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진짜 아기 가지는 건 어때?2021.09.18.
남편의 맨살에 입술이 부딪히고 안 그래도 빨갛던 은조의 얼굴이 더 빨갛게 달아올랐다. 은조가 발그레한 얼굴로 시선을 들어 민후를 보았다. 그가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미안. 괜찮아?”
낮고 다정한 목소리로 그가 물었다. 은조는 시선을 얼른 돌리며 말했다.
“괜찮아요.”
은조는 크게 돌아서 자신의 방으로 얼른 들어갔다. 문을 닫고 몸을 기댔다. 다리에 힘이 풀리는 것만 같다. 쿵쿵쿵. 가슴은 계속 빠르게 뛰었다. 손을 입으로 가져갔다. 미쳤어. 몸에 입술을 대다니. * 다음날, 출근하는 민후는 차창 밖을 보며 픽 웃었다. 어제 아내의 당황하던 모습이 귀여워 밤새 자꾸 웃음이 나왔었다. 그 모습이 아침까지도 생각나 입꼬리가 내려가질 않았다. 민후는 출근하자마자 회장님 실로 바로 갔다. 어제 오해했던 일을 사실대로 말씀드리기 위해서였다. 비서실로 들어가 말했다.
“회장님 출근하셨죠? 잠깐 면담 필요하다고 해주세요.”
비서가 인터폰에 대고 말했다.
“회장님. 강민후 전무님 오셨습니다.”
[어. 그래. 안 그래도 부르려고 했는데 잘됐네. 들여보내.]
강 회장은 여전히 들뜬 목소리였다. 강 회장을 모시는 황 비서가 문을 열어주며 말했다.
“회장님 기분이 아주 좋으십니다. 축하드립니다, 전무님. 회장님께 소식 들었습니다.”
이런. 벌써 소문을 내셨나? 민후가 난감한 얼굴로 황 비서를 보았다.
“근래 몇 년 동안 저렇게 좋아하시는 회장님 처음 뵙습니다.”
이실직고하러 찾아온 민후는 부담이 안 될 수 없었다. 사무실로 들어가니 강 회장은 누군가와 통화 중이었다.
“장 회장, 나도 곧 손주를 보게 생겼네. 하하, 그래. 둘째 놈이 먼저 임신을 했네! 그려. 아무렴 어때. 요즘 누가 그런 순서를 지키나? 허허.”
또 다른 누군가에게 손주 보게 되었다고 자랑을 하고 계셨다. 민후는 더욱 난감해졌다. 빨리 사실을 털어놓아야 하는데. 강 회장은 환한 얼굴로 통화하며 민후를 보고 소파에 앉으라고 손짓했다. 민후는 난감한 얼굴로 빨리 통화가 끝나기를 기다렸다. 저렇게 자랑하고 싶으셨는데 어떻게 임신이 아니라고 얘기할까? 민후는 손으로 뒷목을 쓸어내렸다. 호탕한 웃음과 함께 통화를 끝낸 강 회장이 소파로 다가왔다.
“우리 예비 아빠 강 전무, 어떻게 알고 오셨소? 안 그래도 내가 할 얘기가 있어서 부르려고 했다.”
강 회장이 상석에 앉으며 서류봉투를 툭 내밀었다.
“내가 전에 했던 얘기 기억하지? 먼저 손주를 안겨주는 놈한테 지주사인 한주홀딩스 지분 주겠다고 한 거.”
강 회장이 흐뭇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할아비가 되는데 뭐 해줄 게 없나, 하다가 미리 지분 주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싶었지.”
민후가 놀란 눈으로 두툼한 봉투를 내려다보았다.
“지분 10%다.”
강 회장이 봉투를 민후 쪽으로 밀었다.
“이건 임신 축하 선물로 받아라. 나머지는 출산 축하 선물로 주마.”
아, 큰일 났다. 이를 어쩌지? 민후는 난감한 시선을 들어 강 회장을 보았다. 지금까지 보아온 아버지의 모습 중에 가장 행복해하는 얼굴이었다. 민후가 어렵사리 두바이의 큰 사업을 따냈을 때도 저렇게 기쁜 얼굴은 아니었다. 그렇게 손주가 보고 싶으셨을까? 그동안 손주, 손주. 노래를 부르시기는 했어도 이렇게나 간절하게 바라시는 줄 몰랐다.
“네가 차기 경영권을 잡는 게 여러모로 좋을 것 같다. 기현이 녀석은 열정과 욕심이 너무 과해. 그게 사업가로 장점이 되기도 하지만 치명적인 단점이 될 수도 있다.”
강 회장은 내심 민후가 먼저 임신을 해서 다행이라 여겼다.
“기현이 놈이 네가 회장직에 올라도 순순히 받아들였으면 좋겠는데.”
강 회장이 걱정스럽게 말하는 사이 민후는 제 앞에 놓인 증권 봉투를 보며 고민했다. 주변에 이미 자랑도 하신 것 같은데 어떻게 사실대로 밝힐 수가 있을까? 했던 말 주워 담는 그런 모양새 빠지는 상황은 아버지의 성격상 자존심 상해서 노하실 것이 뻔했다.
“그래, 무슨 일로 왔어?”
강 회장이 싱글벙글 웃는 얼굴로 물었다. 민후는 도저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일단 지금은 타이밍이 아닌 것 같았다. 사실을 알릴 방법을 좀 더 고민해봐야겠다.
“아닙니다. 그냥 차 한잔 함께 하고 싶어서요.”
민후가 둘러대자 강 회장이 웃으며 비서에게 말했다.
“여기, 차 좀 가져와.”
* 민후는 퇴근하기 전 아내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버지께 말씀을 못 드렸어. 벌써 주변에 자랑도 하신 것 같은데 어떻게 말씀드려야 할지 모르겠어.”
[벌써 자랑도 하셨다고요? 어떡하죠?]
“오늘 일찍 퇴근할 건데, 이 건으로 얘기 좀 할 수 있어?”
[네. 그래요. 저도 곧 퇴근해요.]
민후는 퇴근하고 바로 집으로 갔다. 아버지에게 어떻게 사실을 알릴 것인지 함께 고민해보자는 핑계로 아내와 오붓하게 저녁 식사도 하고 싶었다. 그 일이 있고 난 후 아내와는 좀 더 가까워진 느낌이다. 이렇게 조금씩, 천천히 아내에게 다가가고 싶었다. 오늘따라 퇴근하는 길이 즐거웠다. 집에 도착하니 아내도 이미 퇴근해 집에 있었다.
“일찍 오셨네요. 씻고 나오세요. 저녁 거의 다 됐어요.”
“음.”
집 안에는 맛있는 냄새가 풍기고 아내가 퇴근하는 자신을 맞이했다. 자신이 꿈꾸던 행복하고 단란한 가정의 모습이라 민후는 행복했다. 아내와 진짜 이런 가정을 꾸리고 싶었다. 드레스룸으로 들어가 넥타이를 당겨 풀며 민후는 여느 신혼부부 같은 자신들의 모습에 가슴이 설렜다. 도우미가 불고기 전골을 내어왔다.
“전무님 일찍 오신다 해서 급하게 불고기 전골을 했는데 맛이 어떨지 모르겠어요. 전무님 일찍 오시는 거 알았으면 좋아하시는 해산물을 좀 사다 놓을 걸 그랬나 봐요.”
“불고기 전골도 맛있습니다. 아주머니, 정리는 우리가 할 테니 일찍 퇴근하세요.”
민후가 도우미를 일찍 퇴근시켰다. 아내와 오붓하게 식사하며 임신 해명에 관한 얘기를 하기 위해서였다.
“네. 그럼 두 분 맛있게 식사하세요.”
도우미가 나가고 두 사람이 조용히 식사했다. 이렇게 둘만 마주 앉아 식사했던 일이 별로 없었다. 민후가 조용히 밥을 먹으며 말했다.
“아버지가 비서실에 임신했다는 얘기를 해서 회사에도 금방 소문이 퍼진 것 같아.”
은조가 손을 입으로 가져가며 난감한 얼굴을 했다.
“어머, 어떡해요.”
“아버지가 너무 행복해하셔서 도저히 입이 안 떨어졌어.”
“어쩌죠? 어떻게 해야 하죠?”
“그래서 생각을 해봤는데.”
천천히 음식을 씹어 삼킨 민후가 조심스레 말했다.
“유산되었다고 얘기하는 건 어떨까? 초기에는 유산되는 경우가 많다고 하던데.”
은조가 두 손으로 입을 가리며 눈만 깜빡거렸다. 그렇게 하면 자연스럽게 지나갈 수는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없는 생명이지만 그렇게 거짓말로 둘러대는 것이 찜찜했다.
“그런…… 방법밖에 없을까요?”
민후가 짧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
“나도 좀 마음에 걸리기는 하지만, 그 방법이 주변에 자랑까지 하신 아버지 체면도 살릴 수 있을 것 같아.”
“그러면…… 제가 거짓으로 병원에 입원 같은 것도 해야 하겠죠?”
은조는 영 내키지 않은 얼굴이었다. 오해를 막기 위해 또 다른 거짓말을 해야 하는 상황이 불안했다. 두 사람은 말없이 식사를 이어갔다. 민후는 젓가락으로 밥을 헤집으며 생각에 빠졌다. 예전부터 아내와 진짜 부부가 되어 단란한 가정을 꾸리고 싶었다. 진짜 부부처럼 같은 침대를 쓰고 밤새 대화도 나누며 지내고 싶었다. 아내와의 사이에서 아이도 낳고 싶었다. 아내는 여전히 계약 결혼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어제 울면서 자신에게 화를 냈던 일, 샤워하고 나와 마주치자 얼굴을 붉히던 모습이 떠올랐다. 어쩌면 아내도 제게 호감을 가지고 있을지도 모른다. 자신처럼 진짜 부부가 되고 싶어 하는지도. 진짜 부부……. 민후가 시선을 들어 아내를 보았다. 아내에게 진짜 아이를 갖자고 제안해 볼까? 거짓이 아니라 진실로 만들자고. 민후는 방금 자신이 떠올린 생각에 스스로 어이가 없어 픽 웃었다. 미친 생각이지, 진짜 아이를 갖자고 제안이라니. 아니, 어쩌면 아내도 동의할 수도 있는 문제다. 민후가 시선을 들어 아내를 힐끗 보고 말했다.
“그리고 오늘 아버지가 한주홀딩스 지분 10%를 주셨어.”
은조가 고개를 들어 그를 보았다. 손주를 보고 싶어 지주사 지분을 조건으로 걸었던 회장님의 말을 은조도 기억하고 있었다. 자신이 임신했다는 거짓말 때문에 주신 거라는 얘기다.
“나머지 20%는 출산선물로 주시겠다고 하셨어.”
은조가 젓가락을 내려놓고 손으로 입을 막았다. 철석같이 믿고 있는 회장님을 속이고 있다는 죄책감에 은조는 괴로웠다.
“정말 미안해요. 괜히 나 때문에…….”
오해를 불러일으킨 자신의 경솔한 발언 한마디의 파장이 이렇게나 커질 줄은 몰랐다.
“원래 지주사 지분에 큰 욕심이 없었는데.”
민후가 젓가락으로 반찬을 집으며 말했다.
“오늘 받고 보니 욕심이 생겼어.”
민후는 거짓으로 지분 욕심 핑계를 댔다. 아내와 가까워지고 싶은데 계기가 필요했다. 은조가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나머지 20%도 받고 싶어졌어.”
민후의 말에 은조는 눈만 깜빡이며 그를 바라보았다.
“우리…….”
민후가 시선을 들어 은조를 보고 말했다.
“진짜 아이 낳는 건 어때?”
은조는 눈만 끔뻑거릴 뿐 말이 없었다. 그녀는 계약 결혼으로만 생각하겠지만, 민후는 어떻게든 그녀와 가까워질 기회를 만들고 싶었다. 와중에도 스스로 말도 안 되는 제안이라는 생각은 떨칠 수가 없었다. 그래도 민후는 이왕 뱉어버린 말, 끝까지 가보자 하는 생각으로 말을 이었다.
“당신이 원한다면 결혼하면서 썼던 계약서, 거기에 추가해도 좋고.”
민후는 아내와 진짜 부부가 되고 싶은 마음에 도박을 걸며 형식으로 계약서를 앞세웠다. 자신이 생각해도 미친놈이다, 싶었다. 계약서에 아이를 임신하고 낳는 조항을 넣는 게 말이 되나? 당연히 아내가 거절할 거로 생각했다. * 은조는 자신이 제대로 들은 게 맞나 의심이 갔다. 진짜 아이를 낳자니? 나머지 지분 20%를 더 받고 싶다고 그가 진짜 아이를 낳자고 말했다. 은조는 자신이 실수로 저지른 일로 지분까지 받게 되었고 이렇게나 일이 커진 것에 대한 책임감을 느꼈다. 남편이 지분 욕심을 내는 것은 당연했다. 형 기현과 경영권을 두고 신경전을 벌이고 있는 것을 알고 있었다. 남편에게 기회가 갈뻔했는데 그걸 다시 끊어내는 꼴이 될 것이다. 오해를 불러일으킨 자신의 경솔한 한마디로. 남편은 그걸 책임지라고 저런 제안을 하는 것 같았다. 은조는 자신을 응시하는 민후를 바라보았다. 그의 짙은 회갈색 눈동자와 눈이 마주치니 가슴이 쿵쿵 뛰었다. 언제인지부터 모르게 남편을 좋아하고 있었다. 그것을 깨달은 지 불과 며칠밖에 되지 않았다. 남편을 좋아하고 있는데 그가 아이를 낳자고 제안한다. 갑자기 얼굴이 화르르 달아오르는 느낌이다. 그가 제안하는 것을 받아들이면……. 어쩌면 진짜 가족이 되지 않을까? 계약 기간이 지나면 남남이 되는 것이 아니라 진짜 부부, 진짜 가족이.
‘3년만 위장 부부처럼 살다가 이혼하면 돼. 강 전무도 그걸 원해. 강 전무에게는 결혼이 그냥 비즈니스일 뿐이야.’
할머니는 3년만 얌전하게 며느리 행세를 하다가 이혼하고 오라고 했다. 계약 기간이 지나면 이혼과 함께 다시 할머니에게로 돌아가야 한다. 계약이 끝나도 그와 이혼하기 싫었다. 다시 할머니에게로 돌아가기 싫었다. 그와 진짜 가족을 이루고 살고 싶다. 은조가 민후를 빤히 응시하며 말했다.
“네, 좋아요. 아이…….”
민후의 동공이 순간 흔들렸다.
“낳아요, 우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