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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폐물 조연은 도망치고 싶다-101화 (101/115)

#101화

“블랑세! 아까 순찰하면서 바크 풀이 있는지 확인한 거야?”

“응.”

“그렇다면….”

왜 이제 이야기했을까. 설마 내가 판단할 시간을 벌어 주기 위해서? 바로 알게 된다면 혼란이 컸을 테니 말이다.

나는 못마땅하게 한숨을 쉬고 말했다.

“블랑세. 바크 풀을 섭취한 주민이 몇 명이나 될까?”

“쉽게 확인하기는 어려울 거야. 나도 마시기 전까진 몰랐으니까. 그러니 치료제는 넉넉히 준비해야겠어.”

“엘린. 치료제가 무엇입니까?”

“타르 열매요. 타르 공국에 있으니 구하기 어려운 재료는 아니에요. 그런데….”

나는 주먹을 꽉 쥐고 결연하게 말했다.

“바크 풀 씨앗을 섞은 범인을 잡고 싶어요.”

“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인간 화분으로 만들어 줍시다.”

만약 타르 공국에 간다면 범인은 내 움직임을 간파하고 도주할 것이다.

“독성이 드러날 때까지 일주일의 잠복기가 있지. 이틀간 범인의 단서를 찾아보고 결과가 어떻든 바로 타르 공국으로 가겠어.”

“좋은 생각이야.”

만약 누군가 풀을 섞으려고 했다면 이클립스 기사단이 알아차렸을 터.

내부자일 가능성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었지만, 에카르트가 믿어 온 사람들을 의심하고 싶지 않았다.

“일단… 치료제는 공국에서 구할 수 있어요.”

성전 출신의 백마법사는 성전에서 보관하는 재료를 구매할 수 있다.

증거를 확보한 후이니 공개적인 행동을 개시해도 되지만 충분한 물량을 갑자기 구할 수는 없을 것이다. 무엇보다 에카르트 역시 공국에서 가져올 것을 추천했다.

“백마법사 단장 카렌은 아시다시피 황후의 측근입니다. 미리 이 사태를 예측했을지도 모르죠.”

“그럴지도요.”

나는 나의 위치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공작령의 물자를 공국에서 충당하려면 대가가 필요할 텐데.’

그렇지 않아도 내가 공국에서 하는 일도 없는데. 물론 나라를 바로잡았긴 하지만, 그럼에도 훗날 문제의 여지가 발생할지 모른다. 나는 교역로 진행 계획을 확인했다.

“헬라. 마정석으로 교역로를 확장해야겠어요.”

“가능할 겁니다.”

“공작령과 공국 간 진행되는 교역은 관세를 낮추는 혜택도 부여하고요.”

그녀는 문제없다는 듯이 미소 지었다.

치료제는 얼마든지 확보할 수 있었다. 며칠 전 공국에서 재배한 품목을 전부 보고받았다.

“혹시라도 치료제 수급을 훼방하려는 세력이 있을지 모릅니다. 기사 한 명을 산맥으로 보내 두겠습니다.”

“좋아요.”

치료제를 구할 방안을 정했으니 범인을 잡기로 했다.

***

나는 헬라가 14구역을 확인하러 간 사이 블랑세를 침대에 눕히고 곁을 지켰다.

블랑세가 나처럼 수호 신령이 있거나 에카르트처럼 특출 난 힘을 가진 것도 아니라 여러모로 걱정이 되었다.

아니. 애초에 블랑세가 아무리 강인해도 독을 먹는 것 자체가 싫었다.

“속상해?”

“…….”

“증상도 아직 없고. 치료제도 알면서 뭘 그렇게 걱정해.”

“걱정 안 했는데.”

나는 블랑세에게 괜히 마음의 짐을 얹어 줄까 봐 본심과 다르게 말했다. 물론 에카르트가 창틀을 괜히 툭툭 치며 질투할 만큼 티가 났다.

아직 시간이 충분해도 경계를 놓을 수 없었다.

“인명 피해가 발생하면 나를 신뢰했던 만큼 돌아설 텐데.”

“엘린. 당신에게 뭐라 하는 놈은 다시는 그런 소리를 하지 못하게 혀를 자르고, 손과 발도 불구로 만들 테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

이상하지만 그런 협박을 들으니 마음이 편해졌다. 그러자 블랑세가 에카르트를 의식한 듯이 이마에 손을 짚고 앓는 소리를 냈다.

“왠지 열나는 것 같아. 네 성력을 받으면 좋을 텐데.”

나는 에카르트 몰래 이불 아래로 손을 넣고 블랑세의 손을 잡아 주었다. 뒤를 돌아보자 아니나 다를까 맹수 한 마리가 으르렁거리고 있었다.

“엘린. 성력의 향기가 납니다.”

“아프다고 그래서요.”

“꾀병이라는 데에 제 부하 한 놈을 걸지요.”

“애꿎은 부하는 왜 걸어요.”

곧 노크 소리가 들리고 헬라가 상황을 보고해 주었다.

“공작님. 말씀대로 벨라 영지에서 받은 농작물을 배급한 지역에서 바크 풀이 발견됐습니다.”

헬라는 내게 지역을 표시해서 보여 줬다. 그리고 품에서 작은 유리 상자 하나를 꺼냈다.

“그리고 아직 풀지 않은 자루도 다시 확인하니 이 깃털이 섞여 있었습니다.”

상자 안에는 초록색 깃털이 있었다. 이 근처에서 서식하는 새는 아니었다.

“신수겠지요.”

에카르트가 확신했다. 나는 황실과 더불어 글로리아를 떠올려 보았다. 글로리아를 완전히 믿을 수는 없었지만 완전히 의심할 수도 없었다.

“다음 납품일이 이틀 뒤니… 신수는 다시 올 확률이 커요.”

“저도 그럴 가능성이 높다고 봅니다.”

“이클립스 기사단은 신수를 알아차릴 가능성이 있고 루솔릿 공작령의 결계는 보다 삼엄하게 작동하니, 신수가 범인이라면 바크 풀을 도착하기 전에 섞으려고 하겠죠.”

“제 생각도 그렇습니다.”

에카르트가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자루 사이에 영상석을 놓으라고 해야겠어요. 벨라 영애를 적당한 핑계를 대서 부르죠. 한데 만약 영상석을 설치해도 충분한 증거가 될까요?”

“걱정 마십시오. 신수를 잡아 봅시다.”

“그럼 좋을 텐데 가능할까요?”

“도구가 있습니다.”

“신수를 잡을 수 있는 도구가 있다고? 저는 한 번도 들어 보지 못했는데요?”

내가 머릿속으로 물음표를 찍자 그가 보충 설명을 했다.

“덫을 설치하면 됩니다.”

“어떻게요?”

“아는 놈이 한 명 있지요.”

“에카르트가 위험해지는 일은 안 돼요.”

“당신이 걱정하시니 가끔 위험한 짓을 하고 싶어진단 말입니다.”

에카르트가 능청스러운 눈빛으로 나를 유혹하려고 들었다. 이럴 상황은 아니었지만 나는 짧게만 입을 맞춰 주었다.

“아슬아슬한 건 항상 즐기시잖아요.”

“사실 늘 그런 생각을 하지요.”

“사실 저도 그래요.”

내가 적당히 맞받아치자 에카르트는 아예 나를 잡아먹으려 했다. 나는 그를 적당히 받아 준 후 말 그대로 숨을 돌리고 말했다.

“정말 여러 분야에 재능이 많으시네요.”

“감사합니다. 인정받아서 기쁘군요.”

나는 글로리아에게 편지를 쓰기 위해 잠시 귀빈실을 나왔다. 에카르트는 블랑세의 화병에 꽂아 둔 꽃을 챙겨서 나를 따라왔다.

“아니, 왜 갖고 오셨어요?”

“그 여자 방보다는 제 방에 더 잘 어울릴 것 같습니다.”

“그럼 블랑세 방에 잘 어울리는 꽃은 뭔데요!”

“글쎄요. 마구간 볏짚 정도가 좋겠군요.”

나는 블랑세의 처우 개선은 반쯤 포기하기로 했다.

***

헬라는 시엘리나의 편지를 벨라 영지로 전했다.

시엘리나는 다시 한번 헬라가 침착하게 계획을 세우는 모습을 보고 감탄했다. 그녀는 필요한 명령만 지시하며 고용인을 감정적으로 부리지 않았다.

게다가 일부 귀족들이 얼마나 행패를 부리는지 알았기에 시엘리나의 집사가 된 것을 감사히 생각하고 있었다.

휴가 시간도 챙기고 혹시라도 과로하지는 않을까 자신의 건강까지 염려하는 상냥한 주인이었다.

마음속으로 신께 감사 인사를 드리는데. 에카르트가 집무실 문을 지키고 서 있었다.

아무리 주인이 시엘리나로 바뀌었다고 해도, 에카르트 역시 명령을 내릴 수 있는 위치. 헬라가 불길함을 느낄 때 아니나 다를까, 무시무시한 목소리가 들렸다.

“막심, 알지?”

“네, 기억합니다.”

막심은 희귀한 생물을 전문으로 잡는 사냥꾼이었다.

원래는 북부의 기사로 지내다가 중년이 되어 은퇴한 후 새로운 천직을 찾았다나. 솔직히 잊었다고 하고 싶었지만, 흉흉한 눈빛 앞에서 자백제라도 먹은 것처럼 솔직해졌다.

“재주껏 창고로 데려와. 기사단에게 맡기든 직접 데려오든.”

“예? 주인님께서 호출하실지 모르니 항상 대기해야 합니다.”

“호출하기 전에 빨리 처리하면 될 것을. 엘린은 내가 지키지.”

에카르트가 사악하게 덧붙였다.

놀랍게도 헬라는 이 얼토당토않는 명령을 수행해 냈다.

기사단원이 목숨을 걸고 막심을 찾아낸 덕에 이튿날 공작성 창고에서 만남이 이뤄졌다.

“고, 공작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찾으셨다기에 냉큼 달려왔습니다요!”

막심은 무슨 이유로 기사단이 저를 찾아왔는지 열심히 머리를 썼다.

크로덴 공작가 소유의 영토에서 사냥을 하거나, 시엘리나 루솔릿 공녀에게 말을 붙인 적도 없었으며, 오직 상명하복을 충실히 따르며 살았다.

그랬기에 이렇게 공작의 직접 호출은 더 두렵게 했다.

에카르트가 물끄러미 막심을 보다가 말했다.

“덫 하나 만들어 와.”

“덫요? 혹시… 무엇을 잡으려고 하십니까?”

“비둘기나 닭 같은 거다.”

그럴 리가! 막심은 차라리 인간을 사냥하겠다는 말이 더 신뢰가 갔다.

“잡으려는 종류에 따라 다르게 개발해야 합니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실 수 있을까요?”

“새 종류의 신수다.”

“시, 시시… 신수!”

차라리 인간인 편이 더 쉬웠을 것이다. 신수는 만지거나 길들이기 어려울뿐더러, 일반인이 황실의 소유에 손을 댄다면 그 대가는 불 보듯 뻔했다.

“저… 죽습니다.”

“내가 아니었다면 북부에서 죽었겠지.”

어차피 여기까지 납치당한 이상 결정권이 없었다.

“죄송합니다. 당장 만들겠습니다. 기간은 얼마 정도로 예상하시지요?”

“내일.”

“네?”

전혀 현실성 없는 말에 막심은 기절할 것 같았다.

“내일.”

“…네!”

하지만 결국 마음속으로 눈물을 삼키고 명령에 응할 수밖에.

***

- 벨라 영애. 이번에는 제가 동방의 식사를 대접할게요.

편지가 유출될 가능성을 대비해 시엘리나는 용건을 적지 않았다.

편지를 받은 글로리아는 새벽부터 치장하느라 분주했다. 드레스룸에서 가장 좋은 드레스를 빼입고 빨간색과 금색을 섞은 리본 장식을 둘렀다.

“오레이칼 왕국의 마법 대회에서 마법사들이 시엘리나 님을 응원하는 데에서 유래했다나. 어때! 예뻐 보여?”

“네에, 그 얘기 벌써 서른 번쯤 하셨어요!”

“내가 얼마나 예쁘다고?”

“시엘리나 루솔릿 공작님 다음으로요!”

“아하하! 마음에 드네. 월급 올려 줄게.”

글로리아가 까르르 웃자 하녀는 적당히 장단에 맞춰 주었다.

공작령에 도착한 후에도 글로리아는 계속 구름 위를 떠다니는 기분이었다. 물론 시엘리나의 표정이 오늘따라 차분했고, 식사 자리에 에카르트까지 함께 있어 다소 무서웠지만 말이다.

글로리아와 함께하는 식사가 끝나고 내가 본론을 꺼냈다.

“글로리아. 받은 곡물에 독초가 섞여 있더군요.”

“네?!”

글로리아는 포크를 쥔 상태 그대로 굳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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