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피폐물 조연은 도망치고 싶다-102화 (102/115)

#102화

“영애. 듣고 있나요?”

“죄송해요. 놀라서.”

헬라를 향해 눈짓하자 그녀가 바크 풀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바크 풀이에요. 귀리와 비슷하게 생겼고, 씨앗일 때는 더더욱 구분하기 어려워요. 하지만 귀리인 줄 알고 먹었을 때, 일주일의 잠복기를 지나 증상이 드러나면 심할 경우 사망에 이르죠.”

“저, 저는 모르는 일이에요!”

글로리아가 내게 다가오더니 눈물을 후두둑 쏟으며 치맛자락을 붙잡았다.

“떨어져.”

글로리아는 훌쩍거리며 치맛자락을 느슨히 잡았지만 놓지는 않았다.

“진정하세요.”

“정말 죄송합니다. 그렇지만… 그렇지만 저 몰라요오오….”

“네. 계약도 예정대로 진행할 테니 걱정 마시고 범인을 찾는 데에 협조해 주세요.”

“네에. 영주민들을 전부 심문해서 제 결백을 밝히겠어요!”

“아니. 눈에 안 띄게 행동하셔야 해요. 이 사실 역시 발설하지 마시고요.”

“알겠습니다. 숨도 참고 입도 꾹 닫고 있을게요.”

열정이 너무 과했다. 나는 헬라를 불러 재료를 전달했다.

“자루가 보이는 자리에 영상석과 이 특수 장치를 놓아주세요.”

헬라는 영상석과 함께 평범해 보이는 작은 쇳조각을 내밀었다. 하지만 자세히 보니 톱니 장치가 있어 상당히 정교해 보였다. 막심이 만든 특수 장치였다.

“이튿날 덫에 뭔가 잡히면 천으로 덮은 후 들고 오면 됩니다.”

“자동으로 작동하는 덫인가요?”

“네. 생명력과 심장박동은 물론 움직임에 반응하죠.”

헬라가 대신 설명한 후에 싱긋 미소 지었다. 에카르트보다는 유한 인상이었지만 공작성의 고용인이었기에 설명하기 어려운 위압감이 있었다.

“할 수 있겠죠? 살려서 데려와야 합니다.”

시엘리나가 웃음기 하나도 없는 얼굴로 묻자 글로리아는 위압감을 느꼈다.

“네, 네에! 저 덫 잘 놓아요! 닭부터 멧돼지까지 못 잡는 게 없죠.”

혼신의 힘을 다해 고개를 끄덕인 글로리아였다. 이윽고 헬라가 분홍색 디저트 상자에 무시무시한 물건을 담아 건넸다.

글로리아는 특수 장치를 한 번 더 확인하고서는 말했다.

“그런데 처음 보는 덫인데 역시 대단하시네요! 어떻게 구하셨나요?”

“제가 아니라.”

“아아.”

글로리아는 크로덴 공작의 능력에 새삼 혀를 내둘렀다. 그리고 절대 두 사람에게 밉보이는 일이 없게 하도록 다짐, 또 다짐했다.

“공작님, 공작님!”

다음 날 아침이 되자마자 글로리아는 천을 씌운 커다란 새장을 들고 응접실로 왔다.

시엘리나 역시 일찍 일어나 기다리고 있던 터였다. 글로리아는 잠을 제대로 못 잤는지 피곤해 보였지만 눈빛은 기쁨으로 빛났다.

“범인, 아니. 범조를 잡았어요. 혹시 공범이 있을까 봐 영상석도 새것으로 갖다 두고요. 일단 영상석 받으시고 새장도 확인해 보셔요!”

말과 동시에 글로리아는 천을 걷었다. 새장으로 변한 특수 장치 속에 처음 보는 조류가 갇혀 있었다.

“황실 신수로군요. 좋은 먹이만 먹고 자라서 그런지 살이 잘 올랐습니다. 맛있게 손질해서 저녁상에 올리지요.”

“어머. 정말 가정적이세요!”

에카르트와 글로리아 둘 다 제정신이 아니었다. 신수는 말귀를 알아들었는지 새장 속에서 마구 파닥거렸다.

“일단 신수를 잘 감시해야겠어요. 헬라, 신수가 동물처럼 특수한 울음이나 신호를 보낼지도 모르니 각별히 주의하시고요.”

“네. 맡겨 주십시오.”

빠르게 범인을 잡고 증거도 확보했으니 나는 곧바로 다음 계획에 돌입했다. 치료제를 구하러 가는 것이다. 그런데 블랑세로 인해 변수가 생겼다.

***

“시엘. 나, 나은 것 같아. 이거 봐.”

귀빈실에 갔더니 블랑세가 잠복된 독이 있는지 검사하는 진단지를 보여 줬다.

파란색 진단지에 소량의 피를 묻힌 후 종이가 원래의 색을 유지하면 음성이고 붉은색으로 변하면 양성이다. 임시로 쓰던 방법이지만 마정석을 사용해 정확도를 높였다나.

“마정석?”

에카르트가 예민하게 반응했다.

“엘린. 저 여자에게 마정석을 주셨습니까? 다음부터 신체 포기 각서를 작성하고 빌려 주십시오.”

“블랑세는 무슨 재료를 쓰든 다 무료에요.”

‘그나저나. 성력 덕분인가?’

그러나 성력으로 정화되는 독은 아니었다. 나처럼 수호신이 있거나 에카르트처럼 강력한 힘이 흐르는 것도 아니었다. 그렇다면 남은 가설은 하나.

“면역이 있었구나.”

바크 병은 타르 공국에서 한때 유행병을 만들었다. 미리 치료제를 먹거나, 걸렸다가 나은 사람은 중독되어도 잠복기 내에 빠르게 낫는다.

‘블랑세. 초상화와 닮았지.’

푸른 눈과 은발의 머리카락. 그 사실이 새삼 떠오르니 확인할 게 생겼다.

“블랑세. 같이 타르 공국으로 갈래?”

그러자 에카르트가 화병에 꽂힌 꽃의 잎사귀를 한 장 따서 창밖으로 버렸다.

블랑세가 타르 공국과 관련이 있는지 알아내고 싶었다.

하지만 블랑세에게 선대 공왕 부부가 부모님일지도 모른다고 말했다가 혹시라도 아니라면 상처를 받게 될지 몰랐다.

아니. 맞더라도 부모님이 이미 돌아가셨다는 사실에 상처를 받을지도 모른다.

그러자 에카르트가 목소리를 낮게 깔고 으르렁거렸다.

“저를 두고 저 여자와 그 짐승들이 가득한 곳에 다녀오시겠다뇨.”

“수인은 짐승이 아니에요! 그리고.”

“그리고?”

“당신이 제가 아는 사람 중 가장 강하고 믿음직스러우니 공작령을 맡기는 거고요.”

“출장을 간다며 다른 일을 하고 오는 귀족도 있겠지요. 저 여자는 위험해요. 당신에게 아직 저와도 못한 행위를 하려 들겠지요.”

“아니, 그게 뭔데요?”

“바로….”

“아악!”

직설적인 저음으로 내리꽂힌 단어를 듣고, 나는 비명을 지르며 그의 입을 틀어막았다.

그러자 그는 우유를 할짝이는 고양이처럼 내 손바닥을 핥았다. 부드러운 혀가 손가락을 간지럽히자 나는 후다닥 손을 뗐다.

그래도 여전히 야릇한 기분이었다.

“아. 좋은 정보 고마워요. 그럼 시엘의 처음은 제가 되겠네요.”

블랑세가 뜻밖의 행운을 발견한 사람처럼 웃었다. 나는 둘에게서 나를 보호할 필요성을 느꼈다.

***

시엘리나는 공작령을 떠나기 전에 가신 회의를 소집했다.

그리고 14구역 마을을 순찰하던 중 독초를 발견한 상황을 알렸다.

“체질에 따라 독성이 치명적이지만 일주일 내에 치료제를 먹으면 부작용 없이 전부 완치하죠. 내일까지 치료제를 가져와 전 영지에 보급할 테니 기다려 주세요.”

“세상에! 독초가 어떻게 퍼진 겁니까?”

“보급품에 섞여 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범인에 대한 단서를 얻었으나 간과한 부분이 있는지 추가적으로 조사 중입니다.”

“조사 중이라면 아직 해결되지 않은 것입니까?”

“일에 대한 것은 빠른 시일 내에 결과를 공개하도록 약속하죠. 또한 중독 여부는 검사지를 통해 파악할 수 있습니다. 그 외에 평소와 달리 이상을 느낀다면 각 구역의 치안 기사에게 보고하도록.”

가신들은 각 구역에 회의 내용을 전달했다. 일부는 분개하고 걱정했지만 대부분은 시엘리나에 대한 신뢰가 상당했기에 크게 동요치 않았다.

“이틀 전에 발견했는데 내일까지 치료제를 전부 가져온다고?”

“대단하군.”

“뭐, 공작님께서 알아서 해 주시겠지.”

“어허, 무슨 말을! 어차피 공작님이 아니었다면 애초에 공작령은 무너졌을 걸세.”

나와 블랑세는 공국으로 떠날 준비를 했다.

일단 사흘간 공작령 업무를 에카르트에게 위임하는 여러 증서에 도장을 찍었다.

“헬라. 여기 혼인 서약서가 있는데요.”

“…크로덴 공작님께서 끼워 넣으신 것 같습니다.”

다 때가 되면 알아서 하겠거늘! 나는 그 서류는 다른 서랍에 따로 보관해 두고 곧장 공국으로 떠나기 위해 옷을 갈아입었다.

니나는 드레스룸에서 편한 반팔 셔츠에 신축성이 좋은 바지 차림을 준비했다.

“어머, 공녀님. 어쩌면 이렇게 모든 옷이 다 어울리세요?”

마지막으로 니나가 얇은 외투를 걸쳐 주려던 그때 에카르트가 노크 한 번을 하더니 곧장 방으로 난입했다.

그러고는 서류를 뒤적이다가 제 머리카락을 못마땅하게 쓸어 넘겼다.

“찾는 거 있으세요?”

“보셨습니까?”

“중요한 서류 같아서 따로 보관했어요. 나중에 다시 확인할게요.”

“나중? 1분 후 말입니까?”

정말 양심이 없구나! 내가 그저 웃자 에카르트가 서류를 검토하고는 말했다.

“이 순간부터 제게 위임하는 거지요?”

“네.”

에카르트는 니나가 내게 걸치려던 외투를 빼앗아 들었다.

“공작님과 할 이야기가 있으니 나가 봐.”

그가 첫 번째로 내린 명령은 내 하녀를 방에서 내쫓는 거였다. 니나는 눈치를 보다가 조심스레 파이팅 포즈를 취하고 나갔다.

둘만 남자 에카르트가 내 손목을 쥐더니 벽으로 밀어붙였다.

“당신처럼 매력적인 연인을 뒀으면 단속 잘해야 합니다.”

그는 내 몸을 돌려 벽을 보게 하더니 머리카락을 앞으로 넘겼다. 그러고는 칼라 깃을 들추고 안쪽의 피부를 잘근잘근 깨물었다.

나는 이상한 느낌이 들어 “잠시만요!”를 외쳤고 의외로 순순히 입술이 떨어졌다.

“일부러 옅게 남겼습니다. 지워지기 전에 와야 합니다. 아시겠지요?”

“…….”

“늦게 오면 제가 찾아갈 겁니다.”

무엇을 했는지 뒤늦게 깨달았다. 키스 마크를 남기다니! 순식간에 얼굴이 붉어졌지만 이대로 그에게 밀리고 싶지 않았다.

그에게 휘둘리기만 했다가는 주도권이 넘어갈 것 같았다. 이런 절륜함이라면 뭐 그래도 괜찮지만.

나는 까치발을 들어 에카르트의 멱살을 잡고 목을 살짝 깨물었다.

“유혹하는 실력이 타고났나 봅니다.”

그런 더티 토크 같은 말 하지 말라고! 나는 최대한 태연하게 말했다.

“지워지면 다시 남기러 올게요.”

그쯤에서 물러나려고 했는데 그가 다시 나를 붙잡더니 긴 키스를 시작했다.

“그, 그만! 이제 가 봐야 해요.”

“자꾸 자제하지 못하게 하시는군요.”

더 건들면 또 달려들까 봐 나는 슬금슬금 게처럼 옆으로 걸어 빠져나왔다. 그는 내게 외투를 건네려다가 직접 입혀 주더니 단추까지 꼼꼼히 잠갔다.

***

타르 공국까지 미랑을 타고 갈 생각이었다. 미랑은 연기와 함께 부채를 들고는 거들먹거리며 등장했다.

“나를 불렀는가.”

아무리 근엄한 척해 봤자 마수를 보면 겁먹는 하찮은 신령에 불과했다. 내가 피식 비웃자 에카르트가 딴지를 걸었다.

“저놈에게 웃어 주셨군요.”

“비웃은 거예요.”

“비웃음도 웃음이지요.”

그럼 악법도 법이고 꿀밤도 밤인지 대꾸하려던 그때. 블랑세가 이때다 싶어 말했다.

“시엘. 저 의처증 남자 대신 나한테 와.”

“블랑세. 그럴 일은 없지만 만약 물에 다비온 전하와 내가 빠졌어. 그럼 어떻게 할 거야?”

“당신이 다비온 그 자식과 왜 같이 있던 겁니까?”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