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화. 누워서
“그나저나 변호사 만나기로 했는데, 이래서 갈 수가 있나. 물 들어올 때 노 저으라고 그 자식 쫄았을 때 확 잡아먹어야 하는데.”
“엄마. 그런 건 내가 할 테니까 신경 그만 써. 엄마 건강한 거 알았으니까 말도 좀 그만하고.”
기도삽관을 했던 터라 목이 아플 거라고도 하는데, 현숙은 말할 때마다 인상을 찌푸리면서도 말을 멈추지 않았다.
“몸이 아프니까 계속 말하는 거야. 내가 언제 누워만 있던 사람이니. 답답하고 좀 쑤셔서 죽겠네.”
그렇게 말하는 현숙을 보니 또다시 서글픈 생각이 몰려왔다.
조금도 가만있지 못했던 엄마는 2년을 병상에 누워 있다가 돌아가셨다.
지혈 때문에 여섯 시간 가만히 있는 것만으로도 좀이 쑤신다고 난리인데, 3년을 꼼짝없이 누워만 있었다.
욕창으로 몸이 썩어 들어갈 때, 엄마는 무슨 생각을 하면서 죽어갔을까.
두통과 목의 통증에도 말을 하지 않고서는 버티지 못하는 사람인데, 그 긴 3년을 어떻게 참았을까.
또다시 선아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나왔다.
맹세코 과거 이 나이의 선아는 이렇게 눈물이 많지 않았었다. 그러나 아이를 낳고 아이를 키우면서 인생의 희로애락을 경험했고, 눈물도 부쩍 늘었다.
원래 자식이라는 존재는 없던 공감 능력까지도 생기게 하는 존재였다. 제게 세빈이가 그러하듯 엄마에게도 자신이 그런 존재일 터였다.
그러니 자신의 파혼 문제로 이렇게 병까지 앓는 것일 테다.
“얘 봐, 얘 봐! 또 운다, 또 울어!”
현숙의 성화에도 선아는 눈물을 그치지 못했다.
“누가 보면 엄마 죽은 줄 알겠다? 나 아직 안 죽었거든? 너 이제 보니까 내가 안 죽어서 서운하구나? 그래서 이렇게 서럽게 우는 거지?”
놀리듯 말하는 걸 보니 수술이 정말로 잘된 모양이었다.
선아가 입술을 삐죽이면서 눈물을 훔칠 때였다.
똑똑똑. 병실 문을 노크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한 발 떨어져서 모녀를 보고 있던 도진이 문가로 갔다.
문손잡이를 돌려 문을 연 도진은 놀란 듯 그 앞에 선 사람을 바라보았다.
“아버지.”
도진의 입에서 나온 아버지라는 말에 현숙과 선아의 시선이 문가로 향했다.
문이 열리고 정장 바지에 격자무늬 카디건을 걸친 노신사가 모습을 드러냈다.
아버지라고 했지만, 도진과 그는 손자와 할아버지라고 할 만큼 터울이 져 보였다. 노신사의 하얗게 센 머리 때문에 그렇게 보이는지도 몰랐다.
그럼에도 건장한 체격과 이목구비만은 부자가 똑 닮아 있었다.
“윤 사장님, 몸은 좀 어떠십니까.”
1인 병실로 들어선 그는 곧장 침대 가로 다가왔다. 현숙은 머쓱해 하며 답했다.
“오셨어요, 이사장님. 제가 지혈 때문에 일어나질 못해서 누워서 인사 받아요.”
도진의 아버지는 이 병원 재단 이사장이었다. 현숙이 뇌출혈로 입원했다는 말을 듣자마자 지방 분원 시찰 일정을 취소하고 급히 서울로 돌아왔다.
“지금 찾아오면 실례가 될까 걱정하다가도 안 찾아오면 또 그것대로 실례라고 생각해서 결례를 무릅쓰고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병원 재단 이사장님이 찾아주셨는데 저야말로 영광이죠.”
“그렇습니까. 하기야 제가 다녀간 거랑 아닌 거랑 의료진들 태도도 다르지 않겠습니까.”
농담처럼 하는 말에 병실 안 분위기가 풀어졌다.
“이사장님 덕분에 대접받으면서 몸 추스르겠네요.”
“하하하하. 특별히 대접해드리라고 병실 데스크에 전달해두겠습니다.”
현숙은 선아에게 나가서 음료라도 사 오라고 눈짓했다.
갑작스러운 엄마의 입원으로 병실에 이사장을 대접할 만한 음료가 없었다. 급한 대로 복도 자판기 음료라도 사 올까 싶어 선아가 문가로 가자, 도진이 짧게 고갤 흔들었다.
‘금방 가실 거야.’
그가 입술만을 움직여 소리 나지 않게 말했다.
선아가 밖으로 나가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할 때, 이사장의 입에서 선아의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따님 일 때문에 속이 많이 상하셨던 모양입니다.”
선아는 멈추어 서서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현숙은 면목 없다는 듯이 대답했다.
“부끄럽죠.”
그 또한 현숙의 지인으로 결혼식에 참석한 터라 그 난리를 모두 다 보았다.
선아는 얼굴이 화끈화끈했다. 자신의 복수를 위해 엄마의 체면도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이 이제야 실감이 났다.
“그래도 나중을 생각하면 그렇게 끝난 게 천만다행입니다. 따님 잘못도 아니고, 다 끝난 일이니 두고두고 속끓이지 마세요. 지금은 회복만 생각하셔야 합니다.”
“그렇게 이야기해주시니 저야말로 마음이 편안해졌어요.”
“나가면서 담당의와 병동 간호사에겐 특별히 잘 부탁한다고 일러두겠습니다. 윤 사장님이 뇌출혈로 쓰러지셨단 말 듣고 철렁했는데, 그래도 이렇게 괜찮은 모습 뵈어서 안심입니다.”
현숙은 방금 웃으며 이사장의 뒤에 선 도진을 바라보았다.
“저야말로 이사장님께 감사드리고 싶네요. 아무래도 제가 이만한 게 다 우리 류 팀장 덕분인 거 같아서요. 혹시 들으셨나요? 제가 류 팀장 덕분에 얼마 전에 이 병원에서 건강검진을 했어요. 그때 류 팀장이 건강검진 권해서 미리 해 뒀기에 출혈 부위 찾는 게 빨랐다고 들었어요.”
“의대 가기 싫다는 걸 억지로 공부시켜놨는데, 의사는 안 됐어도 이렇게 쓸 일이 있어 다행이군요.”
“어디 그뿐인가요. 류 팀장이 우리 회사 보배인 걸요. 제가 류 팀장 덕분에 이사장님보다 부자 될지도 모르겠어요.”
“오호, 그렇습니까. 호재가 있는 건가요?”
네이비와 MOU 협의 단계라 현숙은 말을 아꼈지만, 대신에 흡족한 표정으로 고갤 끄덕이면서 좋은 소식이 있을 거라고 예고했다.
“류 팀장 입사하게 허락해주신 이사장님께 절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에요.”
“늦둥이 아들이라 노심초사해서 키운 게 도진입니다. 사실 다른 아들놈들이야 자기 인생 찾아간다고 하면 보냈을 건데, 늦둥이 녀석만은 지금도 물가에 내놓은 애 같아서 끼고 있고 싶었어요. 그래도 나가서 잘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으니 안심입니다.”
“자제분들 다 훌륭하시지만 노심초사해서 키운 막내아들은 정말 크게 될 사람이에요. 제가 보증할게요, 이사장님.”
“어이쿠, 윤 사장님 보증이면 확실하죠. 기대됩니다.”
의자에서 일어선 이사장은 병실에 미흡한 점이 있나 확인이라도 하려는 듯 꼼꼼하게 병실 내부를 살폈다.
눈에 띄는 부족한 점이 없었는지, 이내 그는 밝은 얼굴로 현숙에게 작별 인사를 건넸다.
“그럼 쾌차하십시오.”
“네. 찾아주셔서 감사합니다.”
병실 문을 나서려던 이사장은 도진의 앞에 멈춰 서 아들의 어깨를 두어 번 토닥였다.
“잘하고.”
“예. 아버지.”
선아가 배웅을 위해 이사장의 뒤를 따라갔다.
복도로 나온 이사장은 선아에게 눈인사를 건네며 한마디를 해왔다.
“파혼은 안 됐지만, 인생 전체로 보아선 잘한 일이에요. 잘못된 선택 때문에 때로는 인생이 완전히 다른 길로 접어드니까요.”
“말씀 감사합니다.”
선아는 허리를 숙여 그에게 인사했다.
“어머니 간호 잘해드리고,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네. 조심히 들어가세요.”
이사장은 고개를 끄덕여 보이곤 왔던 길을 따라 나갔다.
복도를 걸어간 이사장의 모습이 보이지 않게 돼서야 선아는 긴장을 풀고 편히 숨을 쉴 수 있었다.
도진의 아버지는 바위처럼 존재감이 큰 사람이었다. 병실에 들러서 별말 하지 않았는데도 그가 떠난 후로도 한참은 묵직한 잔상이 남았다.
선아는 제 옆에 선 도진을 보며 말했다.
“선배 아버지가 나 되게 되바라진 애로 보셨겠다.”
“그렇게 보셨으면 파혼 이야기 꺼내지도 않으셨을 거야. 우리 아버지는 아니다 싶은 사람하곤 상대도 안 하시거든. 도리어 민망하지 말라고 먼저 언급하신 걸걸.”
선아가 느끼기에도 그랬다.
결혼식에 참석한 사람 중에 그 난리를 모르는 사람이 없으니 차라리 이렇게라도 먼저 이야길 꺼내 별일 아니라는 듯 말해준 것이 더 나았다.
저뿐만이 아니라 엄마도 주변인 보기가 민망했을 텐데, 도리어 그렇게 이야길 꺼내주니 한결 편안해졌다.
생색을 내며 큰 위로를 해준 건 아니지만, 돌이켜보면 그런 태도조차도 배려였다. 그리고 이사장의 그런 언행이 도진과 닮아 있었다.
“선밴 아버지 닮았구나?”
“아버지보다 내가 낫지.”
“뭐래. 엄청 멋있으시던데.”
“내가 나이 들면 아버지보다도 나을걸.”
“안 봐서 모르겠는데. 그때까지 살아보고 과거로 올 걸 그랬나.”
엄마가 수술을 잘 마친 까닭일까. 아니면 정말로 과거와 연관된 불행한 일이 모두 끝났다고 생각되어서일까.
이제는 도진을 향해 농담을 할 만큼 여유가 생겼다.
선아는 도진을 향해 활짝 웃어 보였다.
지난 3개월간, 웃어도 웃는 게 아니었던 그녀의 얼굴에 오랜만에 진짜 같은 미소가 떴다.
꽃이 피어난 듯 만개한 미소를 도진은 말없이 눈에 담다가 고개를 돌렸다.
“들어가자.”
“응. 선배.”
***
원래대로라면 코일 색전술을 한 환자는 2박 3일 정도로 짧게 입원한다.
그러나 현숙은 병변 부위가 작았음에도 출혈이 일어났었기에 후유증이 있는지 경과를 지켜봐야 한다고 했다. 그 탓에 입원 기간이 길어졌다.
그동안 휴가를 내고 간병하려던 선아는 부모님의 채근에 못 이겨 다시 회사로 출근하기 시작했다.
아침 출근 전 병원에 들러서 엄마의 얼굴을 보고, 퇴근 후에 병실에 들러서 시간을 보내다가 집으로 돌아가는 게 그녀의 일과가 되었다.
퇴근 시간이 되자 선아는 업무용 컴퓨터를 끄고 가방을 챙겨 들었다.
“수고하셨습니다.”
“내일 뵙겠습니다.”
팀원들이 한둘씩 자리에서 일어났다.
서류 가방을 챙긴 도진이 선아의 앞으로 왔다.
“병원으로 갈 거지?”
“왜? 선배도 병원 갈 일 있어?”
“아니, 병원으로 갈 거면 같이 저녁이나 먹을까 하고.”
“아, 저녁…….”
“시간 안 돼?”
선아가 고갤 저었다. 실은 시간이 안 된다기보다는 따로 알아볼 게 있어서였다.
“저기 선배. 혹시 운전 연수하는 사람 좀 알아?”
“운전 연수?”
도진이 희한하다는 눈으로 선아를 보았다.
지난 삶에서 선아는 운전을 할 수 있었지만, 이번 삶에서는 한 번도 운전을 하지 않았다.
교통사고로 세빈이를 잃은 터라 운전에 대한 막연한 공포 때문이기도 했고, 지금의 몸에 운전하던 감이 남아 있을지 판단이 서지 않아서이기도 했다.
“사실 엊그제 차 한 댈 계약했거든. 6개월 이상 대기해야 하는 줄 알았는데, 국산 차를 계약했더니 한 달 뒤에 출고된다는 거 있지.”
선아는 핸드폰을 켜고 자신이 계약한 소형 SUV 차량의 사진을 도진의 앞에 내보였다. 외관은 하얀색이고, 실내는 베이지 톤의 예쁘장한 차였다.
“난 사실 우리나라 자동차 회사가 이렇게 실내를 예쁘게 만드는지 몰랐다?”
차를 계약하고 웃는 선아를 보면서도 도진은 웃을 수가 없었다.
선아와 세빈이의 사고를 보았기에 걱정스러운 말부터 흘러나왔다.
“근데 차는 갑자기 왜? 나는 네가 운전 못 할 줄 알았는데.”
실은 선아도 운전할 자신이 없었지만 그래도 해야 하는 이유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