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화
“나를 통제하려고 하지 마세요.”
“…노력하겠습니다. 당신이 도망가는 것보다야 낫겠지요.”
에카르트는 여전히 안심하지 못했지만 그래도 그 말은 진심인 듯했다. 나는 어떻게 하면 그를 안심시킬 수 있을까 하다가 말보다 행동으로 보여 주기로 했다.
“안아 줄까요? 전에, 저와 닿으면 기분이 좋아진다고 했잖아요.”
“네.”
내가 손을 뻗었다. 그는 나를 껴안고는 내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창밖에 빗줄기가 쏟아지는 가운데 심장박동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따뜻하군요.”
“…….”
그가 느끼는 안정감이 내게도 전해져 왔다. 에카르트는 내 등을 슬그머니 쓰다듬으며 말했다.
“시엘리나. 당신이 떠나면, 저는 제국에 있는 의미가 없습니다.”
“에카르트를 아끼는 사람이 많아요. 황태자 전하는 물론 헬라와 이클립스 기사단도 있잖아요.”
“그들은 당신과 다릅니다.”
“다르다고요?”
“네, 누구도 당신을 대신할 수 없습니다.”
그의 숨소리도 목소리의 진동도 떨리게 다가왔다.
‘다르다.’
내가 다르게 느껴지는 이유가 백마법뿐이 아니었다. 그는 내 마력뿐만 아니라 내 말에, 내 행동에 영향을 받는다.
그리고 나 역시 그러했다. 멀리 떨어지려고 했으나, 이젠 이렇게 곁에 있는 게 마음이 놓였다.
‘내가 찾으려던 자유는 에카르트와 블랑세를 완전히 버리고서는 얻을 수 없어.’
나는 그의 넓은 등을 말없이 토닥였다.
“그래요. 내가 에카르트의 곁에 있을게요.”
“…정말입니까?”
그가 버림받기를 두려워하는 소년처럼 불안한 목소리를 냈다. 그러나 이내 카리스마 있고, 사람을 따르게 하는 힘을 실어 말했다.
“약속하십시오.”
“약속해요. 에카르트의 주변에 소중한 게 많이 생길 때까지… 기다릴게요. 내가 떠나고도 견뎌 줘서 고마워요. 앞으로 이런 일로 힘들게 하지 않을게요.”
진심을 말하는 데에는 약간의 시간이 필요했다.
“당신은 앞으로 더 행복해질 거예요.”
나는 한때 원작의 흑막이었던 그에게, 주문처럼 속삭였다.
***
‘시엘리나. 너는 모르겠지.’
블랑세는 땅에 가볍게 착지하고 과거를 회상했다.
시엘리나가 자신을 끌어안고 하고 싶은 거 다 하고 살라고 말했던 그날 밤. 블랑세는 원래의 목적지로 향하는 대신 그저 주변을 걷고 또 걸었다.
‘네가 나에 대해 뭘 안다고 그렇게 말했을까?’
자신을 꽉 끌어안은 그 순간만큼은 마치 자신을 진심으로 걱정하고 붙잡아 줄 사람이 생긴 기분이 들었다. 뜻밖에도 그 사람이 시엘리나 공녀라서 더 이상했다.
‘누군가 그런 말을 더 일찍 해 줬다면.’
많은 것들이 바뀌었을지도 모르지. 블랑세는 씁쓸하게 웃고서는 공작성을 나와 어디론가 향했다.
그 시각, 황궁에서도 인적이 드문 화원.
블랑세는 미리 약속한 듯이 은밀하게 황후와 재회했다.
“하여, 에카르트 공작님의 힘은 그대로입니다.”
블랑세가 작은 마름모 모양의 영상석을 건넸다. 그 안에는 에카르트가 북부에서 마수를 처치하는 장면이 담겨 있었다.
검을 휘두를 때마다 마수들의 살점이 낙엽처럼 나부꼈다. 전무후무한 힘. 그야말로 전장귀 그 자체였다.
‘이 능력이 다비온에게도 있었다면 좋았을 것을.’
황후는 혀를 찼다. 영상이 끝난 후 그녀는 블랑세에게 당부했다.
“시엘리나가 제국을 떠났으니, 앞으로는 네가 그의 치료를 전담하거라. 계속 상태를 보고하도록.”
“존명.”
“받거라.”
황후는 품속에서 천 주머니를 꺼내 내밀었다. 블랑세가 에카르트의 백마법사를 자원한 대가로 요구한 물건이었다.
“초대 공작이 사용하던 반지를 구했다. 유서 있는 보물이기에 황실에서 보관하였지.”
블랑세가 두 손으로 주머니를 받고 열어 보았다. 파란색 특수한 광물로 만들어진 반지는 빛 모양으로 장식되어 있었다.
색과 모양을 보아하니 블랑세 자신이 찾던 물건인 것 같다. 신전 지하의 문틈과 딱 맞아떨어지는.
“한데 이 반지를 요구한 이유가 알고 싶군.”
“초대 공작의 물건이니 연구할 가치가 충분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가.”
“특별한 점을 발견하거든 황후 폐하께 바로 보고드리겠습니다.”
황후는 수긍하고 블랑세의 협조를 당부했다.
“앞으로도 보상은 확실하게 하지. 뒤를 봐줄 테니, 계속 현명한 판단을 하도록.”
“감사합니다.”
블랑세가 예를 차렸고 황후는 먼저 자리를 벗어났다.
홀로 남은 그녀는 팔찌를 쥐고 잠시 멍하니 생각했다. 파란색 눈동자는 나비처럼 몽환적인 빛을 띠었다.
‘크로덴 공작이 시엘리나를 찾으러 간 지 한 달째.’
북부에서 돌아온 에카르트는 전장은 전부 자신의 기사단에게 맡기고 곧바로 제국을 떠났다.
다비온은 용케 그 사실을 숨겨 주고 있는 듯했다. 블랑세의 ‘기억’대로, 그사이 에카르트가 다시 출전할 만큼 큰 규모의 마수가 출몰하지는 않았고 말이다.
그래서 블랑세는 시엘리나를 찾으러 떠나는 에카르트를 붙잡지 않았다. 애초에 그를 통제할 능력도 ‘아직’ 없을뿐더러….
‘우리의 상황도 그의 행동도 이전과 달라. 그 증거로 내가 알던 사람들은 살아 있어.’
블랑세는 팔찌를 소매 안쪽으로 감췄다.
‘조금만 더 지켜보자.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면서.’
그때, 어디선가 시선이 느껴졌다.
옆을 돌아본 블랑세는 화원 기둥 너머로, 놀란 듯한 금색 눈동자와 마주했다.
눈동자의 주인인 다비온은 흠칫 놀라 급히 기둥 뒤로 다시 몸을 숨겼다. 지켜보긴 했어도 이렇게 모습을 들킬 생각은 아니었기에.
“다비온?”
블랑세가 저도 모르게 그의 이름을 불렀고 그 목소리에는 그리움이 묻어 있었다.
“……?”
일개 백마법사가 자신을 존칭도 없이 부르는 이 상황이 무척이나 당황스러운 다비온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마냥 불쾌하지는 않았기에 다비온은 블랑세를 비스듬히 마주 보고 섰다.
“아! 블랑세 양이군요.”
“네. 이전에 성전에서 보고를 올릴 때 뵈었지요.”
단순한 인사라고 하기엔 여러 감정이 담긴 눈빛이었다. 그리고 어투는 어느새 존칭으로 바뀌어 있었다.
황태자는 여러 단체에서 보고를 받는데, 성전에서도 정기적인 성과 보고를 올린다. 그때 시엘리나에게 끈덕지게 달라붙는 블랑세를 보았다.
직접 만난 적은 별로 없으나 에카르트로부터 몇 번 불평을 들어 이름은 친숙했다.
에카르트가 집착하는 시엘리나에게 끈덕지게 집착한다는 여자.
그 외에 다비온이 아는 정보는 별로 없었다.
그러다 오늘 황후와 밀담을 나누는 장면을 목격한 것이다.
“황실에는 무슨 용건이었죠?”
“…황후 폐하의 명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대답을 들은 다비온의 미간이 좁혀졌다.
‘공녀가 떠난 후 어머니가 에카르트에게 심복을 붙이려는 것인가? 한데 어째서 이 여자를.’
다비온은 의아함을 담아 물어보았다.
“당신이 그 명을 자처한 이유를 알고 싶군요.”
“그저 제국을 위한 일을 할 뿐입니다.”
전하지 못한 말과 미련이 남은 표정으로 블랑세는 답을 했다. 그러고는 가벼운 목례를 마친 후 서둘러 자리를 벗어났다.
블랑세는 다비온을 만나자 마음이 아려 왔다.
의도치 않은 만남이었기에 그래서 그런지 시엘리나의 빈자리도 더 크게 느껴졌다. 수많은 사람 사이에서 블랑세는 혼자인 것처럼 느껴졌다.
‘그래도 원치 않는 애정을 받는 것보다는 나아.’
이전의 일은 더 이상 생각하지 말자고 다짐했지만, 불쑥불쑥 밀려드는 원망은 어쩔 수가 없었다.
‘그만 생각하고 신전으로 가자.’
그녀의 소매 안쪽엔 이미 팔찌 두 개가 더 있었다.
하나는 시엘리나가 준 것. 그리고 다른 하나는, 크로덴 공작가에서 훔친 에비게일의 팔찌였다.
사실 블랑세는 일전에 열렸던 황실 무도회에 몰래 참석했었다.
그때 시엘리나와 비슷한 옷을 입은 라멜을 발견했다. 시엘리나를 관찰하려던 블랑세는 이전 생에서와는 다른 새로운 사건이라고 생각하여 타깃을 바꿨다.
라멜은 에카르트에게 접근하고 팔찌를 건넸다.
이후 그가 팔찌를 공작성으로 가져왔지만, 에카르트에게는 단순히 모친의 팔찌였을 뿐 그것 말고는 크게 의미가 없었기에 보석함에 보관한 후 다시는 들여다보지 않았다.
그 덕에 블랑세는 힘들이지 않고 손쉽게 잠금 마법을 해제하고 선대 공작의 팔찌를 챙길 수 있었다.
‘망자의 물건을 훔치니 미안하지만. 대의를 위해서라면….’
그녀는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며 누군가 뒤따라오는지 살펴봤다. 그리고 은색 머리카락을 결의를 다지듯 동여매고 곧장 신전으로 향했다.
***
다비온은 블랑세가 사라진 후에도 그 자리에 남았다.
왜 황후의 명령을 수행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것보다 이해하기 어려운 건 또 있었다.
블랑세가 자신에게 말을 걸으니 묘한 그리움이 든 것이다. 마치 이전에도 대화를 나눈 기분. 그것도 꽃이 만발한 이 화원에서 말이다.
‘그럴 리가.’
다비온은 화원의 하얀 기둥을 쓸어 넘겼다. 왠지 기둥 뒤에서 불쑥 블랑세가 환하게 웃으며 나올 것만 같았다.
도무지 말이 되지 않는 일이었다. 그 정도의 감정을 느낄 정도라면 자신이 기억하지 못할 리 없으니 말이다.
그때 새의 형상을 한 하얀 신수 한 마리가 날아들었다.
신수의 등장에 다비온은 블랑세를 향한 생각을 겨우 멈출 수가 있었다. 신수의 발목에 갈색 나무줄기가 묶여 있었다.
“왔군.”
시엘리나를 찾으러 신석을 챙기지 않고 급하게 떠난 에카르트와 주고받기로 한 신호였다.
에카르트가 보내온 그것은 온난한 지대에서 자라 줄기가 부드럽고 남부 국경 주변에서 서식하는 식물이었다.
‘이 나무줄기를 묶어 보내온 것을 보면 국경까지 도착했다는 뜻이지.’
대부분의 신수가 어머니의 감시를 받는 와중에 이 신수는 믿고 비밀리에 명령을 내릴 수 있었다.
신수의 이름은 폴. 부르기 쉽고 부드러운 어감이 신수의 모습을 닮아 그렇게 지었다.
다비온의 손 위에 있는 이 신수는 약하게 태어난 데다 어렸을 적 나무의 높은 곳에서 떨어진 적이 있기에 백마법사도 치료를 포기했다.
하지만 어린 다비온은 아기 신수를 정성껏 돌봐 낫게 했고, 다 자란 신수는 오직 그만을 충직하게 따르게 되었다.
그럼에도 아주 약해서 모두가 각성 후의 능력을 기대하지 않았지만, 오히려 황후의 눈을 피하려는 다비온에게는 큰 전력이 되었다.
또한 폴은 신력이 부족해 황궁의 결계의 작은 틈새를 기척 없이 통과할 정도로 존재감이 희미했다.
그래서 비밀 전령용과 감시용으로 쓰기 적합했다.
다비온은 블랑세를 쫓는 대신 신수와 함께 얼른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그리고 술식과 숨겨 두었던 재료를 소모해 워프 마법진을 여러 보안 마법과 함께 비밀리에 발동시켰다.
다비온이 자리를 비운 그동안 신수는 방에서 대기하며 자신이 방에 있는 것처럼 기운을 풍겨 줄 것이다.
다비온이 마법진을 통해 온 곳은 인적이 드문 남부 국경 검문소였다.
그 검문소 앞에는 마차 한 대가 멈춰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