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3화
“…….”
미아는 눈을 크게 떴다가 입술을 깨물곤 고개를 휙 돌려 버렸다.
아딜로트 역시 그 모습을 보았다. 그의 인상이 단숨에 살벌해졌다.
“너…….”
“폐하. 제 파트너시잖아요.”
샴페인이 드레스에 튀어 울상짓는 영애는 쳐다보지도 않은 채 릴리벳이 속삭였다.
“그렇게 행동하시면 제가 뭐가 되겠어요? 약속은 지켜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아딜로트의 손이 스르르 허리춤의 단검으로 움직였으나 릴리벳은 태연히 가까이했던 몸을 물렸다.
“미아 양은 폐하가 사람을 죽이는 걸 싫어하는 것 같더군요.”
“…….”
아니나 다를까 아딜로트의 동작이 우뚝 멈췄다.
“미아 양이 폐하를 떠나고 싶어 하는 이유에 그런 점도 있지 않을까요? 어떻게 생각하세요?”
빙긋 웃은 릴리벳은 자리에서 일어나 그제야 옆자리의 영애를 바라보았다.
“옷을 내어줄게요. 다녀와요.”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 없는 오만함과 당당함. 하지만 그녀는 크라우스 공작가였고, 샴페인을 맞은 영애는 입술만 깨물었다.
남은 일행은 얼마 안 있어 알트 언덕으로 향했다. 좁은 길을 따라 걸어가자, 곧 탁 트인 언덕이 드러났다.
“와!”
“너무 멋져요.”
“굉장한 넓이의 밀밭이군요.”
함께한 귀족들이 제각기 탄성을 내질렀다. 그럴 만한 풍경이었다. 지대가 평탄한 공작령을 푸른 밀밭이 뒤덮고 있는 모습은 가히 장관이었으니까. 다른 한쪽에는 꽤 넓고 울창한 숲이 펼쳐져 있었다.
“역시 크라우스 공작가군요. 병충해 따위는 없어 보이네요.”
“그럼요. 크라우스 공작가는 농업 생산량을 위해 크게 신경 쓰고 있으니까요. 다른 어떤 영지도 크라우스 공작가만큼의 생산량을 뽑아낼 수는 없어요.”
“비법이 정말 궁금하군요!”
“아무리 그래도 그걸 알려드릴 수는 없답니다. 크라우스 공작가의 일급 기밀이니까요. 귀족의 힘은 토지에서 나오고, 땅을 잘 관리하는 것이야말로 부와 명예를 가장 효율적으로 지키는 방법이죠.”
그렇게 말한 릴리벳이 아딜로트를 흘끗 바라보았다.
“황실과 크라우스 공작가가 같은 방향을 향해 나아가게 된다면 또 모르지만요.”
“……!”
의미심장한 발언에 귀족들이 슬쩍 황제를 살폈다.
아딜로트는 가소롭다는 듯이 혀를 찼지만 릴리벳은 신경 쓰지 않았다.
원래 정치란 여론을 휘어잡는 쪽이 이기는 법이다. 그리고 아딜로트도 황제라면, 결국엔 공익을 위한 선택을 할 터였다.
그리고 거기에 가문도 몰락한 ‘애완동물’의 자리 따위는 없다.
릴리벳은 너무 거만해 보이지 않도록 주의하며 미아를 바라보았다.
‘조금쯤은 기가 죽어 있으려나? 나와의 격 차이 때문에 너무 속상해하진 말아야 할 텐데.’
그러나 예상과 달리 고개 돌린 곳에 풀 죽은 미아는 없었다.
미아는 뭔가 신기하다는 듯이 밭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릴리벳이 고개를 갸웃했다.
“미아 양? 뭘 보고 있나요?”
“네?”
미아가 화들짝 놀라 눈을 크게 떴다.
페르디안이 그녀의 옆에서 경계하듯 몸을 굳혔지만, 릴리벳은 신경도 쓰지 않고 미아에게 다가갔다.
“뭔가 집중하고 있는 것 같아서요.”
“아…….”
미아는 쉽게 대답하지 않고 머뭇거렸다.
“그냥 인부들이 뭘 뿌리고 있길래요.”
그녀의 말에 릴리벳이 우아하게 고개를 돌려 인부들을 바라보았다.
“맞아요. 크라우스 공작가만의 특별한 제조법으로 만든 비료예요. 공작령의 농업 생산량을 비약적으로 끌어올린 비법이죠.”
“아! 역시 비료인 거죠?”
미아가 방긋 웃었다. 그리고 조금 신난다는 듯이 손뼉을 쳤다.
“다행이에요! 크라우스 공작가에서 쓰고 있다고 하니까 저도 만들어도 되겠어요!”
“……?”
그 말에 릴리벳이 멈칫했다. 다른 귀족들도 마찬가지였다. 내내 언짢은 표정이던 아딜로트마저 ‘지금 쟤가 무슨 소릴 한 거지?’ 같은 얼굴이었다.
“……미아 양? 지금 뭐라고 한 거예요?”
그들을 대표해 릴리벳이 물었다. 그녀의 물음에 미아가 도리어 고개를 갸웃했다.
“어. 저기……. 비료를 만들겠다고……?”
“비료가 쉽게 만들어지는 물건인 줄 아는 건 아니죠? 원료가 뭔지는 알고 있나요?”
“그야 초석이랑…….”
릴리벳이 피식 웃었다. ‘설마?’ 싶어 긴장한 자신이 우습다는 생각에 나온 행동이었다.
“미아 양. 초석은 그렇게 쉽게 구할 수 없어요. 만들어지는 양에 한계가 있다고요.”
“그치만 만드신 거 아니에요? 뿌리는 거랑 아까 들렀던 공방들 생각하면 그런 거 같은데!”
“…….”
릴리벳은 다시 침묵했다.
‘설마 뭔가 알고 말하는 건 아니겠지?’
그녀의 녹색 눈이 정탐하듯 미아를 살폈다. 미아는 그걸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안절부절못했다.
“저, 저는 그냥, 크라우스 공작가도 만든 거면 저도 만들어도 되지 않을까 하고…….”
“그러니까 어떻게요?”
“그건…….”
미아가 머뭇거렸다. 그녀는 릴리벳이 눈을 부라리자 그제야 찔끔하곤 말했다.
“말해도 모를 텐데…….”
“…….”
“허억.”
“흡.”
릴리벳은 저도 모르게 눈을 감았고, 뒤에서는 귀족들이 숨을 삼켰다. 그중 아딜로트가 작게 헛웃음치는 소리가 릴리벳을 가장 화나게 했다.
릴리벳은 가까스로 냉정을 유지하고서 입을 열었다.
“그런 단정은 아주 나쁜 행동이에요, 미아 양.”
“아……! 죄송해요!”
죄송하단 말과 달리 미아의 얼굴이 환해졌다. 그리고 그녀는 곧 뭔가를 떠들기 시작했다.
“그럼 말해 볼게요! 농작물 재배에 가장 중요한 건 질소랑 칼륨이랑 인이잖아요? 칼륨이랑 인은 광석으로 대신하기로 하고, 결국엔 질산 화합물이 필요하단 건데, 이걸 공중 질소 고정법을 이용하면 되잖아요!”
“……네?”
“그러니까 하버―보슈 공법을 이용해서! 아, 저 미로미스 상회를 운영할 때 마법사들 데리고 실험해 봤어요! 가능하더라고요! 말마따나 초석은 공급이 너무 딸리니까요!”
“어…….”
“그런데 크라우스 공작가가 이런 기술을 사용할 줄은 몰랐어요! 저는 아직 이쪽 인류에겐 너무 이른 것 같아서 묻어 두고 있었는데! 그런데 혹시 토양의 염류화는 어떻게 처리하고 있나요? 제 생각엔 역시 마법으로 처리하는 게 제일일 것 같은데 거기까진 실험을…….”
릴리벳은 입을 벌린 채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녀는 지금 미아가 하는 말의 반도 이해하지 못한 상태였다.
릴리벳이 크라우스 공작가의 일원으로서 알고 있는 것은 딱 두 가지였다.
크라우스 공작가가 비료의 원료인 초석을 마음껏 만들어 낼 기술을 갖고 있다는 것.
그래서 크라우스 공작가의 농업 생산량이 다른 영지보다 뛰어나다는 것.
“암모니아 합성에 대해서는 저도 잘 모르지만 다행히 화학식을 알고 있어서 마법사들이랑…….”
미아는 그러고도 한참을 뭔가 전문 용어 같은 것을 떠들었다. 그녀는 마치 자신 외의 천재를 처음으로 만나서 신난 사람 같았다.
그런 그녀를 릴리벳과 다른 귀족들은 떨떠름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미아는 아무도 그녀의 말에 호응하지 않자 뒤늦게 릴리벳의 안색을 살폈다.
“아…….”
그러곤 당황한 얼굴로 변명하듯 말했다.
“음음, 저기, 어려운 이야기니까 모르는 게 당연하고…….”
“……!”
릴리벳의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혼자 있다면 모를까, 지금은 무려 크라우스 공작가의 가신들과 함께인 상태였다.
게다가 만약 미아의 말이 맞다면, 지금 미아는 크라우스 공작가만이 갖고 있던 비법을 만천하에 공개한 셈이었다.
크라우스 공작가는 몇몇 가신들에게만 비료를 나눠 주며 그들의 충성을 받아왔는데 말이다.
너무나도 터무니없게 가문의 비밀을 털린 릴리벳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런 그녀의 태도를 보고 미아의 말이 거짓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은 귀족들이 저도 모르게 앞으로 나섰다.
“미아 님! 나중에 그걸 다시 말씀해 주실 수 있나요?”
“네? 어…….”
“정말 식견이 넓으시네요! 혹시 다른 기술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네? 어떤…….”
“이를테면, 그래요! 토지라든가? 역시 미로미스 상회를 운영하신 분이면 부동산 감각도 남다르시겠죠?”
폭포처럼 쏟아지는 질문에 미아는 정신을 못 차리는 듯했다. 그때 페르디안이 그녀의 앞으로 살짝 나섰다.
“……!”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코가 닿을 듯이 달려들던 귀족들은 잿빛 눈의 기사에게 찔끔해 뒤로 물러났다.
그제야 숨통이 트인 미아가 페르디안의 뒤에서 살짝 몸을 내밀었다.
“그, 근데 전 땅이 그렇게 중요하다고는 생각 안 해서. 아, 물론 수도 울름이라면 좀 다르겠지만…….”
“울름의 땅을 사라는 거죠?”
“아, 아뇨. 그렇다기보다 땅에서 나올 수 있는 수익에는 한계가 있다는 거였어요. 역시 고부가가치 산업으로 넘어가야 하지 않나 싶은데요…….”
“2차 산업이요? 철강 기술 같은 걸 말씀하시나요?”
“그건 아니고…….”
미아가 머뭇거렸다. 입술을 달싹거리던 그녀는 이내 어색한 미소를 흘렸다.
“그냥…… 그런 게 있어요!”
그 순간, 자리에 있던 모든 귀족의 눈이 번득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