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3화
미아와 크라우스 공작은 레벤토르 내에 마련된 티룸으로 향했다.
티룸의 궁인은 크라우스 공작이 나타나자 아주 자연스럽게 가장 채광이 좋고 조용한 별도 공간을 내어주었다.
‘나를 왜 부른 거지?’
미아는 굳이 자신을 불러낸 크라우스 공작의 의중을 짐작할 수 없었다.
‘크리소르를 엿 먹일까 봐 그러는 걸까?’
아딜로트와 요아힘에게 듣기로는, 호흐실트 후작 뒤에 크리소르가 있었다 했다. 그런데 그를 조사하기도 전에 호흐실트 후작이 죽어 버린 것이다.
미아는 잠깐 율리시즈를 떠올렸으나 이내 그 생각을 부정했다.
‘설마 시즈겠어?’
그때 크라우스 공작이 입을 열었다.
“차는 입맛에 맞나?”
“음……. 네.”
미아가 아무 생각 없이 답했다.
“잘됐군.”
크라우스 공작은 그렇게 말했다. 끝이 뚝 떨어져서 묘하게 재수 없게 들리는 어조였다.
차가 입에 맞느냐고 물어본 걸로 대충 체면치레는 했다고 생각했는지, 크라우스 공작은 바로 본론에 들어갔다.
“너는 크리소르의 궁에 종종 들렀지.”
미아는 약간 기이해졌다.
‘황태후를 크리소르라고 불러?’
여동생이라고는 해도 황태후다. 그런데 존칭을 사용하지 않는다?
‘뭐지? 크리소르 황태후랑 크라우스 공작 사이가 생각보다 별로인 건가?’
크라우스 공작은 그런 미아의 생각 따위는 알 바 아니라는 듯이 말했다.
“크리소르는 잘 지낸다던가?”
“일이 바빠 자주 찾아뵙진 못하지만, 무탈하게 지내신다고 알고 있어요.”
“일.”
플로리안 크라우스가 얇은 입술 사이로 탄식 비슷한 것을 내쉬었다.
“일이 바쁜가?”
“원치 않게 그렇게 됐네요.”
“바쁘지 않은 게 좋겠는데 말이야.”
미아가 얼굴에서 표정을 지웠다. 내내 무표정이었던 크라우스 공작은 눈도 깜짝하지 않았다.
“그만 들쑤시는 게 좋겠군.”
“협박인가요?”
“권고라네.”
“이유는요?”
“내가 아주 번거로워.”
크라우스 공작의 이마에 자잘한 주름이 생겨났다. 미간을 찌푸린 것이다. 연기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상대하기 어려운 아저씨네.’
과연 정치판에서 구르고 구른 크라우스 공작다웠다.
그가 불쑥 물었다.
“네 목적은?”
“네?”
파충류처럼 가늘게 찢어진 녹색 눈이 미아에게 향했다.
“쭉 지켜보았네만, 개인의 영달을 좇는 것 같진 않더군.”
미아는 잠시 대답을 망설였다. 원래 그녀의 목적이야 늘 하나였다.
‘살아남고 싶어.’
그게 해결되자 그다음엔 어쩌면 자신이 망가뜨렸을지도 모르는 이 소설의 해피엔딩을 보고 싶었다.
‘아딜과 렌이 행복해졌으면 좋겠어.’
그리고 나도.
전에는 하지 못한 평범한 즐거움을 누리면서.
“폐하의 치세가 안정화되는 거죠.”
미아는 그걸 좀 더 세련되게 풀어 말했다.
그 순간, 플로리안 크라우스 공작의 눈이 번득였다.
“폐하의 치세.”
“…….”
“너는 나와 뜻이 맞군.”
영문을 알 수 없는 말이었다. 하지만 크라우스 공작은 대화의 목적을 달성했는지 어느새 자리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미아.”
중년의 공작은 오만하게 서서 미아에게 말했다.
“그 목적을…… 계속 유지하길 권하지.”
플로리안 크라우스 공작은 그 말만 남기고 등을 돌렸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말이야.”
* * *
혼자 황제궁의 방으로 돌아온 미아는 주변을 살폈다. 그리고 아무도 없다는 걸 확인한 뒤, 허공에 대고 외쳤다.
“시즈! 거기 있어?”
아무래도 크라우스 공작에 대해 조사가 필요할 것 같아서, 율리시즈에게 물어보려는 생각이었다.
“…….”
그런데 아무리 기다려도 율리시즈는 나타나지 않았다.
‘어디 갔나?’
율리시즈는 미아가 당황해 멀뚱히 서 있을 때, 뒤늦게 창문을 열고 나타났다.
“오, 오랜만이네요. 미아 님…….”
“으응, 오랜만인데…….”
그의 얼굴을 보고 미아는 여전히 당황한 상태였다.
‘왜 저렇게 피곤해 보이지?’
소년 같던 뺨이 거멓게 죽어 있었다. 길드에서 어려운 의뢰라도 들어온 걸까?
“무, 무슨 일로 부르셨어요……?”
“응? 아. 별건 아니고, 에트루리나 지역에 대해서 얘기를 해야 하지 않을까, 우리?”
미아가 그렇게 대답하며 슬쩍 율리시즈의 눈치를 보았다.
“저기 일단, 그쪽 일은 잘 해결했어!”
“네에. 저도 들었어요…….”
“응! 지원금도 제대로 돌아갈 거고, 당분간은 요아힘이 직접 관리한댔어. 몰수한 재산으로 빈민 지원금도 확충할 거래!”
“네…….”
“그, 근데 ‘율리시즈’가 에트루리나 개발 사업을 이관받진 못하게 됐어…….”
이게 본론이었다. 미아는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계속해서 눈치를 보았다.
원래 에트루리나 개발 사업은 내무부 담당인 그라스 후작의 몫이었다. 그러나 그의 경질로 요아힘이 그 자리를 맡았다.
그 말은 즉 길드 ‘율리시즈’가 끼어들 틈이 없다는 뜻이었다.
요아힘이라면 누구의 손도 빌리지 않고 척척 에트루리나 개발 사업을 원상 복귀 시킬 것이다.
그리고 그건 미아가 율리시즈와의 계약을 지키지 못했다는 뜻이었다.
“그, 근데 들어 봐? 요아힘은 머리도 좋고 횡령도 안 할 거고……!”
그러나 미아의 변명이 무색하도록 율리시즈는 대수롭지 않게 어깨를 으쓱했다.
“괜찮아요.”
“……응?”
“괜찮아요……. 열심히, 해 주셨는걸요. 계약은…… 잊어버려도 된다고 저번에도 말씀드렸는데.”
율리시즈는 그렇게 말하며 눈을 내리깔았다.
미아는 멈칫했다.
“시즈.”
“네에…….”
“너 무슨 일 있지?”
그녀가 한 걸음 더 다가섰다. 표정은 굳은 채였다. 그리고 걱정이 가득했다.
“네……?”
율리시즈가 당황해 반문했으나 미아가 좀 더 다급하게 말했다.
“너 무슨 힘든 일 있잖아. 무슨 일이야? 누가 괴롭혀?”
“…….”
율리시즈는 자신이 도무지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이 멍하니 미아를 바라보았다.
그러다 어깨를 들썩이며 실소를 흘렸다.
“그냥…… 진로 선택을 잘못한 게, 이제 와서 후회가 되네요…….”
“전직해!”
“…….”
이게 아닌가? 미아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황제궁에 소리소문없이 잠입하는 능력이면 뭘 해도 될 것 같은데.’
미아도 되도록 율리시즈가 사람 죽이는 일은 그만하길 바랐다.
물론 그는 악한들만 죽이고, 그런 놈들이야 죽어 마땅하지만, 사람을 죽여야 하는 율리시즈의 정신이 걱정되었던 것이다.
그때, 율리시즈가 말간 눈으로 미아를 바라보았다.
“미아 님은…… 절 믿으세요?”
그 순간 미아가 멈칫했다.
이상한 질문이었다.
‘아딜이나 요아힘은 시즈가 의심스럽다는 듯이 말했지만…….’
자신이 본 율리시즈는 나쁜 사람이 아니었다.
애초에 그가 자신에게 접근한 것도 빈민들의 처우를 개선하기 위해서였고 말이다.
미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응. 믿어.”
“…….”
율리시즈는 묘한 시선으로 미아를 살폈다.
그리고 그녀의 얼굴에서 거짓말을 하는 기색을 찾지 못하자,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아. 제가 진 것 같아요…….”
“응? 이거 게임이었어?”
“네……. 아마 계속 제가 질 것 같네요…….”
율리시즈가 그렇게 말하고는 창문으로 다가갔다.
“에트루리나 일은, 더는 신경 쓰지 마세요……. 계약은 끝났어요.”
“뭐? 시즈!”
미아가 뭔가를 더 말하기도 전에 율리시즈는 바람과 함께 창문 밖으로 휙 뛰어내렸다.
“시……!”
미아가 율리시즈를 찾기 위해 창문 밖으로 몸을 내밀었을 때였다.
“미아!”
세레니티가 급하게 방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큰일났어요!”
“큰일?”
“폐하가……!”
세레니티의 입에서 아딜로트와 관련된 이야기가 나오자마자 미아의 표정이 달라졌다.
“왜? 아딜이 왜!”
설마 크라우스 공작이 수작을?
그러나 세레니티는 흐린 눈으로 더듬거리며 말했다.
“폐하께서…… 결혼하신대요.”
* * *
황궁 레벤토르가 들썩였다.
“황제 폐하가 결혼한다고?”
“할 것 같다던데?”
“누구랑?”
“크라우스 공작가의 영애래!”
“거기에 폐하 또래의 아가씨가 있었나?”
“원래는 분가라던데, 폐하랑 혼인하게 되면 본가로 불러들인다더라?”
입 무거운 궁인들조차 떠들썩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오르퀘니나의 절대권력자인 아딜로트. 거기다가 명문가인 크라우스 공작가의 결합이라니.
역사상 두 번 연속으로 한 가문이 황가의 외척이 된 적은 없었다.
이는 크라우스 공작가의 위세를 더 널리 떨칠 수 있는 일이기도 했지만, 가장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무려 크라우스 공작이 직접 요청했다던데?”
“크라우스 공작이 지고 들어갔다는 거지?”
“그래!”
빨랫감을 들고 떠들던 궁인들은 시시덕거리며 웃었다.
“그럼 진짜로 더는 황궁에 피바람이 불 일은 사라지는 거네?”
“그러게 말이야. 좀 살기 좋아지려나~!”
* * *
그 시각 아딜로트의 집무실.
아딜로트는 궁내관인 슐츠 공작, 재상인 요아힘과 함께 낯선 방문객을 바라보는 중이었다.
“차향이 좋군요.”
가는 눈매와 은테 안경. 이마 부근만 희끗희끗한 검은 머리.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오르퀘니나 최고의 가문, 크라우스 공작가의 가주 플로리안 크라우스였다.
“슐츠 공께서 이리 차를 잘 타시는 줄 알았으면…… 종종 한담이라도 나눠 볼 것을 그랬습니다.”
“예? 하하……. 감사합니다.”
슐츠 공작은 저 크라우스 공작이 이렇게 친근한 말을 하는 것을 처음 보곤 당황한 상태였다.
요아힘은 상황을 뒤에서 관찰하고 싶은지 아무 말도 없이 나서지 않고 있었다.
“차향은 나중에 논하고, 다시 한번 말하도록.”
그리하여 아딜로트가 팔짱을 낀 채, 심드렁한 얼굴로 말했다.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습니다, 폐하.”
크라우스 공작은 뱀처럼 쉭쉭거리는 목소리로 대답하며 자신의 옆자리에 앉은 영애를 눈짓했다.
“저희 가문의…… 릴리벳 크라우스. 폐하의 짝이 되기에 부족함이 없는 아이입니다. 폐하께서 이 아이와…… 혼인해 주시기를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