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화
“허.”
“어머. 읽기도 전에 갑자기 바람이 불어서 날아갔네요.”
내가 명백히 실수였음을 강조했다.
“가져와.”
엔티 후작이 분노를 참고 부하에게 명령했다. 부하가 종이를 잡으려고 할 찰나 나는 아예 성벽 너머로 종이를 날려 보냈다.
“공작. 뭐 하는 짓이요?”
“바람이 불었잖아요.”
“공작이 마법을 사용한 거 아닙니까!”
“지팡이를 움직이지도 않았는데요. 피해망상이 있으신가요?”
그리고 그가 대답하기도 전에 난처하다는 듯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제가 안으로 들어가서 찾아볼게요. 죄송하지만 지금은 확인할 수 없으니… 오늘은 기사를 데리고 돌아가시죠.”
후작이 이를 빠득 갈고 언성을 높였다.
“이딴 뻔히 보이는 개수작… 공작이 되니까 뭐라도 된 것 같습니까?”
“당연히 선대 루솔릿 공작과는 달리 뭐라도 되어야죠.”
“다 망해 가던 영지에서 뭘 하겠다고.”
“그런 영지까지 이렇게 신경을 써 주신다니 섬세하셔라. 망해 가던 곳이었다고 해서 사람이 살지 않는 건 아니었거든요.”
그 말은 성벽을 감시하던 병사들에게도 전해졌다.
“공작님 말씀… 정말 영주민을 신경 쓰시는군.”
이전 루솔릿 공작이 얼마나 형편없었는지 그들은 사소한 말에도 감동을 받았다. 마침내 에카르트가 상황을 정리했다.
“엔티 후작.”
나의 충직한 연인은 마검에 오러를 둘렀다. 그의 눈빛은 모든 것을 집어삼킬 불꽃같았다. 저주를 사라지게 했다고는 해도 상대방을 압도할 포스를 갖고 있었다.
“…….”
“루솔릿 공작의 자비는 여기까지다. 이제 떨거지들 데리고 썩 꺼져.”
“쌍으로 눈에 뵈는 게 없나 봅니다.”
후작이 작게 욕설을 중얼거리더니 군대를 데리고 철수했다. 블랑세 역시 곱지 않은 시선으로 그들을 바라봤다.
나는 뒤쪽에서 우두커니 눈치를 살피던 미랑에게 부탁했다.
“미랑. 공작성으로 들어가면 헬라가 재료를 받을 거예요. 먼저 들어가요.”
“알았다. 잘 전달하지.”
짐 상자가 있다 보니 미랑의 등 위에 세 명이나 탈 수는 없었다. 나는 에카르트, 블랑세를 양옆에 데리고 공작성까지 걸어갔다.
“엘린. 제가 마검을 든 데에는 다 사정이 있었습니다.”
“네. 잘했어요. 애초에 당신을 공격하려는 사람은 내가 가만두지 않았을 테니까.”
“그럼 약한 척을 좀 할 걸 그랬습니다.”
곧 안주인이 될 사람이라 그런지 전보다 더 능청스러워졌다.
성벽 안으로 들어오자 기사들과 하녀들이 나를 영웅처럼 바라보며 이상한 소리를 냈다.
“공작님, 어흐흑! 너무 보고 싶었어요.”
“부군님… 어흑. 덕분에 공작성도 무사했습니다.”
“저희가 목숨 걸고 세 분을 지키겠습니다!”
***
나는 방으로 들어온 후 에카르트에게 타르 공국에서 있던 일을 털어놓았다.
“에카르트. 제가 출생의 비밀을 알게 되었는데요.”
“당신 말입니까?”
“그럴 리가요! 블랑세, 타르 공국의 공주에요.”
나는 사정을 간단하게 설명했다.
빌론이 당시에 공주였던 블랑세를 죽이려 했으나, 신관이 발견한 덕에 신전으로 데려왔다는 이야기.
그런 가슴 아픈 사정을 듣고도 에카르트의 반응은 한결같았다.
“엘린. 타르 공국은 제가 준 선물입니다. 설마 그 여자에게 돌려주겠단 건 아니지요?”
“…아무래도 원래의 주인을 찾아 주는 게 도리에 맞다는 생각은 들었어요.”
“하아. 그렇다면 대신 조건이 있습니다.”
“조건?”
“네. 그 여자를 공국에 보내고 주변을 개간해서 누구도 접근하지 못할 유배지, 아니, 요새로 만드는 겁니다.”
“블랑세를 유배 보내는 게 아니에요! 그만 괴롭히세요.”
“그 여자가 저를 괴롭히는 겁니다. 당신 곁에서 알짱거리는 모습을 보기만 해도 속이 뒤틀리지요. 이런, 치료를 해 주셔야겠군요.”
커다란 손이 어느새 내 허리로 향해 있었다.
그때 소파 아래서 덜그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곧 하얀 두 손이 튀어나와 바닥에 깔린 러그를 더듬었다.
“시엘. 공국은 필요 없대도. 나는 네 마음만 받겠다니까.”
“아악!”
나는 비명을 지르며 발을 소파 위로 올렸다. 그러자 에카르트는 콩벌레처럼 말린 나를 은근슬쩍 끌어안았다.
조금 진정한 후 우리는 바크 풀의 중독을 막을 치료제를 만들었다.
내가 재료를 배합하고 에카르트가 사발을 부술 듯이 찧으면 블랑세와 헬라가 약병에 담았다.
곧 기사단이 집집마다 치료제를 전달했고, 나는 영지를 둘러보며 배급 상황과 주민들의 몸 상태를 전부 확인했다.
“공작님만 믿고 있었다고요!”
“문제가 생겨도 척척 해결해 주시니 걱정할 게 없습니다.”
“직접 와 주시니 정말 감사할 따름입니다.”
큰일이 날 뻔했는데도 대처가 빠르고 인명 피해가 없었기에 다행이었다. 나는 기사단에게도 감사를 표했다.
그날 밤. 에카르트, 블랑세와 함께 공작성으로 돌아왔더니, 황실의 인장이 찍힌 편지 한 장이 나를 기다렸다.
- 긴급 소환장.
두 번 이상 소환에 불응하면 무력을 행사할 수 있다. 황후가 이번 사태에 대해 나와 에카르트의 책임을 묻는 자리를 만들었겠지.
그간 중요한 사안은 다비온과 논의하고 여러 도움을 받았다. 이번 일에 대해서도 한 번 더 이야기를 나누면 좋겠지만 평범한 전서구로는 황태자궁까지 연락하기 어려웠다.
“블랑세. 황태자 전하께 미리 계획을 알려 드리면 좋겠지만… 연락이 닿지 않으니 나도 내가 준비한 대로 행동하겠어.”
신수의 소행이라고 폭로할 경우 다비온과 사이가 틀어질지도 모른다. 그러니 블랑세가 미리 마음의 준비를 하는 편이 좋을 것이다.
“시엘, 나는 네 편이야.”
“…고마워.”
“엘린. 이참에 황실을 복속시키고 당신이 황위에 오릅시다.”
나는 양손으로 둘의 머리를 쓰다듬어 줬다.
“일단 신수가 잘 있는지 확인해야겠어요.”
“같이 갑시다.”
“같이 가!”
둘의 팔짱을 끼고 신수를 가둔 지하로 내려가자, 분필로 칠판을 긁어도 덜 시끄러울 것 같은 소리가 들렸다.
“그대의 머리카락 넘기며 장미 한 송이를 꽂았어요~”
바로 니나의 노래였다. 신수가 외부와 연락을 취하지 못하도록 하녀들이 번갈아 가며 소리를 교란시키는 중이었다.
그래서인지 신수는 먹이를 거르지 않았는데도 깃털 색도 푸석해지고 눈동자도 퀭해 보였다.
여러모로 든든함을 느끼고 내가 말했다.
“일단 신수는 계속 이 자리에 둘게요. 에카르트. 블랑세. 큰일을 앞두고 떨리긴 하지만, 전처럼 걱정이 되지는 않아요. 최선을 다하겠어요.”
“네. 여차하면 다 쓸어버리면 그만입니다.”
“시엘과 함께라면 수배당해도 좋아.”
또 정신 나간 소리를 하는 둘이었다. 그러자 니나도 노래를 멈추고 무서운 말을 했다.
“저는 평생 공작님 발닦개에요! 언제든 문지르셔도 돼요.”
아니다. 니나까지 셋. 나는 모두를 향해 허허 웃으며 말했다.
“다들 고마워요. 정말 많은 의지가 되네요.”
“내가 제일 든든하지?”
“엘린. 굳이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할 필요 없습니다. 저 여자들은 당신 발목이나 잡지요.”
“저, 앞으로 더 노력할게요!”
셋이 동시에 말하는 바람에 마치 놀이터처럼 시끌벅적해졌다.
이튿날 영상석 사본과 신수의 깃털을 검은 상자 안에 넣어 챙겼다.
영상석 하나에는 한 개의 기록만 담기므로 사본을 만들었는데, 영상석으로 재생한 장면을 다른 영상석을 들고 촬영한 것이다.
그렇게 증거도 준비하고 미리 에카르트와 할 말도 맞춰 놨지만, 나는 평소보다 식사도 적게 하고 목각 인형처럼 딱딱하게 굳었다.
“내가 증거를 보여 줘도 통하지 않는다면요?”
“그땐 제가 나서겠습니다.”
나는 황실로 향하는 마차 안에서도 말수가 적어졌다. 에카르트는 그런 내 모습을 보고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엘린.”
“…네?”
“헬라와 니나가 교제한다고 합니다.”
“뭐라고요?!”
“농담이었습니다. 차라리 정말 그러면 좋을 텐데요. 당신을 향한 음흉한 시선도 좀 거두고 말입니다.”
무슨 그런 농담을! 워낙 편견이 없으니 농담 아닌 것 같은 농담도 하는 그였다.
내가 피식 웃어 주자 그가 내 손에 사탕 하나를 쥐여 줬다. 역시나 긴장을 풀어 주려고 했던 모양이었다.
마차에서 내리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시스 자작이 서 있었다.
“거, 조심 좀 하지 그랬소? 황실군까지 적대적으로 대하다니 선을 넘었지 그래.”
자작은 나를 걱정하는 척했으나 입꼬리가 올라가 있었다.
“제 처지를 그렇게 염려해 주실 줄 몰랐네요. 자작령은 요즘 안녕한가요?”
“…….”
자작은 답하지도 않고 먼저 쌩하니 회의장으로 들어갔다.
높은 자리에 오르면 질투와 시기를 받는 게 당연한 이치였다. 루솔릿 공작령과 나의 몰락을 은근히 혹은 대놓고 바라는 사람은 당연히 있을 터.
그러나 나는 그들의 뜻대로 무너지지 않겠다.
헬라가 증거를 담은 상자를 들고 회의장 입구까지 따라왔다. 하지만 입구를 지키던 기사가 상자를 보고 경고했다.
“잠시만요. 사안이 사안인 만큼 아무것도 반입할 수 없습니다. 가져오신 자료가 있거든 황실 측에서 먼저 안전한지 검토하겠습니다.”
“그건 지금 바로 확인이 가능할 텐데요.”
“걸려 있는 술식이 있는지 면밀하게 살펴보라는 명이었습니다.”
“만약 먼저 말씀하셨으면 일찍 도착해 검토를 받았을 거예요.”
“그 부분에 대해서는 죄송합니다만… 저는 그저 받은 명령을 수행할 뿐입니다. 회의 중에는 들여보내겠습니다.”
자료를 없애려는 개수작이군. 나는 헬라를 흘긋 보고 말했다.
“헬라. 늦지 않게 가져올 수 있죠?”
“네, 공작님. 잘 지키겠습니다.”
루솔릿 공작가의 집사라면 어떻게 해서든 명령을 수행하리라는 믿음이 있었다. 그녀는 다른 호위 기사의 안내에 따라 증거품을 들고 떠났다.
빈손이라서 걱정이 되었으나 일단 에카르트와 함께 회의장에 입장했다.
이미 여러 귀족이 자리에 모여 있었다. 대부분 내게 먼저 인사를 건네기엔 조심스러운 눈치였다. 그 와중에 벨라 영애가 먼저 인사를 건네주었다.
나와 에카르트는 황족을 마주 보는 두 개의 의자에 앉았다.
곧 다비온와 아렌다가 들어와서 모두 기립했다.
나는 다비온에게 약간의 서운함을 느꼈다. 여태 블랑세와도 연락하지 않고 이 사태에 대해 일언반구 언급도 없었으니 말이다.
“오늘 회의를 소집한 이유는 알다시피. 시엘리나 루솔릿 공작은 전염병을 은폐하였고, 에카르트 크로덴 공작은 황실군을 공격하였죠. 이 모두 반역에 준하는 엄중한 죄목이므로 해명을 요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