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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폐물 조연은 도망치고 싶다-56화 (56/115)

#56화

“시간을 더 주세요. 이렇게 빨리 밝혀내지는 못합니다.”

“실력이 부족해서 그런지 변명이 많군.”

차라리 이쯤에서 백마법사 증명서를 공개하는 게 나을까.

아무리 성전에서 실전 경험을 쌓고, 에카르트를 오래 치료한 나라도. 불안해서 심장이 두근두근 뛰기 시작했다.

그때 샤사가 떨리는 목소리로 외쳤다.

“차, 찻잔 받침!”

“…찻잔 받침?”

“차가 문제가 아니었어요. 주인님께선 오늘 미리 찻잔 받침을 준비하셨죠.”

나는 빌론의 책상 위에 놓인, 주황색 찻잔 받침을 바라보았다. 샤샤는 얼굴이 상기되고 손을 꼼지락거리면서도 계속 말을 이었다.

“받침 바닥에 약간의 물기가 있었어요. 그것이 독이었을 겁니다.”

순간 빌론이 얼굴을 구겼다. 샤사는 눈을 감고 집중해서 냄새를 맡다가 눈떴다.

“인간, 독은 아직 소량이 남아 있을 거야. 차향과 냄새가 느껴져.”

“…고마워, 샤사.”

나는 누가 말릴 틈도 없이 주전자를 들고 받침에 물을 부었다. 그리고 그것을 빌론에게 내밀었다.

“다시 마셔 보면 되겠네요.”

“뭐?!”

“제 마법에 문제가 있었는지, 당신이 어쭙잖은 장난으로 제게 잘못을 덮어씌우려 했는지. 다 밝혀질 테니까요.”

“가, 감히 명령을!”

“제가 누명을 쓴 거에 비해 이 정도야 별거 아니죠.”

빌론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 나는 빌론의 파르르 떨리는 입술까지 받침을 가까이 들이밀었다.

“어서요. 차 한 잔 마시는 게 그렇게 어려운 일인가요?”

“하!”

“설마 정말 독이 들어 있어서 망설이신다면, 이번엔 제가 치료할 가치도 없겠군요.”

“…그래서 어쨌다는 거지?”

빌론은 더 이상 연기를 계속하지 않았다.

그는 내가 들이민 받침을 탁 쳐 냈다. 주황색 받침이 허공에 떠올랐고 곧 산산조각 나며 깨졌다.

“지금 뭐 하는-”

“입 다물어, 계집.”

그러고는 나를 밀치고 샤사를 향해 성큼성큼 다가가더니 구둣발로 그를 걷어찼다.

샤사는 찻잔 파편 위로 엎어졌고 작은 손에서 피가 배어 나왔다.

“윽!”

“노예 새끼 때문에 귀찮게 됐네. 거둬 준 은혜도 모르고 말이지.”

그가 다시 발로 짓이기려고 할 때, 나는 샤사에게 방어벽을 만들어 줬다. 체구가 작은 소년은 여전히 괴로운 신음을 내뱉었다.

저딴 쓰레기가 영웅이라니! 한동안 잊고 지낸 루솔릿 공작이 생각났다. 샤사를 향한 발길질을 멈춘 빌론은 나를 돌아보았다.

“리나. 이까짓 일은 없던 거로 하면 그만이야.”

“없던 일?”

“그래. 왜 자네 같은 무명 백마법사로 골랐는지 알아? 연고자도 없는 떠돌이 계집이니까. 그런 인간들은 처리하기가 쉽지.”

꿀 빨려고 도망쳤는데 제국 밖에는 더한 쓰레기가 있다니.

“이런 새끼들은 어디 한곳에 모아서 활활 태워 버려야 하는데.”

나는 살의를 느끼고 이를 갈았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순식간에 기사 다섯이 집무실에 들이닥쳤다.

이런 짓거리를 한두 번 한 솜씨가 아닌 듯했다. 이렇게 합이 잘 맞는 것 보니 말이다.

“여봐라! 둘을 포박해라.”

“네, 공왕 전하!”

그들은 검을 들고 나와 샤사를 에워쌌다.

새파란 칼날을 보고 샤사는 겁을 먹었다. 그러면서도 절뚝거리며 내 옆으로 다가와 말했다.

“미, 미안해! 내가 막을 테니 인간이라도 도망쳐. 다 나 때문이야.”

“왜 너 때문이야?”

“사실…. 영주는 네 방에 귀중품을 넣어 두라고 지시했어. 내가 다시 그의 방에 몰래 갖다 놓느라 드레스룸에 들어간 거야.”

진작부터 도둑이든 뭐든 누명을 씌울 생각이었는데 샤사가 막고 있었구나.

“그럼 샤사는 돈을 훔치려던 게 아니라, 나를 도우려고 했던 거야?”

“응. 미리 말해야 했는데 미안. 그럴 위치가 아니어서. 도와줬다는 게 발각될까 봐 무서웠어.”

샤사의 연갈색 눈동자에 눈물이 잔뜩 고였다.

평화롭게 살아가려던 생각이 얼마나 안온했는지. 새삼 깨달았다. 나는 손을 슥 들어 샤사의 연갈색 머리카락을 헝클었다.

“샤사. 백마법사에겐 단점이 하나 있어.”

“단점?”

“그래. 뭐냐면….”

나는 지팡이 끝을 정확하게 빌론을 향해 겨눴다.

“내가 치료한 놈이 치료할 가치도 없는 쓰레기일 수도 있다는 거. 이런 인간은 어서 대자연으로 돌아가야 하는데!”

“이런, 리나. 여유가 넘치는군. 백마법사가 공격은 할 줄 아는가?”

“못하는 게 아니라 안 했을 뿐이야.”

빌론이 코웃음을 치더니 박장대소했다.

백마법사는 성력으로 회복 마법을 사용하기에 공격력 자체는 낮다는 오해를 샀다. 그랬기에 그는 나를 무시했다.

“어서 저 반역자들을 잡아들여라!”

그의 명령에 기사들이 나와의 거리를 좁혀 왔다. 그간의 경험으로 미루어 보아 기사 다섯쯤은 나의 상대가 되지 않았다.

“어딜 감히!”

내가 술식을 외우자 지팡이 끝에서 하얀색 광선이 나갔다.

광선은 기사의 갑옷이 일그러질 정도로 가격했다. 그리고 곧바로 빛을 반사해서 다른 기사를 쳐 냈다. 조무래기 기사들이 바로 나동그라지자 빌론이 당황했다.

하지만 일련의 소란을 듣고 다른 기사 다섯이 몰려들었다.

“전하, 괜찮으십니까!”

저들도 내 털끝 하나 건드리지 못할 것이다.

“샤사, 잠시 눈 감아.”

나는 샤사에게만 경고하고 곧바로 마법을 시행했다.

아까보다 더 찬란한 빛이 불꽃처럼 타올랐다. 타는 듯한 갈증과 고열에 시달리는 환각 마법이었다. 집무실에 들이닥친 기사들이 고통스럽게 신음을 내질렀다.

“으윽!”

빌론은 홀로 환각 마법에서 풀려났다. 하긴. 명색이 드래곤을 죽인 소드 마스터인데 이런 주술은 저항력이 있었을지도.

“잔재주가 많군. 정체가 뭐지?”

“너 같은 쓰레기는 알 필요 없어!”

“그래. 고문해서 알아내면 그만일 것을! 여봐라!”

빌론이 큰 소리로 외치자 다시 집무실에 기사들이 들이닥쳤다.

10분 후. 나는 지팡이를 들고 빌론의 군사들과 맞서고 있었다.

쾅, 콰광! 힘 조절을 못 해서 바닥이 이리저리 마구 패이고 벽이 뚫어졌다.

‘이러다 성이 붕괴하겠네.’

나는 마법 장벽을 만들어 내 기사들을 가뒀다. 그리고 그 안에 특별한 힘을 작동시키자, 기사들은 눈을 끔뻑이다가 그 상태로 곯아떨어졌다.

“인간. 무슨 마법이야?”

“수면 마법.”

오레이칼 왕국의 마법 대회에서 고블린을 재우는 술식을 풀었던 것을 약간 응용했다.

“젠장, 무슨 마력이 저렇게 많아!”

결국 빌론은 이를 빠득 갈더니 뒤돌아 도주했다. 나와 맞설 생각도 하지 않고 달아나는 것인가. 그사이 샤사는 다리 힘이 풀려서 휘청였다.

“일어나, 샤사! 어서 이곳을 벗어나야 해.”

나는 소년의 손목을 붙들고 일으켜 세웠다.

“샤, 샤를을 두고 갈 수 없어!”

“누가 두고 간대? 일단 샤를부터 찾아. 샤를이 인질로 잡히면 일이 복잡해져.”

우리는 집무실을 나와 먼저 샤를과 합류하기로 했다. 일단 빌론이 향한 방향은 샤를이 있는 지하가 아니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몇 걸음을 옮기기도 전에, 빌론은 기사 수십 명을 몰고 왔다.

뒤를 돌아봐도 그의 기사들에 의해 가로막혔다. 나는 앞과 뒤를 살피며 샤사에게 물어보았다.

“샤사. 공국 안에 기사가 몇 명이나 돼?”

“2백은 넘어.”

그 병력을 전부 나를 잡는 데에 동원하려나. 2백 명을 상대한 적은 없는데 말이다.

게다가 샤사와 샤를의 안전까지 신경 써야 한다면, 마냥 내 실력을 믿고 날뛰기도 곤란했다.

“귀찮게 됐네. 혹시 근처에 개구멍 있니?”

“그, 글쎄.”

“없으면 말고. 그럼 싸워야지.”

나는 한숨을 쉬고 지팡이를 고쳐 잡았다.

“당장 저 둘을-!”

빌론이 다시 공격 명령을 내리던 그때. 기사 한 명이 헐레벌떡 뛰어와 소식을 전했다.

“전하, 침입자입니다!”

기사는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얼굴이 퀭하게 질려 있었다.

“이 상황에서 웬 침입자란 말이냐?”

“기사들이 전부 당했습니다.”

이전에 베이커리 주인의 말이 떠올랐다. 3지구에서 반란이 자주 일어난다고 했는데. 혹시 그와 연관이 있을까.

“공국 주민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누구란 말이냐!”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남자 단 한 명입니다. 1지구 치안대까지 전부 당했습니다!”

“단 한 명을 제압하지 못했다고?”

“하, 하지만 정말 괴물입니다. 소드 마스터인지 뭔지 검에 붉은 오러를 둘렀는데, 멀리서 봐도 그 힘이 예사롭지 않았습니다!”

그런 압도적인 실력을 가진 남자는 유일무이했다. 이건 폭동이 아니었다.

‘에카르트 크로덴.’

내가 그를 떠올리는 것과 동시에 멀지 않은 곳에서 뭔가 우지끈 무너지는 굉음과 사람들의 비명이 들렸다.

일렁이는 기운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내게도 물든다는 착각이 들 정도로 강렬한 힘.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저년은 내가 상대할 테니, 다들 그놈부터 막아!”

“네, 넷!”

기사들이 일사불란하게 흩어졌고, 빌론이 검을 뽑아 내게 달려들었다.

그의 칼날에 미약한 빛이 감돌았다.

“조, 조심해, 인간! 공왕은 소드 마스터야.”

샤사가 내 앞으로 끼어들더니 양팔을 벌려 막아 보려고 했다.

“비켜 봐, 샤사.”

나는 날다람쥐 같은 샤샤를 옆으로 밀어내고 곧바로 반투명한 마법진을 만들어 냈다. 방어벽이 칼날을 막아 냈으나 미세한 금이 갔다.

“네깟 계집이 감히 소드 마스터인 나와 싸워 보겠다는-”

하지만 빌론의 말은 더 이어지지 못했고, 방어벽을 내려치려던 검이 힘없이 떨어졌다.

빌론은 무릎을 꿇고 피를 토했다. 등에서도 피가 솟구쳤다. 그가 고통스러운 신음을 내며 바닥을 나뒹굴었다.

그의 뒤로는 피를 뒤집어쓴 에카르트가 서 있었다.

“감히.”

목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철렁했다.

붉은색 눈동자는 전보다 더 강렬했고, 얼굴은 전보다 야윈 것 같았으며 눈 밑은 어두웠다.

“…에카르트.”

나는 마치 재앙을 목격한 사람처럼 중얼거렸다.

“전하가 당했다! 하, 한꺼번에 다 덤벼!”

흩어진 기사들이 모여 달려들었지만 마검의 검기만으로도 쓰러졌다. 피 칠갑된 주변이 어찌 되든 에카르트는 나만을 뚫어져라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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