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폭군의 애완동물이 되었다-39화 (39/193)

39화

미아 본인이야 아딜로트가 나쁜 사람이 아닌 걸 알고 있다지만 남들은 아니다.

“그래?”

그사이 아딜로트는 심드렁한 얼굴로 허리춤의 단검을 잡았다. 그걸 본 미아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넌 또 왜 안 봐주는데! 여주잖아! 개겨도 좀 봐줘야 하잖아!’

미아가 급하게 팔을 뻗어 덥석 세레니티의 손을 잡았다.

“레, 렌! 나 괜찮아요! 그냥 아딜이랑 대화만 잠깐 할게요!”

세레니티의 눈이 동그래졌다.

“렌……이요?”

미아가 뒤늦게 아차 했다.

렌. 세레니티가 아직 가족과 화목했을 때 듣던 호칭.

듀레인 남작가에 계모가 들어온 이후로는 누구도 세레니티를 그렇게 불러 주지 않았다.

‘독자로서 너무 오래 우리 렌 행복해! 우리 렌 하고 싶은 거 다 해!ㅠㅠ를 부르짖어서 나도 모르게 그만.’

게다가 원래는 아딜로트가 가장 먼저 불렀어야 하는 호칭이었다. 졸지에 남자주인공의 호감도 포인트를 낚아채게 된 미아가 급하게 둘러댔다.

“레, 렌 좋지 않나!? 렌도 나를 미아라고 불러 줘요! 우린 친구잖아요!”

말 몇 마디 나눠 본 게 전부인데 친구라고 주장하는 자신이 얼마나 웃기게 보일까?

하지만 착한 여자주인공 세레니티는 그 말에도 감격한 듯이 상냥하게 웃어 주었다.

“친구요……?”

“응! 우리는 모두 친구!”

세레니티가 뺨을 붉혔다.

“친구…….”

미아는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아니야! 이거 아무리 봐도 영화에서 주인공한테 소중한 존재로 각인되는 장면이잖아! 이건 내가 받아야 될 게 아니라고!’

좌절한 미아를 두고 아딜로트는 차갑게 말했다.

“좋아. 그럼 반대로 하지.”

그가 코웃음과 함께 탁자 위에 무언가를 올려놓았다.

황제의 검인 ‘샹귀스―에퀴온’이었다. 전쟁에서 수많은 사람을 베고도 날이 상하지 않는 명검.

분위기가 단숨에 휘어잡혔다. 미아는 마른침을 삼켰다. 아딜로트가 ‘샹귀스―에퀴온’을 꺼냈다는 건, 이 이상 귀찮게 하면 정말로 베겠다는 뜻이었다.

낮은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세레니티 듀레인만 남기고 나가. 아무래도 당사자와 이야기를 좀 해야겠어.”

* * *

미아는 죽이면 안 된다는 외침을 흘리다 제인의 손에 이끌려 사라졌다. 페르디안 역시 집무실을 떠났다.

황제의 수석 시종인 올리버까지 말없이 차 두 잔을 두고 집무실을 나가자 방 안은 금세 조용해졌다.

“…….”

“…….”

더없이 아름다운 금발의 여자와, 조각처럼 잘생긴 남자 한 명이 마주 앉아 침묵했다. 누가 보아도 잘 어울릴 선남선녀였으나, 속은 달랐다.

아딜로트는 세레니티가 마뜩잖은 상태였다.

‘저 세레니티랑 친구 할 거니까! 절대 죽이면 안 돼요!’

미아가 강하게 주장했기에 들어줄 생각이기야 했지만, 세레니티 듀레인은 황태후와 연결점이 있는 인간이었다. 차라리 잡아다 고문하고 죽이는 게 낫지, 앞으로 내내 경계할 생각을 하니 귀찮고 따분했다.

세레니티 역시 아딜로트가 마음에 들지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백성을 생각하는 정책과 달리, 들려오는 소문은 그를 폭군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세레니티는 원래 그런 소문을 믿지 않았으나, 미아와 대화를 한 뒤로 확신했다.

이 황제는 백성을 생각할 줄은 알지만, 개개인의 인권은 존중할 줄 모르는 불한당이다.

“전 폐하를 존중할 수 없습니다.”

세레니티가 불쑥 그렇게 말했다. 아딜로트는 느른하게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안 물어봤는데.”

“사람에게 애완동물이라니요.”

그건 아딜로트도 내켜서 한 게 아니었다. 미아를 살려 둘 마땅한 구실이 없었을 뿐이다.

하지만 황태후의 입김이 들어간 여자 앞에서 할 말은 아니었기에, 그는 변명하기를 포기했다.

“반역자의 딸이야. 원래는 죽였어야 했던 걸 동물로라도 살게 하는 게 그렇게 큰 문젠가?”

“무도회에서 그녀에게 이래라저래라 했다는 게 사실인가요?”

“반역자의 딸이니까.”

“심지어 춤추다 버려 두고 가버려 웃음거리로 만드셨다면서요. 그렇게까지 하셨어야 했나요?”

“애완동물이잖아.”

“사람이에요!”

세레니티가 외쳤다.

아딜로트는 자신이 왜 이런 대화를 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급격한 피곤함이 몰려왔다.

“할 말은 끝인가?”

“설마 신분으로 미아 님을 억눌러 이상한 짓을 시키진 않으셨겠죠?”

아딜로트의 얼굴에 짜증이 스몄다.

“내가 왜 걔한테 그런 걸…….”

그러나 말하다 말고 아딜로트가 멈칫했다. 문득 어떤 기억이 떠올랐다.

‘자기야?’

바로 자신의 무릎 위에 손을 살짝 올리고 고개를 갸웃하던 미아의 모습이었다.

……이상한 거라고 하기엔 그렇게 이상하진 않지만, 생각할 때마다 심란해지긴 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여인들에게는 여인들만의 방법이 있는 법이지요. 눈빛 하나만으로도 상대를 애타게 만드는 그런 방법 말입니다. 미아 님은 지금도 아름다우시지만, 제게 가르침을 받으시면 더 성숙하고 아름답게 피어나실 거예요.’

‘여기서 성숙해지기까지 하면 내가 진짜 미쳐 버릴지도 모르니까 안 와도 돼.’

아딜로트는 그때 미아의 화를 풀어 주기 위해 수도의 유명 케이크 가게에 사람을 보내야만 했다.

그러니까, 이상한 걸 시킨 건 아닌데, 약간 이상한 발언을 제멋대로 하긴 했다.

“…….”

아딜로트가 입술을 달싹거리다 고개를 돌렸다.

“……내가 시킨 건 아니야. 그냥 자기가 먼저 그렇게 한 거지.”

“……!”

그리고 그 반응에 세레니티는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정말로 뭔가를 했구나!’

사람을 그렇게 우습게 여길 정도이니 무슨 짓을 했을지 모른다. 그렇게 순진하고 착해 보이는 사람에게!

“어떻게……, 어떻게 그런 짓을!”

“내가 시킨 게 아니라니까.”

세레니티가 입을 틀어막았다.

‘발뺌까지!’

그녀는 해맑게 웃던 미아를 떠올리며 참담한 기분을 느꼈다.

“살고 싶으니 시키지 않더라도 눈치를 보며 그런 행동을 한 것일 텐데, 심지어 책임마저 회피하시는 건가요!”

“회피한다고는 안 했어. 책임지고 있잖아.”

“그렇다는 건 미아 님을 황후로 올리시겠다는 건가요?”

“셀레스티얼 가문은 몰락했으니 그건 말도 안 되지.”

“결국 미아 님에게서 쾌락만 취하시겠다는 뜻이 아닌가요!”

“쾌락까진…….”

아닌가, 맞나.

손안에서 말랑거리던 하얀 뺨을 떠올린 아딜로트가 인상을 썼다.

그걸 쾌락이라고 하면 너무 나간 것 같은데, 그렇다고 좋지 않았느냐고 물으면 또 그건 아니고.

“……기분이 나쁜 건 아니었지만.”

“대체, 하!”

세레니티는 자신의 추측이 옳았음을 확신했다.

대체 뭘 시킨 건가, 이 황제는! 그러면서 왜 이리 당당한가!

세레니티가 부들부들 떨었다.

“어떻게 한 나라의 황제가 그런 행동을 대놓고 시키고……!”

“시킨 건 아니라니까.”

“그럼 거절하셨어야죠!”

아딜로트가 다시 인상을 쓰며 미아를 떠올렸다.

어떻게든 살아 보겠다고 애교를 부릴 때마다, 다 들리게 투덜거리며 입술을 삐죽 내밀던 얼굴.

아딜로트가 저도 모르게 한숨을 쉬었다.

“……솔직히 그걸 어떻게 거절해.”

인정하고 싶진 않지만 조금 귀엽긴 했다.

그러나 사정을 모르는 세레니티가 경악하기엔 충분했다.

비틀거리던 세레니티가 탁자를 짚고 심호흡했다.

“이런 분이실 줄은…… 정말 몰랐어요!”

그녀는 아딜로트를 향한 분노로 눈을 부릅떴다.

“당신을 경멸합니다, 폐하.”

“나도 너 싫어.”

아딜로트 역시 낮게 말했다. 미아가 봤다면 땅을 치고 통곡했을 장면이었다. 그렇게 미아의 뜻과 달리 두 사람의 만남은 크게 어긋나고 있었다.

* * *

미아는 아딜로트가 침실로 돌아올 때까지 진정할 수 없었다. 그리고 아딜로트가 돌아오자마자 달려들었다.

“안 죽였죠!?”

“안 죽였어.”

“흐아아…….”

안도의 한숨이 튀어나왔다.

‘까딱하면 남주가 여주를 죽일 뻔했네!’

아무리 이미 망한 소설이라지만 그 꼴만은 두고 볼 수 없었다.

‘그래, 망했지…….’

두 주인공의 첫 만남부터 아주 거하게 말아먹었다. 이래서야 앞으로의 전개가 걱정이었다. 자신이 알고 있는 내용이 얼마나 쓸모가 있을지도 짐작 가지 않았다.

‘그래도 아직 아딜로트가 남아 있어. 아딜에게 희망을 걸어 보자!’

그리 생각한 미아가 조심스레 운을 띄웠다.

“저기……, 아딜, 렌 예쁘죠?”

“모르겠는데.”

“네? 아하하, 그럴 리가. 우리 폐하, 눈에 문제 있어요?”

“…….”

“죄송합니다…….”

내내 시큰둥하게 서 있던 아딜로트가 의자에 앉았다. 어깨에 걸치기만 한 코트를 뒤로 넘기고 팔짱을 낀 자세가 그림처럼 근사했다.

“그래서 넌 저 여자를 왜 찾아다닌 거야?”

“할 이야기가 있어서…….”

“그게 뭔데.”

“어……, 여자들의 대화……?”

대답하며 미아는 생각에 빠졌다. 어쨌든 친구가 되었으니 앞으로 세레니티에게 원작의 정보를 물어보긴 쉬워질 것이다.

그러면서 황태후 쪽으로 얘기가 안 들어가게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는 점이 문제였지만.

“그보다 렌한테 너무 무섭게 하면 안 돼요, 아딜!”

그 말에 아딜로트가 탄식을 흘렸다.

“너 쟤가 얼마나 날 안 무서워하는지 알기나 해?”

“안 무서워해요?”

“무서워하긴 무슨. 나를 저렇게 대하는 사람은…….”

아딜로트가 말을 멈췄다.

‘너 이후로는 처음이야.’라는 말이 목 끝까지 올라왔지만, 그건 마치 자신이 미아에게 엄청난 의미를 두고 있다는 것처럼 들리지 않나.

하지만 미아는 다르게 생각했다. 그녀는 손바닥으로 입을 가리고 ‘어머어머!’를 연발했다.

‘이거 완전 날 이렇게 대한 건 네가 처음이야 같은 말이잖아!’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