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화
요아힘이 감탄의 의미로 한숨을 흘렸다.
‘갖고 놀고 있는 건 폐하뿐만이 아닌 듯하군.’
가공할 만한 침투력이었다.
한참을 어떻게든 체면을 세워 가며 미아를 달래려는 것 같던 아딜로트는, 이내 모든 걸 포기했는지 한숨을 쉬었다.
“……그냥 심술 좀 부려 본 거니까, 나랑 가.”
그리고 그 말에 미아는 고민 하나 없이 까르륵 웃었다.
“그래!”
하얗고 천진한 얼굴에 단숨에 활기가 차올랐다.
“그럼 우리 옷도 맞추나? 무도회는 원래 드레스 코드도 맞추고 그러지 않나? 근데 나 제대로 된 무도회는 처음이야! 에스코트 받고 그러나? 맛있는 거 많이 주나!?”
그녀가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하는 말에 아딜로트와 요아힘이 저도 모르게 실소를 흘렸다. 페르디안 역시도 멍하니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셋 중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요아힘은 한참을 마시지도 않고 들고만 있던 찻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미아 님.”
“넹!”
“저랑은 척지지 않기로 하죠.”
“……그래요!”
이유도 묻지 않고 냉큼 답하는 모습에 요아힘이 한 번 더 실소를 흘렸다.
“그러면 두 분이 함께 무도회에 가시겠군요. 복장을 맞춰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 말에 이제야 생각났다는 듯이 아딜로트가 말했다.
“안 그래도 제인이 그러더라고. 얘 옷이 좀 필요하겠다고.”
“슐츠 공작 부인께 부탁드릴까요? 저번에도 그리하셨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그럼 그렇게―.”
요아힘의 제안에 바로 고개를 끄덕이려던 아딜로트가 멈칫했다. 문득, 미아가 예전에 했던 말이 머릿속에 스쳐 지나갔다.
‘말마따나 여기는 다 저를 황제 아니면 아무것도 아닌 애로 알고 있는데 부끄러워서 어떻게 돌아다녀요! 저도 자존심이 있지!’
눈을 내리깐 채 잠시 생각에 잠겼던 아딜로트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사람을 고용하지. 어차피 언젠간 전속을 둬야 할 테니까.”
그 말에 요아힘과 페르디안의 눈이 살짝 커졌다.
당연하지만, 황실에서 전속 양장사를 두는 건 황족뿐이다. 그러니 미아에게 전속을 둔다는 건, 언제고 그녀를 황후로 올릴 예정이라는 뜻을 비친 것과도 같았다.
‘포기할 생각이 없으신 거군.’
요아힘이 자연히 미아를 바라보았다. 당사자 앞에서 이렇게 대놓고 선전포고할 정도니, 황후는 별로라던 미아의 반응이 궁금했던 것이다.
하지만 당황하고 있으리란 예상과 달리, 미아는 천진하게 눈을 반짝반짝 빛내고 있었다.
“전속! 아이돌 같네? 나 아이돌이네!?”
……무슨 말인진 모르겠지만, 황제의 뜻을 못 알아챘다는 것만은 확실했다. 요아힘이 아딜로트를 향해 안타까운 미소를 보였다.
“폐하. 힘내십시오. 라지푸트보다 어려운 상대인 듯합니다.”
“위로하지 마. 짜증 나니까.”
그 와중에 아딜로트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체념의 빛을 띠었다는 점이 가장 가관이었다.
* * *
수도에서 가장 유명한 양장점 거리인 스카발 거리.
그리고 그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실력을 자랑하는 양장점인 <512 프뤼게>.
그 주인인 레미냑 프뤼게는 아침부터 난데없이 찾아온 마차에 입을 다물 수 없었다. 마차에 황실의 상징인 붉은 사자가 그려져 있었기 때문이다.
“여기가 <512 프뤼게>가 맞는가?”
마차에서 내린 황궁의 관료가 물었다. 레미냑은 머리가 떨어질 지경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예, 예! 제, 제가 <512 프뤼게>의 점주입니다!”
“자네가 ‘레미냑 프뤼게’인가?”
“예!”
관료는 고개를 끄덕이곤 품에서 두루마리 하나를 꺼냈다.
“오르퀘니나의 유일한 주인, 아딜로트 겐첸 슈뢰더 황제 폐하께서 네게 교지를 내리셨으니 받들라.”
“허억…….”
레미냑은 숨을 멈춘 상태에서 교지를 받았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교지를 펼친 레미냑은 이번엔 혼절할 뻔했다.
“호, 혹시 이거…….”
관료가 레미냑의 의문을 알아채곤 답했다.
“폐하의 친필이니 영광스럽게 생각하도록.”
“……!”
레미냑의 숨이 한번 넘어갔다가 되돌아왔다.
정말 황제의 친필 교지였다! 무려 황제의!
레미냑은 왕방울처럼 커진 눈으로 그것을 읽어 내렸다. 황제의 교지답게 온갖 우아한 어휘가 가득했지만, 요약하자면 간단했다.
‘니가 옷 좀 만든다며? 있는 거 좀 털어와 봐. 괜찮은 거 같으면 내 여자 드레스 좀 만들고.’
생각보다 온건한 요청에 조금 안심할 뻔했던 레미냑은 마지막에 쓰인 글을 보았다.
‘기껏 불렀는데 별로면 재미없을 줄 알아.’
레미냑은 당장 준비물을 챙겨 마차에 올라탔다.
황궁 레벤토르로 향하는 마차 안에서 그는 정말로 꿈을 꾸는 것 기분이었다. 뛰어난 실력 덕에 공작이나 공작 부인도 많이 만나 보았지만, 황족을 만나는 것은 처음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보통 황족은 전속 양장사를 두곤 했다. 프뤼게 가문에서도 몇 명이나 황족의 전속으로 양장사를 보내곤 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아딜로트 겐첸 슈뢰더는 그런 것에 관심이 없는 모양이었다. 그는 따로 전속을 두지 않고 슐츠 공작의 도움을 받는 게 보통이었다.
솔직히 말해서 레미냑은 그편이 더 좋았다. 현재 오르퀘니나에서 가장 뛰어난 양장사는 자신이었다.
그러니 황제가 전속을 두면 분명 자신을 데려갈 터였다. 생각만 해도 오금이 저리는 일이었다. 잘못 만들면 죽일 게 뻔했으니까.
‘하지만 결국 피할 수 없었구나.’
오늘 자신의 목만 황궁을 나올 수 있다고 생각하니 눈앞이 깜깜해졌다. 그렇게 레미냑은 어떻게 이동했는지도 모르게 황궁 레벤토르의 접견실에 다다랐다.
그는 궁의 하인에게 몇 가지 주의사항을 당부받은 뒤, 서서히 열리는 문을 넘어 접견실에 들어섰다.
“지, 지, 지, 지고하신 오르퀘니나의…….”
“고개 들어.”
황제는 전장에서 많은 시간을 보낸 사람이라 명령 불복종을 매우 싫어한다고 들었다. 레미냑이 바로 고개를 치켜들었다.
“허…….”
그리고 헤벌레 입을 벌렸다.
종종 공식 석상에서 본 적이 있지만, 다시 봐도 그는 아름다웠다. 검을 쓰기 때문인지 체격도 훌륭했고, 무심한 표정에 살짝 올라간 눈초리는 사람을 호릴 만큼 농염했다.
그리고 그 옆에.
“안녕!”
솜사탕이 앉아 있었다.
레미냑은 다른 의미에서 입을 또 헤벌레 벌렸다.
머리카락에서 눈동자, 입술에 이르기까지 색채가 있는 곳은 모두 분홍색이었고, 피부는 희었다. 남들보다 명도도 채도도 한참 밝았다.
그 와중에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함박웃음을 짓고 있기에, 레미냑은 저도 모르게 따라 웃고 말았다.
“…….”
그러다 황제의 찌르는 듯한 시선을 받고 잽싸게 표정을 굳혔지만 말이다.
아딜로트는 그런 레미냑을 마뜩잖다는 듯이 바라보며 말했다.
“드레스가 필요해. 얘한테 제일 잘 어울릴 만한 것으로. 내 것도 같이.”
“그렇대! 나 무도회 가라고 옷 사 준대! 완전 할리우드다!”
미아가 꺄르륵 웃었다.
‘이분이 소문의 미아 셀레스티얼이구나.’
레미냑은 아딜로트 옆에서 해맑게 웃고 있는 미아에게로 시선을 주었다.
미아 셀레스티얼은 평민들 사이에서 최근 가장 많이 이름이 오르내리는 사람이었다.
황제는 미아 셀레스티얼의 등장 이후로 갑자기 공식적인 처형을 극도로 줄였다.
그렇지만, 반대로 미아 셀레스티얼에게 대들었던 귀족들이 남몰래 사라졌다는 이야기가 즐비했다.
‘그 여자한테 착하게 보이고 싶은 모양이던데?’
자기 형을 죽이고 황위에 올랐다던 그 아딜로트가 말이다.
게다가 사실 셀레스티얼 백작가는 반역을 저지르지 않았고, 황제가 미아 셀레스티얼을 손에 넣기 위해 반역죄를 뒤집어씌웠다는 말도 돌았다.
너무 어처구니없는 말이었지만 그래서 묘하게 더 그럴듯했다.
앙겔루스 구빈원에서 황제가 미아에게 비공식적으로 프러포즈했다는 이야기는 소문에 더 불을 지펴 주었다.
이쯤 되니 뭐가 있어도 있긴 한 모양이라고 사람들은 생각했다. 레미냑 역시 동의했으나, 그다지 믿지는 않았다.
‘무슨 몰락한 백작가 영애를 상대로 그렇게까지 하겠어?’
하지만 소문의 미아 셀레스티얼을 눈앞에 둔 지금, 레미냑은 어쩐지 황제의 마음이 이해가 갈 것 같았다.
“밥은 먹고 왔어? 너무 급하게 불렀나!? 나 공식 무도회는 처음이라 엄청 떨리는데! 예쁘게 만들어 줄 거지?”
식사했느냐는 왜 묻는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미아 셀레스티얼은 보기만 해도 괜히 흥이 나는 사람이었다.
무엇보다, 그녀를 보자마자 느껴졌다.
‘황제를 정말 좋아하는구나.’
양장사는 귀족을 상대로 하는 업종이기에 눈치가 빨라야 했다.
그래서 레미냑은 바로 알 수 있었다.
아딜로트를 바라보는 미아 셀레스티얼의 모든 눈빛에서 다정한 애정과 신뢰가 묻어 나왔다. 보는 사람이 괜히 쑥스러워질 정도로.
그리고 그건 황제도 마찬가지였다.
‘아니, 오히려 이쪽이 더한 것 같기도……?’
미아 셀레스티얼이 무의식적으로 얼굴에 손부채질을 하자, 그것을 보고 즉각 얼음이 든 차를 내오게 한 것만 봐도 그랬다.
보지 않는 척 하지만, 황제의 모든 신경이 미아에게 쏠려 있는 게 느껴졌다.
‘단순히 좋아하는 수준이 아닌데?’
미아 셀레스티얼이 황제를 보는 눈이 다정이라면, 황제가 미아를 보는 눈은 독점욕에 가까웠다.
두근.
저도 모르게 레미냑의 심장이 뛰었다. 원래 세상에서 남의 썸이 제일 재밌고 남의 이별이 제일 재미 없……, 아니지, 남의 이별은 재밌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