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화
미아가 방으로 돌아오자, 율리시즈가 자연스럽게 창문으로 들어왔다.
“너 자꾸 창문을 문처럼 쓸래?”
“미, 미리 들어와 있을 순 없잖아요……?”
“응? 그러면 되지.”
“…….”
“그러고 보니 시즈는 평소에 어디서 자? 잘 곳 필요하면 내 침대에서 자!”
“……네에, 네에. 전혀 의식하고 있지 않다는 건 잘 알겠네요…….”
율리시즈가 볼멘소리로 뭔가를 중얼거리더니 흥 하고 고개를 쳐들었다.
“미, 미아 님은, 정말 초대장이 올 거라고 생각하세요……?”
“시즈, 별걸 다 걱정하는구나? 초대장은 당연히 오지!”
미아의 자신만만한 대답에 율리시즈가 고개를 기울였다.
“당연히……요? 하지만, 미아 님은 그 사람들에게 적인데요……?”
“적이니까 더 살펴야지. 게다가 난 지금 황제의 애완동물인걸!”
“그게 무슨 연관이…….”
“잘 생각해 봐. 남들 눈에 나는 그냥 평범한 백작 영애야. 그런데, 내 조언으로 어느 가문이 부흥했대!”
율리시즈가 눈을 깜빡였다. 미아가 최근 그런 소문을 일부러 내고 있다는 건 그 역시 잘 알고 있었다.
소문은 꽤 널리 퍼졌다. 바이지겔 백작에게서 나온 정보이니만큼 의심하는 사람도 없었다.
길드에도 ‘미아 셀레스티얼이 정확히 무슨 조언을, 어떻게 했느냐’, ‘미아 셀레스티얼이 조언한 게 맞느냐’고 묻는 사람이 생겼다.
“그럼 누구나 생각하지 않겠어? ‘무슨 머리로 쟤가 그런 조언을 해 줬지?’”
그 말을 들은 율리시즈의 팔에 약한 소름이 돋았다. 미아의 짐작은 정확했다.
“사람들은 생각하겠지. 얘가 황제 옆에서 뭔가를 주워들었구나! 그리고 그걸 남한테 흘릴 만큼 멍청하구나!”
“아…….”
“그러니까 반드시 보내. 필요한 건 계기뿐이야.”
이튿날, 여러 통의 편지가 도착했다. 전부 황태후 파 귀족들의 살롱 초대장이었다.
* * *
“카르디날레 살롱에 간다죠? 저도 갈래요, 미아.”
미아가 살롱에 참석한다는 소식을 듣고 세레니티가 바로 찾아왔다. 제인의 도움으로 드레스를 입고 있던 미아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렌이? 재미없을 텐데! 사람들이 시비도 엄청 걸걸?”
“사람들이 미아에게 시비를 걸겠죠. 그런 곳에 미아를 혼자 보낼 수는 없어요.”
‘난 타격을 안 입어서 괜찮은데…….’
그렇게 말하기엔 세레니티의 표정이 너무 결연했다. 허리에 리본을 두르기 위해 미아가 자리에서 빙글 돌았다.
“왜 갑자기 그런 생각을 했어?”
“……복도에서 바이지겔 백작님을 마주쳤어요.”
대답하는 세레니티의 안색이 어두웠다.
“바이지겔 백작님께서 말씀하시더군요. 의자가 없는 정도로는 끝나지 않을 텐데, 괜찮으냐고…….”
“그래서 할아버지 통해서 마법 물품도 잔뜩 구비해 놨는걸!”
미아가 지로티 공작에게 부탁해 얻어낸 마법 물품을 들어 올려 흔들었다. 그것들은 제인이 신묘한 손놀림으로 드레스 여기저기에 쑤셔 넣는 중이었다.
“다치진 않을 테니 안심이에요. 하지만, 누군가 미아의 마음을 속상하게 할지도 모르잖아요.”
“……누가?”
정말로 그럴 사람이 없기에, 미아가 되물었다. 그도 그럴 것이, 미아에게 다른 사람은 큰 의미가 없었다.
미아의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건 미아 자신의 생존.
그리고 세레니티와 아딜로트.
애초에 두 주인공의 서사라고 생각해서인지, 미아는 다른 사람의 행동에 크게 자극받지 않았다. 소설 속 세계라는 점도 한몫했다. 어느 정도는 사람들이 전부 종이 인형으로 보이는 것이다.
“렌. 너무 걱정하지 마! 솔직히 내가 유도하고 있기도 한걸?”
“안 돼요! 전 미아가 무례한 취급을 받는 걸 절대 용납할 수 없어요!”
“난 정말 괜찮은데…….”
“뭔가 찾고 있는 정보가 있는 거죠? 그러면 사람이 둘인 게 더 낫지 않을까요?”
“아가씨. 준비가 끝났답니다.”
두 사람의 대화에 조심스럽게 끼어든 제인이 한 걸음 물러났다. 미아는 난처하게 머리를 긁었다.
오늘, 카르디날레 살롱에서 그녀는 꽤 전투적으로 행동할 생각이었다. 필요하다면 드잡이질도 해야 할 텐데, 그걸 세레니티에게 보이기가 망설여졌다.
하지만 세레니티는 미아가 뭘 걱정하는지 눈치챈 듯이 부드럽게 말했다.
“미아. 전 미아가 어떤 모습이어도 괜찮아요. 미아는 제게 소중한 사람이에요. 그러니까…… 도울 수 있게 해 주세요.”
“윽…….”
금빛 눈이 간절했다. 양손을 모으고 애원의 눈빛을 보내는 세레니티의 모습은, 거절하기엔 너무 예뻤다.
‘아무래도 난 얼굴에 좀 약한가 봐.’
결국, 미아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알았어. 대신 혹시라도 남이 나한테 하는 말 때문에 화내거나 하진 말고. 알겠지?
세레니티의 낯에 기쁨이 퍼졌다.
“자신은 없지만, 노력해 볼게요!”
기뻐하며 옷을 단장하러 돌아가는 세레니티의 뒷모습을 보며 미아가 생각했다.
‘뭐 별일이야 있겠어?’
* * *
소문의 애완동물이 카르디날레 살롱에 참석한다는 소식이 일파만파 퍼졌다. 파급력이 클 수밖에 없었다. 카르디날레는 크라우스 공작가와 함께 황태후를 지지하는 세력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 카르디날레 살롱이죠?”
“그러게 말이에요. 테레지아 양은 그 애완동물에게 한 방 먹었다고 들었는데.”
“한 방이 뭐예요. 마주칠 때마다 아무것도 못 하고 있다던데요?”
영애들은 주워들은 소문을 떠들며 킥킥 웃었다.
같은 태후파 귀족이어도 테레지아를 진심으로 따르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그러기엔 테레지아의 성향이 지나치게 폭력적이었다.
그녀는 자기 마음에 안 들면 뺨을 내려치거나, 심지어 주먹을 날리기도 했다.
그래서 테레지아에게 당한 적이 있는 영애들은 내심 그녀가 미아에게 당한 게 쌤통이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그러니만큼 영애들은 앞다투어 카르디날레 살롱에 참여하기 위해 애썼다. 그 애완동물과 테레지아가 또다시 맞붙는 광경을 놓칠 순 없었다.
“양께서도 이번에 카르디날레 살롱에 가시나요?”
“어머, 물론이죠. 절대 놓칠 수 없잖아요?”
“맞아요. 구경도 구경이지만, 어쩌면 바이지겔 살롱에서만 나돈다는 귀한 정보를 들을 수도 있고요.”
소문의 애완동물을 보고 싶어서.
혹은 그 테레지아가 당하는 모습이 궁금해서.
아니면 이번에야말로 복수할지 기대돼서.
각각의 이유로 카르디날레 살롱은 초유의 관심사가 되었다.
* * *
“미아 님, 세레니티 듀레인 님 드십니다.”
미아와 세레니티가 살롱이 열리는 유리 정원에 들어서자마자 공기가 팽팽하게 조여졌다. 부채 너머로 입술들이 소곤거리는 것이 들렸다.
“정말로 왔네요……. 무슨 생각이지?”
“듀레인 남작가는 중립이었던 걸로 아는데…….”
사람을 깔보듯, 은근한 거리감이 느껴지는 시선이 따라붙었다.
다들 미아가 부담감에 움찔하기라도 바라는 눈치였지만, 미아는 그들을 무시하고 태연히 걸음을 옮겼다.
‘보면 어쩔 건데.’
대놓고 시비를 걸 정도의 용기도 없는 찌끄래기들까지 신경 써 줄 이유가 없었다.
‘아. 그래도 렌은 좀 신경 쓰이려나?’
그렇게 생각한 미아가 옆을 흘낏 돌아보았다.
그러나 생각과 다르게 세레니티는 사람들에게 관심 한 톨 주지 않은 채 은은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녀는 미아가 돌아보자 생긋 웃어 주기까지 했다. 여기저기서 영애들이 감탄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네. 저 미모를 평생 갖고 살았는데 고작 시선에 주눅들 리 없지.’
세레니티에게서 시선을 돌린 미아는 찬찬히 주변 사람들의 얼굴을 살폈다.
‘이나자르크바흐 백작가, 바르크호른 백작가, 주카리니 후작가…….’
전부 황태후 파 귀족들이었다.
적진 한복판이라고도 할 수 있는 상황.
하지만 미아는 눈도 깜짝하지 않았다.
오히려 적이 많을수록 좋았다. 그들이 흘리는 아주 사소한 정보라도 미아에게는 도움이 될 테니까.
‘어차피 귀족들이라 체면 차릴 테니까 그 부분만 긁어 주면―, 어?’
그러나 다음 순간, 미아는 예상치 못한 사람을 발견했다.
‘쟤가 왜 여기에?’
미아의 시선 끝에는 은발의 아름다운 영애가 있었다.
등까지 떨어지는 매끄러운 은빛 생머리. 하늘색 눈. 눈처럼 흰 피부와 처연한 아름다움.
툭 치면 부러질 것 같은 연약한 이미지의 미인이었다.
그녀는 청초한 외모에 어울리지 않는 싸늘하고 표독스러운 눈으로 세레니티를 바라보고 있었다.
미아는 그녀가 누군지 알고 있었다.
―힐데가르르 릴레 후작 영애. 원작의 두 번째 악녀.
‘힐데가르트가 벌써―’
“왔군요?”
당황한 미아의 귓가에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미아는 흠칫하고서 소리가 들린 곳으로 시선을 옮겼다.
“진짜 올 줄은 몰랐는데……. 하!”
유리 정원의 가장 좋은 자리에서 테레지아 카르디날레가 미아를 향해 코웃음치고 있었다.
푸른색의 벨벳 슈즈를 신은 다리를 꼰 채, 그녀는 오만과 독기가 뒤엉킨 눈으로 미아를 바라보았다. 괜히 지켜보는 사람들의 오금이 저리는 살벌한 시선이었다.
‘정말 죽이기라도 할 기세네요.’
‘머릿속으로는 벌써 열두 번도 더 죽인 것 같은데요?’
사람들의 시선이 자연스레 미아와 테레지아에게 집중된 순간.
모두의 시선을 받게 된 미아가 뺨을 붉히며 말했다.
“앗. 고마워…….”
“…….”
그녀는 진짜로 칭찬을 받은 듯이 수줍어하고 있었다.
모두가 경악했다.
‘……약간 미친 것 같다는 소문이 사실이구나.’
괜히 그 황제에게 총애를 받고 있는 게 아닌 모양이었다.
적진 한복판에서도 태연한 미아를 보며 테레지아 역시 약간 당황한 눈치였다. 그러나 그녀는 재빨리 눈을 부라렸다.
“뭘 생각하고 온 건지는 몰라도, 맘대로는 안 될걸?”
“뭘 생각하긴! 친교를 다지러 왔지!”
“하! 친교는 사람하고 다지는 거야. 짐승이 아니라.”
그 말에 미아가 동그란 눈으로 주변을 살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