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이제 진짜 키스할 거야2021.10.05.
은조는 자신도 모르게 침을 꼴딱 삼켰다. 민후가 손을 뻗어 은조의 한쪽 어깨를 잡으며 더 다가왔다. 키스하려고 자세를 잡는 느낌에 은조는 몸에 더욱 힘이 들어갔다. 안고 있던 인형은 더 세게 안아 인형 몸체가 찌그러졌다. 민후의 얼굴이 조금 더 내려왔다. 코와 코 사이 거리가 10cm 정도 되었지만 은조의 체감상으로는 코가 닿은 느낌이다. 왜냐하면, 그의 호흡이 얼굴에 느껴졌기 때문이다.
“싫으면 안 할 거니까, 싫으면 고개 돌려.”
민후는 그녀에게 선택권을 주었다. 은조는 긴장되기는 해도 키스를 거부할 생각은 없었다. 솔직히 그와 닿는 느낌이 좋았다. 그가 키스 얘기를 꺼낸 이후로 그와의 첫키스에 대한 기대감도 있었다. 은조가 거부하지 않자 민후가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은조는 몸이 굳은 것처럼 움직일 수 없었다. 그의 입술만 쳐다보았다. 천천히, 아주 느리게 민후의 얼굴이 비스듬히 기울어졌다. 그리고 민후의 입술이 그녀의 입술에 닿아 가볍게 눌러졌다. 느낌은 부드럽고 따뜻했다. 입술만 가볍게 닿았다가 떨어진 그가 가만히 쳐다보았다. 은조는 떨리는 눈으로 그를 보았다.
“입술 조금 벌려봐.”
민후가 다시 고개를 숙여 그녀의 입술을 베어 물었다. 은조가 허락하듯 스르르 입을 벌렸다. 살짝 벌어진 그녀의 윗입술을 베어 물자 서로의 입술 안쪽 촉촉한 부분이 닿았다. 짜릿한 전율이 일었다. 민후는 그녀의 윗입술, 아랫입술을 차례로 가볍게 베어 물었다. 은조는 호흡도 멈춘 채로 눈을 감고 그의 입술 감촉을 느꼈다. 온몸이 간질간질 기분이 이상했다. 무릎이 절로 오므려지고 다리가 비비 꼬이려고 했다. 입술을 잠시 떼어 낸 민후가 낮게 속삭였다.
“이제 진짜 키스할 거야.”
응? 지금까지는 키스가 아니었나? 생각할 찰나. 민후가 손으로 그녀의 얼굴을 감싸고 입술을 깊게 물었다. 뜨거운 숨결이 입술 사이를 파고들었다. 축축하고 말캉한 숨이 입안을 가득 채워 훑어내기 시작했다. 은조는 심장이 마구 뛰었다. 입술을 가르고 들어온 그의 숨결이 거칠게 움직였다. 고개를 비틀어 가며 다시 입술을 물었다. 민후는 한 손으로 그녀의 얼굴을 잡고 어디 도망가지 못하도록 상체로 아내의 몸을 지그시 누르며 키스했다. 그의 가슴 아래로 걸리적거리는 게 있었다. 그녀가 인형을 아직도 꽉 안고 있었던 탓이다. 민후는 그녀와 더 가까이 몸을 맞대고 싶은 욕심에 인형을 잡고 당겼다. 은조는 그제야 안고 있던 인형을 놓았고 어찌할 바를 모르던 손은 민후의 팔을 살며시 잡았다. 방해꾼이던 인형은 바닥으로 떨어졌고 민후는 그녀의 몸 위로 점점 올라왔다. 은조는 그의 몸에 눌리는 느낌이 너무 이상했다. 그의 몸에 갇혀버린 느낌에 미칠 듯이 심장이 뛰고 숨이 차올랐다.
온몸을 휘감는 아찔한 감각에 정신이 아득해졌다. 이러다 심장이 멎어버릴 것만 같아 그의 어깨를 살짝 밀어냈다.
“자, 잠깐만요.”
그가 입술을 떼어 내고 더운 숨을 뱉으며 은조를 보았다.
“숨을 못 쉬겠어요.”
너무 심장이 뛰어서 호흡하기가 곤란했다. 민후는 자기도 모르게 흥분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언제 그녀의 몸에 올라탔는지 기억이 안 날 정도로 흥분했던 것 같다. 혼자 아내에 대한 마음을 키워오다가 처음 하게 된 키스에 자신도 모르게 마음이 들떴다. 숨을 밭게 내쉬며 자신을 올려다보는 아내가 너무 예뻐 보였다. 두 볼은 발그레했고 방금 키스했던 입술은 평소보다 붉어진 데다 약간 부풀어 올라 더 탐스러웠다. 다시 입술을 내려 입을 맞추고 싶은 충동이 일 정도였다. 민후는 아내가 사랑스러워 입가에 절로 미소가 그려졌다. 숨을 몰아쉬는 아내가 벅차 보여 민후는 그녀에게서 내려왔다. 첫키스에 흥분해 너무 정신없이 해버린 것 같다. 아직도 키스의 떨리는 설렘이 가시지 않았다. 천장을 바라보는 그의 가슴 흉곽이 크게 오르내렸다. 스킨십 진도 때문에 해야 할 숙제를 한 명분이었지만 둘 다 심장은 빨리 뛰고 감정이 소용돌이쳤다. 서로의 숨결이 닿았을 때의 그 강렬하고도 짜릿한 감각이 아직도 생생했다. 심장이 터질 것처럼 느낌이 좋았다. 늘 곁에 있던 아내와 남편. 매일 얼굴 보며 살던 부부였지만 첫 키스에 서로에 대한 감정이 폭발적으로 커진 듯했다. 부부로서 나란히 누워 있다는 것 자체로 가슴이 떨렸다. 민후는 키스하고 난 후 밤새 감정이 가라앉지 않았다. 아내의 입술 감촉과 숨결이 자꾸만 떠올랐다. 고개를 틀어 아내를 보니 아내는 어느새 고른 숨소리를 내며 잠이 들었다. 아내의 숨소리를 듣다 보니 자꾸 방금 키스했던 순간만 떠오르고 머릿속은 점점 맑아졌다. 아내를 안고 싶다는 본능은 밤새 더욱 커졌다. *
“전무님 나오셨습니까? 좋은 아침입니다.”
다음날 민후가 회사로 출근하자 비서가 일어나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네. 좋은 아침입니다.”
비서 문 실장이 민후를 따라 들어오며 말했다.
“경찰서에서 연락이 왔었습니다.”
경찰에서 연락이 왔다는 건 스토커에 관한 내용일 것이다.
“지금 유치장에 있는데 다시는 안 찾아온다고 용서해달라고 그런다는데 합의하실지 의사를 묻습니다.”
민후가 책상에 앉으며 차갑게 말했다.
“합의해줄 생각 없다고 하세요.”
선주를 떠올리자 불쾌해진 민후는 인상을 썼다. 그동안 결혼한 사실을 강조하며 최대한 예의 있게 대처했었다. 하지만 스토킹은 멈추지 않았고 접근금지명령으로 충분히 경고가 되었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이번에 아내를 찾아가 아내에게 충격적인 발언을 한 것은 용서할 수가 없었다. 아내를 건드리는 것은 큰 실수였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었다.
“경찰에서는 상담프로그램을 받도록 하는 게 어떻겠냐고 합니다.”
“상담과 치료는 교도소에서 받으라고 하세요.”
늘 무시로 일관하던 민후가 갑자기 강경하게 나오는 것이 문 실장은 의아했다.
“예. 기소 부탁드린다고 하겠습니다.”
아내에게 상처를 주는 자가 있다면 여자든 남자든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민후의 표정은 어느 때보다 싸늘했다.
“오늘 일정 말씀드리겠습니다.”
문 실장이 태블릿을 들고 스케줄을 말했다.
“잠시 후 10시에 각부서 부장님들 회의가 있고 12시에 ○○건설 부사장님과 오찬 약속이 있습니다. 오후 일정은 특별히 없습니다.”
문 실장이 태블릿을 닫다가 뭔가 생각난 듯이 말했다.
“아, 참. 이번에 매입한 별내동 건물 한번 가보시겠습니까? 다른 임차인들 재계약은 끝났고요. 1층 꽃집 재계약은 아직 안 한 상태입니다. 직접 하시겠다고 말씀하셨다고요?”
민후는 아내의 어머니가 운영하는 꽃집이 있는 건물을 이번에 사들였다. 아내는 할머니가 알게 될까 봐 두려워하며 어머니를 모른 체해달라고 했지만, 민후는 그럴 수 없었다. 어머니가 가게를 운영하면서 부채까지 있다는 정보를 알게 되자 도와주고 싶었다. 진짜 부부처럼 지내보자고 했으니 사위 노릇도 하고 싶었다. 아내 몰래 꽃집이 있는 건물을 사들여 월세도 파격적으로 낮출 생각이었다. 그렇게라도 몰래 장모님을 도와주고 싶었다. 아내가 돕고 싶어도 도울 수 없는 상황인데, 자신이라도 조금이나마 도움을 줄 수 있어 다행이었다. 아내 대신 장모님을 챙길 수 있게 되다니, 진짜 부부가 된 것 같아 마음이 뿌듯했다.
“오늘 직접 가보겠습니다. 오후 5시에 출발하죠.”
“예. 준비하겠습니다.”
* 은조는 오늘도 어김없이 출근길에 박물관 내 카페에서 커피를 주문했다. 커피 주문을 받는 친구 시은이 은조의 얼굴을 유심히 쳐다보았다.
“왜? 내 얼굴이 오늘따라 더 예쁘니?”
은조가 손으로 꽃받침을 만들어 보이며 장난쳤다.
“데이트 잘했어? 어제 분위기 좋더라? 둘이 우산 쓰고 걸어가는 모습이 무슨 영화장면 같았어.”
어제 데이트 현장을 목격해서 오늘 분명히 이 일로 놀릴 거라는 예상은 했다. 은조는 배시시 웃을 뿐 대답하지 않았다.
“뭐 했어?”
“스테이크 먹으러 갔었어.”
“그리고?”
시은이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물었다. 그리고 또 뭘 했냐는 질문에 은조는 키스 예고제와 함께 어젯밤 처음 키스한 것을 떠올렸다. 그의 숨결이 입안을 가르고 들어온 순간이 떠오르자 은조는 얼굴이 붉어졌다.
“왜 이래? 얼굴은 왜 빨개지고 그래?”
시은이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얼굴을 더 들이밀었다.
“빨개지긴 누가. 빨리 커피나 줘.”
은조는 돌아서서 열이 오른 얼굴을 손등으로 꾹꾹 눌렀다.
“주문하신 커피 나왔습니다.”
“고마워. 오늘도 수고.”
커피를 받은 은조가 인사하며 뒤돌아서는데 시은이 말했다.
“야, 너 지금 딱 연애 시작하는 사람 표정이다.”
은조가 뒤돌아보며 손으로 볼을 감쌌다.
“내가?”
“근래 이렇게 행복한 표정 오랜만이다. 하여튼 보기 좋다.”
시은이 말하고 웃었다. 은조도 웃으면서 뒤돌아섰다. 연애 시작하는 사람 표정이라고? 시은 말대로 은조는 지금 남편에 대한 감정이 커졌고 남편과 연애를 하고 있다. 남편은 지분을 위해 임신 제안을 하고 그것을 이행하는 것일 테지만 은조는 아니었다. 남편과 한 협의는 명분이었고 남편과 진짜 부부처럼 지내고 싶어 제안을 수락했다. 남편은 비즈니스일 뿐인데 혼자서 이렇게 연애하는 기분으로 살아가도 될까? 하지만 남은 기간이라도 남편과 결혼생활다운 결혼생활을 하고 싶었다. 아이도 낳고 남들 부부처럼 지내다가 기왕이면 남편도 자신을 좋아하게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지만, 그래서 이혼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지만 단지 희망일 뿐이다. 남편이 자신을 좋아하지 않아도 지금까지의 결혼생활에서도 남편은 신사적이었기 때문에 은조로서는 만족스러운 결혼생활이 될 것이다. 남편 곁에서 어떤 형태로 살아가든 할머니와의 삶보다는 나을 것이기에. 2년 뒤 어떤 운명이 될지는 모르지만 은조는 지금의 행복한 감정에 충실해지고 싶었다. 할머니 집으로 들어간 이후 처음으로 느껴보는 행복감이기 때문에. 뒤늦게 시작한 연애 감정에 오랜만에 가슴이 설레고 세상이 아름답게 보였다. 은조는 자신도 모르게 미소가 피어오른지도 모르고 커피를 호로록 마셨다. * 민후를 태운 차가 시내의 한 20층짜리 건물 앞에 섰다. 은조의 친모인 최송화 씨가 운영하는 꽃집이 있는 건물이다. 민후가 이번에 이 건물을 매입했다. 건물주인이 바뀌었기에 민후는 전 임차인과 계약서를 다시 썼다. 다른 가게나 사무실은 법무 대리인이 계약서를 썼지만 1층 꽃집은 민후가 직접 만나고 싶다고 말했다. 꽃집은 건물 외부 귀퉁이에 7평 남짓한 작은 가게였다. 민후가 꽃집에 들어섰다. 딸랑. 경쾌한 종소리가 울리고 송화가 손님을 맞으러 나왔다.
“어서 오세요.”
안에서 뭔가를 정리 중이었는지 그녀는 흰색 일 장갑을 끼고 있었다. 문 실장까지 따라 들어오니 가게가 꽉 찼다.
“꽃 사시려고요? 어떤 거 찾으세요?”
송화가 키가 큰 민후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민후는 아내의 어머니를 보고는 피식 웃음이 나오려고 했다. 아내가 어머니를 많이 닮았다. 동그란 눈과 선해 보이는 인상들이 그랬다.
“이분이 새 건물주이십니다.”
따라 들어온 문 실장이 말하자 송화가 놀란 표정을 짓고는 인사를 꾸벅했다.
“어머나. 그러세요? 안녕하세요. 처음 뵙겠습니다.”
민후는 장모님이나 다름없는 분이 제게 허리를 굽히자 당황했다.
“아, 예. 안녕하십니까?”
민후도 송화가 숙인 허리만큼이나 같이 허리를 숙였다. 장모님에게 절을 받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옆에서 이를 지켜보는 문 실장의 눈이 커다래졌다. 민후가 누구 앞에서 저렇게 허리를 크게 숙인 것을 처음 보았기 때문이다. 송화는 새 건물주가 젊은 사람이라 무척 놀랐다. 앞에 서 있는 남자가 딸 은조의 남편일 것이란 상상은 전혀 하지 못했다. 할머니 때문에 은조를 못 본 지도 몇 년이 되었다. 은조가 할머니 몰래 자신을 만나고 간 적이 몇 번 있는데 그럴 때마다 은조가 할머니에게 맞았다는 얘기를 들었다. 할머니는 송화에게 전화해 또다시 은조를 불러내거나 만나면 은조의 뺨이 남아나지 않을 것이라며 무섭게 경고하고 전화를 끊었다. 제 딸이 맞았다는 소리에 송화는 가게 문도 닫고 구석에서 오열했다. 그래서 송화도 은조에게 더 찾아오지 말라고 일부러 매정하게 굴었다. 은조가 자신 때문에 할머니에게 혼나고 맞는 것은 견딜 수가 없기 때문이었다. 결혼한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지만 어떤 집안, 어떤 사람인인지는 알지 못했다. 은조가 좋은 집안에 남편도 좋은 사람이라고 짧은 통화에서 그렇게 말했기 때문에 결혼해 잘살고 있겠거니 생각하고 있었다. 젊고 잘생기기까지 한 새 건물주를 보며 송화는 생각했다.
‘우리 은조가 결혼한 사람이 이런 사람이면 좋을 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