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아내의 못된 손2021.10.09.
“건물주가 바뀌었다는 말을 옆에 미용실 원장님에게서 들었어요. 원장님은 새로 계약서를 썼다고 하던데 저는 연락을 못 받아서 불안했거든요.”
건물주가 자신과 재계약을 하지 않아 송화는 자신을 내쫓으려고 하나 내심 불안했다. 민후가 슈트에서 명함을 꺼내서 주었다.
“강민후라고 합니다.”
민후에게서 받은 명함을 본 송화가 놀라며 고개를 들었다.
“한주 그룹이면 대기업인데.”
뉴스에 가끔 나오기도 하는 대기업의 전무이사가 새 건물주라니. 대기업의 임원인데도 이렇게 젊고 멋지기까지 하구나. 송화는 내심 감탄하며 민후를 보았다.
“재계약, 직접 하려고 왔습니다.”
“아. 네.”
‘다른 가게는 법무 대리인이 와서 재계약했다던데 왜 나는 건물주가 직접 재계약하려고 하지?’
송화는 불안한 표정을 감출 수가 없었다.
‘혹시 월세나 보증금을 올리려고 그러나?’
“계약서는 어디서 보시겠습니까?”
민후가 좁은 가게를 둘러보며 물었다. 어디 앉을 만한 곳이 있는지 찾는 듯했다.
“아, 잠시만요.”
송화는 좁은 가게 안에서 잡무를 보는 책상 위를 부산스럽게 치웠다. 겨우 두 명이 앉을 수 있는 자리가 마련되었고 송화가 말했다.
“여기 앉으세요.”
“먼저 앉으십시오.”
민후는 어른보다 먼저 앉는 것이 예의가 아니라는 것을 알기에 송화에게 먼저 앉으라 손을 내밀었다.
“앉으세요.”
송화가 재차 말했고 민후도 재차 송화에게 먼저 앉으라고 했다. 어쩔 수 없다는 듯 송화가 앉자 민후도 따라 앉았다. 이 광경을 보던 문 실장은 입이 떡 벌어지려고 했다. 민후가 예의를 차리기는 해도 이 정도로 하는 모습은 처음 보았다. 대체 이분이 누구시기에 이러나 궁금증이 더해졌다.
“평수보다 월세가 좀 과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월세를 절반으로 낮춘 계약서입니다. 현시점부터 새롭게 하는 계약서고요.”
민후가 새 계약서를 보여주며 말했다. 월세를 낮추겠다는 말에 송화가 놀란 얼굴을 했다. 월세를 올렸으면 올렸지, 건물주가 알아서 월세를 낮춰주는 예는 없었다. 왜 낮춰주는 거냐고 묻고 싶었지만 송화에게는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기회라는 걸 알고 있어 행여 번복될까 봐 묻지 않았다.
“어머, 반이나 낮춰주다니. 저야 정말 감사하죠.”
“적절한 월세를 새로 책정한 겁니다. 여기 도장 찍으십시오.”
송화는 건물주의 마음이 바뀌기 전에 얼른 도장을 찍었다.
“불편한 점 있으면 언제든 관리인에게 얘기하세요. 개선하라고 할 테니까요.”
민후가 계약서를 문 실장에게 주자 문 실장이 봉투에 챙겨 넣었다.
“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송화는 연신 감사하다며 새 건물주에게 허리를 숙였다. 갑작스러운 인사에 민후도 어정쩡하게 고개를 숙였다.
“인사는 그만하셔도 됩니다.”
“요즘 사실 아주 어려웠는데 월세 부담이 확 줄어서 저는 너무나 감사한 마음입니다.”
민후가 일어나며 말했다.
“우리 회사에서 행사가 있을 때 꽃을 여기서 납품하는 것도 검토하겠습니다.”
옆에 있던 문 실장의 눈이 커다래졌다. 행사 때 쓰는 꽃은 양이 많아 화훼도매시장과 계약하고 진행하는 경우가 많다. 이런 조그마한 소매점과는 수량도 그렇고 단가도 맞지 않는다. 송화는 놀라며 손으로 입을 가렸다.
“헉.”
입을 틀어막고 눈이 동그래진 모습이 아내의 그런 모습과 너무 똑같아서 민후는 픽 웃음이 나오려고 했다.
“정말이에요? 어머, 세상에. 이 은혜를 어떻게 갚을지.”
민후는 놀라서 쳐다보는 문 실장을 쳐다보았다.
‘뭐요? 뭐 잘못되었습니까?’
‘아니, 전무님. 그런 중요한 사항을 충동적으로 결정하시면…….’
둘이 복화술로 대화하는 동안, 옆에서 송화는 기뻐서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그럼 가게 더 번창하십시오.”
“네. 안녕히 가세요. 감사합니다.”
민후는 출입구로 가다가 이참에 아내에게 꽃을 선물해줄까 생각했다. 어머니를 만나지도 못하는데 어머니의 손길이 깃든 꽃이나마 선물해주고 싶었다. 민후가 걸음을 멈추고 말했다.
“온 김에 꽃을 좀 살까 하는데요.”
“아, 네! 누구에게 선물해주실 건가요?”
“아내에게 주려고 하는데 어떤 게 좋을지. 추천해주시겠습니까?”
민후는 봐도 꽃이 거기서 거기 같아서 뭘 골라야 할지 선택이 어려웠다.
“글쎄요. 사모님께서 어떤 꽃을 좋아하시려나.”
송화가 꽃이 담긴 바구니에 손을 뻗었다.
“사장님 따님에게 선물해준다 생각하고 추천해주십시오.”
민후가 말하자 송화의 손이 멈칫하더니 표정이 아련해졌다. 송화가 바구니에서 꽃을 꺼내 들었다.
‘우리 은조는 이 꽃을 좋아하는데.’
송화는 몇 종류의 꽃을 섞어서 꽃다발을 만들었다.
“우리 딸은 이 꽃을 좋아해요. 살굿빛이 도는 핑크색을 좋아하는데 사모님도 마음에 들어 했으면 좋겠네요.”
“분명 좋아할 겁니다.”
꽃다발을 받아들며 민후가 의미심장하게 말했지만, 송화는 민후가 은조의 남편인지 전혀 알아채지 못했다. 민후가 카드를 내밀자 송화가 손을 내저었다.
“아니에요. 이건 제가 드리는 선물이에요.”
“아닙니다. 계산하겠습니다.”
“오늘 월세도 낮춰주셨는데 이거라도 제가 선물할 수 있게 해주세요.”
고마워하는 송화의 마음이 느껴져 민후는 고맙다고 말하고 꽃다발을 받았다. 송화는 가게 앞까지 나와서 민후를 배웅하며 차에 타는 모습까지 지켜보았다. 차를 타고 가면서 민후는 아내가 어머니와 생이별해 살고 있다는 사실이 안타까웠다. 할머니인 명신제지 윤 회장님이 두 사람이 만나는 것을 극도로 싫어해 떼어놓으려 한다니 자신이 뭔가 도울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 . . 퇴근해 들어오는 민후의 손에 꽃다발이 있었다.
“자. 이거 받아.”
민망한지 무뚝뚝한 표정으로 꽃다발을 안겨주었다. 마치 ‘오다 주웠어.’ 하는 표정으로 주고는 민망한지 드레스룸으로 들어갔다. 남편에게 처음 받아보는 꽃이었다.
“어머, 예뻐라.”
생각지도 못했던 꽃 선물이라니 은조는 좋아서 입꼬리가 한참 올라갔다. 심지어 은조가 좋아하는 꽃들로만 만든 꽃다발이라 더욱 그랬다.
“고마워요. 이거 내가 좋아하는 꽃인데 어떻게 알고 사 왔어요?”
넥타이를 당겨 푸는 민후가 슬쩍 웃었다.
‘당신 어머니가 당신 좋아하는 꽃으로 골랐으니 그렇지.’
속으로만 말하고 혼자 웃었다. 어머니 가게에 갔다고 하면 할머니가 알면 어쩌나 걱정할 것 같아 일부러 말하지 않았다. 씻고 나오니 은조가 꽃을 예쁜 화병에 담아 식탁에 올려놓았다. 저녁 식사를 하면서도 은조는 식탁 위 꽃을 바라보며 흡족해했다.
“꽃이 있으니까 우아한 레스토랑이 된 기분이에요.”
“마음에 들어 하니 다행이네.”
“이거 제가 좋아하는 리시안셔스인데 어떻게 딱 알고 사 왔대요?”
은조가 신기해하며 말하고 아련한 표정으로 꽃을 바라보았다. 꽃을 보니 엄마 생각이 났다.
‘엄마, 이 꽃 너무 예쁘다. 이거 이름이 뭐야?’
‘리시안셔스야.’
‘리시안셔스, 이름도 예쁘다.’
‘장미랑 비슷하게 생겨서 장미라고 착각하는 사람이 많지. 꽃말이 변치 않는 사랑이어서 부케에도 많이 사용돼.’
‘변치 않는 사랑, 꽃말도 멋지네. 나도 결혼할 때 이거로 부케 만들어야지.’
어릴 때 엄마랑 대화했던 것이 생각났다. 은조는 할머니와 살지 않는데도 엄마에게 찾아갈 수 없었다. 할머니가 고용한 사람들이 엄마 가게 근처에서 감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민후는 꽃을 보면서 어딘가 모르게 슬픈 표정인 아내를 보면서 엄마 생각을 하나 보다 짐작했다. 어머니를 편하게 만나면서 살 수는 없을까, 자신이 도울 수 있는 게 없을까, 민후는 고민했다. . . . 밤이 깊어가고 잠자리에 들 시간이 되자 은조는 또다시 긴장되었다. 남편과 같은 침대를 사용한 지 오늘이 삼 일째다. 첫날은 자신이 잠결에 남편을 안고 자다가 깨어났고 둘째 날은 스킨십 진도를 나가자며 키스했다. 같은 침대를 사용하고 나서부터 남편과 많이 가까워지기는 했다. 언젠가는, 아니 곧 아기도 만들겠지. 그 생각을 하면 은조는 얼굴에 열이 오르는 것 같았다. 인형을 꼭 끌어안고 침대에 누워 있는데 남편도 침실로 들어왔다. 문이 달칵 열리는 소리가 나자마자 은조는 긴장해 몸이 경직되었다. 바스락. 남편이 윗옷을 벗고 침대에 눕는 소리 하나하나 디테일하게 들렸다. 이윽고 침실에 정적이 흘렀다. 두 사람 모두 어제 한 키스가 떠올라 심장 박동수가 점점 올라갔다. 민후가 고개를 돌려 아내를 보았다. 여전히 인형 베개를 꼭 끌어안고 있었다.
“그 인형 말인데.”
민후가 정적을 깨고 말했다.
“없이 자면 어때?”
은조가 인형을 꼭 안은 채로 민후를 보았다.
“뭐든 안고 자는 잠버릇이라며. 그게 없으면 날 안고 자지 않겠어?”
은조는 눈만 끔뻑이며 쳐다보았다. 자신을 인형 대신 안고 자라는 얘긴가?
“우린 빨리 친해져야 하니까.”
민후가 은조가 안고 있던 인형의 머리를 잡고 슬며시 뺐다. 은조가 반사적으로 팔에 힘을 더 주었다.
“왜, 싫어? 인형 대신 날 안고 자는 건 싫은가?”
아니, 싫어서가 아니라! 그러면 잠을 못 잘 것 같아서 그러죠. 지금도 떨려 죽겠단 말이에요. 속엣말을 뱉지는 못하고 남편을 쳐다보았다. 떨리는 마음을 인형에 의지해 억누르고 있었는데 긴장감이 터질 것 같았다. 남편 말대로 아기를 가지기 위한 노력을 해야 하니 적응을 위해서라도 놓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속으로 크게 호흡한 뒤 은조는 팔에 힘을 풀었다. 민후가 인형을 바닥에 툭 던졌다. 은조는 팔을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 난감했다. 안고 있던 것이 없어지자 품이 허전했다. 민후가 팔을 올리며 말했다.
“날 안아.”
민후가 팔베개를 해주려고 팔을 뻗었고 은조는 쭈뼛대면서도 고개를 살짝 들어주었다. 민후의 팔이 은조의 목 아래로 들어와 은조의 어깨를 감쌌다. 그가 훅 끌어당기자 은조는 그의 몸에 착 붙었다.
“어마!”
몸을 끌어당기는 힘이 세서 그런지 은조의 얼굴이 그의 맨가슴에 부딪히는 사고가 있었다. 하마터면 그의 가슴에 뽀뽀할뻔했다.
“이 자세가 훨씬 편하네.”
민후가 말했다. 그의 팔을 베고 안겨 있으니 은조도 안락했다. 자세는 편했지만 심장은 두근두근 뛰었다. 은조가 팔을 어찌해야 할지 몰라 어정쩡하게 옆구리에 붙이고 있으니 민후가 은조의 팔을 잡아 자신의 허리에 두르게 했다.
“뭐든 안아야 한다면서. 인형은 잘 안으면서.”
그의 허리에 팔을 두르고 있으니 온몸이 밀착된 느낌이다. 그의 맨살과 은조의 맨팔이 닿아 있으니 그런 느낌이 드는 것 같았다. 은조는 아까보다 심장이 더 뛰는 것 같았다. 은조의 심장이 민후의 몸에 닿아 있었기 때문에 민후가 제 심장 소리를 다 들을 것만 같았다. 미친 듯이 뛰는 제 심장 소리를 듣고 그가 웃으면서 놀릴 것만 같았다.
‘뭘 이런 거로 긴장하고 그래. 우리 성인이잖아. 남자랑 한 번도 안 자봤어?’
네, 저 한 번도 안 자봤어요. 처음이라고요. 처음엔 누구나 이렇게 떨리는 거 맞죠? . . . 심장이 빠르게 뛰는 건 민후도 마찬가지였다. 아내 옆에 함께 눕는 것만으로도 긴장되었다. 곧 가져야 할 잠자리를 위해서 아내가 부담되지 않도록 서로의 스킨십에 자연스러워질 필요가 있었다. 첫 번째 밤에 아내가 잠결에 인형을 떨어트리고는 자신을 안고 잤던 그 날 기억이 좋았다. 그렇게 안고서 매일 아침 눈을 떴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다. 인형만 없으면 아내가 그날처럼 자신을 안고 잘 것 같았다. 팔베개를 해주니 아내가 품 안으로 쏙 들어오는 느낌이다. 뭔가 퍼즐이 맞춰진 것처럼 자세가 편안했다. 아내를 품 안에 안고 있는 순간이 너무나 행복했다. 심장박동 수와 함께 행복지수가 올라가고 있었다. 밤이 깊었고 아내는 잠이 들었다. 몇 시간이나 제 팔을 베고 있지만 팔이 저린 줄도 몰랐다. 규칙적인 아내의 들숨과 날숨이 자장가 노래처럼 평화롭게 들렸다. 민후는 행복감에 잠들지 못하고 잔잔한 아내의 숨소리를 들었다. 한참 숨소리를 듣는데 갑자기 제 허리를 안고 있던 아내의 손이 움직였다. 그녀가 민후의 배와 가슴을 쓰다듬었다.
“으음. 젤리 코 어디 있어.”
얼굴을 민후의 가슴에 비비며 잠꼬대도 했다. 맨살에 얼굴을 비비니 미칠 것 같았다. 아내의 손이 민후의 배와 가슴을 더듬기 시작했다. 무언가를 찾는 손길. 아내의 손이 넓은 가슴을 이리저리 더듬었다. 민후는 당황하기 시작했다.
“아아, 자, 잠깐.”
자는 아내가 들을 리가 없었다. 아내가 안고 자던 인형의 말랑한 코를 젤리라고 표현하는 것을 들은 적 있다. 인형의 말랑한 젤리 코를 찾아대는 아내의 손길은 위험 수위를 넘나들었다. 민후는 아내의 잠버릇에 온몸에 열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아아, 잠깐. 이거 위험한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