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화
“…….”
그가 고개를 젖혔다. 맑은 물빛의 하늘의 보였다. 날이 좋으면 미아가 가끔 잔디밭에서 데구르르 구르며 논다는 보고를 받은 적이 있었다.
그래서 오늘도 그러고 있겠거니 했는데.
아무것도?
‘외, 외로워서……?’
페르디안과 외출하고 돌아온 날, 미아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러고 보면 찾아가서 만난 사람도 또래의 귀족가 영애였다.
어쩌면 정말로 외로워서 친구가 필요했던 건지도 모른다. 엠브라를 그렇게 각고의 노력을 하며 살리려고 한 것도, 그래서일 수도.
하지만 그렇게 외롭다면 찾아오면 될 게 아닌가?
기껏 집무실 출입 허가도 내줬건만.
“……언젠 보고 싶다더니.”
괜히 불안감이 차올랐다.
결국, 초조하게 펜을 두드리던 아딜로트가 몸을 일으켰다.
“안내해. 어쨌든 내 반려동물이니까, 내가 보살펴 줘야겠지.”
베일리는 ‘그거 정말 동물로 보는 거 맞습니까?’라고 묻고 싶은 것을 참고서 고개를 끄덕였다.
* * *
감시자가 말한 장소로 다가갈수록 아딜로트는 기분이 가라앉았다. 그에게 익숙하고 달갑지 않은 장소가 있는 곳이었다.
어머니인 레아 황비가 죽었을 때.
클라우디오 황태자가 괴롭혔을 때.
크리소르 황후가 경멸의 눈초리를 보냈을 때…….
그때마다 아딜로트는 구석진 곳에서 멍하니 앉아 시간이 흐르기를 기다리곤 했다. 정확히 그곳에서 아딜로트는 미아를 발견했다.
미아는 수풀 속에서 멍하니 하늘을 보고 있었다. 기쁨이든 슬픔이든 늘 선명하게 드러나곤 하던 미아에게서 감정이 빠지자, 하얀 도화지 같은 얼굴만 드러났다.
낯설고 이상했다.
항상 분홍색 머리카락을 찰랑이며 폴짝폴짝, 배짱도 좋게 잘도 뛰어다니곤 했는데.
마치 어릴 적 그 자신이 사람들을 피해 앉아 있던 것처럼 쪼그리고 있는 미아를 보니 심장이 크게 동요했다.
아딜로트가 굳은 얼굴로 미아에게 다가가, 말없이 그 옆에 앉았다. 그러자 미아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
그리고 밝게 인사하려다, 그들이 얼마 전에 싸웠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심드렁히 고개를 돌렸다.
“안 바쁘세요?”
“바빠.”
“근데 일 안 하고 뭐 하세요? 일하세요.”
“…….”
늘 방싯방싯 웃으며 반겨 주던 것과는 너무 다른 모습이었다. 특별히 퉁명스럽게 대할 의도보다는 그제야 원래의 거리를 찾았다는 듯한 분위기였다.
턱을 괸 채 허공을 바라보는 미아에게 아딜로트가 말했다.
“황태후가 누굴 보냈다던데.”
미아가 크게 움찔했다.
“그, 그렇긴 한데, 제 뜻은 아니었어요. 그냥 첩자 노릇 잘하라고 보낸 거예요.”
“누굴 보냈는데?”
미아는 의아한 표정이었다.
“지로티 할아버지가 말 안 하셨어요?”
“그 양반도 그렇고 제인도 그렇고 대답을 안 하던데. 황궁 사람들은 다 나보다 네가 좋은가 보지.”
“그렇진 않을 거예요!”
그는 별생각 없이 말한 것인데, 갑자기 미아가 안절부절못하기 시작했다.
“다 아딜을 얼마나 좋아하는데요! 저, 저는 그냥 오갈 데 없는 게 불쌍하니까 잘해 주시는 거고! 저랑 달리 아딜은 뭐든 잘하잖아요! 오해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조금만 기다리면 사람들이 다 알아줄 거예요!”
양 주먹까지 꼭 쥔 필사적인 변호였다.
아딜로트는 잠시 할 말을 잊었다. 조금 전까지도 토라져 있었던 것 같은데.
별것도 아닌 말 한마디에 저를 달래려 하는 게 생경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그리고 아딜은 엄청 착하다고요!”
“내가 정말 착했으면 너한테 고생했다고 말 한마디 정도는 했겠어.”
“그건 그래요.”
“…….”
미아의 단호한 대답에 아딜로트가 잠시 침묵했다.
이 와중에도 아니라곤 말하지 않는 점이 참으로 미아다웠다. 그녀는 곧 눈치를 보며 자기 무릎을 끌어안았다.
“무슨 일 있었어요?”
“조금.”
“누가 뭐라고 했어요?”
그러면서 조금 눈썹에 힘을 주는 것이, 아무래도 국무 회의에서 귀족들과 싸웠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그럴 리가.
요 며칠 아딜로트는 내내 기분이 별로였고, 국무 회의는 그가 기분이 별로일 땐 아주 조용하게 이뤄지는 편이었다.
아니면 그냥 탁자 위에 올려놓은 칼 때문이거나.
“만약 나쁜 말을 하는 사람 있으면 저한테 말하세요. 제가 혼쭐을 내줄 테니까.”
“죽여 주겠다고?”
“그, 그건 아니고.”
당장 울상을 짓는 모습에 아딜로트의 입에서 실소가 튀어나왔다. 그는 천천히 무릎에 뺨을 기댔다.
“아니면 뭘 해 주게?”
“어……. 저는 사실 할 줄 아는 건 별로 없거든요……. 음! 그러니까……!”
“겉으로만 보면 그렇긴 하지.”
애교 있는 몸짓에 처진 눈꼬리. 솔 톤의 맑고 명랑한 목소리와 귀여운 인상.
외모로 사람을 판단하는 게 좋은 일은 아니라지만, 그런 소녀 같은 모습에서 그녀의 비상함을 짐작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렇다곤 해도 그 망해 가던 셀레스티얼 백작가를 부흥시킨 장본인 아닌가.
좀 더 자신감을 가져도 될 텐데.
아딜로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모르고 미아는 심각하게 중얼거렸다.
“역시 애니멀 테라피……?”
“…….”
곧 각오를 굳힌 미아가 양팔을 펼쳤다.
“절 쓰다듬으세요! 허락할게요!”
아딜로트는 빠르게 주변을 살폈다. 이런 오해하기 쉬운 발언을 들은 사람이 있다면 곤란했다.
다행히 주변엔 아무도 없었다.
“예전부터 생각한 건데 너 좀…… 발언에 주의가 필요한 거 알지?”
“네? 아하. 폐하가 애니멀 테라피를 좋아한다는 거, 바깥엔 숨겨야 한다고요?”
“아니, 나 그거 안 좋아하거든.”
“아…….”
미아가 시무룩하게 팔을 내렸다.
“그렇다고 안 한다곤 안 했어.”
아딜로트가 급하게 말했다. 미아는 다시 비장하게 눈을 부릅떴다.
“그럼 오세요!”
“…….”
아딜로트는 망설인 끝에 손을 뻗었다. 장갑을 낀 손이 향한 곳은 미아의 머리카락이 아니라 뺨이었다.
“웃.”
뺨에 손이 닿자마자 미아는 장갑의 감촉에 움찔했다. 아딜로트는 그녀의 반응에 잠자코 장갑을 벗은 뒤, 다시 손을 뻗었다.
손바닥이 미아의 뺨을 감쌌다.
미아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이었으나.
쭈우욱.
아딜로트가 미아의 볼을 길게 잡아 늘인 순간 뚱한 표정을 지었다.
“……지금 시비그는 거에여?”
“핫.”
발음 새는 소리에 아딜로트는 웃어 버렸다.
너무 하얗고 말랑해 보여서 계속 만져보고 싶었다고는 말하기 곤란했다. 딱 상상했던 만큼 말랑말랑한 뺨이었다.
그는 미아의 눈에서 원망의 기색이 짙어지는 것을 모르는 체하며 계속해서 그녀의 뺨을 조물거렸다.
“이건 애니머 헤라피가 아냐…….”
미아가 공허하게 중얼거렸다. 그에 아딜로트는 결국 웃음이 터져 손을 놓았다.
“자칭 반려동물이라며. 오래서 갔더니 왜 그런 반응이야?”
“좀 더 머리라든가, 머리라든가…….”
“머리나 뺨이나.”
“달라요…….”
“뭐가?”
“뺨은 너무…… 친근해 보이잖아요.”
아딜로트의 웃음기가 살짝 희미해졌다.
“내가 너랑 친근해 보이면 안 돼?”
“안 돼요.”
“……왜?”
미아는 뾰로통한 얼굴로 시선을 돌렸다.
“전 저한테 화내는 사람 싫어해요. 공도 과도 확실한 사람이 좋다구요.”
뼈 있는 말이었다. 아딜로트는 가만히 그녀를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그러네.”
“…….”
“미안. 내가 실수했어.”
그는 그 이상 말하지 않았다. 그 자신도 무슨 말이 나올지 감당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딜로트는 남을 위해 위험을 감수하고 희생을 자처하는 사람들이 싫었다.
싫다기보다, 제발 그러지 않길 바랐다.
자신의 어머니인 레아는 모두를 위해 자신을 희생했고, 그게 그에게는 큰 상처로 남았으니까.
그래서 그는 기왕이면 미아가 계속해서 악착같이 삶에 집착해 주기를 바랐다.
엠브라가 아닌 그 누가 위험에 빠져도, 자기만을 생각하고 이기적으로 굴어 줘.
하지만 이번 일로 깨달았다.
미아는 그러지 않을 사람이었고, 말은 생존이 최고라고 하지만 결국 남을 위해 불길로 뛰어들 사람이었다.
그러니 자신이 강해지는 수밖에 없었다. 그런 사춘기 소년 같은 다짐을 입 밖에 낼 수는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언제나 그의 속을 전부 들여다보는 것만 같은 미아는 구태여 그에게 그 이상을 요구하지 않았다.
그녀는 말갛게 빛나는 분홍색 눈으로 자신을 응시하다가, 장난스럽게 꿍얼거렸다.
“치사해……. 얼굴이 너무 잘생겨서 화도 못 내겠네…….”
“내가 얼굴 덕을 좀 보는 편이지.”
“뻔뻔해…….”
“너도 만만치 않아. 황제한테 반말하는 걸 보면.”
“그건 애정과 존경의 증거일 뿐이에요…….”
미아는 그렇게 말하고서, 하얀 치아를 보이며 함박웃음을 터뜨렸다.
“이런 게 뻔뻔한 건가?”
마치 ‘이제 우리 괜찮아!’하고 말하는 듯한 환한 웃음이었다. 내내 애가 타듯이 조바심치던 아딜로트의 마음이 그제야 가라앉았다.
그리고 그는 역시 그녀가 웃고 있는 게 좋다고 생각하고 말았다. 계속 그 미소를 보고 있으면, 여름날의 뭉게구름처럼 온갖 감정이 둥글게 둥글게 부풀어 오르는 듯했다.
아딜로트는 그 낯선 부피에 괜히 헛기침하며 턱을 괴었다.
“그래서 황태후가 누굴 보낸 건데?”
“앗.”
미아가 멈칫하고는 큰 눈을 데구르르 굴렸다.
“그, 그게…….”
“나한테 말 안 하는 걸 보면 위험한 건 아닌 모양이고. 뭔데?”
“…….”
연신 눈치만 보던 미아는 에라 모르겠다, 두 눈을 질끈 감은 채 입을 열었다.
“이, 이다 블라시하 남작 부인이요!”
그녀의 소문에 대해서는 잘 모르는 아딜로트는 바로 블라시하 남작가의 재정 상태와 정치적 입지를 머릿속에서 뽑아냈다.
여차하면 어떻게 블라시하 남작가를 멸문시킬지에 대해서는 3초 만에 결론이 나왔다.
“뭐하는 사람인데?”
“그게…….”
미아가 솟아오르는 자괴감을 삼키며 썩은 미소를 지었다.
“상대를 유혹하는 법을 가르쳐 준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