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4화 〉7. 단서
도로스는 고개를 숙였다.
후웅 하고 묵직한 팔이 방금 전까지 그의 머리가 있던 곳을 후려쳤다. 목 뒤를 긁는 풍압에 소름이 돋는다. 도로스는 역수로 쥔 단검을 칼날이 위로 가도록 잡고, 그대로 위쪽으로 비스듬히 찔러넣었다. 무언가를 궤뚫는 찝찝한 감촉과 함께 그를 습격했던 돌연변이가 추욱 늘어진다.
내리 누르는 시체를 온 힘으로 옆으로 밀치지 않았다면 분명 깔려서 허우적 대고 있었을 게 분명했다.
점점 가빠오는 호흡을 애써 침착하게 달래며 그는 재빨리 주위를 훑었다. 소란스럽게 마을을 휘감은 어둠 속에서 곳곳에 불길이 일었다. 그덕에 시야를 확보하는데엔 어려움이 없었다.
도로스는 저도 모르게 입술을 깨물었다. 그의 시야에 들어오는 광경은 참혹하기 그지 없었던 까닭이다.
시야 한 구석에서 누군가가 죽어간다. 사방에서 비명과 괴성이 난무했다. 사람이건 돌연변이건 모두 뒤섞여서 온갖 유혈이 낭자했다.
"막아아아!!"
"빌어먹을 돌연변이 새끼들!!"
자경대는 절규섞인 외침과 함께 발악하듯 움직였다. 낡아빠진 총이라도 쏘고 군데군데 이가 나간 냉병기를 증오스러운 돌연변이들을 향해 휘둘렀다. 가족이, 친척이, 이웃이 죽어나가는 걸 제 눈으로 똑똑히 본 이들의 분노는 매섭다.
격렬한 분노에 휩싸여 기적과도 같은 전투력을 선보이자, 순식간에 한 무더기의 돌연변이 시체가 탄생했다. 그러나 기뻐할 시간도 여유도 없었다. 적은 아직 많고 많았다. 전사들을 마을을 지키기 위해, 죽은 사람들을 위해 한계이상의 전투력을 발휘했다.
그러나 부족하다.
질낮은 장비와 머릿수 앞에 자경대는 천천히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도로스는 그 장절한 광경 앞에 말을 잊었다. 분노가 아비규환으로 바뀌는데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흩날리는 선혈. 둔탁한 강철의 소리와 총탄의 세례. 울부짖음. 괴성. 비명. 단말마. 세상에서 가장 저열한 것들이 이 자리에 있었다. 사람들을 덥치고 게걸스럽게 포식하는 돌연변이들. 움푹꺼진 복부와 그 사이로 새어나오는 창자. 억눌린 채 새어나오는 처참한 비명.
마을 단위 규모의 전투를 치뤄본 적 없는 도로스는 정신없이 울려대는 감의 경고에 가까스로 제정신을 붙잡았다. 취한 것처럼 반쯤 정신을 놓고 기계적으로 덤벼드는 녀석들을 해치우다보니 몇이나 쓰려뜨렸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갓 지옥에서 기어올라온 아귀들은 여전히 줄어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총소리와 돌연변이들의 기괴막측한 울음소리가 뒤섞여 골을 울렸다. 방독면을 끼고 있건만 철과 화약의 냄새가 코를 아릿하게 찌르는 것 같았다.
근처에도 하이톤의 비명소리가 들렸다. 비명소리라기보단 단말마에 가까웠다.
그러나 도로스는 그 비명의 진원지에 한 발짝도 가까워질 수 없었다.
사방에서 수없이 달려드는 돌연변이들을 상대로 제 목숨 보전하기 바빴기 때문이다. 제 목숨마저 도외시하고 사람들을 구하러 달려갈 정도로 도로스는 멍청하지 않았다. 자기가 먼저 살아야 남을 돕던지 말던지 할 것이 아닌가?
그렇기에 애초에 마을 사람들에게 돌연변이들의 공습에 관해서 말하지 않았던 것이다. 괜한 변수로 일행 모두의 목숨을 위험에 빠뜨릴 수는 없으니까. 아무래도 만난지 며칠도 되지않은 데면데면한 이들보단 카지트들이 더 소중했다.
물론 마을 사람들을 돕고 싶은 마음도 사실이다. 고향 마을이 생각났으니까. 그렇기 때문에 다른 일행들도 고향을 그리워하는 그를 배려해서 의견을 바꾸었다고 도로스는 생각했다. 그냥 조용히 마을을 떠난다면 신경쓰지 않아도 될 것을, 굳이 위험을 무릎 쓸 필요는 없었던 것이다.
누가 위험을 자초하겠는가? 그러니 카지트들은 큰 결정을 한 것이다.
그렇기에 도로스는 그들에게 고마워하는 한 편, 미안한 감정을 느꼈다. 그리고 스스로의 판단이 옳은 것인지에 대한 고민 또한.
그러나 고민 할 새는 길지 않았다. 시야에 들어오는 것만 셋. 돌연변이 세 마리가 그에게 달려들고 있었던 까닭이다. 셋 모두 빠른 속도다.
도로스는 한 손에 숏소드를, 다른 손엔 보우건을 쥐었다. 상대의 정확한 수를 모르니 볼트를 아껴야 한다.
보우건을 적들에게 대강 겨누고 연사. 수족처럼 다루는 애병은 빗나가는 일 없이 한 마리에 한 발씩 세 발 모두 깔끔하게 명중시켰다. 그러나 기괴한 울음소릴 내며 쓰러지는 둘과 달리 한 마리는 속도를 줄이는 일 없이 그대로 달려든다.
거미의 하체와 곰의 상체를 하고 있는 돌연변이. 심장을 노려 쐈으나 가죽이 두꺼운 나머지 치명상이 되지 못한 듯 하다. 그 속도는 결코 느리지 않다. 그대로 몇 초 후면 도로스의 지척까지 도달하리라.
도로스는 지체없이 두꺼운 털로 가득한 가슴보단 머리를 노리기로 했다.
그러나 방금 전의 사격으로 녀석도 보우건의 위험성을 느꼈는지 두손으로 재빠르게 머리를 가렸다. 최소한의 지성이 엿보인다. 약간의 지성이나 그를 곤란케 하긴 충분하다.
거리를 벌려야 했다. 보우건이 통하지않는다면 한 뼘보다 좀 더 큰 숏소드로는 충분한 데미지를 주기 힘들다. 도로스는 머릿속으로 녀석과의 속도를 대충 감으로 짚어내며 뒤로 몸을 날렸다.
어떻게든 빨리 해치우지 않으면.
혹여 다른 돌연변이라도 가세한다면 골치아플 게 틀림없다. 어떻게든 거리를 벌리고 등에 맨 리볼버 라이플을 사용해야 했다.
그러나 도로스의 걱정은 기우로 끝났다.
퍼엉!! 하는 소리를 내며 배에 구멍이 뚫린 돌연변이는 천천히 쓰러졌기 때문이다. 도로스는 뭐가 뭔지 영문을 모르겠다는 시선으로 그 뒤를 응시했다.
둔중하게 쓰러지는 돌연변이의 뒤에서, 친숙한 모습이 몸을 드러냈다.
"조심하게."
태연하게 돌연변이의 배를 터뜨린 프로바움은 다음 사냥감을 향해 몸을 던졌다. 도로스의 시선이 그를 쫓았다. 그 화력에 걸맞게 장전속도가 긴 페퍼박스 대신, 각각 너클을 끼운 그의 두 주먹은 매섭기 짝이 없었다.
파이프를 입에 삐뚜름히 꼬나문 채, 노장은 주먹을 휘둘렀다.
일격일살.
검은색 양복과 페도라를 벗어던지고, 하얀 와이셔츠의 소매를 단단히 접어올린 그는 나이와 정반대의 움직임을 보였다. 마치 무게가 없는 것같은 경쾌한 스텝. 그완 반대로 내뻗는 주먹은 강맹하다.
부웅, 하는 파공성과 함께 쭉 내지르는 호쾌한 일격.
그를 향해 이빨을 드러내며 달려들던 돌연변이의 머리가 호쾌하게 깨진다. 그러나 프로바움은 눈길조차 주지않았다.
그의 눈길은 이미 다음 목표를 찾고 있었다.
"...상황이 그다지 좋진 않은데.."
어느새 그의 뒤로 다가온 카지트의 말에 프로바움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름 분전하고 있긴 하지만 기본적인 질이나 숫자에서 밀리니 어쩔 도리가 없군. 게다가 기습까지 당했으니."
주위를 둘러본 프로바움은 쯧쯧, 혀를 차며 냉정한 판단을 내렸다. 이대로라면 마을 측의 패배가 확실했다. 기본적인 조건에서 밀리는 판에 기습까지 당했으니. 도로스들이 분전하지 않았다면 이미 진작에 망하고도 남았을 것이다.
이 상황을 역전시키는 방법은 단 한 가지. 프로바움과 카지트는 눈빛을 교환했다. 십 년지기는 서로 생각하는 바가 같음을 깨닫고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너구리 수인을 잡을게."
"가능..하겠나?"
카지트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프로바움은 접근하는 돌연변이들을 격살하면서 나즈막한 한숨을 내뱉었다.
"젠장..미안하네. 위험한 일을 자꾸 자네에게만 맡기는 것 같군."
점점 말라가는 얼굴과 생기를 잃어가는 털 위에 흩뿌려진 피는 동정심을 유발하기 충분했다. 그러나 카지트는 말없이 고개를 저었다. 그럼에도 프로바움은 여전히 작은 죄책감이라도 느낀 듯 안타까운 눈길을 보냈다.
돌연변이들의 사령탑일 것이 확실한 너구리 수인을 때려눕힌다면 그들에게도 승기가 보일 터다. 애초에 저들끼리도 서로 죽이고 먹어치울 정도로 흉폭한 녀석들이니, 조종에서 벗어나기만 한다면 지리멸렬하게 흩어질 것이다. 반쯤 그런 생각을 했기에 도로스에게 찬성했던 것이고.
프로바움은 반쯤 썩고 녹아내린 이빨을 들이미는 양머리의 돌연변이를 분쇄하며 물었다.
"닥터는?"
자동인형의 물음에 카지튼는 턱짓으로 위를 가리켰다.
촌락에서 그나마 제일 높은 건물의 지붕에서, 귀뚜라미는 열심히 방아쇠를 당기고 있었다. 두 손으로 저격총을 들고 나머지 두 손으로 장전을 하니, 그 속도가 거의 화약식 총에 버금갔다. 위력을 거의 한계까지 높인 총이라 데미지도 거의 화약식 총에 근접할 것이다.
연신 당겨대는 방아쇠는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구하고 있다. 물론 닥터 윌슨은 혼자이고 적들은 수 십으로 곳곳에 퍼져있으니, 모두를 구할 수는 없다. 그렇지만 인명피해를 최소화하는 그의 지원 덕분에 아직까지 전투가 이어질 수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저 쪽은 잘하고 있는 듯 하구만. 너구리놈의 위치는 아나?"
카지트는 고개를 살짝 끄덕이곤 몸을 돌려 화연과 혈향 속에 몸을 던졌다. 뒤에서 헛 참, 하고 프로바움이 중얼거리는 게 들렸으나 그는 별로 개의치 않았다.
마을 주민들과 자경대를 위협하는 돌연변이 몇 놈을 빠르게 해치운 그는 재주좋게 지붕 위로 올라갔다. 바닥 위에 널린 게 먹이라 카지트에게 눈길을 주는 놈은 하나도 없었다.
그는 도움이 필요해보이는 곳에 총탄을 몇 발 씩 박아넣곤 목표로 삼은 곳으로 몸을 날렸다. 딱히 비명이나 절규 때문에 도와준 것이 아니다. 자경대든 마을사람이든 숫자가 많을 수록 그의 일행들에게 향하는 돌연변이를 잠깐이나마 줄일 수 있기 때문이다.
도로스들을 제외한 다른 이의 비명이나 단말마 따윈 그의 관심을 끌 수 없었다.
목표로 삼은 장소에 사뿐히 내려앉은 카지트는 눈 앞의 문을 노려봤다. 그가 도착한 장소는 너구리 수인의 집.
귀를 기울이자 부스럭거리는 소리와 낮게 그르렁 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누군가 숨어있는 듯 했다. 필시 너구리 수인임이 틀림없다. 그 곁의 그르렁거리는 소리는 호위로 둔 돌연변이겠지. 심증이 있던 터라 추측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카지트는 트리플 배럴 소드오프 샷건을 한 손에 꼬나쥐고 문을 발로찼다. 소리와 기척에 반응해 달려드는 녀석이 둘. 이미 녀석들의 존재를 예측한 카지트의 샷건이 불을 뿜었다. 실내에선 샷건만큼 확실한 무기가 없다. 한 순간에 걸레쪼가리로 화한 돌연변이들은 바닥에 고꾸라졌다.
그러나 카지트는 그런 것 따위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덜덜 떨며 그를 노려보는 너구리를 스쳐지나간 그의 시선은 바닥 한 구석에 못박혔다.
그곳엔, 고철덩어리가 되어버린 파울로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