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 완성된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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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 완성된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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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 완성된 가족
2022.05.24.
그날 밤 민후는 바로 장모님을 집으로 모시고 갔다.
“장모님. 오늘은 우리 집에 가서 주무시죠. 은조랑 오랜만에 함께 주무세요.”
오랜만에 모녀가 함께 잘 수 있도록 해 주기 위해서였다.
“여기 이사는 언제든 편할 때 하시면 됩니다.”
민후가 낙찰받아 산 송화의 옛집은 현재 빈집이라 언제든 송화가 들어가 살 수 있었다.
“자네한테 이렇게 신세를 져도 되는지 모르겠네.”
“신세라뇨. 그렇게 말씀하시면 섭섭합니다.”
민후가 송화를 보며 웃었다.
“사위도 자식인데. 자식한테 신세 진다는 말 안 하지 않습니까?”
“집을 그냥 받을 수는 없고 전세로 들어가 살겠네.”
“그건 제가 싫습니다.”
민후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장모님이 그 집을 힘들게 장만했다고 들었습니다. 잃은 것 다시 찾아드리고 싶었습니다.”
송화는 한두 푼 하는 것도 아닌 부동산을 아무 대가도 없이 선물하겠다는 것이 부담스러웠다.
송화가 몇 번을 거절해도 민후는 물러나지 않았다.
송화가 은조에게 작은 소리로 말했다.
“은조야, 네가 강 서방한테 잘 얘기해서 그 집 명의는 바꾸지 말라고 해. 집이 한두 푼 하는 것도 아니고 엄마가 그걸 어떻게 받아? 조만간 전세금 마련해서 전세로 살겠다고 해. 엄마는 다시 그 집에서 살 수 있는 것만으로도 너무 좋아.”
“엄마, 민후 씨가 그렇게 하고 싶어 하는 거니까 민후 씨 말대로 해요.”
은조는 민후가 마음을 바꾸지 않을 것이라는 걸 잘 알기에 그렇게 말했다.
“민후 씨가 선물하고 싶은가 봐.”
“이런 걸 염치없이 어떻게 덥석 받아? 여태 내가 해 준 것도 없는데.”
“해 주고 싶어도 기회가 없었잖아. 이제부터 사위한테 잘해 주면 되겠네.”
은조가 웃으며 말을 덧붙였다.
“사위 사랑은 장모라잖아.”
.
.
.
은조는 민후와 자던 침실에 송화와 나란히 누웠다.
민후는 게스트룸에서 따로 잤다.
은조는 누워서도 엄마와 얼굴을 보며 눈을 떼지 않았다.
마치 꿈을 꾸는 것 같았다.
지금 보고 있는 사람이 엄마가 맞나, 싶었다.
송화도 은조의 얼굴을 이리저리 만지고는 했다.
마치 잃어버린 딸을 10년 만에 찾은 기분이었다.
은조가 초등학생 때까지 함께 잤던 기억이 났다.
성인이 되어 이렇게 함께 누워 있는데도 초등생 딸을 데리고 자던 그때 같았다.
이제는 그 딸도 곧 엄마가 된다고 하니 새삼 대견했다.
“몸은 힘들지 않아? 몸이 무거워지기 시작했을 텐데.”
“응. 아직은 괜찮아.”
송화가 은조의 배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낳기 전에 다시 만나서 다행이다. 너 몸 푸는 거 엄마가 도와 줄 수 있어서.”
“응.”
은조가 애틋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임신한 걸 알았을 때 엄마 생각이 먼저 났었어. 그리고 아기 낳으면 난 친정엄마한테 산후조리 못 받을 것 같아서 좀 우울했었거든.”
은조가 송화를 끌어안으며 말했다.
“나도 이제 친정엄마한테 기댈 수 있어서 좋아.”
은조는 그동안 가장 편안하고 기댈 힘이 되어야 할 가족에게서 억압만 받고 살아왔었다.
이제는 안식처가 되는 진짜 가족이 완성된 것 같아서 기뻤다.
“엄마가 옆에서 우리 딸 지켜줄게.”
송화가 은조를 안고 등을 토닥여 주었다.
어릴 때 자장가를 불러주며 어린 은조를 재우듯이.
은조는 그날 밤 엄마를 꼭 끌어안고 편안한 잠에 빠졌다.
*
은조는 다음날 고소한 냄새에 눈을 떴다.
침대 옆자리는 비어 있었다.
은조가 잠이 덜 깬 얼굴로 침대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가보았다.
엄마가 주방에서 분주하게 요리를 하고 있었다.
“엄마, 뭐 하는 거야?”
송화가 돌아보며 말했다.
“왜 벌써 일어나? 더 자. 한창 잠이 많을 때잖아.”
은조는 벌써 몇 가지 음식이 완성된 것을 보고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걸 엄마가 다 한 거야? 대체 몇 시에 일어난 거야?”
송화는 새벽마다 꽃도매시장에 나가 꽃을 사 왔던 터라 새벽에 잠이 오지 않았다.
은조가 잠이 든 것을 보고는 주방에 나와 사위를 위한 첫 아침 식사를 준비했다.
“강 서방 몇 시에 출근하니? 사위 첫 밥상 차려 주려다 보니까 엄마도 욕심이 나서 이것저것 하게 됐어.”
미역국에, 잡채에, 생선구이에, 갈비찜까지 아침 식사로 하기엔 과한 음식들이 차려졌다.
송화는 결혼하고 사위에게 밥 한번 못 차려 주었던 것이 미안했다.
사위를 위해 밥상 한번 차려주자 생각하고 시작했다.
그러다 보니 점점 스케일이 커졌다.
만약에 은조가 결혼할 사람을 인사시키려고 왔으면 어떤 음식을 해 주었을까? 생각하니 해 주고 싶은 음식이 떠올랐다.
그리고 그동안 은조의 생일을 못 챙겨 주었던 것이 생각나 미역국도 끓이고 은조가 좋아하던 생선도 굽게 됐다.
“사위 사랑은 장모라는데 그동안 못 주었던 사랑을 한 번에 주려니 일이 커져 버렸네.”
송화가 멋쩍은 듯이 웃었다.
“냉장고에 재료들이 많이 있어서 이것저것 했어.”
“이 많은 걸 언제 다 했어? 생일상 차린 것 같아.”
“그동안 네 생일 몇 년 동안 엄마가 못 챙겨 줬잖아. 그거 한 번에 챙겨 주려고 미역국도 끓인 거야.”
못 챙겨 준 생일상 한 번에 챙겨 주려고 미역국을 끓였다는 말에 은조가 울컥했다.
“잡채랑 갈비찜은 사위한테 장모가 해 주는 첫 음식이고.”
은조는 코끝이 빨개진 채로 엄마를 안았다.
“엄마, 아침부터 이렇게 감동 주기야?”
“감동은 무슨. 그동안 엄마 노릇 못 했던 거 미안해서 그런 거지. 엄마 죄책감 씻어내려고.”
송화는 은조를 안고 등을 쓸었다.
.
.
.
아침에 일어난 민후가 식탁에 차려진 음식을 보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민후 씨, 엄마가 사위한테 처음 차려 주는 밥상이라고 이렇게나 많이 했지 뭐예요?”
“장모님. 힘들게 아침부터 왜 이렇게 많이 하셨어요?”
“힘들지 않고 설레고 신났어. 처음 사위한테 내 손으로 지은 밥 차려 준다는 생각에 재미있었으니까 부담 갖지 말고 맛있게 먹어 주게.”
민후와 은조는 푸짐하게 차려진 식탁에 앉았다.
“많이 들게나. 은조도 많이 먹어.”
송화가 음식 그릇을 두 사람 앞으로 밀어 주었다.
“잘 먹겠습니다. 장모님 먼저 드세요.”
“그래. 나도 먹을게. 얼른 먹어.”
송화가 수저를 들자 민후와 은조가 음식들을 하나씩 입에 넣었다.
송화는 두 사람이 밥을 먹는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너무 맛있는데요? 이게 말로만 듣던 장모님 손맛이라는 거군요.”
민후는 맛있다며 평소보다 밥을 더 많이 먹었다.
엄마가 끓여 준 미역국을 후루룩 떠먹은 은조가 말했다.
“엄마가 만들어 준 집밥 11년 만에 먹는 것 같아. 너무 맛있어. 엄마.”
“그래. 많이 먹어.”
은조는 오랜만에 먹는 엄마 밥이 끊이지 않고 들어갔다.
송화는 자식이 밥 먹는 모습만 보아도 배가 부르다는 말처럼 은조와 민후가 맛있게 먹어 주는 것만으로도 흐뭇했다.
민후가 먼저 출근하고 은조도 출근 준비를 했다.
송화도 가게에 나가야 해서 은조와 함께 집을 나섰다.
“엄마 오늘도 우리 집에서 자.”
은조는 엄마와 밤늦게까지 서로 얼굴 보며 이야기를 나누었던 지난밤이 너무 행복했다.
매일 엄마랑 함께 자고 싶었다.
“그래도 돼? 강 서방이 서운해할 텐데.”
송화도 은조와 단 하루만 잤던 것이 아쉬웠다.
“내가 물어볼게. 분명 괜찮다고 할 거야.”
은조는 송화와 헤어지고 출근하면서 민후에게 전화를 걸었다.
[음. 출근하는 길이야? 장모님은?]
“엄마는 가게로 가셨어요. 민후 씨, 물어볼 게 있어서 전화했어요.”
[뭔데?]
“엄마 오늘도 우리 집에서 저랑 자고 가도 되죠?”
[그럼. 물론이지.]
은조는 들뜬 얼굴로 덧붙였다.
“계속 그렇게 해도 돼요? 한 달쯤?”
[응? 한 달?]
“엄마랑 같이 못 잔 지 10년도 넘었는데 하루 이틀로는 성에 안 차요.”
은조는 그동안 함께하지 못했던 시간을 보상받고 싶었다.
[음…… 물론 그건 좋은데…….]
민후가 말끝을 흐렸다.
[그럼 나는?]
“네?”
[난 언제 내 아내 안고 잘 수 있는데?]
“…….”
[나도 매일 밤 당신 안고 싶은데. 어제는 오랜만에 장모님하고 자고 싶을 테니까 참고 잤어. 오늘까지도 내가 참을 수 있는데…… 그 이상은 나도 안 되겠어.]
투정 부리듯이 말하는 민후 말에 은조가 웃었다.
[오늘 밤까지 장모님하고 자고, 내일이랑 모레는 나랑 자고. 그다음 날은 장모님하고 자. 아니면 월, 수, 금하고 화, 목, 토로 나눌까. 일요일은 당연히 나랑 자야 하고.]
민후의 말에 은조가 소리 내 웃었다.
“알았어요. 이제 엄마랑 잘 수 있는 날 많으니까. 오늘까지만 엄마랑 잘게요. 내일부터는 민후 씨랑 쭉 잘 거예요.”
[고맙네.]
은조와 민후는 행복하게 웃었다.
*
은조는 박물관으로 출근해 시은의 커피숍에 들렀다.
제주도 여행 때문에 며칠간 보지 못했던 탓도 있었지만, 며칠간 은조에게는 어마어마한 일이 일어났기 때문이었다.
민후를 잃을 뻔한 겪고 싶지 않았던 일도 겪었고 엄마를 다시 만난 감격스러운 일도 있었다.
시은에게 다가가 말했다.
“언니 왔다. 나 없는 동안 잘 지냈어?”
장난스러운 인사에도 시은이 이상하게 풀이 죽은 모습이었다.
“출근했네? 여행은 잘 다녀왔고?”
“완전 버라이어티했어.”
은조가 여행에서 있었던 일을 이야기하려고 말을 꺼냈다.
“좋은 소식과 나쁜 소식이 있는데 뭐부터 들을래?”
시은이 무미건조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나도 좋은 소식과 나쁜 소식이 있는데 나부터 얘기하면 안 될까?”
항상 밝은 시은의 표정이 심상치 않아 은조의 얼굴이 조금 굳어졌다.
무슨 일이 있는 게 분명해 보였다.
“무슨 일 있어?”
은조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좋은 소식, 나쁜 소식, 뭐부터 들을 거냐고.”
“좋은 거.”
시은이 단조로운 표정으로 말했다.
“관장님이 드디어 커피숍에 오셨었어. 2주 만에.”
“헉! 진짜?”
은조가 놀라 눈을 크게 떴다.
“그래서? 그동안 왜 안 오신 거래?”
시은이 굳은 표정으로 은조를 보았다.
은조는 뭔가 심상치 않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럼 너 그날 진짜 고백한 거였어?”
“응. 확실해.”
고백한 거면 두 사람의 관계에 뭔가 진전이 있어야 하는 거다.
그런데 시은의 표정을 보니 그렇게 좋은 결과 같지가 않았다.
시은이 퉁명스레 말을 이었다.
“나쁜 소식은.”
은조는 긴장한 얼굴로 시은의 말을 기다렸다.
표정이나 분위기로 보아 고백을 거절한 것임을 알 수 있었다.
“가게 비우래.”
“……?”
예상치 못한 말에 은조가 의아하게 쳐다보았다.
“재계약은 당연히 힘들고. 계약이 남았지만 좀 빨리 나가 달래.”
“뭐?”
은조가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고개를 기울이며 되물었다.
“나가 달라고?”
“응.”
“왜?”
“왜겠어? 고백받고는 나랑 얼굴 보기 힘들다는 거지. 같은 공간에조차 있기도 싫은가 봐.”
은조가 충격을 받은 듯 손으로 입가를 가렸다.
“그 정도로 내가 싫은가 보지.”
시은은 단조로운 목소리와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은조는 시은이 얼마나 상처받았을지 가늠할 수가 없었다.
아무렇지 않은 듯 덤덤하게 말하는 시은이 오히려 더 마음 아팠다.
“서, 설마. 그래서 그런 건 아닐 거야. 다른 이유가 있지 않을까?”
은조는 어떻게든 시은이 상처를 덜 받았으면 했다.
“다른 이유가 있었으면 그 이유를 내게 말했겠지. 어떤 이유도 말하지 않았어.”
시은이 한숨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서 빨리 꺼져 주려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