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화
황제의 뒤로 백마법사 단장도 보였다. 황제의 건강 상태를 염려해 요즘 백마법사 단장은 주치의와 더불어 황실에 상주하게 되었다.
다비온은 예를 차린 후 함께 식사를 시작했다.
테이블 위로 음식이 화려하게 마련되었지만, 황제는 단 한 입도 제대로 들지 못하고 피를 토했다. 백마법사 단장이 그의 상태를 살피며 조심스레 말했다.
“폐하. 달의 꽃을 사용할 때가 된 것 같습니다.”
“달의 꽃은 후대를 위해 아껴 두어야 하오. 어쩌면, 짐은 제국에서 내려올 때가 되었는지도 모르지.”
이미 모든 것을 내려놓은 듯한 황제의 말을 듣고 다비온의 마음은 복잡해졌다. 자신이 황위에 오른다는 것은 아버지가 물러남을 뜻했다.
“아버지.”
“말하거라.”
“시엘리나 루솔릿 공녀에게 치료를 받는 건 어떠십니까? 그녀는… 유능합니다.”
그러자 단장도 아닌 황후가 딱 잘라 말했다.
“마검의 지배자를 치료하던 사람이다. 그녀의 몸도 영향을 받았을지 모르는 일. 폐하께 저주나 마력이 물들면 어쩌느냐?”
“…….”
백마법사 단장이 알기론 여태 그런 사례는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반박하는 대신 가만히 황후의 눈치를 살폈다. 그러자 황제는 어딘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황후의 말이 옳다. 다비온, 나의 병증에 대해선 내가 잘 알지.”
“어찌 그런 말을 하시나요. 어서 건강해지셔야죠.”
다비온에게 황제는 윈터로드 제국의 수장이기 전에 자신의 아버지였다. 그 마음을 아는 황제는 따뜻하게 웃어 주었다.
“나는… 충분히 살았다. 윈터로드 제국은 더 젊은 황제가 필요해.”
황제가 다시 잔기침을 시작했다. 다비온은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다.
“황후 앞에서 꼴사나운 모습을 보이는군. 미안하오.”
“아닙니다. 어서 쾌차하시길.”
“고맙소.”
황제가 따뜻한 목소리로 간신히 미소 지었다. 아렌다는 그를 외면하고 백마법사들에게 지시했다.
“…폐하를 모시거라.”
“네, 황후 폐하.”
다비온과 단둘이 남게 된 후 그녀는 담담하게 다시 식사를 시작했다.
“네 아버지는 염려할 것 없다. 그나저나 크로덴 공작과 시엘리나 공녀가 교제한다더군.”
“그런가요.”
다비온이 최대한 남 일처럼 심드렁하게 말했다. 하지만 속으로는 황후의 소식통이 정말 빠르다고 생각했다.
“라멜 공녀가 다녀간 후 네가 조치를 취한 것이 아니냐.”
“…….”
별달리 부정하지 않는 다비온을 보고 아렌다는 실망했다. 실망은 곧 원망으로 바뀌었다.
“너를 위한 일임을 어째서 몰라주는 것이지?”
“어머니.”
“일개 평민 여자가 어떻게 이 자리에 올랐는지 너는 알지 못한다!”
아렌다가 다비온을 다그쳤다. 가만히 있으면 되거늘 어째서! 제 자식이 이렇게 뒤에서 자신의 뜻과 엇나가는 짓을 할 줄 몰랐다.
“나의 모든 행적은 너를 위한 것이었어! 그 과정에서 수많은 것을 포기하였지.”
처음엔 분명히 그랬지만 점점 다비온을 위해 한 것, 자신이 원한 것 중에 무엇이 먼저였고 이후인지 헷갈렸다.
“그리고-”
그녀는 말을 삼켰다. 아직 다비온에게도 말할 수 없는 이야기가 있었다.
하지만 알게 되더라도 그는 이해해야 한다. 제 자식이니까 거슬러서는 안 된다. 그를 위한 길이므로 받아들여야 한다!
“…….”
다비온은 시엘리나와 블랑세를 생각했고 그들의 능력과 담대함을 떠올렸다.
더 많은 권한을 갖고 있음에도 그간 소극적으로 나선 자신이 부끄러웠다. 이상하게도 더 이상 어머니의 감정이 스스로의 감정보다 앞서지 않았다.
“제 친구의 삶을 망가뜨리는 게 저를 위한 길입니까?”
“네가 무슨 바람이 들었는지 내 말에 의문을 품는구나.”
“어머니, 저는 그들이 저를 믿게 하고 싶습니다.”
다비온은 이전처럼 곧바로 의견을 굽힐 수 없었다.
***
라멜의 티파티는 온통 에카르트와 시엘리나 이야기뿐이었다.
“두 분이 수도 한복판에서 공공연한 데이트를 했다죠.”
“키스를 오래하셔서 지켜보던 사람들도 먼저 자리를 떠날 정도였어요!”
“귀족끼리 연애가 보수적이란 건 역시 편견이에요. 얼마나 열정적이신지… 저도 살면서 그런 사랑을 해 보고 싶네요.”
귀족 모두가 그런 연애담에 한마디씩 보탰다.
라멜은 미소를 지으면서도 테이블 아래로 주먹을 꽉 쥐었다. 한창 잘 어울리고 부러운 커플이라는 식으로 분위기가 흐를 때, 영애 한 명이 우쭐거리며 말했다.
“저는 남부에서 흥미로운 소문을 들었답니다!”
“뭔가요?”
“라멜 님은 아실 텐데. 시엘리나 공녀님이 말이에요….”
“네?”
라멜은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자 영애는 잠시 뜸을 들여 모두의 궁금증을 자극한 후 말했다.
“시엘리나 님이 타르 공국의 공왕이 되었대요!”
“네? 걔가… 아니, 언니가요?”
라멜은 깜짝 놀라 순간 반문했다가 간신히 상황을 수습했다.
“호, 호호… 언니가 직접 전할 말이 있다더니 그거였나 보네요!”
“어머. 그럼 먼저 알려 드려서 어쩌죠? 죄송해요!”
“아니에요. 뭐, 어차피 다 알려질 테니까요. 언니도 참, 뭘 그렇게 기쁜 소식을 숨긴대요?”
라멜은 담담한 척하며 곧 루솔릿 공작의 생일이라고 운을 띄우려 했다. 하지만 귀족들의 뜨거운 반응은 좀처럼 식지를 않았다.
“세상에! 공왕이라니, 그럼 앞으로는 전하라고 불러야 하나요?”
“저도 신하로 받아 달라고 부탁드리고 싶어요.”
“저도, 저도요!”
귀족들의 관심은 커져만 갔다. 라멜은 포크를 들고 당장 시엘리나를 찌르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티파티가 끝나고 방에 들어오자마자 라멜이 본색을 드러냈다.
“그 벌레가 공왕이 됐다고? 웃기지 마! 공왕은 아무나 해?”
그녀는 화병이나 손에 잡히는 물건을 죄다 집어 던지며 비명을 질렀지만 울분은 풀리지 않았다.
“가주 교육도 못 받은 주제에 무슨….”
하녀들은 그녀의 눈치를 보며 가만히 서서 속으로 생각했다.
‘또 시작이야?’
‘저거 다 치우는 것도 일인데.’
라멜이 씩씩거리다가 하녀 사이에서 실라의 멱살을 잡아들었다.
“너. 방금 웃었지?”
“아, 아니에요.”
“이제 내 말에 토까지 달아?”
매번 이런 식으로 가장 큰 불똥은 실라에게 튀었다.
정말 그런 적 없었건만 라멜은 실라가 자신을 비웃었다고 확신했다. 짝 하는 세찬 소리와 함께 실라의 뺨이 돌아갔다.
“빚 때문에 갈 곳도 없는 주제에! 감히 공녀인 나를 깔봐?”
라멜의 구타가 한 번으로 끝나지 않자 보다 못한 하녀가 말렸다.
“고, 공녀님! 곧 연회장으로 가실 시간이에요.”
“마, 맞아요. 공작님을 만나러 가셔야죠.”
“맛있는 식사가 준비되었을 거예요!”
라멜이 찬바람을 일으키며 다른 하녀들을 데리고 나간 후. 실라는 부푼 뺨을 어루만지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아가씨가 공왕이 되셨다면 공작 작위는 어떻게 되지?’
여태 공작성에 남았던 의미는 없는 것일까.
잠시 속상한 마음이 들었지만 이내 씩씩하게 의지를 다잡는 실라였다.
‘내가 원해서 공작성에 남았는걸. 아가씨의 행보가 어떻게 되든 축복할 일이야. 제국에 돌아오셨다면… 다시 공작령에 들르실지 모르고.’
실라는 일단 공작성을 떠나지 않고 계속 증거를 수집할 생각이었다.
공작가의 모든 권한과 재산은 애당초 시엘리나의 것이니까.
***
연회장에 마련된 네 개의 의자 중 두 자리가 비어 있었다.
루솔릿 공작은 접시 위의 음식을 먹는 둥 마는 둥 했다. 그는 문가를 흘긋흘긋 보며 리셀과 리타가 오기를 기다리다 결국 요리를 반이나 남겼다.
“결국 오늘도 우리 둘뿐이구나.”
“리타는 공부하느라 바쁜 모양이에요. 이따 제가 따로 식사를 전할 테니 걱정 마셔요.”
라멜이 달래도 공작의 근심은 깊어졌다.
“후우, 불쌍한 내 아들! 요즘 들어 무리하는 것 같아서 고민이다.”
“저도 너무 걱정이에요.”
“그것이 리타의 자존심을 상하게 한 게 문제다. 마법 대회에 승리한 것도 다 운이건만!”
“…….”
마법에 대해 잘 모르는 라멜이라도 그건 아니었다.
먼 관중석에 앉아서 경기를 봤지만 리타는 애초에 시엘리나의 상대가 되지 않았다.
“라멜. 무슨 일 있느냐?”
“아, 아니에요.”
‘그러고 보니 크로덴 공작과 그것이 사귄다고 했지.’
루솔릿 공작은 사랑하는 딸이 시무룩한 이유를 또 시엘리나 때문이라고 착각했다. 이미 라멜은 실라에게 실컷 화풀이를 하고 온 후였는데 그런 사정도 모르고 말이다.
“내가 그 여자와 결혼하는 게 아니었다!”
설마 리셀을 말하는 건가 싶어 덜컥 놀란 라멜이었다.
“엄마…요?”
“체닐 말이다!”
라멜은 대답을 듣고 안도했다.
한편으로 이렇게 아빠의 말에 기분이 좌지우지되는 제 처지가 딱하게 느껴졌다.
‘다 그 벌레 때문이야.’
시엘리나가 태어난 바람에 자신이 공작성에 늦게 들어와서, 남들의 눈치를 보는 성격이 되었다고 믿었다.
더구나 그녀가 공작성 밖으로 나가 승승장구하니 마음이 갈팡질팡했다.
그래서 에카르트에게 쓸데없는 짓만 잔뜩 하며 여태 시간만 낭비했다.
하지만 부녀의 생각이 잘못되었다고 말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기에 시엘리나를 향한 망상과 증오는 더욱 견고해졌다.
***
식사를 마친 후 라멜은 직접 음식을 들고 리타의 방으로 향했다. 그러다 복도에서 술에 취한 리셀을 마주했다.
“어머. 마침 배고팠는데. 잘 됐네!”
리셀은 쟁반 위의 작은 샌드위치 하나를 그대로 집어 들었다.
“먹지 마요! 리타 거예요.”
“얘가, 먹는 거로 쪼잔하게 굴기는! 배고프단 말이야.”
그녀는 게걸스럽게 샌드위치 하나를 해치웠다. 그리고 가슴팍에 묻은 소스를 대충 문질러 닦고는 반대편으로 걸어갔다.
라멜의 눈빛에 경멸이 어렸다.
‘또 그 호위 기사를 만나고 왔겠지.’
안주인 역할도 제대로 못 하고 어찌나 자식에게 무관심한지 짜증이 날 지경이었다.
‘나는 리타의 하나뿐인 누나야. 내 동생은 내가 챙겨야지.’
라멜은 스스로 착하고 어른스럽다고 생각하며 리타의 방을 노크했다.
“리타~”
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몇 번 더 문을 두드리자 문이 벌컥 열리더니, 리타가 짜증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내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