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 행복한 냄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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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 행복한 냄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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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 행복한 냄새
2022.04.02.
“태교 여행?”
[응. 임신하면 태교 여행 많이 가잖아. 좋은 거 보면서 힐링하고.]
은조는 내키지 않아서 거절했다.
“직장인이 여행 갈 시간을 어떻게 내니? 내가 너처럼 지금 바빠. 끊어.”
전화를 끊은 은조가 입술을 삐죽이며 혼잣말했다.
“내가 태교 여행을 너랑 왜 가? 그게 태교에 도움이 될 거로 생각해?”
다시 업무를 보려고 모니터를 바라보던 은조가 중얼거렸다.
“태교 여행이라…….”
SNS를 보다가 휴양지 사진에 태교 여행 해시태그가 붙어 있는 걸 본 적이 있다.
곧바로 태교 여행 해시태그로 검색해보았다.
대부분 남편과 둘이서 간 여행이었다.
“그럼, 태교 여행을 사랑하는 남편이랑 가야지 행복감에 태교가 되지.”
다른 사람들의 태교 여행 사진들을 넘겨 보며 말했다.
“싫은 사람이랑 가는 게 태교가 되겠냐고.”
은조는 사진들을 보다 보니 남편과 좋은 곳으로 여행을 가보고 싶었다.
“엄청 바쁜 사람인데 그런 여유가 없겠지.”
매일 스케줄이 꽉 차 있는 대기업 임원이 한가하게 여행이나 갈 시간은 없을 것이다.
민후는 일찍 퇴근하는 날에도 보통 집으로 일거리를 들고 오는 편이었다.
아내와 시간을 갖고 싶어 일찍 퇴근해 함께 저녁 식사를 하고 그는 항상 늦은 밤까지 서재에서 업무를 보았다.
그러고 보니 한 번도 같이 여행을 가본 적이 없었다.
신혼여행도 가지 않았으니.
은조가 다른 사람들의 행복한 사진들을 부러운 듯이 보았다.
“나도 태교 여행 가고 싶다.”
*
“어머, 전무님 일찍 퇴근하셨네요.”
다른 날보다 민후가 일찍 퇴근해 집으로 왔다.
“아직 사모님은 안 오셨어요.”
“네, 압니다.”
민후가 드레스룸으로 들어가고 도우미는 저녁준비를 위해 다시 주방으로 갔다.
민후가 평소보다 일찍 퇴근해 도우미는 약간 허둥댔다.
그러다 가슴에 손을 얹고 인상을 썼다.
도우미는 평소 부정맥이 있는데 요 며칠 더 심해진 느낌이었다.
심장이 빨리 뛰면서 약간의 가슴 통증이 느껴졌다.
약도 꾸준히 먹고 있는데 왜 갑자기 안 좋아진 건지 도우미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옷을 갈아입은 민후가 주방으로 들어왔다.
주방에 들어온 민후가 물을 마시거나 음료를 꺼내서 가져가는 게 아니라 뒤에 서성이고 있었다.
“뭐 필요한 거 있으세요?”
“아닙니다.”
“시장하시죠? 금방 저녁상 차릴게요.”
“아주머니.”
“네.”
도우미가 분주하게 고기를 볶으며 돌아보았다.
“부탁드릴 것이 있습니다.”
“네. 말씀하세요.”
“미역국 끓이는 거 어렵습니까?”
“미역국이요? 미역국 드시고 싶으세요?”
도우미는 미역국이 먹고 싶어서 말을 꺼내나 싶었다.
“아뇨. 그게 아니고 좀 배워보려고요.”
“……예?”
도우미가 요리하던 것을 멈추고 뒤로 돌았다.
“아내가 출산하면 미역국을 먹어야 하지 않습니까?”
“그렇죠.”
“제가 아내에게 직접 끓여주고 싶어서요.”
민후는 요즘 임신한 아내를 위해 남편이 준비해야 하는 것에 관한 책을 열심히 보고 있었다.
책에서 출산한 아내를 위해 남편이 미역국 정도는 끓일 줄 알아야 한다고 쓰여 있었다.
자신이 아니어도 도우미가 잘 끓여줄 것을 알고 있지만, 왠지 직접 끓여주고 싶었다.
출산의 고통을 참아낸 아내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고 싶었다.
출산할 때는 자신이 도와줄 수 있는 게 없으니 출산 후 먹을 미역국이라도 끓여 주고 싶었다.
“아. 산후에 드실 미역국이요.”
도우미가 활짝 웃었다.
“어쩜 전무님 너무 자상하세요.”
민후의 집에서 몇 년간 일했지만 무뚝뚝하기만 하던 사람이 이렇게 아내에게 지극정성이 될 줄은 몰랐다.
“미역국, 하나도 안 어려워요. 제가 알려드릴게요.”
도우미가 장을 열어 마른미역을 꺼냈다.
“일단 재료는요. 미역이 기본으로 필요하고 기호에 따라 소고기미역국, 황태 미역국, 전복 미역국, 성게 미역국, 다양하게 끓일 수 있어요.”
“미역국에 뭐가 들어가냐에 따라 이름이 달라지는군요.”
“그렇죠. 지금은 재료가 소고기밖에 없어서 소고기미역국으로 할게요. 사모님이 소고기미역국 잘 드세요.”
“네.”
“미역은 일단 물에 불려두세요. 20분 정도 불려주면 돼요.”
도우미가 큰 볼에 미역을 불리고 냉장고를 열었다.
“소고기는 국거리용으로 하셔야 해요. 양지 부위를 많이 써요.”
민후에게 익숙한 소고기는 스테이크용으로 구워서 먹는 것이 대부분이어서 잘게 자른 소고기는 처음 보았다.
“고기는 키친타올로 눌러서 핏물을 한번 빼주시면 좋아요.”
민후의 표정이 조금 굳어졌다.
하나도 안 어렵다더니 뭔가 복잡했다.
메모할 걸 그랬나? 아직 요리는 시작도 하지 않았는데.
도우미는 민후가 보는 앞에서 불린 미역을 찬물에 여러 번 헹궈 씻고 고기와 미역을 참기름에 볶았다.
고소한 냄새가 진동했다.
“이렇게 볶다가 찬물을 부어서 끓여주시면 돼요. 쉽죠?”
볼 때는 쉬웠는데 직접 해보면 다 기억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아, 참. 간은 국간장으로 하셔야 해요. 이게 진간장, 이게 국간장인데 헷갈리지 마시고 이거로요.”
도우미가 간장병을 들어 보이며 설명했는데 민후로서는 매우 혼란스러웠다.
간장이 종류가 여러 개인 것도 처음 알았다.
‘미역국 끓이기 쉽다더니 이렇게 어려울 줄이야.’
도우미는 숙련되었으니 쉬울지 몰라도 초보인 민후에게는 재료준비부터 하나하나 쉬워 보이지 않았다.
“제가 나중에 연습 삼아 한번 해볼게요.”
“네. 하기 어렵지 않을 거예요. 아!”
도우미가 돌아서는데 갑자기 가슴에 손을 얹고 고통스러워했다.
“아주머니. 왜 그러세요?”
민후가 놀라 도우미를 부축했다.
“어디 불편하세요?”
도우미가 심장 쪽 가슴을 움켜쥐듯 쥐고 인상을 썼다.
“괜찮아요. 제가 부정맥이 좀 있어서요.”
“구급차 부를까요?”
도우미가 손을 내저었다.
“아뇨. 이제 좀 괜찮아졌어요.”
도우미가 허리를 펴고는 말했다.
“가끔 심장이 두근대고 아플 때가 있어요. 다 나이 들어 그렇죠. 뭐.”
“그거 협심증 증상 아닙니까?”
“병원 다니고 있어요. 약도 먹고요.”
도우미가 주방 쪽을 보면서 말했다.
“식사 준비는 거의 했긴 한데 그만 퇴근해도 될까요?”
“그럼요. 병원은 안 가셔도 되겠습니까?”
“네. 집에 가서 쉬면 괜찮을 거예요.”
도우미가 앞치마를 벗고 퇴근 준비를 했다.
“아주머니 잠시만요.”
민후가 핸드폰을 들며 말했다.
손을 들어 도우미에게 잠시 기다리라는 손짓을 했다.
“김 기사. 아직 멀리 안 갔죠?”
민후는 기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미안하지만 다시 돌아와서 도우미 아주머니 집까지 태워다 드리세요.”
“아유, 아니에요. 전무님.”
도우미는 통화하는 민후 앞에서 손을 내저었다.
“네. 도착하면 전화해요.”
전화를 끊자마자 도우미가 말했다.
“전무님. 저 요 앞에서 버스 타면 돼요. 안 갈아타고 바로 가거든요.”
“몸도 안 좋으신데 제 차 타고 가세요. 10분이면 온답니다.”
“안 그러셔도 되는데…….”
도우미는 미안하면서도 고마운 표정으로 민후를 보며 웃었다.
잠시 후 은조가 퇴근해 집에 들어왔다.
현관 도어락 소리에 도우미가 말했다.
“사모님 오셨나 봐요.”
민후가 현관 쪽으로 나갔다.
먼저 들어온 민후를 보자 은조가 반갑게 웃었다.
“오늘 일찍 왔네요.”
“응. 어서 와.”
은조가 앞치마를 벗고 가방을 든 도우미를 보며 말했다.
“퇴근하시는 중이세요?”
민후가 도우미 대신 대답했다.
“음. 아주머니가 몸이 안 좋으신 것 같아서 김 기사한테 집까지 태워다 드리라고 부탁했어. 김 기사 기다리는 중이야.”
“어머, 그러세요? 많이 안 좋으세요?”
은조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아뇨. 이제 좀 괜찮아졌어요. 버스 타고 가도 되는데 전무님께서 저한테 이렇게 배려를 해주시네요.”
“버스 타지 마시고 저희 차 타고 가세요. 많이 안 좋으시면 내일까지 쉬셔도 돼요.”
“아니에요. 사모님. 그 정도로 아픈 거 아니에요.”
“그렇게 하세요. 내일 쉬시고 병원에도 다녀오시고요.”
도우미는 마음씨 따뜻한 젊은 부부가 고마웠다.
“사모님, 아직 상은 못 차렸는데 제육볶음 볶은 것도 있고요. 국도 끓여놓았어요. 두 분 저녁 맛있게 드세요.”
“네. 수고하셨어요. 저희가 차려 먹으면 돼요.”
곧이어 기사가 도착했다는 전화를 받고 도우미가 집을 나섰다.
도우미가 나가고 은조가 신발을 벗고 들어오며 말했다.
“아주머니 괜찮으시겠죠?”
“그래야지.”
은조가 코를 킁킁대며 말했다.
“근데 집에 맛있는 냄새가 나네요. 고소한 냄새.”
아까 참기름으로 미역을 볶았더니 고소한 냄새가 집안에 퍼져 있었다.
“무슨 냄새? 난 모르겠는데? 이런 걸 신혼부부 깨 볶는 냄새라고 하나? 행복한 냄새.”
민후가 능청스레 말하자 은조가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그런가 봐요. 행복한 냄새.”
민후가 싱긋 웃으며 은조를 향해 팔을 벌렸다.
은조가 민후에게 가서 안기며 말했다.
“퇴근하고 집에 왔는데 민후 씨가 먼저 와서 반겨주니 너무 좋다.”
“그래? 가끔 일찍 들어와서 반겨줘야겠네. 주인 보고 꼬리 흔드는 강아지처럼.”
“오늘 하루 잘 보냈어? 우리 리은이도 잘 있었어?”
“네. 리은이도 아무 탈 없이 잘 지냈어요. 리은이 지금 너무 배고프대요.”
임신 15주가 넘어가면서 은조는 식욕이 왕성해졌다.
“그래? 우리 아가 배고프면 안 되지. 얼른 씻고 나와. 밥 먹자. 내가 상 차릴게.”
“민후 씨 밥상 차려본 적 있어요? 할 수 있겠어요?”
“처음이지만 우리 아기랑 아내가 먹을 밥은 즐겁게 차릴 수 있을 것 같아.”
“그럼 부탁해요.”
은조가 씻는 동안 민후는 태어나 처음으로 밥상을 차려보았다.
주걱으로 밥을 퍼서 그릇에 담고 냉장고에서 반찬도 꺼냈다.
국도 푸고 고기볶음도 접시에 담아서 냈다.
그릇이나 도구들을 찾느라 여러 곳을 뒤져야 했지만 나름 잘 차려졌다.
씻고 나온 은조가 주방에서 상을 차리는 민후를 보며 웃었다.
숟가락 젓가락까지 가지런하게 놓은 모습이 초보 같지가 않았다.
민후에게서 저런 모습을 보게 될 줄 몰랐다.
“처음인데 엄청나게 잘하는데요? 민후 씨 대체 못 하는 게 뭐예요?”
“나야 안 해서 그렇지 하면 또 뭐든 잘하지.”
거들먹거려도 얄밉지가 않았다.
은조는 처음으로 남편이 차린 밥상에 마주 앉아 밥을 먹었다.
“오늘따라 더 맛있는 거 같아요. 엄청나게 배고팠는데 너무 맛있어요.”
숟가락으로 밥을 듬뿍 떠서 복스럽게 먹는 은조를 보며 민후는 흐뭇하게 웃었다.
“많이 먹어. 일하다가 중간에 간식도 많이 먹어야겠네.”
“안 그래도 오후 3시만 되면 1층 커피숍 가서 케이크랑 빵들을 제가 다 털잖아요.”
민후는 흐뭇하게 웃으며 은조를 바라보았다.
소소한 일상 얘기를 나누며 식사하는 시간이 너무나 소중했다.
은조는 오늘 예지에게서 태교 여행 가자는 말이 생각 났다.
“참, 오늘 형님한테서 전화가 왔었어요.”
“오늘은 또 왜?”
얼마 전 집에 찾아와 용서를 구했다는 얘기를 했다.
그것도 자발적인 것이 아니라 아버님이 시켜서 온 거라고.
너무 미워서 반말로 말했다고 하니 잘했다며 그가 웃었다.
“화해의 의미로 자기랑 태교 여행을 가자고 그러는 거예요.”
“태교 여행?”
민후는 생소한 단어를 들은 듯한 표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