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판자촌의 유령선장-0화 (1/128)

0화

프롤로그-안개의 나팔

신대륙이 발견되고 해군과 해적이 바다를 쏘다니는 시대. 언젠가부터 이러한 충고가 뱃사람 사이를 유령처럼 돌아다녔다.

‘짙은 안개 속에서 음울한 뱃고동 소리가 들리면 항복할 준비부터 해라. 그러면 적어도 그 밑에서 영원히 복무하게 되는 일은 없을 테니까.’

***

번화한 항구 도시는 언제나처럼 시끌벅적했다.

형형색색의 깃발과 무늬들로 장식된 천막이 벽돌로 지어진 집들 사이에 드리워졌고 그 밑으로 부지런한 걸음들이 북적였다.

새벽동안 고기잡이를 하고 돌아온 어부나 수산물을 사러 시장을 기웃거리는 아낙네부터, 마차에 육중한 상자를 싣는 일꾼과 어구를 관리하는 데 바쁜 장인들, 한쪽에서는 대장간에서 땅땅거리는 쇠 내려치는 소리가 은은한 박자를 자랑했으며, 혹여 도둑이 있지는 않은지 정해진 시간대로 머스킷을 한쪽 팔에 메고 순찰하는 경비병들까지.

여느 때처럼 소란과 사건 사고가 뒤엉키는 활기 넘치는 도시였다.

안개가 다가오기 전까지는.

수평선 너머에서부터 짙은 해무(海霧)가 몰려오기 시작하는 것이 보였다. 기온차가 큰 산에서 갑작스럽게 만나는 밤안개 같은 습기가 수평선 너머에서부터 기어오고 있었다. 그 모습은 마치 회색의 무수한 손아귀들이 꿈틀대는 것처럼 느껴졌으며, 보기만 해도 모든 이들에게 불안을 심어주었다.

등대지기가 화들짝 놀라 등대에서 내려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다녔고 이 ‘기이한 바다안개’에 대한 소문을 익히 들은 적이 있는 항구 사람들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사람들의 발이 빨라지고 달리는 이들이 늘어났다. 활기는 경기로 뒤바뀌고 아이들의 손을 붙잡은 부모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집 문이 쾅쾅 닫히고 창문이 턱턱 닫히고 커튼이 드르륵 쳐졌다. 경비병들이 비상종을 땡땡 울리고 절그럭거리는 머스킷을 바짝 잡고는 서둘러 복귀했다.

짙고 짙은 안개.

일반적인 하얀 안개가 아니었다. 다 타고 남은 모닥불의 연기 같은 회색의 뿌연 색깔.

마치 수천 수만 개의 잿더미에서 발산되는 연기들의 집합체처럼, 안개는 항구 도시를 해일처럼 집어삼켰다.

부으으으-

그리고 바다 저편에서부터 울리는 음산한 뱃고동 소리.

깊고 깊은 동굴 속에서 울리고 울려 입구까지 닿아 흐려진 인간의 비명소리를 희끄무레하게 닮은 그 소리는, 낮지만 너무나 선명하게 모두의 뇌리에 새겨졌다.

그 소리는 모든 이들의 뼛속까지 오한을 느끼게 하는 힘이 있었다. 고작 한 번의 소리였음에도 귓바퀴를 맴돌며 계속해서 그 소리가 들리는 듯한 환청을 일으켰다.

부두에 있는 이들은 볼 수 있었다. 바다에서 악명을 떨치는 ‘유령선’의 등장을.

안개를 뚫고 선수 끝의 뾰족한 보우스프릿(bowsprit)이 나타났다. 그 끝에는 커다란 배에 어울리지 않는 조그만 종이 교수형당한 시체처럼 덩그러니 매달려 있었다.

그 뒤로 서서히 거대한 체구의 범선의 형체가 드러났다.

여기저기 구멍 난 선체, 불에 타기라도 했는지 그을음이 가득하고 항해는 절대로 불가능할 다 찢어진 돛. 선체를 이루는 나무는 관리는 내다버렸는지 검게 곰팡이가 슬어 있었고 갑판 위에는 마치 판자촌을 연상시키는 막집들이 거북이 등껍질처럼 덕지덕지 붙어 있어 배가 한층 더 크게 보였다.

구멍이 숭숭 뚫린 선체 옆구리의 포문과 갑판 위 구조물 사이사이에서는 새빨갛거나 새파랗게 녹이 슨 대포들이 머리를 내민 채 검은 아가리를 벌리고 있었다.

그야말로 유령선이라는 말이 부족하지 않은 배였다.

부두의 누군가가 넋이 나간 채 중얼거렸다.

“유, 유령남작......”

거대한 배가 천천히 바다를 가로질러 부둣가에 살포시 멈추었다.

무릇 범선이라 함은 바람의 힘으로 움직이는 것이라 그 큰 거체가 일순간에 멈추는 건 불가하다. 그러나 이 유령선은 보이지 않는 벽이 앞을 막은 듯 부둣가에 정확히 멈춰 섰다.

미처 부둣가를 떠나지 못한 사람들은 볼 수 있었다.

유령선 한쪽 옆구리에 마치 유폭이라도 당한 것처럼 큼지막하게 뚫린 구멍을.

그 정도로 구멍이 크게 뚫렸으면 그 안쪽이 보여야 할 테지만, 어찌된 일인지 내부 구조는커녕 그저 검은 물감을 배에 묻혀놓은 것처럼 까맣게만 보였다.

덜컹하고 그 기이한 구멍에서부터 판자가 튀어나와 부두 접안 시설과 맞닿았다. 그리고 안이 보이지 않아 마치 검은 벽처럼 보이는 구멍에서 누군가의 발이 모습을 드러냈다.

검은 가죽부츠가 턱하고 판자를 밟았다. 가죽부츠의 뒤를 따라 잘그락거리는 갑옷 소리와 터덜거리는 발소리들이 뒤따랐다.

다리에 딱 달라붙는 흰 직물 바지가 보였으나 길고 파란 코트자락에 절반 이상 가려져 있었다. 그 위로는 눈에 띄는 음침한 빛깔의 푸른색이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푸른색 외투에는 금빛 단추들이 한 줄로 단정히 달려 있었고 답답할 정도로 꽉 조인 앞섶과 옷깃은 보는 사람이 다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맨 아래쪽 단추는 풀려 있었지만 그 사이로 툭 튀어나온 칼자루가 대신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상체를 비스듬히 가로지르는 가죽띠에는 단검 몇 개가 줄줄이 박혀 있었고 회색 망토로 가린 오른쪽과는 달리 훤히 드러낸 왼팔은 허리춤의 권총집에 손을 대고 있었다.

창백한 피부와 짙은 눈 밑, 얼굴을 가로질러 오른쪽 눈을 가린 검은 안대가 눈길을 끌었다. 얼굴은 수려했으나 앳된 티를 벗지 못했고 작은 체구와 합쳐져 그 자리에 어울리지 않는 소년을 보는 듯했다.

바다 깊은 곳의 해초로 살짝 물을 들인 듯한 어두운 청록색 빛이 도는 회색 머리카락이 발걸음에 따라 가볍게 흔들렸다. 그 위로는 큼지막한 검푸른색의 선장 모자가 흰 문양을 박은 채 얹혀 있었다. 흰 문양은 절규하듯 입을 쩍 벌린 해골의 뒤로 총과 칼이 교차되어 있는 모습이었다.

부두에 발을 디딘 장본인, 유령남작이 호위병력을 대동한 채 좌중을 둘러보며 외쳤다.

“공-남작(Duke-baron)으로서, 이제부터 이 항구는 제가 섬기는 국가의 영토에 귀의되었음을 선포하겠습니다.”

나긋하지만 감정은 모래밭처럼 바싹 메마른 사무적인 느낌이 강하게 드는 목소리였다. 공-남작이라는 듣도 보도 못한 해괴한 작위를 내세우며, 유령남작은 발칸 반도의 항구도시를 자신이 소속된 국가의 영토로 강제 편입시키겠다는 선언을 내뱉었다.

여러모로 파격적인 등장과 행보였다.

부둣가에는 도시를 다스리는 영주나 공무원이 아닌, 채 피신하지 못한 낮은 계급의 사람들밖에 없었다. 뒤늦게 이 도시를 지배하는 영주와 그의 사병들이 유령선이 정박한 부두로 우르르 몰려들었다. 그들은 거대한 유령선의 모습과 유령남작 뒤의 부하들의 섬뜩한 모습을 보고, 그리고 주변 사람들에게서 유령남작의 선언을 전해듣고는 안색이 파리해졌다.

“이, 이곳은 세르벤테 공국의 영토요! 어째서 이런 폭거를 저지르는 것이오!”

“이유라.”

유령남작이 영주의 눈을 검은 시선으로 응시했다. 무표정으로 그저 쳐다만 보는 것임에도 영주는 목이 달아나는 듯한 느낌에 목을 더듬어야 했다.

“위에서 명했고, 나는 이행하는 것뿐입니다.”

유령남작이 가슴에 손을 살짝 얹으며 부드럽게 설명했다. 정작 듣는 이들은 그 ‘부드러운’ 말투가 어설프게 사람을 따라하는 것처럼 보여 불쾌감이 들었다. 말투와 몸동작과는 다르게 표정은 하나도 변하지 않았기에.

“아니면, 설마 피를 보고 싶은 겁니까?”

그 말에 모두가 유령남작 뒤의 병력들에게 시선을 주었다.

남작의 바로 뒤에서 새카만 갑옷을 두른 기사가 투구에서 붉은 안광을 발산하며 주변으로 검은 기운을 안개처럼 퍼뜨리고 있고, 그 뒤로는 몸 전체가 반투명한 푸른빛을 띠는 이가 마찬가지로 붉은 안광을 번쩍이며 킬킬거리고 있었다. 그 사이로는 명백히 전설 속의 늑대인간이라 칭할 법한 이족보행 짐승이 툭 튀어나온 채 으르렁거렸다.

맨 뒤에는 사람보다 훨씬 큰 덩치의 일그러진 괴물이 대포를 옆구리에 낀 채 콧바람을 내뿜고 있었다.

“아,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에 주눅든 영주가 볼멘소리를 내뱉자.

절그럭

유령남작이 허리춤의 머스킷 권총을 뽑아 겨누었다. 범상치 않은 권총인지, 뒷부분에서 파르스름한 연기가 밤안개처럼 생겨나 흩어지고 있었다.

“이렇게까지 ‘평화로운’ 제의를 하는데 굳이 거부하겠다면야, 어쩔 수 없이 실력 행사를 해야겠는데요. 어떠십니까, 영주님의 생각은? 소문은 믿을 게 못된다지만, 저에 관한 소문은 그다지 살이 붙지 않았다고 들었습니다.”

공손한 말투와는 정반대로 이 지역의 관리자에게 무례하게 권총을 겨누는 유령남작. 영주를 내려다보는 그 무정한 눈동자는 지금 이 권총의 방아쇠를 얼마든지 당길 수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었다.

“아, 아닙니다. 포트 풀라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영주는 고개를 수그릴 수밖에 없었다.

무정한 선장, 전역 없는 징병자, 바다의 공포, 시체의 지배자 등등, 유령남작을 지칭하는 별명은 많고 많았으며 그 별명들에 따라붙는 이야기들은 남작에 대한 공포심을 한층 더 높여 주었다.  그 이야기들 중에는 지금과 같은 ‘강제 편입’을 거부한 도시의 운명이 어찌되었는가도 있었다.

“음음. 좋은 태도입니다. 그렇다면 환영인사를 받아야겠지요? 맛있는 음식을 잔뜩 차린 연회,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어색하고 작위적인 표정과는 달리, 남작의 목소리는 부드럽게 낮아지며 청자로 하여금 목을 죄고 있던 밧줄이 풀리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

“아, 아 예.”

소문에 따르면 유령남작은 미식가에 식도락가라고 한다. 다른 지방 사람들이 꺼리는 지역 고유의 전통음식일지라도 새로운 맛이라면 무조건 도전하는 취미가 있는 이.

백작의 직위를 가진 이 항구의 영주는 공-남작이라 스스로를 지칭하는 해괴하고 난해한 사령술사의 비위를 맞춰줘야 했다.

왜냐하면 이 시대의 바다는 이 자가 꽉 잡고 있었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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