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2화
“…….”
한순간 미아는 멈칫했다.
‘그거?’
마치 이게 뭔지 아는 듯한 말이 아닌가. 미아는 직감에 의지해 천연덕스럽게 말했다.
“선물로 받았어요!”
“서, 선물이요? 누, 누가…….”
“릴리벳 크라우스 양이요!”
“……!”
렌나의 얼굴이 더욱더 창백해졌다.
“릴리벳 양이 그걸 미아 님께 주셨다고요……?”
“네! 몸에 좋대요!”
미아가 방긋 웃으며 말했다. 렌나의 얼굴에 차츰 공포가 떠올랐다.
“…….”
그녀는 손톱을 깨물며 미아의 손에 들린 것을 노려보았다. 그 눈에 떠오른 것은 명백히 두려움이었다.
미아는 일부러 그것을 잘 보이도록 탁자에 올려놓았다.
‘뭔지 몰라도 이 독에 대해서 아는 눈치니까.’
그리고 자신은 렌나에게 제법 이미지가 좋은 편이었다.
“렌나 씨. 그러다 손톱 상하겠어요!”
미아는 처진 눈을 깜빡이며 렌나의 손을 잡았다.
“사람을 살리는 귀한 손이잖아요! 함부로 하면 안 되죠!”
“……!”
미아의 말에 넋을 놓고 있던 렌나가 번쩍 정신을 차렸다. 한참을 번뇌하는 것 같던 그녀는 이내 뭔가를 결심한 듯이 미아의 손을 맞잡았다.
“미아 님. 그거 저…… 주시면 안 될까요?”
미아의 눈에 한 조각 예리함이 떠올랐으나 그녀는 곧장 눈웃음쳐 그것을 가렸다.
“왜요? 이거 귀한 거랬어요!”
“저, 저 주세요. 제발요!”
“이잉. 렌나 씨여도 안 돼요! 혼자 먹으라고 그랬단 말이에요!”
렌나가 몇 번을 더 매달렸지만 미아는 도리질 치며 그것을 거절했다.
다시 손톱을 뜯으며 초조하게 미아를 바라보던 렌나가 이윽고 목소리를 낮췄다. 이제 그녀는 흡사 울먹이고 있었다.
“그, 그럼 미아 님……. 마리아쥬라는 거 아시죠?”
“음식끼리의 궁합이요?”
미아가 천연덕스럽게 말했다.
렌나가 뻣뻣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두려움이 가득한 눈으로 속삭였다.
“그 약은…… 같이 먹어야 하는 음식이 있어요.”
“와. 정말요! 알려 줄 수 있어요?”
렌나는 기다렸다는 듯이 품에서 메모장을 꺼내 부랴부랴 뭔가를 휘갈겨 적었다. 그리고 종이를 찢어 미아의 손에 쥐여 주었다.
“꼭……. 꼭 이것들이랑 같이 드세요. 꼭이요! 아셨죠……?”
“알았어요! 추천해 줘서 고마워요!”
활짝 웃는 미아의 모습에 렌나의 눈에는 눈물이 고였다.
“죄송해요…….”
그렇게 중얼거린 렌나는 도망치듯 떠났다.
“…….”
미아는 떠나가는 그녀의 등을 바라보다 휙 몸을 돌렸다. 그녀의 얼굴에서 빠르게 웃음기가 사라졌다.
‘렌나 씨가 어떻게 이 독에 대해 알고 있는 거지? 분명 전 의원들이 만들었을 거랬는데.’
율리시즈가 있었다면 바로 조사를 부탁했을 텐데 그러지 못하는 게 아쉬웠다.
하지만 뭐가 됐든 뜻밖의 수확이었다.
미아는 곧장 황제궁으로 향했다. 그리고 다행히 바로 제인을 발견할 수 있었다.
“미아 님. 다녀오셨어요? 폭신폭신한 걸 드릴까요?”
“으응. 괜찮아요! 그보다 이걸 준비해 줄 수 있어요?”
미아가 제인에게 쪽지를 내밀었다. 제인이 그것을 읽어 내렸다.
“자수정 분말, 위석, 일각 고래의 뿔, 붉은 두꺼비의 껍질…….”
“…….”
들을수록 저걸 정말 먹으라고 줬나 싶어졌다.
‘하지만 애초에 내가 눈치채길 바라고 준 거겠지.’
미아가 생각에 잠겨 있는 동안 제인은 목록을 읽는 것을 끝마쳤다.
“네. 전부 준비 가능합니다.”
유능한 시녀 제인은 왜 그런 물건들이 필요한지 전혀 묻지 않았다. 미아가 쌕 웃었다.
“나들이 갈 때 가져갈 거니까 같이 부탁해요!”
“네.”
“그리고 엠브라 씨에게도 비밀리에 전달 좀 해 주세요! 최근 분석을 맡긴 ‘그거’에 대한 건데, 확인 좀 해 달라고요!”
“그러겠습니다.”
믿음직스럽게 대답한 제인이 총총걸음으로 사라졌다. 손을 살랑살랑 흔들며 그녀를 배웅하던 미아는 곧 멈칫했다.
‘그런데 왜 뭘 잊고 있는 것 같지.’
잠시 생각에 잠겼던 미아가 뒤늦게 잊은 것을 떠올렸다.
“맞다. 파트너…….”
그녀의 입에서 앓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켄달 경에게라도 찾아갈까 했으나, 장소가 장소이니만큼 적사자 기사단이라면 이미 아딜로트와 함께 이동하는 것이 예정되어 있을 터였다.
‘역시 페르에게 부탁해야 하나.’
오늘 그가 보인 태도 때문에 페르디안에게만은 찾아가고 싶지 않았지만,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별일 없다면 좋겠는데.’
그렇게, 황제가 크라우스 공작령으로 향하는 날이 되었다.
* * *
적사자 기사단이 호위하는 마차 안.
상아색 보닛을 쓴 릴리벳 크라우스는 앞에 앉은 사람을 향해 싱긋 웃었다.
“기분이 안 좋아 보이시네요. 폐하.”
“그대 같으면 좋겠어?”
아딜로트가 그녀를 쳐다도 보지 않고 답했다. 마차에 탄 내내 그는 팔짱을 낀 채 창밖만 바라보았다.
정말 그저 ‘약속이니까 간다’고 온몸으로 외치는 듯한 태도였지만 릴리벳은 신경 쓰지 않았다. 중요한 건 황제가 지금 자신과 함께 크라우스 공작령으로 향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귀족들은 지금 이 놀라운 사태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을 것이다.
정말로 황제와 크라우스 공작 영애가 혼인하게 될까?
아니면, 혼인하진 않더라도 힘을 합치게 될까?
설령 두 사람이 결혼하지 않더라도 황제 역시 크라우스 공작가만큼은 무시하지 못한다는 신호가 될 터였다.
“그래도 제 덕에 크라우스 공작령을 무혈로 둘러볼 기회까지 얻으시지 않았나요?”
“난 딱히 유혈이어도 상관없어.”
“그러신 것 같긴 합니다. 하지만 미아 양은 좀 다른 생각인 것 같더군요.”
미아의 이야기를 꺼내기가 무섭게 아딜로트는 입을 다물었다. 태연한 척 하고는 있지만 속까지 그렇진 않을 것이다.
‘참 신기하지.’
미아가 자신을 떠나고 싶어 한다는 말이 그렇게 충격이었을까. 황제에게 있어 미아의 이름은 마치 그의 유일한 약점 같았다.
‘어리석어.’
릴리벳은 깍지 낀 자신의 두 손을 내려다보았다.
‘역시 미아 양이 황후가 되게 둘 순 없어. 둘 다 서로에게 마음이 있으니, 그건 오히려 나라를 망치는 일이 될 거야.’
감정에 이끌리면 대의를 위한 선택을 할 수 없다. 릴리벳은 이번 나들이에서 둘 사이를 파고들 생각이었다. 그녀로서도 내키는 일은 아니었지만, 원래 누군가는 흙탕물을 뒤집어써야 하는 법이다.
마차는 얼마 안 있어 크라우스 공작령의 초입에 도착했다. 창 너머로 황제를 기다리는 다른 귀족들의 무리가 보였다.
“내키지 않으시겠지만, 오늘 하루는 제 파트너로서 행동해 주시면 감사하겠어요. 과하게 친한 척 하실 필요는 없지만 적어도 저를 존중해 주세요.”
“약속이나 제대로 지켜.”
“물론 재상께서 말씀하신 지역들은 전부 둘러보게 해드리겠습니다.”
마차가 멈췄다.
문이 열렸고, 릴리벳은 에스코트 따윈 생각지도 않았다는 듯이 휙 내리는 아딜로트의 등에 대고 다시 한번 말했다.
“폐하는 제 파트너입니다. 명심해 주세요.”
“도대체가 그깟…….”
반복된 말에 짜증스럽게 한마디 하려던 아딜로트는 저도 모르게 말을 멈췄다.
“…….”
그는 멀찍이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젊은 귀족 무리를 바라보며 자리에 못 박힌 듯 멈춰 섰다.
그의 시선 끝에는 미아가 페르디안과 함께 서 있었다.
* * *
나들이에 모인 귀족들은 전부 열 명 남짓이었다. 릴리벳과 아딜로트, 미아와 페르디안을 제외하면 전부 크라우스 공작가의 가신 출신이었다.
그들은 이번 나들이에서 릴리벳 크라우스를 띄워 주는 역할을 맡았다. 물론, 실제로 그런 지령을 받은 건 아니지만.
‘폐하께서는 저와의 혼인을 깊게 고려하고 계세요. 그분의 선택을 도울 수 있게, 크라우스 공작가가 얼마나 대단한 가문인지를 함께 보여 주면 좋겠어요.’
그렇게 말한 그녀에게서는 범상치 않은 위엄과 당당함이 흘렀다. 당장 황후가 되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였다.
덕분에 가신들은 오늘 적당히 황제와 릴리벳을 이어 주기만 하면 되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막상 모두가 모이자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식사는 좀 입에 맞으시나요? 특별히 준비한 대구 요리인데, 부디 입맛에 맞으셨으면 좋겠네요.”
“…….”
한쪽에는 시종일관 당당하고 우아하게 황제를 챙기는 릴리벳과, 요리에는 손도 대지 않은 채 침묵하는 아딜로트.
“먹어라.”
“가, 감사합니다…….”
무심하게 미아 앞에 단것들을 끌어모으고 있는 페르디안 키토와, 어색하게 인사하는 미아.
오전 내내 크라우스 공작가의 훈련장과 성벽, 밀 창고 등을 속속들이 둘러본 뒤 늦은 점심을 위해 모인 자리였다.
너른 풀밭에 흰 테이블이 놓인 그림 같은 정경이었으나 그곳에는 침묵만이 가득했다.
귀족들은 눈치껏 입을 다문 채 배경음 정도로 들릴 만큼만의 대화만 이어 갔다.
그도 그럴 것이, 황제의 눈빛이 예사롭지 않았다. 이 나들이에 미아 셀레스티얼 참여하는 걸 몰랐던 눈치였다.
그는 정말로 릴리벳 크라우스 죽일 것처럼 그녀를 돌아보기까지 했으나, 릴리벳은 태연했다.
‘모두 폐하께 인사 올리세요.’
그녀는 귀족들을 향해 말했고, 귀족들은 너나 할 것 없이 고개 숙여 인사했다. 미아와 페르디안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자신을 향해 마치 남처럼 고개를 숙이는 미아를 보며 아딜로트는 다시 한번 이를 악물었다.
그의 목울대가 몇 번이고 뭔가를 참아내듯 꿀렁였으나, 아딜로트는 미아에게 다가가지는 않았다.
그리고 일정 내내 노골적으로 미아 셀레스티얼과 그의 파트너인 페르디안 키토를 무겁게 응시했다.
덕분에 폭군의 비위를 거스르지 않기 위해 크라우스 공작가의 가신들은 죽을 것 같은 심정이었다.
릴리벳만이 만족스러움을 느꼈다.
‘다행히 사랑에 눈은 멀었지만 체면 차릴 줄은 아나 보군.’
릴리벳은 더욱 보란 듯이 아딜로트 곁에 붙어 다녔다.
식사 자리도 일부러 긴 테이블의 끝에서 끝으로 정해놓았다. 서로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아야 오해가 깊어지기에 더 쉬울 것이다.
‘게다가 묘하게 키토 후작도 이쪽에 도움이 되고 있고.’
릴리벳이 페르디안을 일별했다.
페르디안은 아딜로트에게 깍듯한 예를 취하긴 했으나, 식사 내내 아딜로트에게는 일말의 관심도 주지 않았다. 오히려 모든 신경이 미아에게 쏠려 있는 듯했다.
“이것도 먹어라.”
“페르 님은 안 드세요?”
“단 건 몸에 나쁘다.”
“…….”
미아가 푸딩을 입에 잔뜩 넣은 채 뭔가를 구시렁거리는 모습이 보였다.
“…….”
아딜로트는 그 모습을 보고 손에 든 포크를 좀 더 꽉 쥐었다.
‘계획대로야.’
적당히 식사가 끝나자 릴리벳은 잔을 두드려 시선을 모았다.
“식사 후엔 장인들의 공방을 들른 뒤, 알트 언덕으로 산책을 가는 게 좋겠어요. 크라우스 공작령의 가장 비옥한 땅이 잘 보이는 위치죠.”
“어머나! 풍광이 좋기로 유명한 곳이잖아요! 크라우스 공작가 혈족에게만 개방한다고 들었는데.”
영애 중 한 명이 호응했다. 릴리벳은 대수롭지도 않다는 듯이 답했다.
“저는 크라우스인걸요.”
“어쩜…….”
“알트 언덕에서는 크라우스 공작령의 밀밭이 아주 잘 보여요. 시야가 탁 트인 곳이니 마음에 드실 거예요.”
크라우스 공작가의 밀 수확량은 모든 가문 중에서 가장 높다. 겸손 속에 자랑을 숨긴 릴리벳은 슬쩍 아딜로트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아딜로트는 이목구비가 지워진 것 같은 무표정으로 가만히 앉아 있을 뿐이었다.
그의 시선은 가끔 미아를 향해 움직일 뿐, 릴리벳의 목소리는 들리는 것 같지도 않았다.
“…….”
릴리벳은 잠시 그 모습을 지켜보다 천천히 허리를 굽히며 손을 뻗었다.
“폐하.”
그녀의 손이 아딜로트의 어깨에 닿은 순간.
릴리벳은 아딜로트가 자신을 밀어내기도 전에 일부러 반대쪽 손을 휙 움직여 와인잔을 쳐 냈다.
“꺅!”
그 바람에 잔이 넘어지고, 옆에 앉은 영애의 드레스에 샴페인이 튀었다.
그 작은 소란에 미아와 페르디안의 시선도 이쪽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들은, 릴리벳이 일견 다정하게 아딜로트과 몸을 가까이하고 어깨에 손을 올린 모습을 목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