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화
“그, 그라스 후작이 누군가와 비밀리에 접선하고 있는 건 확실한데, 누군지는 알 수 없었어요…….”
“길드 율리시즈가 모를 정도라고?”
“제대로 알아보려면 제가 가야 하는데…….”
“아. 내 호위 때문에?”
율리시즈가 고개를 끄덕였다. 침대에 누워 책을 읽던 미아가 책을 덮었다.
“그 말은, 접선 장소는 이미 특정되어 있다는 거지?”
율리시즈가 멈칫했다. 수줍음 가득하던 얼굴에 애매한 미소가 떠올랐다.
“미아 님. 설마…… 직접 가시려는 건 아니죠……?”
미아는 천연덕스럽게 눈을 깜빡였다.
“무슨 소리야? 당연히 내가 가야지.”
“……제가 같이 가더라도 떨어져 있어야 할 테니, 위험할지도 모르는데요?”
“그래도 어쩔 수 없잖아. 그라스 후작이 빨리 고꾸라져 주면 아딜도 좋아할 테고.”
게다가 그런 비밀스러운 장소라면, 원작을 아는 자신만이 활용할 수 있는 정보를 찾을 수 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 말을 들은 율리시즈의 눈이 가늘어졌다.
“……황제를 위해서요?”
“응? 응!”
미아가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
율리시즈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그는 여러 감정이 뒤섞인 복잡한 눈으로 미아를 바라보았다.
“거기가 어떤 곳인지는, 알고 말씀하시는 거예요……?”
“어떤 곳인데?”
“남, 남들의 눈을 속이기 위해서인지, 겉으로는 아주 난잡한…… 사교 모임이라고요. 그런 곳이어도, 황제를 위해 가야겠다고요……?”
“응. 뭐 어때! 별일 없을 거야!”
“…….”
율리시즈는 말없이 미아를 응시했다. 그는 이내 날카로운 웃음과 함께 고개를 저었다.
“……알려드리지 않을 거예요.”
“응?”
미아가 잠시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저기, 내가 널 돕기 위해 이러고 있다는 건 알지? 물론 아딜을 위한 거기도 하지만.”
“……알아요. 아는데…….”
율리시즈의 갈색 눈이 처연하게 떨렸다. 그는 시선을 피하며 자리에서 한 걸음 물러났다.
“……역시 싫어요…….”
미아가 삐뚜름하게 입을 다물고서 팔짱을 꼈다.
‘같은 음지 업계라 자진 신고하기 어려운 건가?’
그런 거라면야. 미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직접 알아내는 수밖에!”
“네?”
“살롱을 뒤지다 보면, 거기에 대해 아는 사람이 한 명쯤은 있겠지!”
“하지만, 아는 사람도 없으시잖아요……? 로사 바이지겔의 살롱은, 계속 다니셨지만 별 소득이 없었고…….”
미아가 어깨를 으쓱했다.
“살롱이 거기만 있는 건 아니잖아?”
당연하지만 살롱의 수는 귀족의 수만큼 많다.
미아가 지금까지 참여한 것은 황제파 귀족의 구심점인 로사 바이지겔의 살롱.
절대 이야기가 새어 나갈 일도 없고, 정보의 질도 수준급이었다.
‘하지만 그래서 더 안 돼. 정보가 너무 걸러져서 들어와.’
최근 미아는 남에게 걸러져서 들어오는 정보의 질에 불만을 느끼고 있었다.
오히려 똑똑한 이들만 모인 살롱이라, 자기들 선에서 정보를 솎아내는 것이다.
보통이라면 그게 좋았겠지만, 미아는 보다 날것의 정보가 필요했다.
‘원작이랑 유기적으로 이어지는 정보를 판별할 수 있는 게 나뿐이니까.’
미아가 말했다.
“좋아, 시즈. 그럼 난 황태후 파 귀족의 살롱에 참석할 거야.”
“……그런 게 가능할까요?”
말도 안 된다는 듯한 율리시즈의 반응에 미아가 눈을 흘겼다.
“가능하게 만들어야지! 네가 안 알려 주니까 별수 없잖아.”
율리시즈는 한숨을 쉬었다. 그는 미아가 절대 ‘그곳’을 찾아내지 못하리라 생각했다. 아니, 애초에 황태후 파 귀족의 살롱에 초대받는 게 가능이나 할까?
“좋아요……. 정말 미아 님이, 스스로 그곳을 찾아내시면……, 그땐 말리지 않을게요.”
* * *
율리시즈와의 약속 이후.
미아는 끈질긴 사냥꾼처럼 목표물이 나타나기를 기다렸다.
‘슬슬 나타날 때가 됐는데…….’
그리고 마침내, 황궁 정원에서 그녀를 찾아냈다.
“카르디날레 양!”
여전히 물빛 머리를 롤빵처럼 말아놓은 테레지아 카르디날레가 눈을 부릅떴다.
“너, 너!”
보트 사건 이후로는 처음이었다. 미아는 테레지아 앞에 쪼르르 다가가 활짝 웃었다.
“아하! 아직 우리 반말하는 사이구나! 그래! 나야!”
“아, 아니. 그게 아니라…….”
“너무 보고 싶었어! 근신은 잘 끝났어? 카르디날레 공작가라 그 정도지, 아니었으면 사형인 거 알지? 정신은 좀 차렸어!?”
반가워하는 건지 놀리는 건지 알 수 없는 인사였다. 테레지아가 표독스럽게 눈을 치떴다.
“지금 시비 거는 거야?”
“부탁할 게 있는데, 들어줄 거지?”
“부탁? 나도 부탁 하나 하지. 내 눈앞에서 꺼져!”
“나 좀 살롱에 초대해 줘!”
“사람 말을 좀 들으라고!”
“살롱에 참여하고 싶어! 기왕이면 큰 살롱이 좋겠는데!”
“너 지금 우리가 그럴 사이라고 생각해!?”
“그럴 사이니까 초대해 달라는 거지! 왜냐면!”
미아가 가슴에 손을 얹고 당당히 외쳤다.
“나를 함정에 빠뜨릴 기회니까!”
“뭐…….”
테레지아가 허, 허, 허, 하고 헛웃음 쳤다.
“너, 지금 네가 뭐라고 지껄이고 있는 건지는 알기나 해?”
“지껄이다니! 테레지아야, 말버릇이 여전히 고약하구나!”
“뭐라고 말하고 있는 건지 알기나 하냐고!”
미아의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
“당연히 알지! 의자 없이 세워 두거나, 식은 차를 끼얹거나, 그런 거 해도 돼! 대신 반격할 거지만!”
그녀는 말하면서 점점 몸을 붙여, 이제 테레지아의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눈이 맛이 가 있어!’
테레지아가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테레지아 역시 미아의 최근 전적에 대해서는 들은 바가 있다.
황제의 정무실에 당당하게 들어가 어느 귀족의 머리를 찻물에 박아넣었다든가.
마음에 안 드는 귀족을 정원 한복판에서 무릎 꿇게 하고, 끝내 실종시켰다든가.
자기 마음에 안 드는 영애의 무릎 위에 앉아 의자 취급을 했다든가!
심지어 그녀에게 대들었다던 험버트 백작은 실종되기까지 했다. 말은 안 하지만, 모두 알고 있었다.
그게 다 황제의 명령으로 이루어진 일이라는 걸.
원래 아딜로트는 그런 식으로 물 밑에서 처리하는 타입이 아니었다. 대대적이고 공식적으로 쓸어버린다면 모를까.
하지만 미아와 관련된 일에선, 그는 정말로 가차없는 모습을 보여 주고 있었다.
‘이 계집애는 모르고 있는 모양이지만…….’
테레지아로서는 긴장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안 그래도 야유회 이후 카르디날레 공작에게 호되게 혼나기까지 했는데.
‘이 어리석은 것! 너 때문에 황제에게 한 수 내어 줘야 하지 않느냐!’
분하지만 테레지아는 그때 이후로 미아를 만나고 싶지 않았다. 복수하고 싶은 마음은 굴뚝 같았으나, 도무지 복수할 길이 없었던 것이다.
솔직히 말해서 이 여자가 눈도 깜빡이지 않고 함박웃음을 지으며 다가오는 모습에 두려움마저 느꼈다.
게다가 분하게도, 두뇌 싸움에서도 테레지아는 미아를 이길 수 없다는 걸 느끼고 말았다.
‘……도망치자!’
하지만 미아가 더 빨랐다. 미아의 팔이 뱀처럼 테레지아의 팔을 휘감았다.
“응? 초대해 줘!”
“히, 히익! 싫어!”
“왜? 왜! 너희도 나 궁금하잖아!”
“네가 무슨 짓을 할 줄 알고!”
“너희가 아무 짓 안 하면 나도 아무 짓 안 해!”
“너 같은 또라이를 어떻게 믿어!”
“헉! 칭찬 받았어!”
“칭찬 아니야!”
정말 사람 화병 나게 하는 말투였다. 미아는 까르륵 웃으며 테레지아를 껴안았다.
“아이, 부탁해! 바이지겔 백작님의 살롱에 가다 보니까, 너무 재밌는 거 있지!”
“좀……! 익……! 너흰 뭐해!? 빨리 좀 떼어 내!”
테레지아가 시녀들을 향해 외쳤지만, 시녀들은 어쩔 줄 몰라 하면서 다가오지 않았다.
그들도 귀가 있기에 황제의 애완동물을 잘못 건드리면 천당까지 지름길로 가게 된다는 소식을 들었던 것이다.
결국 테레지아가 비명을 질렀다.
“알았으니까 놓으라고!”
대답하기 무섭게 미아는 테레지아를 놓아주었다. 방글방글 웃는 모습에 테레지아의 울화통이 터지려 했다.
‘아니, 차라리 잘됐어! 모두가 있는 곳에서 미아 셀레스티얼을 구경거리로 만들면 되지!’
테레지아는 뒤늦게 머리카락을 정돈하고, 오만하게 이를 갈았다.
“넌 대신 나한테 빚진 거야!”
하지만 미아는 안타깝다는 듯이 주먹으로 입을 가렸다.
“빚이라니, 테레지아야……. 내가 폐하한테 네 목을 따 달라고 했으면 넌 여기 서 있지도 못했어……. 그러고도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구나……?”
“이, 이이!”
테레지아의 손이 휙 올라갔다. 그러나 미아는 이미 그것을 예측하고 몸을 슬쩍 움직여 피했다.
‘오른쪽, 왼쪽, 오른쪽, 왼쪽.’
미아가 모든 공격을 피하자 테레지아가 기어코 비명을 질렀다.
“또 왜 안 맞는 거야!!!”
“네가 너무 느려서!”
미아가 불쑥 테레지아에게 다가갔다.
“이제 내가 때려도 돼?”
그리고 동시에 테레지아의 몸이 굳었다. 테레지아는 자신이 몸을 잘 쓰는 편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힘도 세고 튼튼해서, 드잡이질을 하면 항상 상대가 먼저 엉엉 울곤 했다.
그게 아니더라도 카르디날레 공작 영애인 자신이 때리면 누구든 잠자코 맞아야 했다. 아니. 최소한 겁이라도 먹어야 했다.
하지만 미아는 달랐다. 뺨을 치려고 했으나 기가 막히게 피했다. 그것도 웃으면서.
깜빡이지도, 겁먹지도 않은 눈을 보면 알 수 있었다. 미아에게는 기운이 느껴졌다.
너 죽고 나 죽자의 기운.
소위 또라이의 기운이.
“……초대만 해 주면 되는 거지!”
테레지아가 저도 모르게 시선을 피했다.
“해 줄 테니까, 폐하께 나에 대해 입만 뻥긋했다간 봐요! 그리고 더는 내 앞에 나타나지 마!”
“응! 초대만 해 주면 돼! 그리고 어차피 폐하는 너 모르는 거 같던데!”
테레지아가 마지막까지 미아를 노려보았지만, 미아는 방글방글 웃을 뿐이었다. 결국 테레지아는 팩 몸을 돌렸다. 미아가 뒤에서 해맑게 손을 흔들었다.
“초대장 기다릴게! 조심해서 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