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화
다비온이 마차를 향해 다가가자 안쪽에 있던 에카르트가 창문만 살짝 열어 줬다.
에카르트는 다비온의 예상대로 시엘리나와 함께 돌아왔다. 떠날 때보다 안정감을 찾은 표정으로.
“북부는 이상 없었어. 이대로 공작성으로 갈 거야?”
“그래.”
다비온의 물음에 에카르트는 고맙다는 인사도 없이 답했다.
자신의 백마법사를 쫓기 위해 멋대로 제국을 뛰쳐나갔던 에카르트의 관심사는 오직 옆에 있는 시엘리나 그녀 하나뿐이었다.
마차 창문 너머로 다비온과 시엘리나도 서로 목례를 나눴다. 시엘리나는 다비온에게 뭔가 말하고 싶어 하는 눈치였다.
“시엘리나. 저놈에게 할 말이 있습니까?”
“타르 공국에서의 일 말인데요.”
“아. 제가 대신 전해 드리지요.”
에카르트는 그녀에게 걱정하지 말라는 듯이 웃고, 마치 오늘 저녁 식사는 스테이크라는 듯이 간단히 통보했다.
“대륙 남부에 있는 타르 공국 알지? 공녀를 만나러 간 김에 겸사겸사 정벌했다. 그러니 앞으로 시엘리나 님을 국왕 전하 또는 공왕 전하라 부르도록.”
“뭐?”
황태자가 이해할 수 있는 건 첫 문장밖에 없었다. 파도치는 듯한 혼란 속에서 간신히 정신을 차린 다비온이 마차 창문에 가까이 붙어 말했다.
“네가 분명 공녀만 모셔 오겠다고 했을 텐데!”
“일이 그렇게 되었어.”
다비온의 머리가 빠르게 돌아갔다.
타르 공국.
분명 제국과 어떤 관계로도 얽혀 있지 않은 약소국이고, 또 제국민이 타국의 왕이 되어선 안 된다는 법률은 없지만….
하지만 만약에라도 이 사실을 황후가 알게 된다면 더욱 둘을 향한 견제가 심해질 것이 분명했다.
“에카르트. 제발 조심 좀 하고 다녀.”
“우리 어머니께서도 충분히 조심하였지.”
에카르트가 냉소적으로 답하자 다비온은 할 말을 잃은 듯 입을 다물었다.
마검의 지배자는 내키는 대로 행동하면서도 최소한의 이해타산은 하였다. 일국의 공작으로 견제를 받더라도 약소국을 정벌할 여유는 있었다.
또 크게 물의를 일으키지 않는 한 제국 역시 영토를 늘려 주는 것에 큰 반발을 없을 터.
오히려 정국이 안정되면 그 사이의 영토마저 제국으로 편입하고자 전쟁을 벌일 수도 있을 것이다.
애초에 별의 꽃을 받아 저주를 치료한 것과 백마법사 하나 찾겠다고 공국인 왕국을 정벌한 것은 엄연히 다른 문제였다.
크로덴 공작가 대대로 내려오던 저주가 없어진 건 숨기는 게 옳았다.
‘가장 치명적인 약점이 사라졌다고 굳이 광고할 필요는 없으니까.’
크로덴 가문이 제국의 평화에 크게 이바지했다는 사실은 이미 모두가 아는 바이기에 제국과 먼 왕국을 정벌했다고 해서 누구라도 감히 문제를 삼지는 못할 것이다.
분명 귀찮기는 하여도 작은 공국 따위 제국의 공작이 점령하고, 그의 가신이라고 아니, 최측근이라고 할 수 있는 백마법사에게 준다고 한들 크게 문제가 되지 않으리라.
뭐, 가신이 아니라면 어떠한가. 만일 둘이 결혼이라도 한다면 부인에게 주는 내탕금이라 해도 할 말은 없지 않는가 말이다.
이로 인해 괜히 귀찮은 소문이 난다면 적당히 정리하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황태자는 더 조심스러웠다. 지금 에카르트의 상황이 상황인지라 말이 나올 만한 상황을 만들면 안 되었기에 문제였다.
우선 눈앞에 벌어진 일부터 순차적으로 정리하자 싶은 다비온은 말을 하였다.
“에카르트. 적어도 제국과 동맹국이 될 생각은 했겠지?”
“우리 공왕 전하께서도 같은 말씀을 하더군. 시엘리나, 이참에 저놈과 협정을 맺을까요? 제1항. 윈터로드 제국은 타르 공국에 매 분기 공물을 바쳐야-”
“그게 무슨 동맹국이에요!”
시엘리나는 마검의 지배자가 계속 나불대게 두었다가는, 윈터로드 제국을 속국으로 만들자는 말도 거침없이 할 것 같아서 에카르트의 입을 틀어막았다.
“손 키스가 필요하다면 말씀을 하시지 그랬습니까?”
에카르트는 시엘리나의 손바닥을 살짝 깨물고 애무를 하듯 입을 맞췄다. 기겁한 시엘리나가 손을 떼 내려 하자 에카르트는 아쉬워했다.
자신에게 고민거리를 떠안기고 마냥 여유로운 에카르트의 모습에 다비온은 한숨을 쉬었다.
‘하아. 일단 추궁은 나중에.’
다비온은 더 이상 오래 있을 시간이 없어 워프 마법진을 발동시켰다.
에카르트가 제국을 떠났다는 보고를 일부러 올리지 않았고, 국경에서 그를 수도의 공작성 근처로 이동시키는 일 또한 일단 그럴 예정이었건만.
‘저렇게 공국을 정벌하고 올 줄이야.’
다비온의 머리가 지끈거렸다.
그 뒤 두 사람이 탄 마차가 워프 마법진을 타고 사라진 후 다비온은 근처에 몇 가지 잡다한 마법진을 만들었다.
마력을 교란시켜 워프 마법진을 사용한 기록을 숨기곤 자신 역시 황궁으로 돌아갔다. 다행히 누군가 들어오려고 한 흔적은 없었다.
‘시간을 내서 공작성에 한번 방문해야겠어.’
공왕이 되었다는 시엘리나에게 또 따로 전할 소식이 있었으므로.
***
블랑세는 신전 지하에 새로 드러난 문과 그 틈에 대해서 연구해 왔다.
‘안쪽에서 익숙한 마력이 느껴져.’
그리하여 그녀는 가설을 세웠다. 비슷한 기운이되 에카르트의 힘은 아니라면, 그의 혈연과 관계가 있을 거라고.
또한 틈의 열쇠가 되어 줄 만한 물건을 찾기 위해 공작성에 있는 물건 몇 가지를 빼돌려 실험했다. 단순히 에카르트가 착용한 적 있는 반지는 반응하지 않았다.
불과 물이 만나는 색.
단순히 생각하자면 붉은색과 파란색을 합치면 된다. 팔찌의 레드 다이아몬드와 보석의 사파이어를 겹치자 보라색 빛으로 반짝였다.
하지만 선대 크로덴 공작의 팔찌를 대어 보자 빛이 났다. 유의미한 반응이었으나 역시 문을 움직이기엔 부족했다.
그래서 블랑세는 이 문을 열려면 시초, 과거, 현재. 세 가지의 시점이 모두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팔찌를 수집했다. 이름이나 마력처럼 흔적이 남겨진 것으로 말이다.
초대 공작이 기증한 반지. 선대 공작의 이름이 남은 팔찌. 마지막 하나는 시엘리나에게 받은 작별 선물 팔찌였다.
에카르트의 저주를 시엘리나도 느끼게 되었다는 말인즉슨, 둘의 신체에 연결 고리가 생겼다는 뜻.
‘시엘리나의 힘에도 반응하겠지.’
그랬기에 블랑세는 작별 선물로 그녀의 마력이 담긴 팔찌를 요구한 것이다.
‘이제 문을 열어 보자.’
세 겹의 팔찌를 겹쳐 끼우자 빛이 환해지더니 곧 육중한 소리가 들렸다.
안개가 새어 나오며 문이 천천히 열렸다. 하지만 그 안은 오직 암흑으로 가득했다.
‘아니, 아무것도 없는 게 아니야.’
블랑세는 깨달았다. 이 어둠은 수천, 수만 개로 겹쳐진 마법진이었다는 것을!
그 순간 마법진이 검붉은 색으로 타올랐고 강력한 힘이 그녀를 밀어냈다. 블랑세는 세찬 힘에 튕겨져 나가 지하 바닥을 몇 번이나 굴렀다.
“윽!”
마치 오래 잠들어 있던 용이 눈을 뜨듯 중첩되어 있는 마법진에 일제히 불빛이 환하게 타올랐다.
동시에 바닥이 울리기 시작하며 더 많은 안개를 방출했다.
그 안개를 본 블랑세는 직감했다. 다시 이 문을 닫아야 한다고.
블랑세가 손바닥에 힘을 싣고 온몸으로 문을 다시 밀어냈다.
역한 안개가 온몸을 감쌌지만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블랑세가 정신없이 문을 닫자 언제 열렸냐는 듯이 문은 굳게 닫혔다.
기운이 빠진 그녀는 벽을 타고 미끄러져 내리듯 주저앉았다.
‘괜찮은… 건가?’
안쪽의 힘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대체 누가 그렇게 많은 마법진을 숨겨 두었지?’
블랑세는 홀로 안을 확인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녀는 팔찌들과 반지를 챙긴 후, 일단 신전이 무사한지 확인하고자 밖으로 나왔다.
다행히 별 이상은 없는 것 같았고 누구도 지하의 일을 눈치채지 못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블랑세는 별문제가 없을 거라고 믿었다.
아니, 그렇게 믿고 싶었다.
***
루솔릿 공작령의 승마장의 언덕 너머로 흐린 하늘이 펼쳐져 있었다.
공작은 시엘리나에게 들어가는 돈이 아까워 취미를 만들어 주지 않았으나, 리타와 라멜은 개인 승마장을 만들어 줄 정도로 살뜰히 챙겼다.
그 덕에 리타와 라멜은 익숙하게 말을 몰았다.
라멜은 티파티에서 남의 비위를 맞출 때보다, 이렇게 자유롭게 달리는 순간이 좋았다.
한데 지금은 좋아하는 일을 하는데도 여전히 우울했다. 불쑥불쑥 무도회에서의 기억이 생각났기 때문이었다.
‘나는 시엘리나처럼 될 수 없어.’
인정하기 싫은 사실을 깨닫자 라멜의 기분은 다시 가라앉았다.
“누님. 오늘은 그만 돌아갈까요?”
리타는 말이 달리는 속도를 줄이고 말했다. 작은 관심을 기울여 주자 라멜은 곧바로 속마음을 털어놓았다.
“…크로덴 공작님의 눈에 들려고 했는데. 두 번 다시 기회가 있을지 모르겠어.”
리타 역시 마법 대회에서 패배한 후로 불쾌했으나, 감정을 티낸 적은 오레이칼 왕국에서뿐이었다.
그깟 일로 아직까지 징징거리는 누이가 한심하지만 어찌하랴. 언젠가 쓸모가 생길지도 모르니 적당히 맞장구쳐 줄 수밖에.
“과연 공작님은 쉽지 않은 분이더군요.”
“그렇지?”
“네. 호의를 기대할 수 없다면 다른 방법으로 강제할 수밖에요. 이건 어떨까요? 황후 폐하께 조공을 보내, 만남을 주선해 달라고 하는 겁니다.”
“황후 폐하께?”
“유리 세공품을 좋아하신다고 들었습니다만. 공작령에도 상단이 들르니 한번 물건을 보시죠.”
“나, 여자에게 잘 보이려고 했던 적은 없는데.”
“무슨 상관인가요?”
“하긴.”
라멜은 때때로 스스로가 무엇을 위해 이렇게까지 남에게 맞추는지 회의감이 들었다.
“내가 공작님을 사랑하는지 아니면… 그저 집착을 하는 건지 모르겠어.”
누나인 라멜의 고민을 리타는 한 귀로 흘려들었다. 좌우지간 그런 판단도 내리지 못하는 지능이 의심스러웠다.
“어차피 언젠가 결혼하실 거 아닙니까. 모름지기 혼인은 서로의 가문을 위해서, 신분이 낮은 이는 지참금을 받기 위해서도 하는데. 잘생기고 능력 있는 크로덴 공작과 결혼하는 자체가 행운이지요.”
“그런가….”
“생각보다 결혼 생활이 안 맞으면 정부를 두면 됩니다.”
“나, 나는 결혼하면 안 그럴 거야! 가정적인 사람이 되고 싶어. 내게 가족은 정말 중요하니까.”
“네. 누님이라면 사랑받는 아내가 될 겁니다.”
장단은 여기까지 맞춰 준 거로 충분했고, 리타가 물어보고 싶은 건 따로 있었다.
“누님. 혹시 공작성에 전 공작 부인의 흔적이 남아 있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