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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시 (5) (125/200)

효시 (5)2022.03.05.

태국. 방콕 뒷골목의 은밀한 어딘가. “받고 300 더.” 지독한 술과 자욱한 담배 연기 사이로 한창 도박판이 벌어지고 있었다. “스트레이트.” “미안한데, 플러시야. “이런 제기랄!” 김치호 비서관은 테이블을 쾅 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덥석. 덩치 큰 떡대 두 명이 다가와 김치호 비서관의 어깨를 잡았다. “소란 피울 거야?” “……그럴 리가.” 김치호 비서관은 이를 콰득 깨물었다. 맞은편에서 포커칩을 쓸어가던 태국 남성은 눈썹을 들썩거리며 말했다. “뭐 해, 돈 없으면 더 가져오든가. 아니면 꺼지든가.” “……개X끼.” 김치호는 한국말로 욕을 내뱉고는 홱 돌아서서 도박판을 빠져나왔다. 골목 밖으로 빠져나오자, 태국 밤골목 특유의 보라색과 새빨갛게 점멸하는 불빛이 뒤섞여 반짝이고 있었다. 그는 빛을 피해 점점 더 어두운 길목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런 X발…….” 칙-. 김치호는 담뱃불을 붙이며 골목을 걸었다. 퀭해 있는 눈빛만 보더라도 알 수 있는 사실은. 그가 술과 담배 그리고 도박에 절어 있는 폐인 상태라는 것이다. 벌써 1년이 넘었다. 이 지긋지긋한 도피 생활. 사실, 도피 생활이라고 해서 드라마나 영화에 나온 것처럼 뒷골목에 숨어 다니며 노숙을 하는 건 아니었다. 어차피 인터폴 국제 수배가 된 것도 아니고, 돈만 있으면 충분히 먹고 살 수 있는 도시였으니까. 그렇다고 화려하게 5성급 호텔에서 호화롭게 지내는 것도 아니었다. 아무리 그가 뒷돈을 받았다고는 해도, 비서관이라는 직급의 한계 상 수급하는 뇌물의 규모는 그렇게 크지 않다. 적당히 연명할 수 있는 정도의 자금. 딱 그 정도라는 뜻이다. 그렇기에 한국으로 따지면 모텔과 여인숙 그 사이에서 여기저기 전전하며 도박장을 다니는 게 김치호 비서관의 일상이었다. 당연한 말이지만, 그는 제정신으로 남아있을 수가 없었다. 미성년자 성매매, 성접대, 뇌물, 각종 압력 등 그가 더러운 범죄를 저지른 건 사실이지만. 결정적으로 국정원에 끌려가게 된 건 최지훈이 그에게 코리안 뉴딜 유출 건을 뒤집어씌웠기 때문. 그것을 잊기 위해서라도 그는 술과 도박에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 허나, 쉽게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최지훈 그 개X끼만 아니었어도…….” 그는 부들부들 떨며 이를 악물었다. 최지훈만 아니었다면, 자신이 바다 건너 먼 이국땅에서 이처럼 초라하게 살 일은 없었을 테니까. “……X같네.” 그는 바닥에 있는 돌멩이를 세게 걷어찼다. 깡! 드럼통에 부딪치며 커다란 소리가 퍼졌지만, 이미 조용한 길목으로 들어왔기에 김치호에게 뭐라고 할 사람은 없었다. “……하, X발.” 연신 욕지거리를 내뱉던 그는 문득 멈춰서며 하늘을 바라보았다. 별 따위는 보이지 않았다. 눈에 들어오지 않는 건지, 실제로 보이지 않는 건지는 안중에도 없었다. 그저 한국에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뿐. 언제까지고 이렇게 뒷골목만 전전할 수는 없는 법이니까. 그런데 그때. 턱-. 그의 어깨에 묵직한 손길이 느껴졌다. “김치호 씨.” “뭐야?!” 그는 거칠게 돌아서며 손을 뿌리쳤다. “너 뭐야?” 김치호의 시야에는 거대한 체구를 가진 남성이 눈에 들어왔다. 침을 꿀꺽 삼켰다. ‘180cm…… 아니, 최소 190cm는 넘어 보인다.’ 처음 보는 얼굴이다. 허나, 첫인상에서부터 평범한 인물은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김치호 비서관님 맞으시죠?” “…….” 비서관이란 호칭에 자신도 모르게 움찔했다. 그 직급, 그 호칭을 잊은 지 너무나도 오래되었으니까. 심지어 울컥할 지경. “전상국 의원님께서 보내셨습니다.” 순간, 김치호 비서관의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쿵. 쿵. 쿵. 쿵. ‘……전상국?’ 단순히 심박 수만 올라가는 게 아니라, 손이 떨리고 피가 머리로 쏠리는 느낌. 대한당의 수장 격인 전상국을 김치호 비서관이 모를 리가 없었다. 그는 침을 꿀꺽 삼키며 담뱃불을 껐고. 거구의 남자는 태연하게 물었다. “지금 한국 정치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진 아시죠?” “…….” 김치호 비서관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한국에서의 소식은 최대한 듣지 않으려했다. 허나, 조국 땅이 그리워 한국어로 된 뉴스를 보거나 커뮤니티를 뒤지다 보면 자연스레 알 수밖에 없었다. 최지훈 그 개자식이 총선에 출마했다는 사실을. “한국으로 돌아갈 수 있게 해 드리겠습니다.” 그 한 마디만으로도 온몸이 전율에 떨리기엔 충분했다. 태국에서 방탕하게 살며 폐인 생활에 절어 있던 정신은 국회에서 일할 때처럼 쌩쌩하게 돌아가는 듯했다. “제가 뭘 해야 됩니까?” “복수할 기회를 드리죠.” 복수. 그 말에 김치호 비서관의 동공이 확장되었다. 그토록 바라왔지만, 이국 땅에서는 절대 이루지 못할 꿈. “최지훈을 죽이시면 됩니다.” 꿀꺽. 간절히 바라는 사실이었지만, 김치호는 침착하게 가슴을 가라앉혔다. “전 국내에 수배되어 있습니다. 들어갈 수가 없어요.” “그게 문제가 되겠습니까?” 남자는 품에서 봉투에 쌓인 물건을 건넸다. “위조 여권입니다.” 김치호 비서관은 덥석 잡았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순식간에 두려움이 휘몰아쳐왔다. 한 번 당한 적이 있었으니까. “내가 당신을 어떻게 믿죠?” “못 믿어도 별수 있나?” “…….” 사실이었다. 김치호 비서관에겐 선택지가 없었다. 그러나 처음 보는 사내를 덥석 믿을 수는 없는 노릇. 안전책은 확보해 놔야 했다. “한국에 들어간 뒤엔 어떻게 됩니까?” 김치호 비서관은 눈을 부릅뜨며 말했다. “아무리 최지훈을 증오하긴 하나, 녀석을 죽이고 제가 감방에서 평생 살 수는 없잖습니까?” “이봐요, 김치호 씨.” 남자는 한 걸음 다가가며 김치호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전상국 의원님이 가만 있으시겠습니까?” “…….” “일이 성공하면, 전상국 의원님은 8선입니다, 무려 8선. 국내에 단 한 번도 없었던 역사를 쓰시는 거죠.” 국회의원 8연속 당선. 평범한 정치인으로서는 꿈도 꿀 수 없는 경지다. “김치호 씨 당신은 당연히 실형을 받으실 겁니다. 최준석 대통령이 분노할 테니까요. 허나, 사형이 집행될 리 없습니다. 거기서 한 2, 3년 썩어야죠. 그러다가 최준석 대통령이 물러나거나 그의 관심에서 잊힐 즈음에 빼 드리겠습니다. 약속드리죠.” 남자는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그게 가능하다는 거는 저보다 치호 씨가 더 잘 아시잖습니까?”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대한민국에서 8선 의원이면 불가능한 게 없으리라는 건 누구보다 그가 더 잘 알고 있었으니까. 김치호도 어렵지 않게 수긍했다. 남자는 한 발 물러나며 턱짓했다. “여권에 비행기표도 끼워져 있습니다. 당당하게 한국으로 입국하십시오. 괜히 검문에 걸리면 골치 아파질 수 있으니 제대로 면도도 하고 옷도 차려 입으시고요.” “알겠습니다.” 남자는 그 말을 남기고 어둠속으로 사라졌다. 홀로 남겨진 김치호 비서관은 봉투를 뜯어 내용물을 확인했다. 제대로 된 여권이었다. 페이크가 아니란 건 알 수 있었다. 애초에 국정원에서 자신을 잡으려 했다면, 이렇게 접근하지 않고 직접 덮쳐서 손에 수갑을 채웠을 테니까. 해외라고 해도 어렵지 않은 일이다. 다시 말해 방금 보낸 남자는 전상국이 보낸 사람이 확실하다는 것. 김치호 비서관은 주먹을 꽉 쥐었다. ‘그래. 이렇게 태국 뒷골목이나 전전할 바에야 한국 들어가서 몇 년 썩다가 몰래 나오는 게 낫지!’ 중간에 도망치긴 했으나, 어쨌든 한 번 국정원에서도 플리바겐을 통해 나온 적이 있었으니, 전상국 의원 측의 말은 충분히 신빙성이 있었다. ‘기다려라, 최지훈.’ 그는 사악하게 눈을 부릅떴다. ‘이젠 내가 복수할 시간이니까.’ * * * “오늘 현장은 비교적 젊은 유동 인구가 많은 지역입니다. 근처에 대학교가 하나 있고…….” 강선우 보좌관이 오늘의 유세 운동에 관한 브리핑을 이어갔으나,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후보님?” 이내 그는 말을 멈추고는 갸웃거리며 내게 물었다. “괜찮으십니까? 컨디션이 안 좋아 보이시는데.” “어, 괜찮아. 계속해.” “알겠습니다. 우선, 20대 초반들에게 취업에 대한 불안함을 해소시키고…….” 조수석에는 마돈나가 타 있었다. 평소 유세 운동에는 함께하지 않는데 오랜만의 동행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오늘은 거사를 치르는 날이었으니까. 날짜는 나쁘지 않았다. 선거까지는 앞으로 15일. 현재 지지율은 56대 44. 12% 차이로 뒤쳐진 상황이었다. 처음 밀어붙이던 기세를 타고 쭉 왔다면 5% 이내로 좁히며 오차 범위 내에 들 수 있었겠지만, 중간에 구속이 되며 한 번 휘청거린 탓에 격차가 꽤나 벌어진 상태. 지금도 격차가 줄어들고 있긴 하나, 전상국 의원 측에서 고군분투하고 있는 탓에 쉽지는 않았다. 그렇기에 오늘이 핵심이었다. 오늘 벌어질 사건이 앞으로의 선거 향방을 가를 테니까. “도착했습니다.” 수행비서의 말을 들으며 나는 천천히 호흡을 가다듬고 차에서 내렸다. 나는 태연하게 표정 관리를 하며 유세차에 올랐다. “안녕하십니까, 기호 2번 최지훈입니다!” 평소와 똑같은 래퍼토리로 유세 운동을 시작했다. 마돈나와 강선우 보좌관은 근처에 자리를 잡고 섰다. “여러분, 언제까지 당하시고 살 겁니까? 정치인들의 거짓말에 또 속고 싶으십니까? 이제는 변화할 때가 왔습니다. 새로운 정치, 또 젊은 정치, 진정 서민을 위한 정치를 펼치는…….” 한창 연설을 이어갔다. 그렇게 유세 운동의 중반쯤에 접어들 무렵. 저 멀리 모자를 푹 눌러쓴 사내 하나가 이쪽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따뜻한 날씨에 마스크까지 쓴 채로 얼굴을 가리고 품에 손까지 넣고 있는 걸 보면, 알 수 있었다. 김치호. 그 인간이다. 나는 침을 꿀꺽 삼키고는 못 본 척 연설을 이어갔다. 유일하게 진실을 알고 있는 마돈나만 최악의 상황을 막기 위해 대비 중이었다. 김치호 비서관이 유권자들을 사이를 거쳐 점점 앞으로 다가오는 사이. 손가락 두 개를 펴고 2번을 강조하는 선거 도우미들 옆으로 문득 노란 머리칼의 여성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손에 커피 캐리어가 들려있는 걸 보니, 지나가던 길이었던 모양. 잠깐만. 얼굴이 낯이 익은데……. 순간, 머릿속에 한 조각의 기억이 스쳐지나갔다. 송하연. 최지성이 운영하는 SA엔터테인먼트에 소속된 인물. 그녀 또한 모자를 쓰고 있지만, 얼굴을 식별하기엔 충분했다. 미래 문자에서도 등장했던 것 같은데. 그러나 그 생각도 잠시. 타다다닥. 송하연에게 시선이 뺏긴 사이, 추레한 복장의 남성이 연단으로 달려들었다. 막으려던 경호원을 뿌리치려다가 그가 쓰고 있던 모자가 벗겨졌다. 김치호, 그 인간이다. “이거 놔!” 허나, 문제가 생겼다. 경호원이 너무나도 빠르게 그를 막아선 탓에 김치호가 내게 접근하지 못했다. 이러면 문제가 생기는데. 내게 닿기도 전에 제압해 버리면 극적인 효과가 줄어든다. 김치호는 일순 고민하나 싶더니. “비켜!” 그는 안주머니에서 30cm가 넘는 커다란 회칼을 꺼내들며 경호원에게 달려들었다. 가만히 있으면 이대로 상황이 정리된다. 마돈나 또한 그걸 모를 리 없었다. 도망치는 시민들의 시선이 김치호와 나에게로 쏠려 있고, 경호원이 김치호를 주시하는 사이. 마돈나가 슬쩍 경호원의 뒤로 다가가 그의 중심을 잃게 만들었다. 경호원이 비틀거리는 사이. “이 개X끼야!” 김치호는 순식간에 내 앞으로 덮쳐들었다. “꺄아아아악!” 시민들의 비명이 울려 퍼지며 유세차 근처에 있던 사람들은 혼비백산하여 도망갔고. 겁 없는 몇 명만이 남아 휴대폰으로 현장을 촬영하고 있었다. “죽어, 이 새끼야!” 김치호는 악에 받친 목소리로 나를 향해 칼을 내찔렀다. 한 대 정도는 치명상을 피해 맞을 생각이었다. 그래야 보도될 때 효과가 더 커지니까. 그런데 그 순간. 또다시 돌발 상황이 벌어졌다. “비켜!” 누군가의 외침과 동시에 내 몸이 옆으로 밀쳐졌고. 김치호의 칼날은 내 앞을 가로막은 이의 복부를 갈랐다. ……뭐야. 노란 머리 여성. 송하연이다. “이, 이 새낀 뭐야! 당장 나와!” 김치호는 당황한 얼굴로 칼을 빼내며 송하연을 밀쳐냈고. “최지훈 이 X같은 새끼야!” 그는 눈을 희번덕거리며 피가 흐르는 칼을 높이 들었다. “나만 병신 되고 끝날 줄 알았지?” 김치호는 마치 광인처럼 히쭉 입꼬리를 휘며 나를 향해 칼을 내리쳤다. 푹! 그의 칼날이 나의 가슴팍에 꽂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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