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5. 분연히 떨쳐 일어나는
(135/151)
135. 분연히 떨쳐 일어나는
(135/151)
135. 분연히 떨쳐 일어나는
2022.04.17.
‘공격 술식의 완성까지 앞으로 2초!’
케일럽은 입술을 깨물며 상대를 노려보았다.
하지만 대신관이 더 빨랐다.
새하얀 빛이 번쩍이더니 케일럽의 눈앞에 창처럼 내리꽂혔다. 케일럽은 방어 마법으로 그것을 가까스로 튕겨냈다.
마침내 완성된 공격 마법이 녹색 빛이 되어 상대를 덮쳤다. 하지만…….
“이런 귀여운 작전이라니.”
녹색 빛 속에서 대신관은 너무나 멀쩡한 모습으로 걸어 나왔다.
이쪽의 정체를 눈치챈 순간, 상대 역시 방어 술식을 준비해둔 것이리라.
“아무래도 제가 저번에 쓴맛을 덜 보여드린 모양입니다. 무의식 속에 각인되어, 눈을 마주치는 순간 사지에 힘이 풀릴 정도로 선연한 패배의 기억을 안겨드렸었어야 했는데. 아, 그래……. 그대의 어깨에 상처를 입혔던, 그날 말이지요.”
대신관이 케일럽의 어깨에 상처를 입힌 날! 그 짧은 말에 케일럽은 상대가 어떤 사건을 말하고 있는지 깨달았다.
“토파즈 궁에서의 습격 사건, 그게 당신 짓이었구나!”
“제가 알려드리기 전까지는 모르셨다니, 의외로군요. 머리 하나는 쓸 만한 줄 알았는데.”
대신관은 조롱어린 어조로 말하며 한쪽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아니다. 케일럽 역시 예상은 하고 있었다.
상황이 이렇게까지 되었는데 로벨리아를 암살하려고 했던 적이 그라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할 리가.
하지만 그저 어림짐작하는 것과, 범인의 입으로 자백을 직접 들을 때의 심정은 전혀 달랐다.
케일럽은 이를 악문 채 상대를 노려보았다.
‘정체를 들킨 이상 이제 물러날 수 없어.’
그는 결의를 다졌다.
‘어떻게든 대신관을 물리치고, 황후 폐하께 돌아가겠어!’
***
경비와 전투인원, 잡역부들의 상태와 인원을 확인하고, 물자를 점검한 뒤에야 나도 한숨 돌릴 수 있었다.
“정말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황궁으로 돌아오신 이후로 쉴 틈 없이 일하셨으니, 잠시라도 휴식을 취하시지요.”
노먼이 걱정스레 말을 걸었지만, 나는 웃으며 손사래를 쳤다.
“전 괜찮아요. 기사분들은 지금도 치열한 접전을 벌이고 계신데 혼자 쉴 수는 없죠. 다만 케일럽은 아직 어리니까 휴식을 취하게 하는 것도 좋겠네요. 그러고 보니 케일럽은 어디 있죠?”
“저는 아까 작전 회의 때 본 것이 마지막이었습니다.”
지나가는 사람마다 붙잡고 물어보았지만, 케일럽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렇다면 작전 회의 이후 대화를 나눈 내가 케일럽을 마지막으로 본 사람인 거네.’
불안감이 마치 거미 떼처럼 뱃속을 기어 다녔다.
‘설마…… 내게 말한 대로, 대신관을 암살하러 비밀통로를 통해 침입한 것은 아니겠지?’
그때였다. 마지막으로 케일럽을 보았다는 목격자가 나타났다.
“마법사님이 지하 2층 식품 보관소에 들어가는 모습을 제가 이 두 눈으로 똑똑히 봤습니다.”
지하 2층 식품 보관소. 그곳은 비밀통로로 통하는 뚫린 벽이 있는 곳이었다.
‘틀림없어. 케일럽은 비밀통로를 통해서 위층으로 올라간 거야. 대신관을 암살하기 위해서!’
케일럽이 위험한 상황에 처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뱃속이 싸늘하게 식고 심장이 쿵쾅거렸지만, 놀랍게도 머리는 찬물을 들이부은 듯 냉정해졌다.
‘소수 정예로 구조대를 꾸리자. 그리고 비밀통로를 통해 구하러 가는 거야. 케일럽을 구하는 일이라면 노먼 역시 주저 없이 도와주겠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던 그 순간.
“황후 폐하, 마법사님이 1층에 나타났습니다! 현재 대신관과 대치 중이라고 합니다.”
이것을 다행으로 여겨야 할까, 불행으로 여겨야 할까?
케일럽이 죽거나 심한 부상을 입지는 않았다는 것, 그리고 가장 가까운 곳인 1층에 있다는 것은 다행이었으나…….
하필 그 대신관과 단둘이 대치 중이라는 사실은 불행이라고 할 수 있었다.
나는 더 생각할 것도 없이 말했다.
“1층으로 향하는 계단으로 가겠다. 노먼을 불러와!”
“예!”
지하에서 1층으로 향하는 계단의 출구는 성기사들이 쌓아둔 바리케이드로 막혀 있었으며, 수십 명의 성기사들이 지키고 서 있었다.
‘우리 측의 병사 모두가 저 길을 뚫고 넘어가는 것은 어렵겠지만, 소수 정예 정도라면 뚫고 가는 것이 가능할지 몰라. 노먼은 제국에서 제일 강력한 검사 중 하나니까.’
바리케이드와 성기사들로 막혀 있었으나, 케일럽과 대신관 두 사람 모두 올라가는 중앙계단에 서 있었으므로 성기사들의 어깨너머로 그들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다행히 케일럽은 무사한 듯 보입니다.”
노먼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외신의 힘에 대항하는 방법을 배웠다는 케일럽의 말을 증명하듯, 두 사람은 꽤 대등하게 싸우고 있었다.
나이가 어리고 경험이 적은 케일럽의 동작에는 조급함이 묻어났지만, 그래도 대신관에게 아무런 수도 써보지 못하고 제압당했던 때에 비하면 장족의 발전이었다.
“소수 인원으로 적진 한복판에 뛰어드는 것은 어렵고 위험한 일이겠지만, 부탁드려요. 지금은 대등하게 싸우고 있는 것 같지만, 케일럽은 아직 어린애예요. 언제 간교한 대신관의 술수에 당할지 몰라요.”
“케일럽이 위험할지도 모른다는 말씀에 동의합니다. 너무 걱정 마십시오. 반드시 구해오겠습니다.”
“정말 고마워요, 노먼.”
노먼과 기사들은 성기사들을 날카로운 눈으로 쏘아보았다. 이 단단히 막힌 바리게이트를 뚫고 나갈 틈을 노리던 그 순간이었다.
“케일럽, 조심해!”
결국 걱정이 현실이 되었다.
다소 조급하고 감정적인 태도를 보였던 케일럽은 결국 자신의 페이스를 잃어버렸다.
그것은 극히 짧은 한순간이었으나, 바늘 하나 꽂을 틈 없이 팽팽한 접전 도중에는 그런 찰나의 흔들림조차 치명적이었다.
흰빛이 번쩍이더니 케일럽이 쓰러졌다. 대신관은 고작 2계단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그를 내려다보았다.
“크윽!”
“이번에야말로 끝내드리도록 하죠!”
“안 돼, 케일럽!”
대신관이 들어올렸던 팔을 케일럽을 향해 내뻗고, 새하얀 빛무리가 그를 덮치는 그 순간.
“무슨 짓을 해서든 통로를 뚫어라!”
“예!”
노먼과 기사들이 성기사들을 향해 달려들던 바로 그 순간!
콰앙!
갑작스러운 굉음과 함께, 무수한 함성이 허공을 갈랐다.
“황후 폐하 만세!”
“황후 폐하를 지켜라!”
“황후 폐하를 위하여!”
나는 물론이고, 우리 측의 병사들, 1층을 지키고 있던 성기사들과 대신관마저도 놀라 소리가 들리는 곳을 돌아보았다.
그곳에는 내가 결코 있을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지원군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
황궁에는 로벨리아의 시녀들 외에도, 오직 로벨리아에게만 맹목적인 충성을 바치는 집단이 하나 더 있었다.
그들은 바로 로벨리아가 라만차의 거리에서 사온 노예들이었다.
모두가 자신의 분야에서 뛰어난 재량을 가지고 있어 황궁의 이곳저곳에 흩어지게 되긴 했지만, 그들 모두의 마음의 고향은 오직 한 사람, 로벨리아였다.
그들이 자신들의 재능을 유감없이 발휘하며 황궁을 위해 헌신하는 것도 모두 로벨리아를 위해서였다.
그러던 어느 날, 성국에서 온 반역자가 황궁을 점령했다.
심지어 그들의 황후 폐하는 오간 데 없이 사라져버렸다.
황궁 전역에 퍼져 있는 탓에 소식이 늦었던 노예들은 이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되었다.
새로운 황궁의 주인인 대신관은 모든 궁인들에게 목숨이 아깝지 않으면 자신의 지시를 따르라고 종용했다.
로벨리아가 있었다면 그녀의 명령에 목숨 바쳐 복종했으련만, 그녀는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었다.
대신관이 로벨리아를 죽인 것이라면 황후 폐하의 원수를 갚겠다며 들고 일어나기라도 하련만 그것도 아니었다.
로벨리아가 없는 황궁에서, 노예들은 깊은 무기력에 빠져들었다. 결국 그들은 죽지 못해 사는 심정으로 대신관의 지시에 따랐다.
그러던 도중, 검은 암흑 속 한 줄기 광휘와 같은 소식이 찾아왔다.
‘황후 폐하께서 대신관을 물리치고 황궁을 되찾기 위해 돌아오셨다.’라는 소식이!
“그거 들었어? 황후 폐하께서 돌아오셨대. 역시 그분은 우리들을 버리신 게 아니었던 거야!”
“황후 폐하께서 황족 대대로 전해져 내려오는 비밀통로를 통해 중앙궁에 잠입하셨다고 하더군. 중앙궁에서 일하던 궁인들도 전부 황후 폐하의 편에 섰다고 하질 않나.”
“그 간악한 대신관과 맞서기 위해서라면 지원군이 많이 필요하시겠군!”
“궁인들만 황후 폐하를 돕게 할 순 없지. 우리도 황후 폐하의 힘이 되어드리러 가자!”
노예들은 오랜 시간 흩어져 있었으나, 다시 한번 엄청난 결집력을 발휘했다.
그것은 로벨리아가 노예들의 근무지를 옮기려고 할 때와 똑같았다. 그때 그들은 로벨리아의 곁에 있기 위해 자신들의 쓸모를 증명하려고 엄청난 능력을 보여주었다.
처음 그들이 노예라는 사실이 밝혀졌을 때 그들은 신분이 주는 편견으로 인해 궁인들로부터 차별과 멸시를 받았다.
하지만 그로부터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 황궁 각지에 흩어져 뛰어난 능력으로 다양한 도움을 준 그들은 황궁에서 없어서는 안 될 사람이 되었다.
과거에 당했던 차별이 무색하게도, 그들은 궁인들 사이에서 큰 영향력을 행사하며 많은 인기를 누리고 있었다.
물론 그들의 위상이 그렇게 높아지는 데에는 신분 차별에 반대하는 로벨리아의 열린 태도 역시 큰 도움을 주었다.
“모두 주목해주세요! 황후 폐하께서 돌아오셨다고 합니다. 대신관의 폭정에 고통받는 우리들을 구하고, 황궁에 대한 정당한 권리를 되찾으러 오신 겁니다!”
“지금 황후 폐하께는 우리들의 힘이 절실합니다. 우리 모두 더 이상 대신관이 시키는 노역을 하지 말고, 황후 폐하를 지지하러 갑시다!”
노예들의 진심을 담은 말에 일반 궁인, 병사들 역시 마음이 흔들렸다.
“그래, 나도 이젠 더 이상 못 참겠어. 이게 사람 사는 꼴이냐! 난 아니라고 본다.”
“역시 이 황궁의 진정한 주인은 황후 폐하이시지! 나는 이제 황후 폐하를 돕겠어!”
“나도, 나도!”
그렇게 해서 노예들은 수많은 궁인, 병사들을 이끌고 지금 이 자리에 나타나게 된 것이다.
***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이지?’
건방진 어린 노예의 목숨을 끊으려던 바로 그때. 엄청난 소리가 들려와 대신관의 주의력을 흩트려놓았다.
대신관이 본능적으로 돌아본 중앙궁의 대문 앞에는 어마어마한 수의 군단이 버티고 서 있었다. 얼핏 봐도 성기사들보다도 훨씬 많은 수였다.
“황후 폐하 만세!”
맨 앞에 있던 이들이 일제히 외치자, 그 옆, 뒤,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함성을 지르며 대문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그들은 갑작스레 준비한 얼뜨기들인지, 빈틈없이 무장한 성기사들에 비하면 그 무장의 수준이 형편없었다.
무기는 청소용구, 조리도구, 농기구 등을 하나씩 들고 있었고, 방어구는 거의 없는 수준이었다.
하지만…….
‘그들 모두가 나에게 굴복했던 황궁의 사용인들이로군.’
대신관의 여유롭던 얼굴에 커다란 금이 갔다.
‘큰 문제다. 죽음조차 두려워하지 않을 정도의 충성심을 가진 군단이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