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화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좌중을 둘러보고 말했다.
“존경하는 황후 폐하, 다비온 전하. 또한 사태를 걱정하고 이곳에 모인 귀족에게 보고합니다. 공작령에서 발생한 사태는 전염병이 아니며 황후 폐하의 서명이 있는 영장은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일부러 거부하셨습니다.”
엔티 후작이 어제의 앙금이 남아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후작. 말씀드렸다시피 고의가 아니었습니다. 밤새 영지를 수색한 결과, 소환장을 찾아 손상을 복구했습니다.”
나는 너덜너덜하던 소환장을 떠올리며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게다가 오늘 소환에도 적극적으로 협조하지 않았는가.
내가 꿋꿋이 결백을 주장하자 엔티가 에카르트에게 화살을 돌렸다.
“크로덴 공작이 마법사 군단을 공격한 행위 역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입니다.”
“마법사 군단이 먼저 사유 재산을 훼손했으니 정당방위였네.”
“사유 재산?”
“후작이 꽃을 밟았지.”
“…꽃을요?”
어제 에카르트가 이 문제를 명확히 짚고 넘어가고 싶어 할 때 나 역시 후작과 같은 반응이었다.
“꽃이라니. 꿀이라도 발라 놓으셨어요?”
“꿀은 당신 입술에 발라 둔 거 아닙니까?”
에카르트는 내 입술을 빤히 봤고 나는 말을 맞추려다 결국 입을 맞춰 주고 다시 이야기를 했다.
“아무튼 왜 중요한데요?”
“그 꽃이 보이는 성벽 아래에서 키스했으니까요.”
그런 추억이 있으므로 소중하다는 주장이었다.
할 말을 잃었지만 에카르트는 진심으로 유감스러워 보였다. 그 꽃이 왜 중요한지는 구체적으로 말하지 않기로 합의를 보고 나는 에카르트의 편을 들었다.
“후작. 크로덴 공작께서 크나큰 정신적 피해를 받았으니 오히려 위자료를 청구할 수 있는 사안입니다.”
“루솔릿 공작! 회의장은 장난치는 자리가 아닙니다.”
후작이 내게 호통치자 에카르트가 싸늘하게 말했다.
“장난이라니. 내 상처를 욕보일 셈인가?”
“…그런 의도는 아니었습니다.”
후작은 마검을 지배하는 자의 살기 앞에서 차마 대놓고 왈가왈부하지 못했다. 심문을 이리저리 피하자 황후는 후작을 무능하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그리고 본인이 직접 나섰다.
“공작이 공왕으로 있는 타르 왕국에 아직 바크 풀의 씨앗이 남아 있죠.”
“그렇습니다.”
“그 일부라면 충분히 가져올 수 있었겠네요.”
“맹세코 제가 그러할 이유는 없습니다.”
“공작이 영주민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벌인 소행이라는 의견도 있거든.”
내가 영주민들의 신뢰를 얻기 위해 사람의 목숨을 갖고 장난을 쳤다는 말인가.
아렌다라면 나를 어떻게든 몰아갈 거라고 예상했지만. 짜증나고 억울했다. 그런 감정을 뒤로하고 침착함을 유지했다.
“황후 폐하. 신뢰를 얻는 과정의 첫 번째는 상대방을 기만하지 않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나는 밖에 서 있던 기사에게 말했다.
“증거를 가져와 주세요. 이쯤이면 검토가 끝났을 텐데요.”
“네. 드리겠습니다.”
그런데 기사가 순순히 가져온 상자는 검은색이 아닌 회색이었다. 에카르트가 상자를 건네받으며 어떤 주문을 사용했다.
그러자 헬라의 필체로 쓴 글씨가 드러났다.
- 놀라게 해 드려서 죄송합니다. 바꿔치기를 하려는 움직임이 보여 급히 상자를 교체했습니다. 내용물은 안전합니다.
역시 할 때는 침착하게 해내는 그녀였다.
상자를 열어 보니 깃털과 영상석이 남아 있다. 내가 그것들을 책상 위에 올려놓자 황후의 시선이 날카로워졌다.
“황후 폐하. 제가 결백한 자료로 이 깃털과 영상석을 제출합니다.”
나는 일어나서 먼저 신수의 깃털을 보여 줬다.
“황실의 신수로 추정되는 것의 깃털입니다. 이제 영상석을 재생하겠습니다.”
영상석이 재생되자 모두가 그것을 가까이 보기 위해 고개를 바짝 당겼다.
“벨라 영지에서 수입한 귀리 자루에 황실 신수가 바크 씨앗을 섞는 모습입니다. 어떠한 조작도 없도록 이 영상을 촬영되는 모습 역시 촬영해 두었습니다.”
근처에서 발견된 깃털 그리고 황실 신수가 씨앗을 섞는 모습.
그것만으로도 누구나 충분히 추측할 수 있는 정황이었으나 귀족들은 차마 먼저 입을 열지 못했다.
그런 쥐 죽은 듯한 침묵을 깬 건 황후였다.
“어머. 이 아이를 찾아 줘서 고마워요.”
“네?”
“그렇지 않아도 안 보여서 어디 갔는지 궁금했는데 여길 떠돌고 있었나 보네요.”
나는 테이블 아래로 주먹을 쥐고 황후의 멱살을 쥐고 싶은 마음을 참았다.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당당하게 하고도 아무 반박을 받지 않는 이유는 단 하나. 아렌다가 이 제국의 최고 권력자기 때문.
“황후 폐하. 실례지만 제가 신수의 습성을 잘 몰라서 질문드립니다. 황실을 나온 신수가 바크 씨앗을 교역품에 섞는 기행을 벌이기도 하는지요?”
“공작이 마법에 능하니 주술로 세뇌했을지도 모르죠.”
아렌다는 잘못 판단했다. 어쩌면 황실에 추종했을지 모르는 나까지 미리 견제한다면… 어느 누가 당신에게 충성할까. 그녀는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그러니 공작을 더 조사해야겠어요.”
“조사요?”
문가에 서 있던 기사들이 내 자리로 걸어오기 시작했다.
“간단한 절차니 협조-”
“그만하시죠.”
설마 내가 머릿속으로 하던 생각을 직접 내뱉었나.
그러나 그 말을 한 상대는 여태 상황을 줄곧 지켜보던 다비온이었다. 다가오던 기사들도 당황해서 멈춰 섰다.
“루솔릿 공작, 이번 일에 대해 대신 사과하겠습니다.”
“황태자 전하?”
“이런 상황을 미리 알려 드리고자 전서구를 보내려 했으나… 제 신수 역시 공격을 받아 전달드리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동안 손가락만 빨고 있었나?”
에카르트가 퉁명스럽게 비꼬았고 나 역시 속으로 동의했다.
“아니. 황위에 오르기 위해 준비할 게 많았어.”
“황위?”
짙고 곧은 눈썹이 위로 올라갔다. 이곳에 모인 모두가 비슷한 반응이었으며 황후 역시 그러했다.
“다비온! 그게 무슨 말이냐.”
“오늘 오전. 아버지께 황위를 물려받았습니다. 선황께서는 제게 모든 통솔권과 권리와 위무를 위임하셨습니다.”
귀족들이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다비온은 내게 접근하려던 기사들에게 말했다.
“선대 황후 폐하를 모시세요.”
에카르트는 흥미롭다는 듯이 내 손을 잡고 귀에 속삭였다.
“엘린. 저놈이 드디어 엄마 품을 벗어나나 보군요.”
“…….”
누구든 가장 우선시하는 건 황제의 명이다.
한데 아들인 황태자가 누구도 모르는 사이에 황제가 되었고 어머니인 황후를 회의장에서 추방하려고 한다니! 기사들은 순식간에 뒤바뀐 정세에 어쩔 줄 몰랐다.
“상황 판단이 느리군요. 신성한 대전으로 가서 내가 황제가 되었음을 확인한 후에야 명을 수행할 셈인가요? 그게 아니라면.”
다비온이 황금색 보검을 소환했다. 황제만 사용할 수 있는 특별한 검이었다.
지금 황제의 명령에 불복하거나 망설인 기사들은 전부 처벌을 면치 못하리라. 그것을 알고 있는 기사들은 저들끼리 눈치를 주고받더니 나를 지나쳐 황후에게 다가갔다.
“다비온!”
“어머니. 폴을 공격한 것 역시 당신의 신수였죠.”
“…….”
“폴도 이 초록색 깃털을 물고 왔습니다. 아마 그 신수 역시 상처를 입고 동부로 향하다 그곳에 떨어뜨렸겠죠.”
황후는 그 사실 자체를 부정하지 않았다. 다만 언제나 같은 편이라고 믿었던 다비온이 그 사실을 폭로했다는 데에 충격을 받았을 뿐.
“다비온! 내가 해 온 모든 일은 너를 위함이었다.”
“그렇다면 왜 내 황위 계승식을 미뤄 왔죠?”
“그건, 네가 아버지를 생각하니까….”
“아뇨. 저를 황태자로만 남겨 어머니께서 실권을 좌우하려던 것이겠죠.”
다비온은 차가운 눈빛이었다. 여태 그가 여린 부분이 있다고 생각했던 게 착각처럼 느껴질 정도로. 최선의 방법을 찾아보려던 그가 결국 이런 방법을 택하게 되었다.
“어머니께서 저지른 짓. 제국을 굽어살펴야 할 사람이 해서는 안 될 것들입니다.”
아렌다의 이마에 실핏줄이 섰으나 감정을 억누르고 말했다.
“오해를 진실로 믿고 이리 섣부르게 행동하다니.”
“어머니께서 리타를 이용해 실험을 벌였다는 것도 제 오해인가요?”
“…뭐?”
다비온은 품에서 영상석을 꺼내고는 책상 중앙에 내려놓고 재생했다.
그 영상에 나오는 사람은 모두가 잘 알다시피… 리타였다. 리타는 감옥에서 희귀한 재료들을 갖고 실험을 하고 있었다.
“연구는 어느 정도 되었지?”
“다 되어 갑니다. 폐하께서 이런 일에 관심을 보일 줄 몰랐군요.”
“황태자와 관련된 일이니까.”
“네. 이 소악마와 함께라면 황태자 전하는 틀림없이 더 강해지실 겁니다.”
재생이 끝나고 모두가 충격을 받았다.
“어머니께서 리타에게 접근한 이유로 예상되는 바가 있습니다.”
설마, 이전에 공작령에서 진행하던 연구를… 이어 가고 있었나.
“소악마까지 이용해 강력한 힘을 이끌어 낼 실험을 하고 있었죠. 지하에서. 무고한 시민을 상대로 말입니다!”
한참 선을 넘은 짓을 한 황후를 누구도 변호하지 못했다. 엔티 후작조차 그럴 수 없었다. 다비온은 확인 사살을 마쳤다.
“영상의 신뢰를 확보하기 위해 잠시 죄인을 부르겠습니다. 루솔릿 공작. 미리 양해를 부탁드립니다.”
“…네.”
문이 열리자 리타가 성난 짐승처럼 내게 달려들려고 했다. 하지만 다비온 측근의 기사들이 그의 팔을 단단히 붙잡았다.
“이 해충이! 또 내 업적을 방해했어?”
“혀가 길군.”
에카르트가 살기를 띠기 전에 나는 그의 소맷자락을 잡아 상대하지 말라는 듯 말렸다.
그러자 리타는 침이 튀기도록 버럭 소리를 질렀다. 나를 어떻게든 깔보려던 여유는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았다.
“황태자, 당신은 평생 약하게 살 겁니다!”
“황제 폐하시다!”
다비온의 호위 기사가 리타에게 호통을 쳤다. 다비온은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부정한 짓을 저질러서 강해지는 거라면 차라리 약하게 살겠습니다.”
“나는… 당신 같은 사람을 이해할 수 없어.”
리타가 혼란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온갖 대가를 치러서라도 강해지고 연구를 성공시키려던 리타에게 다비온은 전혀 다른 존재일 것이다.
“해충. 내게 할 말 없나요? 내가 마법으로 세상에 이렇게 많은 영향을 미쳤단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