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2화
호흐실트 후작의 죽음은 크게 다뤄지지 않았다.
공식적으로는 적국과 내통한 것을 부끄러이 여겨 자진한 것으로 발표되었다.
자연스럽게 호흐실트 후작가의 모든 재산과 세빌 상회의 재산은 황실에 귀속되었다. 재무부에서는 갑자기 들어온 대량의 현금에 즐거운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며칠 뒤, 국무 회의가 열렸다.
주제는 그라스 후작의 처우였다.
호흐실트 후작과 달리 그는 철광석을 빼돌리고 지원금을 횡령하긴 했지만 간첩질을 하지는 않았기 때문이었다.
“…….”
덕분에 정무실의 분위기는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가장 상석에서는 아딜로트가 팔짱을 낀 채 심드렁한 얼굴로 앉아 있었다.
그리고 그 양옆으로 오르퀘니나의 공작과 후작들이 앉아 서로를 마주 보고 있었다.
가장 먼저 말을 꺼낸 것은 태후파인 주카리니 후작이었다.
“이해할 수가 없군요. 호흐실트 후작이야 라지푸트와 내통했으니 당연하다지만, 그라스 후작은 그리 크게 잘못하진 않았다고 봅니다만.”
그에 동조하듯 카르디날레 공작이 비죽 웃었다.
“내 말이 그 말이오, 후작. 게다가 결국 전로는 다 회수했다 하지 않았소?”
“맞습니다. 게다가 세빌 상회까지 황실에 귀속되었으니…….”
세빌 상회는 국내 최대의 상회였다. 당연히 황제는 금권까지 틀어쥐게 되었다. 태후파 귀족들로서는 그라스 후작의 몰락만큼은 막아야 했다.
“횡령한 금액의 세 배를 지원금으로 내놓겠다고 했으니, 그 정도면 충분하다고 보오!”
“충분하지 않습니다.”
페르디안 키토 후작이 그의 말을 잘랐다.
“감히 황제 폐하께서 백성들을 위해 행한 사업을 중간에서 제 잇속 차리는 용도로 쓰는 것은 결코 용납될 일이 아닙니다. 그를 경질시키고 작위를 박탈하는 것이 옳습니다. 물론 내무부에서도 물러나야 합니다.”
“이보시오, 키토 후작! 그의 가문이 오르퀘니나에 세운 공이 있거늘……!”
“공으로만 따지자면 현재로써는 폐하의 애완동물보다 더 혁혁한 공을 세운 자가 없을 것입니다.”
페르디안이 냉정하게 답한 순간, 잠깐이지만 아무도 대답하지 못했다. 그게 사실이었으니까.
“크흠. 흠…….”
애초에 혼자 이미 결정을 내린 듯한 슐츠 공작은 토론에 참여할 생각이 없어 보였고, 그건 지로티 공작도 마찬가지였다.
의외인 점은 크라우스 공작이 침묵하고 있다는 것이었으나, 그는 원래부터 말수가 적은 편이었다.
그때, 내내 조용히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만 있던 아딜로트가 말했다.
“과반수가 되기엔 모자라군.”
그러고는 천천히 주변을 살펴보았다.
최고 회의의 결정은 과반수로 정해진다. 그러나 지금 황제파와 태후파의 세력은 3:3으로 동일했다.
남은 건, 중립파인 레스피기 후작과 릴레 후작뿐.
자리에 있는 모든 이들의 시선이 자연히 두 후작에게로 향했다.
“아직 발언하지 않은 이의 의견도 들어 보고 싶은데.”
“좋은 생각이십니다, 폐하. 두 후작의 말도 들어 보는 것이 좋겠군요.”
아딜로트의 말에 카르디날레 후작이 이죽대며 말했다.
그 둘이 중립만 선언하더라도 그라스 후작의 처벌은 온건하게 진행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레스피기 후작은 기다렸다는 듯이 손을 들었다.
“……저는 투표를 포기하겠습니다. 그라스 후작이 횡령을 저지른 것은 많으나, 그게 그의 작위까지 박탈할 일인지는 모르겠습니다.”
그의 말에 카르디날레 공작이 기분 나쁜 미소를 지었다.
남은 건 릴레 후작뿐.
키토 후작은 미미하게 미간을 좁혔다. 릴레 후작은 이런 상황에서 단 한 번도 황제의 편을 들어준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저는…….”
그러나 다음 순간, 릴레 후작은 평소와 같은 차가운 태도로 말했다.
“폐하의 의견을 지지하겠습니다.”
“……!”
“뭣……!”
카르디날레 공작이 놀라 눈을 부릅떴고, 그건 주카리니 후작도 마찬가지였다.
지로티 공작은 놀란 듯 보였으나 씩 웃을 뿐이었고, 키토 후작은 도리어 더 미간을 좁혔다.
그리고 플로리안 크라우스 공작의 눈빛은 지금까지와는 달리 날 선 검처럼 예리해졌다.
“그라스 후작의 횡령이 쉽게 넘길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동안 그의 횡령으로 고통받았을 빈민들을 생각하면 그는 좀 더 강한 벌을 받아야 합니다.”
“……릴레 후작. 정말 그렇게 생각해서 하는 말이오?”
“그렇습니다만.”
“허……. 허!”
카르디날레 공작은 믿기지 않는다는 눈치였다. 평소 릴레 후작의 성격을 생각하면 그럴 만도 했다.
그는 늘 중립을 지키고자 애쓰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3:3으로 정확하게 평형을 이룬 국무 회의에서 어느 한쪽의 편을 들다니.
오로지 아딜로트만이 나른하게 눈을 빛내며 만족스럽게 말했다.
“재밌는 상황을 만들어 주어서 고맙군.”
릴레 후작은 쌀쌀맞은 표정을 지을 뿐 대답하지 않았다.
아딜로트가 피식 웃었다.
“결과에 따라 금일부로 그라스 후작의 작위는 자작으로 강등된다. 또한 그의 재산의 반을 몰수할 것이며, 그중의 반은 에트루리나 지역의 발전을 위해 쓰도록 하지.”
* * *
에트루리나에서 돌아온 뒤.
미아는 세레니티를 찾아 황립 의료원으로 향했다.
세레니티는 의료원 구석의 테이블에 앉아 황태후의 주치의인 렌나에게 뭔가를 물어보는 중이었다.
“렌! 잘 지냈어? 렌나 씨도 안녕하세요!”
미아를 발견한 세레니티와 렌나가 화색을 띠었다.
“미아! 잘 다녀왔나요?”
“안녕하세요, 아가씨! 에트루리나 지역에 다녀오셨다죠?”
“네!”
방글 웃으며 대답한 미아가 온갖 책이 널브러져 있는 테이블을 둘러보았다.
“그런데 지금 뭐하는 거예요?”
“아.”
세레니티가 홍조를 띠었다. 그녀는 우물쭈물하다 작게 말했다.
“제가 공부를 배우고 있었어요…….”
또?
‘공부하는 건 좋지만 너무 공부만 하는 건 아닐까.’
미아가 애매한 미소를 짓자, 그 의미를 알아들은 세레니티가 급하게 덧붙였다.
“의학을 공부하고 싶어서요. 저, 의원을 꿈꿀까 해요…….”
그 말에 미아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러고 보니 세레니티는 늘 의료원에서 봉사를 했으니, 오히려 의원의 꿈을 지금 가진 게 더 이상할 지경이었다.
“너무 잘 어울려! 렌은 진짜 좋은 의원이 될 수 있을 거야!”
미아가 활짝 웃으며 말했고, 세레니티는 안심한 듯이 수줍게 고개를 끄덕였다.
“고마워요.”
“그래서 렌나 씨가 알려 주는 거예요?”
미아가 렌나를 돌아보자 렌나가 배시시 웃었다.
“네. 오리존 아카데미에서 쓰던 교재가 아직 있거든요……. 원래는 엠브라 선배님이 많이 봐주시는데, 오늘은 제 차례예요!”
아무래도 렌나는 가르치는 게 즐거운 듯했다. 하기야 세레니티는 꾀도 부릴 줄 모르는 성실하고 똑똑한 학생이니까.
“그런데 렌, 갑자기 왜 그런 결심을 하게 된 거야?”
“그건…….”
세레니티가 멈칫했다. 그러고는 한 떨기 백합, 장미, 작약, 모란, 아무튼 세상의 모든 꽃보다 고운 미소를 지으며 발그레하게 뺨을 붉혔다. 마치 사랑에 빠진 듯한 얼굴이었다.
“비밀이에요…….”
옆에서 렌나가 흐뭇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멍하니 그 미소를 바라보던 미아는 흠칫했다.
‘설마 의료원에 좋아하는 사람이라도 생긴 걸까!?’
그러지 않고서야 설명되지 않는 애틋한 미소였다.
‘잘됐다, 렌…….’
괜히 흐뭇해진 미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였다.
“어라?”
깔끔하게 넘긴 은발에 푸른 눈. 검은 망토를 길게 늘어뜨린 중년이 의료원 안으로 들어섰다.
“리, 릴레 후작 각하?”
“폐하의 애완동물이 여기 있다고 들었는데.”
고드릭 릴레 후작이 북풍처럼 쌀쌀맞은 태도로 말했다.
그를 접대하는 의원이 온몸을 바르르 떠는 것을 본 미아가 재빨리 앞으로 나섰다.
“안녕하세요, 릴레 후작 각하!”
그리고 그 순간, 푸른 눈이 미아에게 향했다.
“찾아다녔습니다.”
그 말에 미아가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무슨 일 있으세요?”
“…….”
릴레 후작은 조금 기가 막힌다는 듯이 침묵했다가, 아주 미미하게 실소를 흘렸다.
“일이 아니라 할 말이 있어서 왔습니다.”
그가 주변의 사람들을 흘끗였다.
“자리를 옮기는 것이 어떻습니까?”
“좋아요!”
후작이 고개를 끄덕이곤 사람이 드문 열주랑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미아 역시 종종걸음으로 그 뒤를 따랐다.
“약속은 지켰습니다.”
의료원을 빠져나오자마자 고드릭 릴레 후작은 차가운 목소리로 바로 본론을 꺼냈다.
‘딱 한 번, 제 의지와 관계없이 폐하를 지지하겠습니다.’
언젠가 했던 약속을 떠올린 미아가 생긋 웃었다. 오늘일 거라고는 이미 예상했다.
“감사합니다!”
“…….”
그녀의 인사에 릴레 후작의 걸음걸이가 멈췄다. 그는 의구심이 가득한 푸른 눈으로 미아를 내려다보았다.
“알고 있었습니까?”
“네?”
“이번 발언으로 저는 정계에서 황제파로 돌아선 것처럼 보일 것입니다. 당연히 견제가 시작될 테고, 그걸 버텨 내기 위해서라도 결국엔 황제 폐하를 지지하게 되겠지요.”
“으음. 그렇겠죠?”
“……알고 있었군요.”
미아가 해실해실 웃었다. 뭐가 문제냐는 듯이.
“그렇지만 분명 이득이 더 많을 거예요. 일찍 탑승하신 걸 기뻐하게 되실걸요!”
“저는 그런 것은 바라지 않습니다. 제가 원하는 건 가문의 안정뿐입니다.”
“누가 그러더라고요. 약자의 생은 늘 소란스럽다고. 고요란 힘 없이는 성립하지 않는대요.”
“트레베레움의 전설경의 말이군요. 하지만 제게 그 힘이 모자라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 순간 미아의 눈이 반짝였다.
“그럼 저랑 부탁 들어주기 내기 한 번 더 하실래요?”
“…….”
고드릭 릴레 후작은 저도 모르게 숨을 들이켰다. 그녀의 분홍색 눈에 희미하게 ‘너 잘 걸렸다’하는 생각이 엿보였다.
“사양합니다.”
“앗. 아쉬워라.”
미아가 정말로 아쉽다는 듯이 울상을 지었다.
‘진심으로 이길 생각이었군.’
고드릭 릴레 후작이 생각했다.
“용건은 끝났으니 가 보겠습니다만…… 앞으로는 조심해야 할 것입니다.”
그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지로티 전로 때문에 많은 이들이 당신을 주시하고 있습니다.”
“알고 있어요.”
뭔가 더 말하려던 릴레 후작은 멈칫하고는 고개를 들어 미아의 등 뒤를 보았다. 먼 곳에서 예상치 못한 인물 한 명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중 한 명이 지금 제 눈앞에 보이는군요.”
“네?”
“플로리안 크라우스 공작입니다.”
미아도 그것은 예상치 못한 모양이었다.
그녀가 잽싸게 몸을 돌렸다.
그곳에는 플로리안 크라우스, 오르퀘니아에서 가장 큰 힘을 가진 공작이 무심하고 예리한 눈으로 미아를 바라보며 걸어오고 있었다.
그는 성마른 체구에 어울리는 좁은 보폭으로 천천히 걸어와, 미아 앞에 섰다.
“이미 알고 있겠지만, 플로리안 크라우스라네.”
플로리안 크라우스가 오만하고 건조한 목소리로 말했다.
“시간을 내주면 좋겠군. 당연하지만, 요청이 아닌 명령이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