?
운 좋게 목숨을 건지더라도 최소 중상을 입었으리라.
한데 공교롭게도 자신이 열었다.
다른 조는 작당을 하고 밖에서 대기만 했다.
이 모든 걸 우연으로 볼 수 있을까?
그리고 지금 그 갈라진 화살을 적랑단 부단주가 가지고 있다.
‘알아야지. 어떤 놈들이 날 노리는 건지.’
남궁천의 눈빛이 깊어졌다.
하나 당예설은 그 말뜻을 잘못 이해했다.
“너는 다르게 생각할 줄 알았는데? 모든 시험은 공정하지 못할 거다. 이 세상이 그렇지 않은 것처럼 시험도…….”
“그런 말이 아닙니다. 물론 시험 도중 몇 놈들이 작당해서 덤비는 거야 어찌 뭐라고 하겠습니까? 단주님 말씀대로 이 세상이 엿 같은 거죠. 하지만 주최하는 입장에서는 참가자에게 동일한 환경과 조건을 부여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무슨 뜻이지?”
당예설의 눈매가 날카로워졌다.
남궁천이 싸늘한 미소를 머금으며 말을 이었다.
“말 그대롭니다. 만약 주최 측에서 응원하는 누군가 존재한다거나, 반대로 눈엣가시처럼 여기는 존재가 있어서 제거하고 싶다거나, 절대로 우승해선 안 될 싹을 일찌감치 베어버리고 싶다거나…….”
“갈!”
당예설이 차갑게 소리치고는 남궁천을 빤히 보았다.
“지금 본 맹이 무연회 승부 조작이라도 한다는 뜻이냐?”
“가능성이 없다고 생각하진 않습니다.”
남궁천이 두 눈을 똑바로 뜨고 대꾸하자 당예설은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아직 강호 경험이 일천할 생도가 어찌 이렇게 단호한 표정으로 자신을 압박한단 말인가?
공식 호구라더니 일, 이차 시에서 놀라운 일을 해내고, 삼차 시에서는 정협관 생도들을 홀로 때려잡았다.
그런데 이젠 맹을 대놓고 의심한다.
‘맹랑하기가 이를 데 없군.’
졸지에 의심의 대상이 되자 기분 나쁘긴 하지만, 그 의심이 합리적이라는 생각도 지울 수 없다.
‘그 강궁은 역시…….’
불길한 생각이 든다.
하나 그녀가 여기서 남궁천에게 동조할 수는 없다.
그랬다간 확실히 알지 못한 일에 스스로도 맹을 의심한다고 인정하는 꼴이 되어버리니까.
당예설이 차갑게 웃으며 되물었다.
“제법 맹랑한 소리를 지껄이는구나. 그래서 네 생각에 그 제거 대상이 너라고 생각하느냐?”
“부인하진 않겠습니다.”
이것 봐라?
이렇게 직접 물어보는데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는다고?
오히려 남궁천의 냉랭한 눈빛이 당예설을 압도하는 기분이다.
뭐 이런 애송이가…… 아니, 애송이가 맞긴 한 건가?
다시 한번 그 오싹한 감각이 머리끝까지 쭈뼛 치솟는다.
하나 최대한 속내를 숨기고는 냉랭하게 되물었다.
“본 맹이 어째서 너 같은 생도 하나를 제거하지 못해 그런 번거로운 수단까지 쓸 거라고 생각하지?”
“대살성의 자식이니까요.”
“……!”
“공정하지 않은 세상에서 정의를 지향하는 무림맹 입장에서는 아무래도 반듯하고 무난한 이야기가 좋겠지요. 대살성의 자식 따위가 우승하는 게 아니라, 제대로 된 명문정파의 후기지수가 우승을 해서 명성을 알리는 게 좋을 테니까.”
“그렇다고 굳이…….”
“한데 기관장치를 이용하면 사고사로 위장하기 딱 좋지 않겠습니까? ‘대살성의 자식이 아무개에게 살해당했다!’라는 것보다는 ‘대살성의 자식이 기관장치에 죽었다’는 쪽이 훨씬 안정감 있게 들리지 않습니까? 사고사는 확실히 무게감이 다르죠. 보기 싫은 싹을 미리 제거하기도 좋고.”
너무나 직설적인 발언에 당예설은 어금니를 꾹 깨물었다.
이 새파란 애송이는 도대체 뭐기에 저런 소리도 아무렇지 않게 내뱉는 걸까?
당장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부정하고 싶지만, 그녀 역시 그런 생각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때문에 당예설은 눈을 가늘게 뜨고 남궁천을 보았다.
‘무슨 애가 세상을 다 살아본 것처럼 말하는군.’
결국 당예설이 한 발 물러났다.
“상상력은 좋구나. 하나 상상도 지나치면 망상이 되는 법.”
“하면 화살촉이 명백한 살상용이라는 건 단순한 실수겠군요.”
“……!”
“그래서 수거해 가시는 거겠죠.”
남궁천이 천진하게 웃어 보인다.
기가 차다.
사람 속은 다 헤집어놓고 마치 아무것도 모른다는 저 표정이라니.
당예설이 입매를 비틀었다.
“그래. 바로 알았구나. 실수한 자를 찾아내 책임을 물을 생각이다.”
“꼭 찾아내시길 바랍니다. 정말 놀랐거든요.”
“그래야지.”
당예설이 눈을 가늘게 뜨고는 답하자, 남궁천이 ‘그럼’ 하고는 몸을 돌려 걸어갔다.
그 뒷모습을 가만히 보던 당예설이 남궁천을 불러 세웠다.
“남궁천.”
“예?”
“합격을 축하한다.”
“감사합니다.”
남궁천이 씨익 웃으며 포권을 취했다.
‘도대체 저 아이는…….’
당예설이 고개를 살래살래 저었다.
알면 알수록 더 모를 아이.
* * *
“알아봤나?”
당예설의 질문에 부단주가 고개를 숙이고는 답했다.
“예, 단주. 철정각(鐵正閣)에서는 분명 훈련용 화살촉을 사용했다고 합니다.”
철정각은 무림맹에서 지급되는 모든 무기류를 제조하는 대장간이라고 할 수 있었다.
당예설이 눈썹을 성큼 치켜 올렸다.
“확실해?”
“철정각주가 직접 검수까지 마친 사안이라 분명하답니다.”
“그렇단 말이지…….”
당예설이 희미하게 중얼거리고는 눈을 가늘게 떴다.
하면 누군가 중간에 손을 댔다는 뜻이리라.
* * *
“과연 그게 누굴까?”
남궁천이 가만히 중얼거린 말에 옆에 서 있던 귀왕이 허리를 바짝 숙이며 되물었다.
“예? 누구 말입니까요?”
“날 죽이려는 놈.”
“헉! 예……? 예? 전, 전 절대 아닙니다요! 정말입니다! 야! 너, 너희들도 알지? 이 새끼들아, 내가 언제 그런 말 한 적 있어? 왜 대답이 없어? 이 새끼들……!”
딱!
“큭!”
남궁천이 뒤통수를 후려치자 귀왕이 자라목을 하며 움츠렸다.
하여튼 이놈은 전생에나 지금이나 매를 부른다니까.
내가 마음이 바다처럼 넓으니까 이 정도로 넘어가 준다.
귀왕이 잔뜩 주눅 든 목소리로 말했다.
“전 정말로…… 아닙니다요. 그게…… 그러니까 아직은 구체적인 실천 계획을 세운 적이 없으니까…….”
“정보가 필요해.”
“예? 무슨…….”
“무림맹에 관한 정보. 나 때문에…… 아니, 우리 아버지 때문에 무림맹 인사이동이 심해졌어. 핵심인사들 관계도 대충 파악해야 할 듯하고.”
“저어, 하지만 정보는 돈이 많이 들어갑니다. 저희가 지금 자금이 그만큼…….”
“돈 벌어서 얻다 썼냐?”
‘네가 다 가져갔잖아!’
귀왕은 목구멍까지 치솟은 말을 꿀꺽 삼키고는 배시시 웃었다.
“요즘 무연회 때문에 손님이 별로 없습니다요. 보시다시피 무림맹에서는 거리가 좀 멀다 보니…….”
그러고 보니 귀왕 반장에 손님이 별로 없다. 아니, 지금은 아예 없었다.
하긴. 아무리 맛집이어도 반장 하나 차려서 재벌이 되긴 쉬운 일이 아니다.
“정보와 돈이 문제군.”
“크음. 그런데 무림맹 정보라면 역시…… 그곳 아닐까요?”
“그곳이라면?”
“왜 있지 않습니까? 바로 코앞에…… 불명회(不明會)라고.”
순간 남궁천의 눈이 번뜩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