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옷 갈아입는 거 도와줄게2021.11.16.
“갈아입을 옷이 어떤 거야? 이거?”
민후가 갈아입을 잠옷으로 어제 입었던 슬립을 들어서 보였다. 슬립은 어제 유혹의 목적으로 입었는데 오늘 또 입을 생각은 없었다. 은조가 고개를 저었다.
“아뇨, 그거 말고 저거 입을래요.”
평소에 입던 잠옷을 가리켰다.
“불 끌게.”
잠옷을 가져온 민후가 침실의 불을 껐다. 순식간에 어둠으로 공간이 꽉 채워졌다. 어둠에 익숙해지자 어른어른 서로의 실루엣이 조금 보였다. 민후가 다가와 말했다.
“뒤에 지퍼 내릴게.”
어딘지 모르게 비장한 말투였다. 어둠 속에서 민후의 손이 은조의 몸을 조금 더듬었다. 지퍼를 찾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행동이었다. 지퍼를 찾던 그의 손이 은조의 목덜미를 스쳤다. 순간 은조는 이상한 기분에 어깨를 흠칫 떨었다. 지퍼를 찾아낸 그의 손이 원피스 지퍼를 내렸다. 지이이이익. 사라락.
어둡고 조용한 공간이라 그런지 옷 벗는 소리가 평소보다 크게 들렸다. 은조도 민후도 왠지 모를 긴장감에 휩싸였다. 원피스 상의가 내려가고 은조가 팔을 하나씩 뺐다. 그 과정에서 팔이 그의 손에 닿았다. 어두워서 안 보여 그런지 그와 더 많이 닿는 느낌이다. 은조는 자신의 얼굴이 새빨개졌을 거라 예상했다. 어두워 그가 못 보는 것이 다행이라 여겼다. 옷이 허리까지 내려갔을 때는 허리에 그의 손이 닿아 온몸이 바짝 긴장되기도 했다. 시각이 차단되어 그런지 살짝만 닿아도 더 예민하게 느껴졌다. 은조가 긴장한 것이 느껴진 민후가 말했다.
“내 어깨 잡아.”
원피스를 완전히 벗겨내려면 은조가 민후를 잡고 의지해야 했다. 그 순간. 민후의 얼굴이 은조의 가슴 근처에 부딪히며 닿았다.
“……!!”
둘 다 움찔하며 놀랐다. 원피스를 벗겨내려고 민후가 자세를 낮추고 있었기 때문이다. 얼굴의 열이 전신으로 퍼져 은조는 온몸이 빨개지는 느낌이 들었다. 심장은 금방이라도 터질 것처럼 맹렬하게 뛰었다. 어색하게 흐르는 침묵으로 제 심장 소리가 그에게 들릴 것만 같았다. 이제 겨우 허리까지만 벗었는데 타이트한 골반을 지나려면 얼마나 그의 손이 몸에 닿아야 할까, 생각하니 아찔하면서도 두근거렸다. 예상한 대로 원피스가 골반을 내려올 때는 머리부터 발가락 끝까지 전율이 일었다. 그의 손이 온몸을 훑어내리는 것만 같은 착각이 일었다. 은조는 너무 긴장되어 숨도 제대로 쉴 수 없었다.
“다리 조심해서 들어봐.”
다친 다리를 조심스레 빼내자 옷이 완전히 벗겨졌다. 은조는 속옷만 입은 차림이 되었다. 어두워서 보이지는 않지만 너무 부끄러웠다. 민후와 같은 공간에 벗은 채로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 민망했다. 이어서 민후가 잠옷을 입혀주었다. 잠옷을 입히면서도 그의 손이 은조의 몸 곳곳에 스쳤다. 그의 앞에서 옷을 벗는 게 부끄러워 불을 껐는데 그게 오히려 역효과였다. 보이지 않으니 그가 몸을 더듬게 된 것이다. 그와 처음 같이 잘 때보다 훨씬 긴장되었다. 민후가 침실의 불을 다시 켰다. 밝아지자 드러난 은조의 얼굴은 발갛게 변해 있었다. 민후가 욕실을 한 번 보더니 말했다.
“씻는 것도 도와줘야겠네.”
“네?”
씨, 씻겨준다고? 은조가 놀라 쳐다보자 민후가 말했다.
“샤워는 힘들고 세수만 해야겠지? 세수시켜줄게.”
세수시켜준다는 말에 은조가 안도하는 표정을 짓자 민후가 웃었다.
“왜, 목욕시켜준다는 줄 알고 놀랐어?”
은조가 민망해하며 시선을 돌렸다.
“발에 물 닿지 않게 샤워하는 방법이 있을 거야. 도와주고 싶지만, 아직 그것까지는 우리가 좀 힘들지?”
다른 부부 같으면 같이 샤워하면서 도와주기도 하겠지만 아직은 내외하는 부부라 그건 불가능하다.
“도우미 아주머니께 부탁드려봐.”
“네. 그럴게요.”
민후가 가만히 은조를 보다가 덧붙여 말했다.
“당신만 괜찮다고 하면 난 도와줄 수 있어.”
은조가 놀람을 감추지 못하고 쳐다보았다. ……예?
“우리 곧 아기도 가질 거잖아. 필요하면 얘기해.”
그가 동그랗게 눈을 뜨고 바라보는 은조를 무심하게 쳐다보다가 방을 나갔다. 민후는 태연한 척 도와주었지만 순간순간 열이 오르고 긴장되었다. 스치듯이 손에 닿은 아내의 살결이 너무 부드러워서 제 속의 짐승이 깨어날 것만 같았다. 오늘 밤 아내와 첫날밤을 치르려고 했는데 발을 다치는 바람에 또 미루어야 했다. 인내하기 힘든 긴 밤이 될 것 같았다. * 다음날 회사로 출근한 민후는 임원 엘리베이터에서 기현과 마주쳤다. 엘리베이터에 발을 들이던 기현이 민후를 보고는 움찔했다.
‘아무래도 형님이 민 거 같아요. 분명 미는 힘을 느꼈어요. 잡아주려는 손이 아니었어요.’
민후는 어제 은조가 했던 말이 떠올라 기현을 향한 눈에 힘이 들어갔다. 민후의 옆에 나란히 선 기현이 말했다.
“사람 보면 인사 좀 하지.”
민후는 여전히 굳은 얼굴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기현이 인상을 쓰며 민후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강민후 전무님! 전무님은 계열사 사장이 X같이 보입니까? 다른 계열사 사장한테도 너 이러냐?”
기현이 빈정대듯 말하자 민후가 고개를 살짝 틀었다.
“당연히 다른 계열사 사장님들한테는 안 그러죠.”
띵, 엘리베이터가 도착하고 알림음을 냈다. 민후가 기현을 향해 몸을 돌리고 말을 이었다.
“그 사장님들은 내 아내를 위험에 빠트리지 않으니까.”
순간 기현의 표정이 서늘하게 굳었다. 기현은 어제 예지가 은조를 밀었다는 걸 눈치채고 있었다. 알고 있지만 모른 척 태연하게 대꾸했다.
“뭐? 그게 무슨 말이야!”
민후가 기현에게 얼굴을 가까이하고 낮게 말했다.
“궁금하면 형수한테 가서 물어봐.”
기현은 순간 등골이 서늘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걸어가는 민후의 뒷모습을 보던 기현은 입술을 짓이겼다. 뭐야, 다 알고 있는 거야? 기현이 인상을 일그러트리며 혼잣말했다.
“그런 짓을 하더라도 티 안 나게 해야지. 멍청하게. 쯧.”
기현은 치밀하지 못한 예지를 탓하며 혀를 찼다. . . . 뚜벅뚜벅 걷던 민후가 걸음을 멈추고 뒤를 힐끔 보았다. 다시 생각해도 화가 치밀었다. 어떻게 임신부를 일부러 밀 생각을 하는지. 너무 끔찍해 소름이 돋았다.
‘두고 봐, 언젠가 두 배로 갚아줄 테니까.’
막 사무실로 들어서는데 민후의 핸드폰이 울렸다. 화면에는 윤 회장이라고 떴다. 지난번 윤 회장과의 통화에서 임신이 계약위반이라며 불편한 심기를 드러낸 것을 떠올렸다. 또 무슨 얘기를 하려고 아침부터 전화인가, 생각하며 전화를 받았다.
“안녕하십니까? 회장님.”
속내는 숨긴 채 겉으로는 반갑게 인사했다.
[안녕할 리가 있겠나.]
까칠한 답변이 돌아왔다.
[자네. ○○빌딩 매입했던데. 그거 왜 샀어?]
은조의 친모 가게가 있는 빌딩이다. 민후는 생각보다 윤 회장이 아내 친모의 주변 소식을 꿰고 있어 놀랐다.
“투자 가치가 있다고 판단되어서 샀습니다. 제가 그 건물 산 거 어떻게 아셨습니까?”
[내가 좀 아는 사람이 그 건물에 있어.]
“그렇습니까?”
[1층 꽃집에 갔었다며? 왜 갔어?]
민후가 입꼬리를 당겨 소리 없이 웃었다. 꽃집을 감시하고 있는 건가?
“재계약을 하려고 갔었습니다. 간 김에 아내에게 줄 꽃도 샀고요.”
[…….]
윤 회장이 말이 없었다.
“1층 꽃집 사장님 아시는 분입니까?”
[아니. 몰라.]
“그런데 왜 물으시는 겁니까?”
[이상하잖아. 재계약 같은 건 법무 대리인 시켜서 해도 될 일인데 직접 갔다니까. 바쁜 사람이 말이야.]
“아내에게 꽃도 사줄 겸, 겸사겸사 제가 갔습니다.”
[그냥 다른 뜻은 없이 그 건물 샀다는 건가?]
“네.”
[알았네.]
윤 회장은 긴가민가하며 전화를 끊었다. 전화를 끊고 민후는 심각한 얼굴로 꺼진 핸드폰 화면을 보았다. 왜 그렇게 감시하고 경계를 하는 거지? . . .
“별내동 ○○빌딩으로 가.”
민후는 오전 회의를 끝내고 은조 친모의 꽃집에 들렀다. 윤 회장이 오늘 자신이 다녀간 것도 바로 안다면 근처에 감시하는 사람을 심어둔 것이 분명했다. 민후가 꽃집에 들어서자 송화가 반갑게 맞았다.
“어머나, 안녕하세요.”
새 건물주가 월세를 낮춰주어서 송화는 민후를 은인 대하듯 했다.
“어서 오세요. 이쪽으로 앉으세요.”
“아닙니다. 꽃을 사려고요. 지난번에 골라주신 꽃을 아내가 무척 좋아했습니다.”
“아, 꽃이요? 이번에도 선물로 드릴게요.”
“아아, 아닙니다. 이번에는 결코 공짜로 받아가지는 않을 겁니다.”
민후가 강한 어조로 말하자 송화가 웃었다.
“할 수 없네요. 이번에도 제가 골라드려요?”
“네. 이번에도 사장님 따님 취향으로 골라주세요.”
송화가 꽃들이 전시된 곳으로 가며 말했다.
“사모님이 제 딸과 취향이 같아서 다행이네요.”
“네. 아내가 좀 다쳤는데 빨리 쾌차하라는 의미로 꽃 선물을 주고 싶습니다. 그것에 맞게 골라주십시오.”
“어머나, 사모님이 다치셨군요. 걱정이 많으시겠어요.”
안타까운 표정으로 말한 송화가 꽃을 몇 가지 골라 꽃다발을 만들었다. 완성된 꽃다발을 민후에게 주며 송화가 말했다.
“사모님이 빨리 나으셨으면 좋겠네요.”
“근사하네요. 아내가 무척 좋아할 것 같습니다.”
송화가 계산대에서 계산할 때 민후가 꽃집을 휘 둘러보았다. 민후는 송화에게 남모르게 도움을 줄 방법으로 회사의 협력업체로 만드는 것이 가장 좋을 거로 생각했다.
“사장님, 우리 회사에 꽃다발 납품하실 생각 있으십니까?”
“네?”
“지난번에 제 명함 받으셨죠?”
“네.”
“직원들 복지 목적으로 생일이나 기념일에 회사에서 꽃다발 선물을 하면 어떨까, 생각했습니다.”
송화는 놀라 눈을 크게 뜨고 민후를 보았다. 민후는 송화의 놀라는 표정을 볼 때마다 아내와 너무 똑같아 매번 웃음이 나오려고 했다.
“직원이 천여 명 되니까 한 달에 한 팔십 명은 기념일이 올 것 같습니다.”
정기적인 납품은 사업하는 사람에게는 성공적인 결실이었다.
“정말이에요?”
송화가 감격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조그마한 동네 꽃집에서 저렇게 큰 대기업에 꽃다발 납품을 맡기는 것이 믿기지 않은 표정이었다.
“이렇게 큰 기업에서 어떻게 이런 작은 저의 가게에…….”
“사장님 꽃다발 만드는 솜씨가 무척 마음에 들어서요.”
민후는 자신이 사위인 것도, 송화를 도울 목적인 것도 숨기고 비즈니스 협력관계인 것처럼 꾸몄다. 사위라고 밝히고, 정식으로 도와주고 싶었지만 지금은 이게 최선이었다. * 은조는 하루만 쉬고 다음 날 박물관으로 출근했다. 민후는 며칠 더 쉬라고 했지만, 은조의 고집을 꺾을 수는 없었다. 출근은 당분간 민후가 태워주기로 했다. 은조를 입구까지 데려다주고 차로 가는데 뒤에서 아내를 부르는 남자 목소리가 들렸다.
“한은조 실장님.”
지난번 보았던 젊은 관장이었다.
“관장님.”
“더 쉬셔도 되는데 아픈 몸으로 출근하셨습니까.”
“개인 소장전 기획 마무리를 빨리 해야죠.”
민후는 가던 길을 멈추고 아내와 젊은 관장이 반갑게 인사하는 것을 못마땅한 시선으로 쳐다보았다. 아내가 절뚝거리며 걷자 젊은 관장이 말했다.
“도와줄까요? 제팔 잡고 걷겠습니까?”
남자가 팔을 내밀자 은조가 잠시 머뭇거리다가 살짝 잡았다.
“저기 엘리베이터까지만 잡고 걸을게요.”
아내가 젊은 관장의 팔을 잡고 걷는 것을 본 민후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은조는 아무래도 조심스러워 최대한 닿지 않게 살짝 지탱하는 정도로만 잡았지만, 민후의 눈에는 그런 건 보이지 않았다.
‘내가 사무실까지 데려다줄게.’
‘아니에요. 입구까지만 데려다줘요. 들어가면 바로 엘리베이터 있어요.’
자신이 데려다준다고 했을 때는 거절했으면서 왜 젊은 관장이 팔을 잡으라고 하니 냉큼 잡는 거야?
“고맙습니다, 관장님.”
“언제든 내 팔 필요하면 빌려주겠습니다.”
유리문 밖에서 쳐다보는 민후의 눈매가 질투로 이글거리는 것도 모르고 은조는 젊은 관장의 팔을 잡고 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