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화
“그렇다면 차라리 다행입니다. 부티크를 미리 예약했으니 그쪽으로 가시지요.”
“부티크를요?”
즉석 데이트인 줄 알았는데 장소가 정해져 있던 모양이다.
“네. 공작성에서 지내려면 생필품이 많이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언제부터 사치품이 생필품이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는 작정하고 데이트를 즐길 작정이었다. 그는 내 손을 꽉 붙들고는 새하얀 벽돌로 지은 부티크로 들어갔다.
“어, 어서 오십시오! 크로덴 공작님, 시엘리나 공녀님!”
직원은 불필요한 동작을 최소화하고 90도 각도로 움직였다. 내가 찬찬히 부티크 안을 둘러보자 에카르트는 하인에게 지시했다.
“저거.”
“네, 주인님.”
“그리고 저기부터 저기까지.”
뭔가 하고 보니 그는 내 시선이 닿는 걸 전부 구매하고 있었다!
“너무… 가격이 높은데요.”
“이 정도는 은행의 며칠 치 이자입니다.”
크로덴 공작가는 숨만 쉬어도 돈이 들어오는군. 나는 같이 데이트하러 나온 건데 자꾸 그가 전부 사 주는 게 곤란했다. 그래서 소곤소곤 그의 귓가에 말했다.
“저도 선물을 드리고 싶은데.”
“선물요?”
“네. 생일도 못 챙기기도 했고….”
“그럼 감사히 받겠습니다. 아. 그러고 보니 당신 생일은 언제로 챙기는 게 좋습니까?”
원래의 시엘리나와 나 둘 중에서 묻는 것이겠지.
“신기하게도 같더라고요.”
“그렇군요. 정말, 당신은 이 세계에서 저를 만날 운명이었나 봅니다.”
나는 딱히 부정하지 않고 미소를 지었다. 나는 남성복 코너에 진열된 정장을 가리키며 말했다.
“에카르트. 저거 어떠세요? 커플 의상으로 어울릴 것 같아요.”
“좋습니다. 그리고 이참에 커플 의상뿐만 아니라 커플 파자마, 커플 슬리퍼, 커플 칫솔도 삽시다. 커플링도 맞추고 커플 귀걸이도 좋겠군요. 제가 귀를 뚫겠습니다.”
에카르트는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커플”로 시작하는 수십 종류의 물건을 나열했다. 저렇게 들뜬 모습을 보니 나도 뭔가 말하고 싶어졌다.
“아! 그럼 커플 속옷도….”
아니, 왜 하필 평범한 물건을 내버려 두고! 나는 내 입을 한 손으로 막고 말을 급히 정정했다.
“미안해요. 이야기가 헛나왔네요.”
“당장 사러 나갑시다.”
“네?”
“애초에 파자마 대신 그것을 말씀드리고 싶었지요. 하지만 당신이 저를 쓰레기처럼 볼까 봐 참았습니다.”
“아니에요. 그건 다음에!”
“다음?”
에카르트는 마치 나를 사탕을 줬다가 뺏은 나쁜 어른처럼 바라보았다.
“미안…해요?”
“미안합니까?”
안 사겠다는 것도 아니고 다음에 사자는 게 그렇게까지 못마땅할 일인가! 나는 왠지 모를 보호 본능이 들어 옷을 더 단단히 여몄다.
에카르트의 하인은 구입한 의상 목록을 직원과 표로 만들어 열심히 계산했다. 다섯 뼘도 넘어 보이는 영수증이 줄줄이 이어졌다.
“엘린. 우리는 식사하러 갑시다.”
나는 하인을 안쓰럽게 쳐다본 후 에카르트를 따라나섰다. 그가 알아봤다는 레스토랑으로 도보로 이동하는 길. 문득 블랑세가 생각났다.
“그런데 블랑세는 잘 있을까요?”
“그 작자는 어린아이가 아닙니다. 저한테 집중하시지요.”
“…그러고 있는데요.”
내 말이 미덥지 못하다는 듯이 에카르트가 눈을 가느다랗게 떴다.
“아무래도 커플링 대신 커플 팔찌를 차는 게 좋겠군요.”
“커플 팔찌요?”
“네. 오래 착용해도 안 아플 정도로 부드럽지만, 혼자서는 풀 수 없을 정도로 튼튼하고 잠금장치도 있어야 합니다.”
“아무래도 족쇄나 수갑을 말씀하시나 봐요.”
“비슷하지만 엄연히 다릅니다. 재질도 함께 고르고 좋아하는 보석도 예쁘게 장식해 드리지요.”
예쁘게 꾸민다고 본체가 달라지는 게 아니잖아! 내가 싫다고 말하려 하자 에카르트가 블랑세 이야기를 꺼냈다.
“엘린. 혹시 그 작자도 저만큼 소중합니까?”
“그건 또 왜… 말씀드렸다시피 블랑세가 소외감을 느끼게 하고 싶지는 않다니까요.”
“그럼 다비온 그 자식과 아예 결혼시킵시다. 전생에 서로 좋아했으면서 저로 인해 이어지지 못했다지요? 이번엔 제가 적극적으로 돕겠습니다.”
“그건 본인 의사가 중요하죠.”
내가 진정하라는 의미로 에카르트의 머리를 쓱쓱 쓰다듬었다. 그러자 그가 한숨을 쉬더니 슬픈 표정을 지었다.
“왜, 왜 그러세요?”
“저… 소외감을 느끼는 것 같습니다. 마음이 찢어질 듯이 아프군요.”
“그럼 어떻게 할까요? 마력을 나눠 드리면 되나요?”
에카르트는 그 반응을 기다렸다는 듯이 제 머리에 얹은 내 손을 감쌌다. 그리고 괜히 손가락 사이사이를 간지럽히는 바람에 기분이 이상해졌다.
“가, 간지러워요.”
“바라는 게 있기는 한데 이런 식으로 요구하고 싶진 않군요.”
말과는 달리 그의 눈빛은 지나가던 참새도 태울 만큼 이글이글했다.
“뭘 바라시는데요? 뽀뽀?”
“하아. 제가 생각한 건… 네. 어쨌든 좋습니다.”
내가 발끝을 들어 올려 에카르트의 입술에 간신히 입을 부딪쳤다.
에카르트는 기다렸다는 듯이 냉큼 내 목을 붙들었다. 이렇게까지 애정 행각을 할 생각은 없었는데. 놀라서 벌린 입 사이로 예고도 하지 않고 그의 입맞춤이 깊게 들어왔다.
단순히 사귀는 걸 보여 주기 위해서라고 하기엔 너무 과했다. 그래도 기분은 좋았다. 에카르트는 숨이 차서 어깨를 탁탁 칠 때까지 나를 놓아주지 않았다.
“하아.”
간신히 그를 밀어내니 맞은편 살롱의 귀족들이 우리를 지켜보던 중이란 걸 알게 되었다.
그들은 컵을 쥔 채 눈을 멍하니 깜빡였고 입 밖으로는 음료가 새어 나왔다.
***
귀족들은 시엘리나와 에카르트가 키스하는 장면을 목격했다. 한참 후 누군가 먼저 정신을 차리고 말했다.
“크로덴 공작님께서… 공녀님을 잡아드셨어.”
“그렇게 열정적인 분이실 줄 몰랐네.”
“공녀님이 조금 걱정될 정도랄까.”
잠시 침묵이 오갔다. 그들은 혹시 누가 듣기라도 할까 봐 주변을 둘러보다가 급히 결론을 내렸다.
“어, 어쨌든 축하해 드리자구. 아하핫!”
뭔가 더 말하고 싶었지만 에카르트의 성격을 모두 잘 아는지라 혹시라도 불경죄로 걸리기라도 할까 봐 말을 아꼈다.
마검을 지배하는 자의 백마법사이자 연인이며, 마법 대회에서 압도적인 실력으로 우승했다는 여자.
시엘리나의 이야기를 했다가 증발한 사람들이 있다는 소문을 들었다. 귀족들은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지고 싶지 않아 주관적인 느낌은 최대한 배제하고 객관적인 사실만을 전달했다.
크로덴 공작과 시엘리나 공녀가 수도 한복판에서 키스를 했으며 데이트를 즐겼다는 것을.
그 덕에 그들이 의도한 둘이 연인이 되었다는 소문 하나만큼은 확실히 퍼져 나갔다.
***
블랑세는 수도로 따라와서 에카르트와 시엘리나를 지켜보았다.
시엘리나 루솔릿.
전생에 자신을 괴롭히다 허망하게 죽은 귀족 중 한 명이었지만, 이제 다른 세계에서 와서 자신을 구해 준 여자가 되었다.
그리고 에카르트 크로덴.
백마법에 대한 집착을 사랑이라고 착각하고 세상을 파멸시켰으나, 이제 진정한 사랑을 찾은 남자.
‘그리고 나도 이제 내 삶을 만들어 가면 돼.’
행복한 둘의 모습을 보고 블랑세는 다짐했다.
“내 행복 중에 너의 행복도 있어.”
그렇게 말하던 시엘리나가 생각났다. 블랑세가 미소를 지으며 발걸음을 돌리려고 할 때. 그녀는 누가 봐도 수상해 보이는 남자와 마주했다.
남자는 베레모와 두꺼운 뿔테 안경을 썼고, 신문으로 얼굴을 반쯤 가리고 있었다. 그는 블랑세와 눈이 마주치자 신문에 더 깊이 얼굴을 묻었다.
“…황태자 전하?”
“아닙니다.”
이전에 다비온은 시엘리나에게 블랑세가 수상하다는 말을 전해 줬다.
시엘리나가 어느 정도 해명을 마쳤지만 의심은 남아 있는 상황. 블랑세는 그 오해를 푸는 건 자신의 몫이라고 생각해서 자리를 피하지 않았다.
“다비온.”
“또 저를 이름으로 부르는군요. 여기서 뭐 하고 계셨나요?”
“그러는 전하께서는요?”
“에카르트와 공녀가 교제한다는 소식을 들으셨겠지요. 사람들의 반응이 궁금하여 몰래 와 보았습니다.”
“저 또한 그래요.”
둘의 목적은 같았다. 블랑세는 다비온을 잠시 바라보다 말했다.
“그런데 전하의 변장이 다소 어색해 보여서, 다른 이도 정체를 알아보지 않을까 걱정되네요.”
“…그렇게 티가 날까요?”
“네. 제가 좀 도와드릴게요.”
다비온은 블랑세의 적극적인 태도가 당황스러웠다.
아직 그녀를 향한 의심이 남아 있지만 싫진 않았다. 이야기를 나누니 마음이 편해지는 기분이었다.
사실 블랑세 역시 변장이 수상하다는 건 핑계일 뿐이었다. 그저 다비온과 조금 더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을 뿐.
둘은 프라이빗한 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전생에 다비온이 블랑세에게 소개한 곳이었다.
“여기는 어떻게 아시나요?”
“이전에 와 보았답니다.”
“…제가 좋아하는 곳입니다.”
“저 역시도 그래요.”
목적과 취향이 같은 사람. 다비온은 알수록 묘한 감정에 휩싸였다. 따뜻하고도 의지가 되는 느낌이 들어 문득 그녀를 향한 의심을 걷었다.
“시엘리나 님이 아직 당신을 곁에 두는 이유를 생각해 봤는데요. 이전에 제 어머니에게 일부러 접근했나요?”
“네. 시엘은 몰랐지만요.”
“…저 역시 어머니를 속이긴 마찬가지였습니다. 하지만 블랑세 양이 에카르트와 공왕을 돕길 원한다면.”
다비온은 블랑세의 빈 잔에 차를 따라 주며 말했다.
“앞으로는 저도 믿어 줄 수 있을까요?”
이미 블랑세를 믿는다는 가정이 포함된 말이었다.
“네. 그럴게요.”
블랑세가 기쁘게 대답했다.
다비온은 문득 그녀와 함께하는 지금 이 순간이, 처음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어디서 본 적이 있나요?”
그러자 블랑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혹시 다비온이 전생의 기억을 약간이나마 떠올렸을까. 그런 기대를 조금 하게 되었다.
“그건, 직접 떠올리시면 더 기쁠 것 같네요.”
***
긴 하루가 지나고 다비온은 이동 마법진을 사용한 방으로 복귀했다. 신수는 방에 누군가 들어오지 않게 지켜 주고 있었다.
다비온은 신수의 부리를 한번 긁어 주었다.
자꾸만 블랑세가 계속 뇌리에 맴돌았다.
수수께끼를 던지고 사라진 여자. 그것을 풀기 위해 머릿속이 복잡해졌는데도, 그런데도 잠시 업무에서 벗어난 다비온의 숨통을 트이게 해 준 기분이었다.
문을 나서자 시종이 그를 황실 연회장으로 안내했다.
“어서 오거라.”
화려한 샹들리에가 달린 연회장에서는 황후와 황제가 다비온을 기다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