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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군의 애완동물이 되었다-36화 (36/193)

36화

상상 이상의 격한 반응에 죄책감이 마구 생겨났다.

지로티 공작은 한참을 그렇게 속을 삼키는 듯하더니, 떨리는 손으로 술병을 더듬어 마개를 땄다.

“그러지 좀 말게. 그러지 좀…….”

“…….”

뭔가 깊은 사연이 있는 듯한 나직한 토로에 미아는 우는소리 할 수도 없어졌다. 문득 머릿속에 아딜로트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얼음장같이 차가운 낯으로 냉기를 폴폴 흘리며 흉흉한 기세를 흘리던 그날의 아딜로트가.

‘차라리 저렇게 걱정했다고나 말해 주지…….’

저도 모르게 입술을 삐죽 내밀며 미아는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죄송해요……. 앞으론 조심할게요!”

“휴……. 제발 좀 그래 주면 좋겠구만. 노인네 심장을 아주 터뜨려 놔야 정신 차리겠어!”

“히…….”

이럴 땐 웃는 게 최고다. 이를 보이며 애교 부리듯 웃자 지로티 공작은 결국 얼굴을 풀고 한숨을 쉬었다.

“그보다 자네. 폐하랑 무슨 일 있나?”

“……왜요?”

“흠, 흠! 오늘 오전이 국방회의였는데, 영 상태가 별로더군!”

“아하.”

심드렁한 대답에 지로티 공작이 미아를 흘낏거렸다.

“자네가 뭐 한 건 아니고?”

“저랑 아딜이랑 무슨 상관이라고!”

“허?”

지로티 공작이 수염을 쓰다듬던 것을 멈추고 눈을 크게 떴다. 그러나 이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거 참…….”

뭔가 더 물어볼 줄 알았는데, 그는 그걸로 대화를 끝내 버렸다. 다음엔 외려 미아가 물었다.

“……더 안 물어보세요?”

지로티 공작은 콧방귀를 뀌었다.

“됐네. 보나 마나 아직 서툰 우리 폐하께서 잘못하지 않았겠나.”

의외의 말에 미아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 사실 아딜이 틀린 말한 건 없는데!”

“원래 폐하가 맞는 말도 틀리게 얘기하는 재주가 있는 사람 아닌가.”

박한 평가에 미아가 킬킬 웃었다.

“할아버지는 아딜 편들어 주실 줄 알았어요!”

“공정성 갖다 버리면 공작은 못 한다네.”

“히히.”

미아가 배시시 웃었다. 누군가가 자신의 편을 들어주는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그리고 아딜로트의 얼굴이 떠올랐다.

‘아딜이 그래 주면 좋았을 텐데.’

그런 생각이 들자 어깨에서 힘이 빠졌다.

‘할아버지가 혼내는 건 괜찮은데, 아딜이 화내는 건 왜 그렇게 서운했을까.’

곰곰이 생각해 보았는데 아무래도 아딜로트가 남주인공이어서인 모양이었다. <장미 정원의 세레니티>를 읽으며 그렇게나 응원하고 예뻐하던 대상이 자신에게 화를 냈으니, 억울한 마음이 들 법도 했다.

미아는 더는 그것에 관해 생각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어쩐지 생각하고 싶지 않은 문제였다.

그때, 제인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 아주 애매한 표정으로 말이다.

“지로티 공작 각하,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미아 님, 접견 요청이 들어왔습니다.”

“네?”

지로티 공작도 한쪽 눈썹을 추켜올렸다.

“자네 또 뭐 했나?”

“그렇진 않은데…….”

“황태후 폐하께서 보내셨다고 합니다.”

설마.

미아의 몸이 덜컹거렸다.

그런 미아를 살피며 제인은 다소곳이 말했다.

“이다 블라시하 남작 부인이십니다.”

이다 블라시하 남작 부인.

그녀는 일개 남작 부인에 불과하지만, 그녀의 위명은 결코 낮지 않다. 화려한 적발을 가진 그녀는 미인이기도 하지만, 다른 쪽으로 더 유명하다.

그러니까…… 엄청난 팜므파탈로 말이다.

‘유혹술을 가르칠 이를 보낼 테니 잘 배우도록 하게!’

‘진짜 보냈어!’

농담인 줄 알았던 미아는 청천벽력같은 소리에 발을 동동 굴렀다.

“어떡하지? 어떡하죠!? 정말 올 줄은 몰랐는데!”

“만남이 곤란하신가요. 미아 님?”

“완전요!”

“그러시다면 다른 분과의 만남 중이시라고 핑계를 대고 거절할까요?”

미아의 고개가 휙 돌아갔다.

“제인 씨! 사랑해요!”

왜 예의에 엄격한 제인이 지로티 공작이 있는데도 문을 열었는지 의아했는데, 그 핑계를 위해서였던 모양이다.

제인이 빙그레 미소 지었다.

“그리 말씀드릴 테니 너무 심려치 마세요, 미아 님.”

“네! 제인 씨만 믿을게요!”

“하지만 제가 해드릴 수 있는 것에는 한계가 있으니, 차후의 일은 폐하와 이야기해 보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녀는 그렇게 말한 뒤 물 위를 걷듯 가벼운 총총걸음으로 사라져갔다. 방에는 다시 미아와 지로티 공작만이 남겨졌다.

“황태후가 대체 왜 자네에게 블라시하 남작 부인을 보낸 겐가? 자네, 그 부인에 대해 알고는 있나?”

술병을 따며 지로티 공작이 물었다. 그도 그녀에 대해 아는 모양이었다. 미아는 흐린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딜이 저한테 완전 홀딱 넘어오게 만들래요…….”

“…….”

“어떡하죠……? 아무래도 크리소르가 아딜이랑 제 사이를 단단히 오해하고 있는 것 같은데…….”

“흠, 흠! 뭐, 오해까진 아닌 것 같다만……. 게다가 그런 이유라면 이미…….”

지로티 공작이 술을 들이켜며 중얼거렸다. 미아가 의아한 얼굴을 했으나, 그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어쨌건! 내가 입을 댈 문제가 아니구만. 다행히 암살자는 아닌 것 같으니……. 힘내게!”

“네!? 할아버지!”

미아의 외침을 뒤로하고 지로티 공작은 서두르는 기색으로 자리를 피해 버렸다. 남겨진 미아는 눈을 두어 번 깜빡이다가 침대를 구르며 소리쳤다.

“나더러 어쩌라는 거야! 남자 꼬시는 법 따위 배우고 싶지 않다고!”

한참을 베개를 끌어안고 발버둥 치던 미아의 움직임이 어느 순간 뚝 멈췄다. 그녀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니지! 할 수 있다! 미아 셀레스티얼! 방년 19세! 내가 이렇게 예쁘고 귀여운데 못하는 게 어딨어!”

자신은 하루아침에 딴 세상에 왔는데도 어떻게든 적응해서 지금까지 살아남은 사람이었다. 생각해 보니 굳이 정면으로 부딪칠 필요가 없는 문제였다. 자고로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게 최선이고, 여의치 않으면 피하는 게 상책이라 하였다.

미아의 눈이 반짝였다.

“피하자!”

* * *

이다 블라시하 남작 부인만 피했다간 일부러 황태후의 연락을 피하는 것으로 의심받을 확률이 높았다. 그래서 미아는 그날부터 아예 사람들을 피해 다녔다.

루비 반지를 받은 이후로 더는 시종들이 그녀를 감시하지 않게 되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황제의 애완동물인 미아에게 누가 뭘 시키는 것도 아니었으니까.

애초에 미아의 일과는 밥 먹기, 뒹굴기, 정원 산책하기, 아딜 기다리기 정도가 전부였다.

이다 블라시하 남작 부인이 눈치 좋게 그만 찾아와 주면 더할 나위 없었을 텐데.

아쉽게도 그런 일은 없었다. 팜프파탈이기 때문인지 그녀는 몹시 집요한 데가 있어서, 이젠 이틀에 한 번꼴로 미아를 찾아왔다.

‘그, 그만 찾아와, 제발!’

다행히 미아는 궁 이곳저곳을 뒤지다가 숨어 있기 딱 좋은 곳을 발견했다. 인적이 드물고 시원한 그늘이 지는 구석이었다. 이미 땅이 다져져 있기도 했다.

‘누가 여기서 몰래 시간 죽이고 그랬나 봐!’

정체 모를 누군가에게 동질감을 느끼며, 미아는 종일 그곳에 숨어 지냈다.

* * *

아딜로트가 묘한 위화감을 느끼기 시작한 건 일주일 정도 지나서였다. 여느 때와 같이 개인 집무실에서 정무를 보던 아딜로트는 아무 의미 없이 창밖을 바라보았다.

하늘이 맑았다. 그러자 침실에 두고 온 자칭 반려동물이 떠올랐다.

‘우스운 꼴을 하면서도 악착같이 살려고 하고. 그러면서도 다른 사람 때문에 자기를 희생하고.’

엠브라 사건 이후, 그와 미아의 관계는 적잖이 데면데면해졌다. 원래부터 그리 친한 사이는 아니었지만, 미아가 다가오지 않자 그들 사이엔 대화 자체가 없어졌다.

애초에 만날 시간조차 적긴 했어도 예전엔 이 정도는 아니었건만. 그녀는 심지어 평소엔 같이 하던 저녁 식사도 따로 하기를 택했다.

결정적인 건 수석 시녀인 제인 고트샬크의 말이었다.

‘미아 님께서 많이 힘들어하고 계십니다.’

실제로는 자꾸 찾아오는 이다 블라시하 남작 부인 때문이었으나, 제인은 교묘하게 그 부분을 빼고 말했다.

그녀는 오래전부터 황제를 모셔온 사람이었고, 그래서 솔직히 말해서, 젊은 황제와 미아가 얼른 화해하길 바랐다.

한편 자신의 유능한 수석 시녀가 절대 주관적인 발언을 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한 아딜로트는 점점 초조함을 느꼈다.

“베일리.”

아딜로트가 낮게 말했다. 그러자 방구석에서 흐릿한 그림자 하나가 차올랐다. 아딜로트의 그림자 수행원인 베일리였다.

―존명.

“미, 흠.”

아딜로트가 잠시 망설였다. 이름을 부르는 게 어쩐지 어색하고 낯간지러웠다.

“내 자칭 반려동물이 오늘 뭐 했는지 알아?”

아딜로트는 가끔 감시자를 통해 미아의 일상을 보고받았다. 원래는 반역의 낌새를 보기 위해 붙여 둔 것이지만, 이제는 종종 미아의 일과를 듣는 게 전부였다.

이상하게도 감시자를 통해 ‘케이크를 8개 드셨습니다’, ‘낮잠을 주무시고 계십니다’ 같은 말을 들으면 좀 안심이 되곤 했다.

이번에도 그런 말이 나오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베일리가 한 말은 예상과 사뭇 달랐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아무것도?”

―예.

아딜로트가 손가락 사이로 펜을 돌렸다.

이상한 답이었다. 베일리는 이런 식으로 보고한 적이 없었다. 물어보기만 한다면 미아가 하루에 몇 번 하품했는지도 보고할 사람이었다.

“아무것도?”

―예. 아무것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식사는?”

―빵과 과일과 치즈를 받아 가셔서 따로 해결하셨습니다.

“왜?”

베일리가 침묵했다. 아딜로트도 굳이 대답을 기대하고 물은 것은 아니었다. 감시자는 본 것을 말할 뿐 뭔가를 짐작하는 사람은 아니다.

다만 감시자도 생각은 있기 때문에, 황제의 수족인 베일리 역시 어느 정도는 제인 고트샬크와 같은 마음이었다. 여기서 ‘명상 중이십니다’하고 답하면 이 황제는 또 한참을 제자리걸음 할 게 뻔했다.

그렇게 두 사람의 은근한 노력에 힘입어, 아딜로트는 결국 펜을 내려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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