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2. 취중고백 (60/100)


62. 취중고백
2022.04.05.



16551895966808.png

“태교 여행?”

민후는 태교 여행이란 단어를 처음 들었다.

16551895966813.png

“임신하고 많이들 가거든요. 원래는 임신 우울증 때문에 힘든 임산부를 위해 힐링하기 위해 갔는데 요즘은 다들 가나 봐요. 예쁜 풍경 보면서 태교하라고. 뭐 여행 갈 명분 만든 것 같기도 하고. 훗.”

은조가 웃으며 말했다.

16551895966813.png

“걔랑은 가고 싶지 않아서 거절하고는 끊었어요.”

은조가 밥을 먹으며 민후의 표정을 살폈다.

나도 그런 거 가고 싶다고 말하고 싶은데 어디 민후가 좀 바쁜 사람인가.

입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16551895966808.png

“갈까? 우리도.”

민후는 은조가 여행을 가고 싶어 하는 눈치라 먼저 말을 꺼냈다.

16551895966813.png

“정말이요?”

밥을 먹던 은조가 고개를 들었다.

16551895966813.png

“정말 시간 낼 수 있어요? 바쁜데 나 때문에 억지로 그럴 필요는 없어요.”

16551895966808.png

“시간 낼 수 있어.”

은조의 입이 크게 벌어지며 웃었다.

16551895966813.png

“진짜 갈 수 있어요?”

어린아이처럼 좋아하는 얼굴로 재차 물었다.

16551895966808.png

“응.”

저렇게 좋아하는데 어떻게 시간을 안 내겠는가.

바쁘긴 하지만 아내가 여행가기를 원하면 무조건 맞춰주고 싶었다.

물론 민후도 아내와 단둘이 여행 가고 싶었다.

한 번도 여행 간 적이 없으니.

16551895966808.png

“어디로 가고 싶은데?”

은조는 하와이 같은 휴양지가 떠올랐으나 바쁜 그에게 부담을 주는 것 같아 차마 그 얘기는 할 수 없었다.

해외로 가려면 은조도 그렇고 민후도 최소한 5, 6일은 휴가를 내야 한다.

은조는 휴일 껴서 연차를 쓰면 가능하겠지만 민후에게 그렇게까지 요구하기가 미안했다.

16551895966813.png

“어디든 좋아요. 국내 여행도 좋고요. 제주도 갈까요?”

제주도 정도면 그도 휴일을 이용해서 충분히 다녀올 수 있을 것이다.

16551895966808.png

“좋아. 제주도 여행 가자.”

16551895966813.png

“와, 선물 받은 기분이에요.”

은조는 손으로 얼굴을 감싸며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16551895966808.png

“우리 결혼식 하고 신혼여행도 못 갔잖아. 나도 단둘이 여행 가고 싶었어.”

민후가 뭔가 더 생각난 듯 말을 이었다.

16551895966808.png

“아, 그러고 보니 단둘이 아니네? 셋이서 가는 여행이네.”

16551895966813.png

“셋? 아.”

은조가 웃으며 배를 쓰다듬었다.

16551895966813.png

“그러네요.”

16551895966808.png

“첫 가족여행이기도 하네.”

첫 가족여행이라고 하니 뭔가 마음이 뭉클해졌다.

16551895966808.png

“이번엔 가까운 곳으로 가고 다음번엔 좀 멀리, 더 근사한 곳으로 가보자.”

민후는 은조의 마음을 알아차렸는지 다음엔 먼 곳으로 가자고 했다.

그렇게 말은 했지만 두 사람 다 과연 다음번 여행을 갈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하지만 누구도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다.

지금은 행복한 기분만을 즐기고 싶었다.

16551895966808.png

“항공권이랑 호텔 등 여행 준비는 문 실장한테 부탁할 테니까 당신은 신경 안 써도 돼.”

16551895966813.png

“네.”

은조는 얼마나 근사하고 멋진 여행이 될까 기대감에 부풀었다.

16551895966808.png

“밥 먹고 내가 당신한테 해줄 게 있는데.”

민후의 말에 은조가 시선을 들고 물었다.

16551895966813.png

“뭔데요?”

민후는 어딘지 모르게 쑥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16551895966808.png

“일단 나중에 보면 돼.”

민후는 말해주지 않고 궁금증을 유발했다.

은조는 민후가 준비한 게 과연 뭘까 기대하며 밥을 먹었다.

밥을 먹고 나서 민후가 방으로 오라고 했다.

16551895966813.png

“저한테 해줄 게 뭔데요?”

16551895966808.png

“침대에 옷 벗고 누워봐.”

16551895966813.png

“네?”

해줄 게 있다더니 옷을 벗으라고?

옷 벗고 침대에 누우라니 은조는 한 가지밖에 생각이 안 났다.

16551895966813.png

“해준다는 게 그거……예요?”

16551895966808.png

“오해하지 마. 배 마사지해주려고.”

민후가 마시지용 크림을 손에 들고 말했다.

16551895966808.png

“요즘 임신한 아내를 위해 남편이 해야 할 일에 관해 공부 중이란 말이야. 배 뭉침과 튼 살 방지를 위해 배 마사지를 해주면 좋다더라고.”

은조가 신기한 얼굴로 다가갔다.

16551895966813.png

“배 마사지를 해준다고요?”

16551895966808.png

“특별히 강사를 초청해서 1대1로 배웠지.”

16551895966813.png

“진짜요?”

16551895966808.png

“윗옷만 벗고 누워봐.”

임산부 아내를 위해 배 마사지까지 배웠다는 남편이 고맙고 감격스러웠다.

은조가 윗옷을 벗고 침대에 누우니 아랫배가 제법 볼록하게 나왔다.

민후가 귀엽게 볼록 나온 배를 쓰다듬었다.

16551895966808.png

“리은아. 아빠가 리은이 마사지해줄 거야.”

은조가 행복하게 웃고 민후가 배에 크림을 짰다.

바로 배에 짜면 차가울까 봐 따뜻하게 핫팩에 넣어두기까지 했다.

민후가 크림을 이용해 부드럽게 배를 마사지했다.

16551895966808.png

“이렇게 마사지랑 함께 태담을 나누면서 아기와 교감하면 좋대.”

민후가 배 가까이에 대고 말했다.

16551895966808.png

“리은아, 요즘 그렇게 먹성이 좋아졌다고? 뭐든 많이 먹고 무럭무럭 자라라.”

민후는 손으로 부드럽게 배를 마사지하며 아기에게 여러 가지 얘기를 했다.

곧 첫 가족여행을 떠나자는 말도 했다.

16551895966808.png

“리은아, 바닷가에 가서 맛있는 것도 많이 먹자.”

은조는 부드럽게 마사지해주는 남편의 손길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

눈을 감고 남편이 아기에게 하는 태담을 가만히 들었다.

행복해서 가슴이 벅차올랐다.

너무 행복한데 불안한 마음이 동시에 들었다.

이 행복감이 길지 않다는 걸 알기에 그랬다.

배를 부드럽게 마사지하던 민후가 크림을 바른 손으로 다른 부위도 마사지하기 시작했다.

은조가 간지럽다며 웃었다.

16551895966813.png

“거긴 간지러워요. 하하.”

간지럽다며 웃으니 민후는 더 장난이 치고 싶었다.

16551895966808.png

“여기? 여기가 간지럽다고?”

16551895966813.png

“아하하. 그만.”

은조가 자지러질 듯이 웃자 민후가 옆에 같이 누워 은조를 안았다.

곧바로 입술을 물며 그가 키스했다.

은조의 어깨와 등을 연신 쓰다듬는 그의 손은 아직 크림으로 미끄러웠다.

입술을 벌려 숨결을 휘감고 그의 손이 미끄러지듯이 은조의 온몸을 쓰다듬었다.

미끄러운 손이 온몸을 마사지하듯 쓰다듬자 은조는 몸이 점점 달아올랐다.

16551895966813.png

“배 마사지는 좀 위험한 것 같아요.”

그와 키스하며 은조가 말했다.

16551895966808.png

“왜.”

16551895966813.png

“자꾸만 야한 생각만 들어요.”

은조의 입술을 무는 민후가 훗 웃었다.

16551895966808.png

“그걸 노린 거야.”

키스하면서도 민후의 손이 나머지 옷을 벗겨냈다.
 

16551896080136.jpg

 

*

근무하다 출출해진 은조는 1층 커피숍으로 내려갔다.

요즘 식욕이 왕성해져 간식을 먹지 않으면 견딜 수가 없었다.

시은이 각종 케잌, 빵과 생과일주스를 들고 왔다.

정신없이 먹는데 시은이 배 쪽을 유심히 보았다.

1655189608014.png

“배가 많이 나온 것 같다?”

16551895966813.png

“응. 좀 나왔어.”

1655189608014.png

“배 만져봐도 돼?”

시은이 아랫배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

1655189608014.png

“네가 엄마가 된다는 게 실감이 안 나.”

16551895966813.png

“나도 사실 실감 안 나.”

1655189608014.png

“진짜 신기하다. 저번엔 점처럼 생겼었는데 언제 이렇게 사람 모양을 하고 있지?”

시은이 초음파 태아 사진을 보며 신기해했다.

16551895966813.png

“넌 어떻게 됐어? 좀 진전이 있는 거야?”

은조가 묻자 시은이 고개를 들었다.

시은이 새로 부임한 관장님을 짝사랑하는 걸 알고 있어 넌지시 물었다.

시은이 어깨를 축 늘어트리며 대답했다.

1655189608014.png

“아무래도 끝난 거 같아.”

16551895966813.png

“응? 왜?”

1655189608014.png

“내가 그날 실수했나 봐. 그날 이후로 커피숍에 아예 안 오셔.”

16551895966813.png

“며칠 전에 술 먹고 전화했다는 날?”

1655189608014.png

“전화해서 뭐라고 했는지 하나도 기억이 안 난다고 했었잖아.”

16551895966813.png

“응.”

1655189608014.png

“그날 제대로 진상을 부렸나 봐.”

16551895966813.png

“진짜?”

1655189608014.png

“그러지 않고는 아예 안 오실 수가 있니?”

시은이 울상을 하더니 엎드렸다.

1655189608014.png

“힝! 대체 그날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고.”

16551895966813.png

“전화해서 물어보지 그랬어? 내가 어제 뭐라고 했냐고.”

시은이 벌떡 고개를 들더니 말했다.

1655189608014.png

“그걸 어떻게 물어! 아침에 일어나 통화목록에서 관장님 이름이 세 개나 찍혀있는 거 보고는 얼마나 놀랐는데! 그것도 새벽 3시 반에! 내가 전화를 계속했더라고. 진상처럼. 어휴!”

양손으로 머리를 쥐어뜯듯이 잡고 말했다.

1655189608014.png

“제일 걱정되는 게 뭐냐면 내가 취해서 고백했을까 봐 그게 제일 겁나.”

시은은 지금 생각해도 창피해 얼굴이 화끈거렸다.

1655189608014.png

“진짜 내가 고백해서 부담되어서 여기 발걸음도 안 하시는 걸까?”

시은이 걱정 가득한 얼굴로 물었다.

1655189608014.png

“취해서 전화 건 거 알고는 다음 날 커피 사러 오시면 뭔가 한마디 하겠지. 그때 죄송하다고 해야겠다, 생각하고 있는데 그 이후로 발길을 안 하시는 게 너무 불안해.”

16551895966813.png

“아예 아무것도 기억이 안 나?”

1655189608014.png

“엉. 완전! 지우개로 싹 지운 것 같아.”

 

*

며칠 전.

시은은 친구의 생일을 맞아 늦은 밤까지 술을 마셨다.

술을 마시면 감성이 더 풍부해져 짝사랑의 외로움이 더 짙어지고는 했다.

술 한잔은 보고 싶은 얼굴을 데려왔고 두 잔은 그 얼굴을 더 선명하게 했다.

시은의 짝사랑은 매일 한두 번 커피숍에 커피 사러 오는 관장님을 보는 그 순간이 다였다.

주문하고 계산하며 짧게 나누는 대화만으로 만족해야 했다

오늘은 바빠서 그런지 그나마도 커피숍에 오시지 않아 시은은 아쉬움이 남았다.

택시를 타고 귀가하면서 핸드폰 화면에 저장한 관장님 사진을 열어서 보았다.

관장으로 부임하는 내용의 기사에 났던 명함사진이었다.

단지 사진일 뿐인데도 심장이 쿵쿵 뛰었다.

이렇게 사진을 핸드폰에 가지고 다닌다는 사실을 알면 아마도 기절초풍하겠지?

언젠가 은조와 함께 셋이서 점심을 먹고 난 뒤에는 개인적인 만남이 전혀 없었다.

관장에게 자신은 한낱 관내 편의시설 운영자일 뿐일 것이다.

혼자 사는 오피스텔에 도착해 가방을 툭 던지고 소파에 털썩 누웠다.

천장이 빙그르르 도는 것 같았다.

마치 블랙홀로 빨려 들어가는 것처럼.

집에 오니 긴장감이 풀려 그런지 취기가 더 확 오르는 느낌이었다.

대체 무슨 생각인지 알 수 없지만 시은은 핸드폰을 들었다.

망설임도 없이 관장님 번호를 띄워놓고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이 길게 이어지는데도 전화를 받지 않았다.

지금이 새벽 3시가 넘었다는 생각을 하지도 못했다.

옆으로 누워 전화기를 귀 위에 얹어두고 받을 때까지 기다렸다.

세 번째 시도에서 전화를 받았다.

16551896162059.png

[여보세요.]

1655189608014.png

“헉.”

눈이 번쩍 뜨였다.

늦은 밤 전화기에서 흘러나오는 관장님 목소리는 더 감미로웠다.

1655189608014.png

“관장니임.”

16551896162059.png

[누구……?]

아, 목소리…… 진짜 꿀이다. 꿀.

그런데 누구냐고? 내 전화번호 저장도 안 되어 있나 봐.

1655189608014.png

“오늘은 왜 커피 사러 안 오셨어요?”

16551896162059.png

[…….]

1655189608014.png

“얼마나 기다렸는데에.”

16551896162059.png

[…….]

아무 말도 없던 관장이 말했다.

16551896162059.png

[커피숍 사장님이세요?]

1655189608014.png

“네.”

16551896162059.png

[이 시간에 무슨 일로 전화하셨습니까?]

1655189608014.png

“보고 싶어서요.”

16551896162059.png

[…….]

1655189608014.png

“너무 보고 싶어서요.”

16551896162059.png

[…….]

1655189608014.png

“목소리 들으니까 너무 좋네요.”

16551896162059.png

[…….]

시은은 저쪽에서 아무런 말이 없어 전화를 끊었나, 싶었다.

1655189608014.png

“여보세요? 관장님?”

16551896162059.png

[……네.]

1655189608014.png

“왜 말씀이 없으세요?”

16551896162059.png

[좀 취하신 것 같은데. 지금 좀 많이 늦었습니다.]

시은이 벽에 걸린 시계를 그제야 보았다.

1655189608014.png

“아아, 참. 많이 늦었죠? 죄송해요.”

16551896162059.png

[네. 그럼 쉬세요.]

관장이 전화를 끊으려고 하자 시은은 지금이 기회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아니면 죽을 때까지 고백은 못 할 것 같았다.

1655189608014.png

“관장님!”

16551896162059.png

[…….]

1655189608014.png

“좋아해요.”

시은은 두 손으로 전화기를 붙들고 몇 달 동안 속앓이했던 것을 토해냈다.

1655189608014.png

“저 관장님 좋아해요. 매일 관장님이 커피 사러 오시는 그 시간만 기다려요. 관장님이 어제 하늘색 셔츠 입으셨던 것도, 그제는 줄무늬 셔츠 입으셨던 것도 다 기억해요. 제 레이더는 관장님만 향하고 있으니까요.”

16551896162059.png

[…….]

저쪽에선 아무 대답이 없었다.

설마 졸고 있는 건 아니겠지?

시은이 귀에서 핸드폰을 떼어내고 쳐다보았다.

1655189608014.png

“그럼 밤늦게 죄송했습니다. 안녕히 주무세요.”

시은은 전화를 끊었다.

그래도 속말을 다 꺼내놓으니 뭔가 후련했다.

조금 전까지 뭔가 갑갑했던 마음이 시원해져 시은은 그대로 대자로 뻗어 잠이 들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