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화
파란 장미가 정원 곳곳에 피어 있었다. 에카르트의 얼굴을 자연스럽게 떠올리며 그쪽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내가 파란 장미를 마음에 들어 한다는 이유로 하루 만에 정원을 갈아엎은 그 남자.
‘잘 지내고 있을까? 생일은 지났겠네.’
내가 챙겨 주지 못하는 만큼 다른 사람에게 진심으로 축하받으면 좋겠다. 오레이칼 왕국에서 왔을 때 축하 파티를 준비했을 때처럼.
나는 공국에 온 후에도 에카르트와 블랑세를 매일 생각했다.
편지 한 장만 남기고 도망쳤으면서 계속 떠올리다니. 그래서야 몸이 자유로워도 마음은 자유롭지 않았다.
왠지 모를 그리움이 들어 말없이 장미 꽃잎을 쓰다듬던 그때. 빌론이 다가왔다.
“리나 양. 여기 있었군.”
“공왕님.”
‘설마 샤를을 치료해 준 게 들킨 건 아니겠지?’
나는 최대한 수상해 보이지 않도록 태연히 미소 짓고는 둘러댔다.
“장미가 예쁘게 피어 있기에 둘러봤습니다.”
“그렇군. 나도 가끔 일하다가 지칠 때면 정원을 둘러보기도 한다네.”
빌론은 내 옆에서 장미를 감상하다가 넌지시 물어보았다.
“식사는 했나?”
“…식사요?”
“안 했으면 같이 들지.”
내게 식사를 권유한 적은 처음 만났던 때 이후로 처음이었다. 나는 사양하지 않겠다고 답하고 그와 함께 연회장으로 갔다.
***
연회장에는 여러 육류와 샐러드가 가득 차려졌고, 촛불이 은은하게 불을 밝혔다.
“어떤가? 진귀한 음식들일세. 이 치즈 퐁듀는 오직 타르 영지에서만 맛볼 수 있지.”
“정말 맛있겠네요.”
에카르트의 공작성에서 간식처럼 먹었지만, 그는 나를 떠돌이 마법사라고 알았다.
“자네가 먹는 그 소고기는….”
나는 가끔씩 고개를 끄덕이는 리액션만 했다. 눈앞에 맛있는 음식이 잔뜩인데 설명이 귀에 들어올 리가!
열심히 스테이크를 썰던 와중에 시선이 느껴졌다. 나는 고기를 삼키고 그의 초록색 눈을 마주 보았다.
“리나 양. 공국에 정착할 생각은 없나?”
“…정착요?”
“그대 같은 마법사들을 몇 번 보았네. 기본적인 마법은 쓰지만 대마법사가 되기엔 어렵지.”
당연히 칭찬이 이어질 거라고 생각했건만 뜬금없는 과소평가에 나는 의아했다. 내 반응을 자신이 한 말을 인정한다고 받아들였는지 빌론이 자신만만하게 말을 이었다.
“전장은 기사들이 활약하는 곳이야. 하급 백마법사는 병사들을 따라다니며 보좌하는 역할 아닌가? 그러다가 객사하기도 하고 말이지.”
평소에 신사적이었던 그였기에, 진심으로 걱정하는 말인가 싶었다.
“…그렇지 않아요. 백마법사는-”
“나는 경험이 풍부한 사람으로서 사실을 말하는 걸세.”
마치 내 미래를 다 아는 듯 그가 와인을 한 모금 마시며 말했다.
“자네처럼 반반하면 그것보다 더 좋은 방법이 있지.”
“뭔가요.”
“배우자를 잘 만나서 성공하는 걸세.”
“…….”
“출신이 마땅치 않으니 정실은 어렵지만, 나 같은 귀족의 첩만 되어도 출세하는 걸세.”
그는 분명히 나를 깔보고 있었다. 쓰레기 같은 속내도 여태 잘 숨겨 왔을 뿐.
나는 들고 있던 포크로 접시를 콱 찔렀다. 금속과 도자기 표면이 부딪치며 날카로운 소리가 들렸다.
“무슨 짓인가!”
“스테이크가 잘 안 찍혀서요.”
나는 몇 번이나 포크로 접시를 콱콱 찔렀다.
화가 나니 나도 모르게 마력이 새어 나왔고 덕분에 접시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갈색의 스테이크 소스가 요란하게 그의 얼굴에 튀었다.
“이딴 장난은-”
그는 손수건을 꺼내 짜증스럽게 얼굴을 닦다가 접시를 보더니 차마 뭐라고 하지 못했다. 아마도 조각난 접시에 자기 자신의 모습을 대입한 모양이었다.
“하. 고기가 좀 질기네요.”
나는 접시가 반으로 갈라지고 나서야 포크를 내려놓았다.
처음에는 자존심이 상하고 화가 나다가, 이내 무명 백마법사는 이런 터무니없는 대우를 받는 건가 싶어졌다. 더 이상 그의 이야기를 들을 필요성을 못 느꼈다.
“어쨌든 좋은 충고를 해 주신 덕분에 저도 새로운 목표가 생겼어요.”
“…그렇지?”
빌론은 여전히 접시를 흘금흘금 보며 눈치를 살폈다.
“저도 공왕 전하처럼 돈을 많이 벌어서 첩을 여럿 둬야겠네요.”
“잠깐. 내 말을 제대로 이해한 게 맞는가?”
“네. 이만 가 볼게요. 식사는 감사했습니다.”
그리고 예의를 차리지 않고 연회장을 나왔다.
에카르트와 블랑세를 떠나면 평화롭게 살 줄 알았는데. 순진했던 판단이었다. 차가운 바람을 맞으며 나는 허탈하게 웃었다.
***
에카르트는 타르 공국 주변까지 왔다. 그는 잠시 그늘 아래 검은색 말을 쉬게 하고, 흉흉한 눈빛으로 성벽을 응시했다.
‘전부 다 쓸어버리면 될 것을.’
사상자가 얼마나 생기든 알 바가 아니지만, 시엘리나가 다칠지도 모르니 참아야 했다. 이윽고 헬라가 하얀색 말과 함께 돌아왔다.
“공작님. 3지구로 진입하는 경로를 알아봤습니다. 주민들과 기사들이 대치하고 있습니다만.”
“곧바로 출발하지.”
에카르트는 그런 상황이야 아랑곳하지 않았다.
“이틀간 잠도 안 주무셨습니다. 기사단에게 맡기고 더 쉬셨다 가는 게-”
“헬라.”
싸늘한 분위기를 감지한 헬라가 눈치껏 입을 다물었다.
이미 인내심에 한계가 다다른 에카르트였다. 그의 이성을 무너뜨린 것도 시엘리나였고, 그나마 유지시키는 것도 그녀였다.
“네 목숨이 붙어 있는 것만으로 자비는 충분히 베풀었을 텐데.”
헬라는 결국 진땀을 흘리며 에카르트를 따라 다시 말에 올라탔다.
그는 제 명령을 거스른 자를 전부 죽이거나 크게 벌했다. 그러나 시엘리나와 그녀가 아끼는 사람들은 달랐다. 그 점은 헬라도 알고 있었다.
“전투를 치를 가능성이 큽니다. 정말 백마법사는 안 데려가십니까?”
“다른 사람의 마력은 받는 생각으로도 역하군.”
에카르트가 생각할 필요도 없다는 듯이 답했다.
시엘리나는 사는 것이 고통스럽지만은 않다고 알려 준 존재였다. 그리고 그 고통을 해결해 주었다. 하지만 그녀가 떠나자 결국 저주에 시달리던 때보다 큰 고통을 남겼다.
***
나는 창 밖에서 지저귀는 새 소리와 함께 눈을 떴다.
어제 빌론과 식사를 마친 후 여러 생각을 했다.
빌론은 백마법사를 그렇게 저평가하며 자신의 첩으로 회유하려던 쓰레기였다. 아무래도 돈을 받은 후 가능한 빨리 이곳을 떠나는 게 좋을 것이다. 떠나서 좀 더 남쪽으로 내려가 연안가의 도시에서 지내는 것도 좋으리라.
‘샤를에게는 회복 연고를 만들어 주자.’
헬라가 구해다 준 재료만큼 귀하진 않더라도, 내 마력을 넣는다면 어느 정도 효과가 보장될 테니까.
집무실 분위기는 평소와 다를 바 없었다.
“어서 오게, 리나.”
샤사가 빌론에게 차를 따라 주었고, 노집사는 뒤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빌론은 김이 모락모락 나는 차를 찻잔 받침에 붓고 내게 태연히 자리를 권했다. 이딴 인간을 치료하는 내 마력이 아까웠다.
하지만 계약은 계약.
“그럼 오늘 치료도 시작하겠습니다.”
나는 그의 맞은편에 앉아 평소보다 딱딱한 말투로 마법진을 그렸다.
그 후 내 마력을 깃들게 하여 종합적인 상태를 나아지게 했다. 마음 같아서 치료하는 게 아니라, 치료가 필요해지도록 뼈 하나쯤 꺾고 싶었지만 말이다.
“치료를 마쳤으니 이만 가 보겠습니다.”
“벌써 말인가? 별다른 일정이 없는 거로 아는데.”
빌론이 식은 차를 천천히 음미했다.
‘아무리 시간이 남아돌아도 그쪽과는 같이 안 있지.’
나는 그의 말을 무시한 채 가볍게 미소를 짓고 목례만 했다. 그런데 걸음을 옮긴 찰나.
뒤에서 뭔가 부딪치는 둔탁한 소리가 들렸다. 황급히 고개를 돌려보니 빌론이 심장을 움켜쥔 채 책상에 쓰러져 있었다.
“고, 공왕님!”
“크읍.”
빌론의 입가에서 피가 새어 나왔다. 곁에 있던 집사가 허겁지겁 달려들어 공왕을 흔들었다.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 나도 순간 몸이 굳었다.
“괜찮습니까? 거기 백마법사, 당장 전하를 살피지 않고 무엇 하는가!”
나는 정신을 차리고 빌론에게 빠르게 다가가 상태를 살폈다.
그는 거칠게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원인을 파악하려는 데에는 시간이 걸릴 터.
일단 회복 마법의 기본이 되는 주술을 읊었다. 어떤 내상이든 적용되는 만큼 효과는 크지 않았기에 오직 임시방편이었다. 다행히 잠시 후 빌론이 정신을 차렸다.
“정신이 드십니까?”
노집사가 빌론을 살피다가 내게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쪽이 진찰하는 분은 공국의 왕이시다! 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
치료한 후 환자가 이상을 호소한 적은 처음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공작이 갑자기 쓰러진 책임은 당연히 내게 묻는 게 합당했다. 하지만 방금 진료를 마쳤을 때만 해도 아무 이상 없었는데…. 침착하게 상황을 되짚어 보았다.
‘내가 진료한 후에 차를 마셨지.’
만약 차에 문제가 있던 거라면? 독이 들어가 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었다.
나는 의식을 되찾은 빌론에게 침착하게 말했다.
“방금 드신 차. 제가 마셔 봐도 될까요?”
“무슨 수작인가!”
집사가 나를 호통쳤으나 빌론이 손을 들어 그를 조용히 시켰다. 그리고 내게 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차가 아니라 그대의 마법에 문제가 있었다면 책임져야 할 것이야!”
“치료는 여태 부작용이 없었습니다.”
“누적되다가 문제가 생겼는지도 모르지.”
빌론은 어제 연회장에서처럼 개소리를 하고 있었다.
그게 말이 되냐고 따지고 싶었지만 감정적으로 대응하는 대신, 그가 쓰러진 원인을 찾아내는 게 우선이었다.
“샤사, 차를 주거라.”
어쨌거나 빌론의 명령에 샤사는 긴장한 얼굴로 새 찻잔에 차를 따라 줬다.
아까 빌론은 차가 충분히 식은 후 마셨다.
온도에 따라 효과가 달라질지 모르니, 나 역시 김이 사라진 후에 찻잔에 입을 댔다.
“…….”
하지만 차 맛은 평범한 로즈티일 뿐. 별다른 이상은 없었다.
시간이 지나도 여전히 아무 반응이 오지 않자 나는 초조해졌다. 빌론은 차를 마시고 거의 곧바로 피를 토했는데 말이다.
“혹시 아침으로 무엇을 드셨나요?”
“감자 수프와 토마토 샐러드를 먹었네.”
그의 말이 사실이면 이상 반응을 일으키는 음식도 아니었다. 하여 다른 원인을 찾아내려고 할 때, 빌론이 역정을 냈다.
“자네의 마법이 문제였던 걸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