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부부 사이에 뭐 어때2021.11.13.
민후가 지하 계단 아래 바닥에 쓰러져 있는 은조를 발견했다.
“은조야!”
계단을 뛰어 내려가 은조를 부축했다.
“괜찮아?”
“발이 삐끗한 거 같아요.”
은조는 발목을 잡으며 인상을 썼다.
“날 잡아.”
민후가 쓰러진 은조를 안고 일어났다. 계단을 오르는데 강 회장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다가왔다.
“새아가! 괜찮으냐? 아니, 임신한 사람이 어쩌다가 넘어졌어?”
은조는 예지가 뒤에서 민 것 같은 느낌을 받았지만 그렇다고 강 회장에게 그 얘기를 할 수는 없었다.
“병원에 가야지! 장 박사님께 내가 연락할 테니 그리로 같이 가자.”
강 회장이 주치의가 있는 병원으로 같이 가자고 말했다. 민후가 흠칫 놀라고 말했다.
“아닙니다. 제가 데려가면 됩니다.”
같이 병원에 갔다가는 가짜 임신인 것을 들킬 것이 뻔했다.
“새아가 검사 빨리해야 하지 않니? 위험할 수 있잖아.”
강 회장이 여전히 걱정스럽게 말했다.
“다니던 병원에 제가 데리고 가면 된다니까요. 가서 검사하겠습니다.”
은조도 강 회장이 병원에 함께 가겠다는 말에 놀라 말했다.
“아버님, 걱정하지 마세요. 발목만 삐끗했어요. 괜찮은 것 같아요.”
“그래도 모른다. 가서 정밀검사를 받아야지.”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아버지.”
민후는 따라나서겠다는 강 회장을 말리고 은조를 차에 태웠다. 병원으로 가면서 은조가 말했다.
“하마터면 아버님께 들킬 뻔했네요. 병원에 가면 다 탄로 날 텐데.”
민후가 은조를 보며 물었다.
“이거 불안해서 혼자 두겠어? 어쩌다가 계단에서 떨어진 거야?”
은조의 표정이 무겁게 변하며 말했다.
“아무래도 형님이 민 거 같아요.”
“뭐?”
민후가 놀란 얼굴로 쳐다보았다.
“확실하지는 않은데…… 분명 미는 힘을 느꼈어요.”
“밀었다고?”
“중심을 잃은 나를 잡아주려고 했다는데…….”
은조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잡아주려는 손이 아니었어요.”
민후가 심각한 표정으로 짧게 한숨을 쉬었다. 충격적이었다. 형수는 분명 임신부로 알고 있는데 뒤에서 밀었다는 건……. 이건 분명 고의로 유산시키려는 거다. 민후는 생각보다 예지가 잔인한 사람이라는 생각에 소름이 돋았다. 지난번 의심스러웠던 칵테일 사건도 그렇고 예지가 대체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걸까? 단지 지분을 뺏기지 않으려고 이렇게까지 한다고?
“형수, 무서운 사람이네.”
일부러 밀었다는 말에 민후는 화가 치밀어 운전대를 잡은 손에 힘이 꽉 들어갔다. 당장 다시 돌아가 따져 묻고 싶었지만 가까스로 이성을 붙들었다. 따져 봐야 발뺌할 것이 뻔하고 CCTV도 없는 곳이라 증거도 없이 캐물었다가는 역으로 상대가 명예훼손을 걸 수도 있다. 운전하던 민후가 말했다.
“확실한 증거 잡기까지는 그 얘기 하지 마. 섣불리 공격했다가는 오히려 역으로 우리한테 뒤집어씌울 사람이야.”
“네. 저도 그럴 것 같아서 아까 말을 못 했어요. 형님이 순순히 잘못을 인정하는 사람이 아니잖아요.”
다시 앞을 주시하며 은조는 병원을 향해 운전하는 민후를 슬쩍 보았다. 넘어진 자신을 발견한 민후가 ‘은조야!’ 하고 불렀던 순간이 생각났다. 처음이었다. 그렇게 이름을 불렀던 것은. 보통 은조를 칭할 때 당신이나 제 아내라고 칭했고 직접 부를 때는……. 뭐라고 불렀더라? 생각해 보니 직접 불렀던 적이 거의 없었던 것 같다. 어쨌든 ‘은조야!’ 하고 부른 것이 친밀하게 느껴져 좋았다. 제 이름을 부르며 뛰어오던 민후의 표정이 잊히지 않았다. 불안과 걱정이 가득한 얼굴이었다. 마치 꼬맹이 시절 다친 자신을 보고 뛰어오던 엄마의 표정과 흡사했다. 운전하는 민후를 쳐다보는 은조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떨렸다.
‘설마 날 좋아하는 건가요?’
‘아까 박물관 주차장에서 질투 비슷한 것도 했잖아요.’
‘진짜 나한테 마음이 조금 있어요?’
은조는 다시 고개를 돌렸다.
‘강 전무는 이 결혼을 비즈니스로만 생각해. 우리 회사 미세분무 기술을 전수하는 게 목적이야. 너 따위에게 관심을 가질 사람이 아니다. 엉뚱한 생각하지 말고 얌전히 지내다가 계약 끝나면 이혼해.’
할머니의 말을 떠올렸다. 은조는 할머니와 같이 살면서 이런 얘기를 수도 없이 듣고 자랐다.
‘착각하지마! 너 따위에게 관심을 두는 사람은 없어! 너처럼 초라한 애한테 접근하는 사람은 다 목적이 있어서야!’
어릴 때부터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던 이런 말들은 은조에게서 자신감을 앗아갔다.
‘그렇겠지. 그는 사업 목적으로 결혼했고 임신 제안도 지분 욕심이 난다며 제안했어. 나한테 관심을 가질 리는 없어.’
* 예지는 침대에 누워 있다가 열불이 나서 벌떡 일어났다. 오늘 은조에게 당한 걸 생각하면 분해서 잠이 오지 않았다.
“어휴! 짜증 나! 뭐 그딴 게 다 있지?”
비빔밥이 갑자기 먹고 싶다고 만들어달라고 할 때부터 골탕 먹일 목적이 분명했다.
‘혹시 침이라도 뱉었어요?’
‘그래. 침 뱉었다. 어쩔래?’
‘어차피 아주버님이 드셨으니 상관없죠.’
얄밉게 구는 통에 순간적으로 욱해서 계단에서 밀어버렸다. 처음부터 밀 생각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후회되지는 않는다. 병원에 간다고 했는데 어떻게 되었는지 예지는 너무 궁금했다. 예지가 기현에게 물었다.
“여보, 동서 어떻게 되었는지 알아? 연락해봤어?”
“안 해봤어.”
“알아봐, 한번! 유산됐는지, 어떻게 되었는지!”
예지가 초조한 말투로 채근했다.
“아까 봤잖아. 발만 삐끗했다고 했잖아. 애가 잘못되면 피가 막 나고 그래야 하는 거 아니야?”
“그건 드라마니까 그런 거지. 반드시 하혈하는 건 아니래. 그리고 초기에는 그렇게 피가 많이 나오지도 않는대.”
“그래?”
기현이 내키지 않은 표정으로 핸드폰을 들었다.
“그 자식한테 전화하기 싫은데.”
“됐어. 내가 할 거야.”
예지가 은조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전화 받는 은조의 목소리가 평소보다 싸늘했다. 예지는 자신이 한 짓이 있어 일단 낮추고 들어갔다.
“동서, 나야.”
상냥한 목소리로 은조를 불렀다.
[…….]
어이가 없는지 은조는 가만히 전화기를 들고 있었다.
“병원이야? 병원에선 뭐래?”
[뭐가 궁금해서 전화하셨는데요?]
쌀쌀한 말투에 예지가 화를 억누르는 표정을 짓고는 말을 이었다.
“당연히 걱정되어서 전화했지. 동서 비틀거릴 때 내가 잡아주었으면 좋았을 텐데, 내가 운동신경이 없어서.”
자신의 잘못은 쏙 빼고 웃으면서 말한 예지가 표정을 싹 바꾸어 물었다.
“아기는…… 어떻대? 괜찮대?”
[발목 인대만 늘어났고 다른 데는 아무 이상 없대요.]
“아…… 그래?”
예지의 목소리에서 실망감이 다분했다.
[꼭 어떻게 되길 바라는 것 같네요.]
“뭐? 그게 무슨 말이야?”
[그냥 느낌이…… 형님 목소리가 좀 그렇게 들려요.]
정곡을 찔린 예지는 오히려 버럭 소리를 질렀다.
“허! 어이없어! 걱정되어서 기껏 전화했더니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야, 끊어!”
전화를 끊은 예지가 씩씩대며 꺼진 휴대폰 화면을 노려보았다.
“윽, 짜증 나.”
예지가 손으로 머리카락을 마구 헝클었다.
“어떻게 계단에서 굴렀는데 애가 무사하지?”
다른 임신부들은 초기에 조금만 스트레스를 받거나 작은 충격이어도 유산이 잘되던데. 지이이잉. 그때 예지의 핸드폰이 진동으로 울렸다. 한껏 열이 뻗친 예지가 고개를 홱 돌려서 전화기를 보았다. 친오빠의 전화였다.
“어, 오빠.”
예지의 친오빠는 법원에서 근무 중이었다.
[동생, 잘 지내?]
잘 지내긴 뭐가 잘 지내! 지금 짜증 나 죽겠는데! 버럭 이렇게 소리치고 전화를 끊고 싶었지만 참고 상냥한 목소리로 물었다.
“뭐, 그럭저럭. 근데 웬일이야?”
[오늘 재판 결과 나온 거를 보는데 고소인이 강민후더라고. 네 시동생 맞지?]
민후가 연루된 사건이라고 하니 예지는 관심이 갔다.
“응. 무슨 사건인데?”
[스토커 처벌법으로 양형 되었던데?]
“스토커?”
[여자가 쫓아다녔나 봐.]
사업과 관련한 사건일 거로 생각했는데 사생활 관련 사건이라 예지는 흥미가 돋았다.
“어머, 진짜?”
[부인한테까지 찾아가서 임신했다고 허위사실로 협박했나 보더라고.]
예지가 입을 벌리며 큰 눈알을 굴렸다.
“그 여자, 그래서 어떻게 됐어?”
[집행유예로 풀려났어.]
“그 여자 연락처 알아?”
[야, 개인정보를 그렇게 알려줄 순 없지.]
예지가 입을 삐죽이며 툴툴댔다.
“됐어! 오빠 아니면 내가 그런 거 알아볼 데 없을 줄 알아?”
[그 여자 연락처는 알아서 뭐 하게?]
“몰라. 끊어!”
예지는 민후를 쫓아다녔다는 스토커에 갑자기 흥미가 생겼다.
“부인한테까지 찾아가서 임신했다고 허위사실로 협박했다고?”
예지가 혼잣말하며 팔짱을 끼고 씩 웃었다. * 병원에 간 은조는 인대가 늘어났다는 진단을 받았고 발목에 깁스했다.
“아버지 걱정하시는데 전화 드려야겠지?”
집으로 돌아가면서 민후는 강 회장에게 전화했다.
“발목 인대가 늘어나서 깁스하고 집에 가는 길입니다.”
[아기는? 아기는 괜찮대냐?]
강 회장은 온통 아기가 잘못되었을까 걱정이었다.
“네. 괜찮답니다.”
어쩔 수 없이 거짓말을 해야 하는 민후도 표정이 좋지 않았다. 옆에서 듣고 있던 은조는 자신이 더 미안해하는 얼굴을 했다.
[아이고, 다행이다, 다행이야!]
안도하는 강 회장의 목소리를 들으며 민후는 미안한 표정이었다. 전화를 끊은 민후와 은조는 하루빨리 아이를 가져야 하는 중대한 숙제가 남았다는 것을 상기했다. 차가 주차장에 도착하고 민후가 벨트를 풀면서 말했다.
“기다려. 업어줄게.”
“네?”
민후가 차에서 내려 보닛을 돌아 조수석으로 오는 모습을 은조는 놀란 눈으로 쳐다보았다. 조수석 문을 열고 민후가 등을 돌리고 말했다.
“자, 업혀.”
“아뇨. 걸을 수 있어요.”
“알아. 그래도 가능하면 안 걷는 게 좋아. 그래야 빨리 낫지.”
갑자기 업히라니 은조는 당황했다. 넓고 탄탄해 보이는 그의 등을 가만히 보고만 있었다.
“뭐 해, 빨리 안 업히고.”
민후가 재촉해 은조는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남편의 등에 업혔다. 민후가 힘들이지 않고 가볍게 일어났다.
‘민후 씨 등 참 넓다.’
업힌 은조는 이렇게 생각했다. 그와 몸이 밀착된 느낌이 너무 좋았다.
‘좋다. 집이 더 멀었으면 좋겠다.’
하지만 주차장에서 집까지는 너무 짧았다. 짧은 꿈을 꾼 것처럼 집 안까지 벌써 도착했다. 발을 마음대로 사용할 수 없는 건 생각보다 불편했다. 절뚝이면서 조금은 걸을 수 있지만 가능한 한 움직이지 않아야 빨리 낫는다고 의사가 말했다. 은조가 침실로 들어가자 민후가 따라 들어가며 물었다.
“옷 갈아입는 거 혼자 할 수 있어?”
혼자 할 수 없으면? 도와주려고? 은조는 당황하며 대답했다.
“하, 할 수 있어요! 아니, 해야죠.”
못한다 해도 해야 했다. 남편에게 옷 갈아입는 걸 도와달라고 할 수는 없으니. 민후가 보기에는 불편한 다리로 옷을 벗는 건 힘들 것 같았다. 오늘 그녀가 입은 원피스가 몸에 붙는 데다 치마폭이 좁았다.
“혼자서는 힘들 것 같은데.”
민후가 다가오면서 말했다. 은조가 당황한 목소리로 말했다.
“괘, 괜찮아요. 혼자 할 수 있어요.”
남편이 다가오자 주춤하다가 중심을 잃었다.
“어어.”
중심을 잃고 비틀거리던 은조를 민후가 잡았다. 민후가 그녀의 허리에 팔을 감았다.
“이거 봐. 혼자 서 있기도 힘들잖아.”
민후에게 반쯤 안긴 상태로 그의 몸에 밀착되었다. 은조는 얼굴을 붉히며 동그랗게 눈을 뜨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아까 의사 말 들었지? 가능한 다리 쓰지 말라고.”
민후가 작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고집 피우지 말고, 옷 내가 벗겨줄게.”
남편을 올려다보는 은조가 입을 벌리고 쳐다보았다.
“네?”
“그런 눈으로 쳐다보지 마. 나 음흉한 사람 아니야. 도움이 필요한 상황이니까 도와주려는 거야.”
음흉한 사람 아니라고 말하지만 그렇다고 순수하게 생각할 수는 없었다.
“부부 사이에 이런 거 이상할 것도 없어.”
부부 사이라고 해도 아직 벗은 몸을 보여주지 않은 부부이지 않나. 은조가 여전히 당황한 표정을 보이자 민후가 말했다.
“싫어?”
“싫다기보다…… 창피해서 그러죠.”
은조가 붉어진 얼굴을 떨구며 말했다.
“안 볼게. 불을 끌까?”
불을 끄고 옷을 벗으라는 말에 은조가 쳐다보았다. 불을 끄면 좀 낫긴 하겠다.
“네. 그럼. 불 끄고 벗을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