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오늘부터 같이 자2021.09.21.
“네, 좋아요. 아이…… 낳아요, 우리.”
민후는 듣고도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그녀가 제안을 받아들일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다시 주워 담고 싶을 정도로 자신도 말도 안 되는 제안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방금…….”
민후는 재차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좋다고 대답한 거 맞아?”
“네.”
은조는 표정 변화 없이 그렇다고 대답했다. 민후가 그녀의 눈동자를 똑바로 응시했다. 장난기 하나 없는 진중한 눈빛이었다. 원래 그녀가 농담이나 장난 같은 것을 하는 것을 본 적도 없었다. 다른 제안도 아니고 아이를 낳자는 말에 너무 진지하게 대답하니 민후는 오히려 당황했다. 아이를 낳으려면 반드시 거쳐야 하는 부부만의 시간이 있는데, 그것까지 동의한다는 말인가? 남처럼 지내온 무늬만 부부이지 않은가.
“아이를 낳는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는 알지? 우리 관계에 변화가 많이 올 거야.”
아이가 생기려면 침대도 같이 써야 하고 잠도 같이 자야 한다. 현재 각방을 사용하는 관계에서 파격적인 변화가 올 것이다. 그녀를 남몰래 흠모하고 있던 민후는 그녀의 대답을 기다리는 몇 초간 심장이 두근댔다. 은조가 얼굴을 살짝 붉히더니 대답했다.
“네. 알아요.”
그 대답에 민후의 심장이 미칠 듯이 쿵쿵 뛰었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제안을 받아들이는 걸 보면, 그녀도 자신을 좋아하고 있었던 걸까? 민후는 들뜨는 마음을 애써 숨기며 물었다.
“왜 승낙하는지 물어도 돼?”
은조는 임신 제안을 승낙한 이유를 묻는 말에 잠시 머뭇거렸다. 사실은…… 당신이 좋아졌어요. 좋아하고 있었나 봐요. 이거 계약위반인가요? 3년이 지나면 이혼하기로 했는데 좋아하면 안 되죠? 당신은 이 결혼이 비즈니스니까요. 차마 좋아하게 되었다, 계약이 끝나고도 이혼하기 싫다. 이혼하고 할머니에게로 돌아가기 싫다, 이 말은 나오지 않았다. 그는 사업상 필요해서 결혼했고 사업 전략상 임신이 필요한 상황인데 좋아한다고 고백하면 부담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그동안 칼같이 선을 지키던 그라서 갑자기 감정을 드러내면 어떻게 반응할지 의문이었다. 자신이 임신을 미끼로 그의 발목을 잡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가 불쾌해하던 스토커와 다름없는 존재처럼 여길지도 모른다. 그 생각을 하니 그 스토커처럼 자신을 싫어하면 어쩌나 두려운 생각이 들었다. 은조는 다른 명분을 내세웠다.
“제 말실수로 시작된 거잖아요. 제가 책임을 져야죠.”
책임? 혹시나 그녀도 자신처럼 마음이 있지는 않을까 기대했던 민후는 적잖이 실망했다. 단지 그 일에 대한 책임을 지기 위해서라고?
“아버님이 지분까지 주시면서 점점 수습하기 힘든 지경이 되었으니, 책임지고 싶어요.”
민후는 실망한 기색을 드러내지 않고 말했다.
“그렇게 생각할 필요까지는 없어. 중요한 건 당신 생각이야. 책임감으로 그런 중요한 결정을 하진 않았으면 해.”
민후가 덧붙여 말했다.
“그런 이유로 아이를 가지겠다는 건 내가 반대야. 그럴 필요 없어.”
자신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할머니 때문에 팔려오듯 결혼을 했는데 거기에 저런 말도 안 되는 책임감으로 아이까지 낳게 하는 건 그녀에게 너무 가혹하다는 생각이었다.
“대신 조건이 있어요.”
없던 것으로 하려는데 그녀가 조건을 제시했다.
“말해봐.”
은조는 민후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계약이 끝나고 이혼하면 전 다시 할머니에게 돌아가야 해요.”
“…….”
“저는…… 할머니의 꼭두각시처럼 살아왔어요. 돌아가면 할머니는 저를 또 다른 결혼 시장에 내어놓을지도 몰라요. 사업이익이 있다면 그러고도 남을 분이죠.”
민후가 생각해도 윤 회장이라면 충분히 그럴 수 있었다.
“그때는 재혼이니 60대 할아버지에게 팔려가듯 결혼하게 될지도 몰라요.”
민후의 미간이 확 좁혀들어갔다. 생각만 해도 피가 거꾸로 솟구치는 기분이었다. 은조가 진지한 눈빛으로 민후에게 말했다.
“계약이 끝날 때 할머니에게서 절 보호해주세요.”
그동안 할머니의 손에서 벗어나는 건 불가능하다고 생각했었다. 제아무리 날뛰어봤자 할머니의 손바닥 안이라고 생각했는데 민후와 살면서 그 생각이 바뀌었다. 그라면 할머니만큼, 아니 할머니보다 더 불가능한 것이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남편이라면 자신을 도와줄 수 있을 것 같았다. 생각지 못했던 조건이라 민후는 다소 놀란 표정이었다.
“이혼하고 나서도 할머니에게로 돌아가고 싶지 않아요. 저를 숨겨주던지, 어디 해외로 멀리 보내주던지 할머니에게 돌아가지 않게 도와줘요.”
약간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끝낸 아내의 얼굴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윤 회장이 강압적인 면이 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결혼 당시에 손녀를 아끼는 듯 말했었기에 이 정도로 심각한 관계인 줄은 몰랐다. 그녀가 그동안 얼마나 윤 회장으로부터 핍박받으며 힘들게 살아왔는지 알 것 같았다. 민후는 가슴이 욱신거리듯 아팠다. 조용히 은조에게 다가가 말했다.
“걱정하지 마. 도와줄게.”
그녀가 조건으로 내세웠지만, 조건이 아니더라도 그녀를 돕고 싶었다. 윤 회장에게 돌아가 다시 강요와 억압 속에서 살게 하고 싶지 않았다. 민후는 방금 아내가 했던 말 중 마음에 걸리는 게 있었다.
‘이혼하고 나서도 할머니에게로 돌아가고 싶지 않아요.’
그녀에게는 계약이 끝나면 이혼절차가 기정사실인가 보다. 임신을 약속하면서도 이혼에 대해 이야기하는 걸 보면 확실했다. 그녀도 자신에게 마음이 있는 건 아닌가 했던 생각은 착각이었나? 실망스러운 마음을 추스르고 민후가 말했다.
“그럼 정리된 건가? 나는 지분을 받고, 당신은 계약이 끝난 후 윤 회장에게서 독립하는 것.”
민후는 그녀와 진짜 부부가 되고 싶은 마음을 드러내지 못했다. 그래서 겉으로는 전략적 합의인 것처럼 말했다. 은조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도 마찬가지로 겉으로는 조건을 내걸고 합의하는 척했다. 서로 진심을 숨긴 채 아이를 낳는 것에 두 사람은 합의했다.
“그럼 이제부터 우리는 진짜 부부처럼 부부 역할을 다해야 해.”
비록 전략적으로 아이를 낳기로 했지만 그녀와 진짜 부부처럼 지내는 것만으로 민후는 가슴이 벅찼다.
“지금 모두 오해하고 있으니 노력은 빠를수록 좋아.”
민후가 어색함을 감추려는 듯 머리를 쓸어넘기며 말했다.
“오늘부터 침실을 같이 써.”
“오늘……부터요?”
당장 오늘부터 침실을 같이 쓰자니 은조가 당황한 얼굴로 쳐다보았다.
“가능한 한 가짜를 빨리 진짜로 만들어야지. 늦어지면 곤란해지잖아.”
은조는 얼굴을 붉히고 시선을 내렸다. 임신하기 위해 그와 함께 뭘 해야 하는지 잘 알고 있다. 떠올리니 민망해지는 것은 당연했다.
“오해하지마. 당장 오늘 뭘 하자는 건 아니야. 그전에 서로 친해질 필요가 있으니 침실을 함께 쓰자는 거야.”
얼굴을 붉힌 채로 은조가 고개를 끄덕였다. 공식 석상에서 팔짱을 끼는 것 말고는 그와 어떤 스킨십도 한 적이 없었다. 긴장되는 건 당연했다. 아이를 가질 목적으로 그와 한 침대를 사용한다니. 생각할수록 얼굴이 터질 듯이 뜨거웠다. 두 사람 사이에 어색한 공기가 흘렀다. 오늘부터 침실을 같이 쓴다니. 긴장되어 심장이 쿵쿵 뛰었다. 손에는 땀이 차고 몸이 경직되는 느낌이었다. 민후가 어색한 공기를 깨고 말했다.
“내가 이따가 당신 침실로 옮길게.”
은조가 가장 큰 안방 침실을 사용하고 있었기에 민후가 옮기겠다고 했다.
“……네.”
가늘게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한 은조의 심장이 점점 더 미칠 듯이 쿵쾅댔다. . . . 11시가 넘은 시각. 은조는 씻은 후에 침실을 이것저것 정리했다. 오늘부터 남편과 같은 침실을 사용해야 하니 시트도 새로 교체하고 베개도 새로 꺼냈다. 늘 하나만 두고 써왔기에 베개 두 개가 나란히 놓인 모습이 낯설었다. 베개가 너무 붙었나? 베개가 너무 가까이 있는 것까지 부끄러워진 은조가 베개를 서로 조금 떼어놓았다. 혼자 잘 때는 커 보이던 퀸사이즈 침대가 오늘은 무척 작게 보였다. 민후와 함께 자다 보면 살이 닿을 것만 같았다. 아까부터 긴장되어 두근대던 심장이 진정되기는커녕 시간이 지날수록 더 뛰었다. 그는 아직 일하는 중인지 서재에 들어가서는 조용했다. 은조는 침대 한쪽에 누웠다. 바로 옆, 민후가 누울 자리는 충분히 비워두었다. * 서재 책상에 앉은 민후는 손으로 이마를 받치고 서류를 보고 있었다. 정확히 얘기하자면 시선만 서류에 두었을 뿐 머릿속에는 온통 오늘 밤 아내와 처음 동침하는 생각뿐이었다. 충동적으로 꺼낸 제안에 그녀가 바로 승낙할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일사천리로 합의하고 바로 오늘부터 같은 침실을 사용하게 되다니, 꿈처럼 믿기지 않았다. 눈으로는 서류 속의 활자들을 읽어내려갔지만, 머릿속으로 들어가지 않아 다시 읽기를 반복했다.
“후우.”
긴장감이 가라앉지 않아 깊게 숨을 내쉬었다. 시간을 확인하니 자정이 다 되어가고 있었다. 이제 침실로 가서 자야 할 시간이다. 보던 서류를 정리하고 서재를 나왔다. 그리고 아내가 혼자 사용하던 안방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이쪽으로는 올 일이 없었는데 낯설었다. 침실문을 여니 조명만 두어 개 켜져 있고 아내는 침대 헤드에 등을 기대고 앉아 핸드폰을 보고 있었다. 민후가 들어온 기척을 느낀 것 같았지만, 쳐다보지는 않았다. 그녀도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아내가 앉은 반대편 쪽 침대로 다가갔다. 침실에는 긴장감이 흘렀다. 은조는 눈으로는 핸드폰을 보고 있었지만, 뭘 하려고 했는지 생각나지 않을 정도로 집중하기 힘들었다. 그가 침실로 들어온 순간부터 심장이 빠르게 뛰어서 뛰는 심장 소리가 그의 귀까지 들릴 것만 같았다. 침대에 그가 앉았다. 그리고 부스럭대는 소리와 함께 그가 윗옷을 훌렁 벗었다. 은조가 놀란 눈으로 그를 보았다. 서, 설마…… 오늘 바로 그걸 할 생각? 그전에 친해지기 위한 시간을 갖자고 하지 않았나? 그가 이불속으로 들어오며 은조가 쳐다보는 것을 보았다.
“왜 그래?”
“옷은 왜…….”
왜 옷을 벗었냐고, 오늘 바로 할 생각이냐고 묻고 싶었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잘 때 답답해서 뭘 입고 자지 못해. 이건 습관이니까 이해해줘.”
아…… 난 또. 긴장했던 탓에 은조는 멈추었던 숨을 안도와 함께 내쉬었다. 은조는 남편의 잠자는 습관이라니 이해해줄 수밖에 없었다. 잠깐 보았던 남편의 벗은 상체가 조각상을 보는 듯 완벽했다.
“이제 적응해야지, 서로에게.”
민후가 침대에 누우면서 말했다.
“대신 코 고는 습관은 없으니 안심해.”
민후가 은조를 보며 물었다.
“당신은 혹시 잠버릇 있어? 코를 곤다거나 이를 간다거나.”
은조가 고개를 저었다.
“아뇨. 그런 잠버릇은 없어요. 다만…….”
은조가 옆에 있던 기다란 인형 베개를 보여주었다.
“잘 때 이런 인형을 안고 자요. 안을 게 없으면 잘 못 자요.”
바디필로우를 곁에 두고 안고 자던 버릇이 있어서 안고 잘 것이 없으면 잘 자지 못한다. 민후가 피식 웃었다. 인형을 안고 자다니, 잠버릇도 사랑스럽네. 은조가 뭔가 할 말이 있는 듯 쳐다보다가 말했다.
“제가 왼쪽으로 돌아누워 자는 버릇이 있는데 이쪽으로 보고 자도 될까요?”
“편할 대로 해.”
민후는 귀여워 웃음이 나려는 걸 참고 대답했다. 은조가 조명을 끄고 침대에 몸을 눕혔다. 그러고는 고양이 인형 베개를 끌어안고 민후를 향해 옆으로 누웠다. 혼자만 자던 공간에 남편이 눈앞에 보이니 낯설고 어색했다. 민후도 조명을 끄고 똑바로 누워 눈을 감았다. 침실에는 어둠이 내려앉았다. 시간이 흘렀지만 민후는 바로 잠들지 못했다. 아내의 숨소리가 바로 옆에서 들리니 갈수록 정신이 맑아졌다. 아내의 잠든 숨소리를 듣는 것만으로 이렇게 가슴이 두근거릴 수 있는 걸까? 그러고 얼마나 지났을까. 민후가 고개를 살짝 돌려 아내를 보았다. 인형을 안고 자는 모습이 어쩐지 천진난만해 보였다. 조용하고 차분한 모습만 보아왔기에 이런 의외의 모습이 매력적이었다. 잠든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길고 풍성한 속눈썹 끝이 살짝 올라가 있다. 그녀가 두 팔로 꼭 안고 있는 인형을 보았다.
‘잘 때 이런 인형을 안고 자요. 안을 게 없으면 잘 못 자요.’
아이처럼 잠든 그녀를 보며 민후는 픽 웃었다. 민후도 베개에 머리를 기대고 잠을 청했다. 몇 시간이 지나고 몸을 움직이던 은조가 안고 있던 인형을 툭 떨어트렸다. 인형은 바닥으로 굴러떨어졌다. 얼마 후 팔이 허전한 그녀가 잠결에 손을 더듬었다. 더듬더듬 인형을 찾던 은조의 손이 민후의 몸을 더듬기 시작했다. 잠이 설핏 들었던 민후가 눈을 번쩍 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