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화
곧 페르디안의 입가에 쓴 미소가 배어 나왔다.
“불가능한 것은 입 밖에 내지 않는 주의라.”
그의 말에 미아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 대사, 분명 원작에서…….’
미아의 머릿속에 줄글이 스쳐 지나갔다.
‘페르디안 경도 사모하는 사람이 있나요?’
‘……있다.’
‘정말인가요? 페르디안 경의 마음을 얻다니 분명 멋진 분이겠네요……. 어떤 분인지 물어봐도 되나요?’
‘…….’
‘아. 혹시 제가 무례했다면…….’
‘아니다. 그저, 불가능한 것은 입 밖에 내지 않는 주의라.’
원작의 마지막에서 세레니티를 사모하는 마음을 삼키며 페르디안이 했던 말이었다.
페르디안은 그 이후로도 계속해서, 끝까지 세레니티를 품고 산다. 결혼도 하지 않은 채 말이다.
당황으로 굳은 미아를 보며, 페르디안은 순식간에 냉정한 낯으로 되돌아왔다.
“다음부터는 기사를 데리고 다녀라. 황후가 될 거라면, 미리 익숙해지는 게 나을 테니.”
그리고 그렇게 말하고선 미아가 뭐라 말하기도 전에 등을 보이며 걸어가 버렸다.
* * *
처형일이 되었다.
미아는 아딜로트가 애용하던 처형대에 처음으로 방문했다.
“…….”
무려 크리소르의 수하였다는 암살자를 처형하는 날이어서인지, 광장엔 사람들이 많았다.
미아는 광장 정중앙의 처형대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밧줄을 보고는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무, 무서워!’
저기서 진짜로 사람이 죽었고, 죽을 예정이라니.
겁먹은 초식동물처럼 움찔거리는 미아의 모습에 아딜로트가 변명하듯 말했다.
“……이 일만 끝나면 해체할 거야.”
“지, 진짜?”
“응. 이젠 죽일 필요도 없고.”
하기야 이제 적대 세력은 싹 사라졌으니…….
미아는 그러면서도 아딜로트의 옷자락을 꽉 쥐고서 마련되어 있던 자리로 향했다.
높은 자리에는 너무 당연하다는 듯이 화려한 의자 두 개가 놓여 있었다. 미아가 그것을 보고 살짝 움찔하며 아딜로트를 돌아보았다.
“왜?”
“내가 저렇게 대놓고 앉아도 돼?”
“너 말고 누가 앉아.”
아딜로트가 태연하게 대답하며 손을 내밀었다. 미아는 얼결에 그 손을 잡고 아딜로트 옆에 앉았다.
‘아무리 봐도 황후 자리인데…….’
아딜로트는 이렇게 구렁이 담 넘듯 일이 스르르 진행되어도 상관없는 걸까.
새로운 가십거리에 눈을 빛내는 관중들의 모습에도 아딜로트는 무심히 턱을 괼 뿐이었다.
곧 기사들의 손에 율리시즈가 처형대로 끌려 올라왔다.
눈은 안대로 가린 채였고, 몸은 가죽끈으로 묶여 있었으며, 손발에는 쇠공이 달려 있었다.
미아가 경악했다.
“너, 너무 심한 거 아냐!? 얘 뼈 부러지겠어!”
“본인이 원한 거야.”
“아무리 그래도…….”
울상짓는 미아와 달리 아딜로트는 시큰둥했다.
“애초에 저 정도는 애들 장난 수준일걸.”
“응?”
그때, 문관 한 명이 처형대에 올라와 목을 가다듬곤 외쳤다.
“죄인에게 유언을 허락한다!”
그의 말이 끝나자 기사들이 율리시즈의 입에서 재갈을 풀어 주었다. 밥이라도 굶긴 건지 초췌한 낯의 율리시즈는, 여린 목소리로 문관에게 뭔가를 속삭였다.
미아는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그 모습을 바라보다 세레니티를 돌아보았다.
‘슬슬 준비를…….’
그때, 문관이 약간 당황한 듯 말했다.
“……미아 님을 보고 싶다고?”
“응?”
미아의 고개가 다시 율리시즈에게 돌아갔다. 문관은 어쩔 줄 몰라 하더니, 빠르게 이쪽으로 다가왔다.
“그게…… 죄인이 마지막으로 미아 님과 이야기하고 싶다고.”
그 말을 들은 미아가 기다렸다는 듯이 벌떡 일어났다.
“시즈가 날 보고 싶대!”
“…….”
아딜로트는 별로 내켜 하는 기색이 아니었다. 하지만 미아의 결연한 표정과 불룩한 주머니를 보고선 짧게 한숨을 쉬었다.
“다녀와.”
미아는 함박웃음을 지으며 말을 전하러 온 문관보다도 빠르게 처형대로 향했다.
다행히 기사들과 문관은 눈치껏 물러나 주었다. 아딜로트의 명령인 모양이었다.
“시즈!”
무릎 꿇은 율리시즈 앞에 냉큼 앉은 미아가 그를 살폈다.
“밥은 잘 먹은 거야!? 아프진 않고!? 고문은 없었지!?”
자신의 얼굴을 이리저리 살피는 미아의 손길에 율리시즈는 풋 웃더니, 강아지처럼 손바닥에 뺨을 비볐다.
“걱정이 과하세요, 미아 님은…….”
“그럼 걱정을 안 하게 해 줘야지!”
“그래서 미리 말씀드린 건데…….”
“하지 말라고 했잖아!”
“그치만, 도움이 되었죠……?”
미아가 울상을 지었다. 율리시즈의 도움으로 더 수월하게 일이 끝난 것은 사실이었다.
미아가 준비한 건 크리스티아네와 아르민의 자료뿐이었지만, 그것만으로는 좀 더 지리한 공방이 이어져야 했을 것이다.
“응……. 전부 시즈 덕이야.”
“도움이 되었다니 기쁘네요…….”
율리시즈가 안대를 쓴 상태로 살풋 미소 지었다. 너무나 초연한 미소에 미아는 괜히 울컥해져 심통이 난 목소리로 말했다.
“그치만 난 너 이대로 두지 않을 거야!”
“아하……. 또 뭘 준비하셨군요……?”
“당연하지!”
미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율리시즈의 처형일이나 처형대의 위치는 미리 정해져 있었으니 물밑작업은 쉬웠다.
세레니티가 정말 적극적으로 율리시즈의 탈출 계획을 돕기도 했고 말이다.
“있지. 내가 신호하면 도망치는 거야. 잘할 수 있지? 곧 폭발이 있을 테니까……. 풀어 주는 건 내가 할게! 그리고 여차하면 날 인질로 잡는 거야, 알겠지?”
미아의 말에 율리시즈가 살짝 멍한 얼굴을 했다가 곤란하다는 듯이 미소 지었다.
“미아 님……. 그렇게 아무한테나 다정하면, 정말 큰일나요…….”
“친구잖아!”
그 순간, 율리시즈가 잠시 침묵했다.
“심술부리고 싶어지는 말이네요…….”
“살아서 심술부려.”
미아의 단호한 말에 율리시즈는 기어이 실소했다.
“미아 님은…… 정말로 삶에 집착하시네요.”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최고인 거야.”
율리시즈는 뜻 모를 미소를 지으며 다시금 침묵했다. 그러다 조용히 물었다.
“제가 살았으면 좋겠어요?”
“응…….”
“알겠어요. 그럼 그냥 살게요…….”
“응?”
율리시즈는 그렇게 말하더니, 갑자기 몸에 힘을 주었다.
그러자 율리시즈의 몸을 묶고 있던 가죽끈이 맥없이 끊어져 바닥으로 떨어졌다.
“……?”
미아가 상황을 이해하지 못해 벙쪄 있는 동안, 율리시즈는 다시 뚝 하고 족쇄에 달린 쇠공을 끊어 냈다.
“여, 역시 좀 불편하긴 했어요…….”
어느새 안대까지 시원하게 벗어 던진 율리시즈가 중얼거렸다.
“푸, 풀려났어!”
“꺄아악! 도, 도망쳐!”
“기사들은 뭣들 하나!”
“하지만 경호 대상이 너무 가까이에……!”
멀리서 당황한 기사들과 관중들의 외침이 들려왔지만, 미아는 멍하니 바닥에 흩어진 구속구와 율리시즈만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풀었……?”
율리시즈가 피식 웃었다.
“제가 누군데 이런 거에 잡히겠어요…….”
“어…….”
미아가 움찔했다. 되게 중2병 같은 대사인데 정말로 그걸 눈앞에서 보여 주니까 할 말이 없었다.
“그렇지만 역시, 오붓한 곳에서 단둘이 인사하고 싶었는데……, 그건 무리겠죠…….”
율리시즈는 줄이 끊긴 쇠공을 들어 올리더니 그대로 미아의 뒤로 던졌다.
“억!”
뒤에서 누군가 쓰러지는 소리가 들려왔고, 관중들은 비명을 지르며 도망치기 시작했다.
그 틈을 타 율리시즈가 미아의 어깨를 살짝 끌어안았다.
“기억하시죠?”
그렇게 말하며 율리시즈가 손가락을 움직였다. 작은 술식이 그려졌다.
별다른 변화는 없었지만,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초점을 잃은 것으로 미아는 바로 눈치챘다.
“어, 어디 간 거야!”
역시 그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게 하는 그 주술인 모양이었다.
“……너 진짜 대단한 사람이었구나?”
미아의 중얼거림에 율리시즈가 재밌다는 듯이 웃었다.
“찾아! 못 찾으면 우리가 죽어!”
주변의 소란 속에서 율리시즈는 도망치지도 않고, 가만히 미아에게 이마를 맞대 왔다.
“사실…… 원랜 별로 살고 싶지도 않으니 그냥 죽을까 했어요.”
“안 돼!”
그 와중에도 자신의 의견을 굽히지 않는 미아의 모습을 보며 율리시즈가 작게 웃었다.
“맞아요. 그러면 미아 님이 죄책감 가질 것 같더라고요…….”
이마를 맞댄 채, 율리시즈는 손을 뻗어 미아의 귓불을 매만졌다. 다정하고 애틋한 손길이었다.
“미아 님의 말버릇이었잖아요……. 살아남는 게 우선이다……. 저도 앞으로 그렇게 살아 볼까 해요. 저는 이제 제 역할을 다한 것 같으니까요…….”
“…….”
“게다가.”
그 순간, 율리시즈가 미아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남녀 관계는 또 모르는 거잖아요……? 혹시 미아 님이 황제에게 금방 질릴지도 모르고요…….”
미아가 당황으로 입을 뻐끔거리며 이마를 문질렀다.
“그, 그, 그런 일 없는데!?”
“그거야 두고 봐야죠…….”
율리시즈는 쌕 웃더니 미아의 손을 잡은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는 슬쩍 상석을 바라보곤 중얼거렸다.
“더 이야기하고 싶은데, 역시 슬슬 그만두지 않으면 안 되겠죠…….”
“응?”
미아의 반문에 율리시즈는 담담해서 더 시원해 보이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또 만나요, 미아 님.”
“…….”
그 말에 속에서 뭔가 울컥했다.
“꼭 영영 헤어지는 거 같잖아…….”
“황제가 요절할 때까지 기다릴 거니까 영영은 아닐 거예요…….”
아니, 그건 좀…….
미아가 당황하는 사이 율리시즈는 방울 소리처럼 맑게 웃더니, 그대로 손을 놓았다.
“그럼…….”
“어…….”
“……미아 님이다!”
“모두 지켜!”
기사들이 소란을 떨며 미아의 곁으로 모여드는 가운데, 율리시즈의 모습은 더는 보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