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 나의 일은 그대의 마음을 빼앗는 일2022.01.09.
맛있는 식사를 하고 디저트를 먹은 뒤, 우리는 발코니에 기대어 가벼운 대화를 나누었다.
“오늘은 어떤 일을 했나? 쇼핑하러 가기 전의 일정은 어떠했지? 그대가 어떤 하루를 보냈는지 궁금하군.”
알렉산드로스가 말주변이 얼마나 좋은지 알고 있는데도 그는 나와 대화할 때 말을 많이 하지 않았다. 그는 나와 함께 있을 때 말을 하기보다는 들으려고 하는 편이었다. 내가 어떤 말을 하건 미소를 머금은 얼굴을 끄덕이고, 진심 어린 관심을 보이며 경청하곤 했다. 나 역시 다른 사람과 대화를 할 때는 말을 하기보다는 들어주는 사람인 편이고, 특히나 힘든 이야기는 최대한 하지 않으려 한다. 힘들었던 이야기와 불평이 상대에게 부담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버릇은 전생의 가족들 때문에 생긴 버릇이기도 했다. 내가 힘들었다는 이야기를 말해봤자 모두가 ‘네가 잘못을 했겠지.’라고 할 뿐 내 이야기를 주의 깊게 들어주지 않았다. 그렇게 오래된 버릇인데도, 알렉산드로스와 대화를 할 때의 나는 이상할 정도로 힘들었던 이야기를 많이 하게 되었다. 골치 아픈 업무, 지시한 대로 정확히 수행하지 않는 부하들, 시시각각 변동하는 경제와 사회상황. 내 일을 어렵게 만드는 것들에 대해 한참이나 불평을 늘어놓다가도 나는 깜짝 놀라 입을 다물곤 했다.
‘이런 이야기를 하려던 게 아니었는데. 어쩌다 이 얘기를 하게 됐지?’
놀란 눈으로 입을 다물고 상대를 보면, 그는 내가 왜 그러는지 모르겠다는 듯한 얼굴로 고개를 까딱였다.
“왜 그러지? 잘 듣고 있었는데.”
“부정적인 이야기라 지루하지 않으신가요?”
“아니, 무척 즐거웠어. 그대가 어떤 일을 좋아하고 어떤 일을 힘들어하는지 알 수 있잖아.”
이 이야기가 나오게 된 경위를 되짚어 보면, 알렉산드로스의 은근한 유도가 있었다. 사회생활 경험이 많은 나조차도 한순간 흔들릴 정도로 그는 대화의 화제를 조절하는 데 능숙한 편이었다.
“부정적인 화제에 대해 너무 그렇게 신경 쓰지 않아도 좋아. 말을 하지 않고 담아만 두면 결국 병이 되고 말지. 나에게 쏟아내서 그대가 속이 시원해진다면 이루 말할 것 없는 영광이야.”
그의 그 말에 나는 그가 나를 걱정해서 일부러 불평을 하게끔 유도했음을 깨달았다. 그는 내가 이렇게라도 업무 스트레스를 해소했으면 하는 것이다. 어릴 때부터 줄곧 ‘일찍 어른이 되기를’ 요구받았던 나는 그 누구에게도 어리광을 부려본 적이 없었다. 항상 누군가의 의지처가 되어줄 뿐, 다른 사람을 의지처로 삼는 일은 상상도 해본 적 없었다. 그런데…….
‘그에게는 하기 싫어도 자꾸만 어리광을 피우게 돼. 이게 바로 의지한다는 것일까?’
나는 그에 대한 고마움을 느끼며 생각했다.
‘누군가에게 의지한다는 거, 이렇게나 기분 좋은 일이었구나.’
가슴 속 어딘가가 간질간질했다. 남에게 이토록 정성스러운 보살핌을 받는다는 일이 이토록 사랑스러운 일인 줄, 이전의 나는 미처 몰랐다.
“그런 일에 너무 힘들어하지 마. 힘든 일보다는 내가 매일 그대를 얼마나 생각하는지에 대해 생각해.”
그가 내 허리를 감싸 안으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요즘 나는 오로지 그대만으로 가득 차 있는 것 같아. 특히 지난번 그대가 내게 그 말을 한 이후로는…….”
사랑한다고 한 것도 아닌데. 그저 당신이 싫지 않다, 호감이 있는 것 같다고 말했을 뿐인데. 그의 깊이를 알 수 없을 정도의 거대한 진심에는 도저히 보답이 될 수 없을 정도로 작은 마음일 뿐인데……. 그런데도 그는 내 말에 그렇게나 기뻐했다. 마치 삶의 이유가 하나 더 생긴 것 같았다. 나는 부끄러워져서 공연히 말했다.
“그런 것 치곤 일을 아주 많이 하시던데요. 요즘 업무량을 늘리셨다고 들었는데.”
“일이라도 하지 않으면 도저히 그대의 생각에서 벗어날 수가 없으니까.”
그가 긴 손가락을 뻗어 내 뺨을 건드렸다. 그의 손가락이 뺨을 따라 길게 움직이자 기분이 묘했다.
“지금 당장 그대의 모든 것을 갖고 싶다는 욕망에서 도저히 벗어날 수가 없으니까…….”
“…….”
“내 이런 욕심이 그대에게는 부담이 될 수도 있겠지. 그러니 욕심을 조금이라도 덜어내기 위해 일에 집중하려 노력하는 거야.”
그는 나를 사랑스럽다는 듯한 눈으로 보더니, 상체를 뻗어 내 뺨 위에 입 맞췄다. 그 행동은 더없이 귀중한 것을 다루는 듯한 거룩함마저 느껴져, 가슴이 울렁였다.
“하지만 날이 갈수록 참기 어려워지는 건 사실이야. 그대를 보면 볼수록……. 가까이하면 할수록 더더욱 갖고 싶어져. 욕심이 충족되긴커녕 더더욱 커져 가. 이대로라면 나는 평생에 걸쳐 그대를 갈망할 거야.”
그가 속삭였다.
“그러니 그대도 내 인내심을 너무 오래 시험하지는 말아주었으면 좋겠군.”
“그게 뭐 마음대로 되나요. 제 마음이 어떻게 될지에 달린 건데.”
그의 소유욕에 지나치게 동요하는 내 감정을 숨기려, 나는 일부러 도도하게 말했다. 알렉산드로스는 웃었다.
“그래, 그대의 말이 맞아. 그러니 나도 최대한 나의 일을 해야지.”
“일이요?”
“그대의 마음을 빼앗는 일.”
그렇게 속삭인 그는 내게 입 맞추었다. 밤의 장막이 내려앉은, 거리의 야경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발코니에서, 우리는 아주 부드럽고 다정한 입맞춤을 나누었다. 입맞춤이 끝난 뒤에도 우리는 잠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진득한 눈으로 나를 보았다. 나는 그와 키스한 것도 쑥스러운데, 키스 직후에 그렇게나 뜨거운 시선을 받는 것은 더더욱 민망해서 그의 시선을 피했다. 그 야릇한 분위기를 견디지 못하고, 나는 침묵을 깨기 위해 입을 열었다.
“사적인 질문을 하나 해도 될까요?”
“무엇이든.”
사실 줄곧 물어봐도 될지 안 될지 고민하던 것이었지만……. 그의 진지한 태도에 용기를 얻은 내가 물었다.
“당신에게는 인생을 걸어도 아깝지 않은 ‘목표’라는 것이 있다고 했죠. 혹시 그 목표가 뭔지 알 수 있을까요?”
그의 일생의 목표라는 것이 무엇이든, 그가 내 남편인 이상 내 삶에도 영향을 적지 않게 영향을 끼칠 수 있는 문제였다. 그러니 나로서는 알고 싶을 수밖에. 아니,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그냥 그에게 그런 게 있다는 이유만으로도 관심이 갔다. 그리고 그가 걱정이 됐다. 황위까지 움켜쥘 수 있을 정도로 유능한 그가 일생을 걸고 목표로 해야 하는 일이라는 건, 어마어마하게 어려운 일이라는 것…… 그리고 어쩌면 아주 위험한 일이라는 것이다. 그가 그렇게 어렵고 위험한 일에 매달려야 한다는 이유만으로도 궁금하다니. 그에게 아무런 관심도 없었던 일 년 전에는 상상도 하지 못했을 일이었다. 그런 내 걱정을 느낀 것일까, 알렉산드로스는 조금의 불쾌한 티도 없이 웃으며 내 손을 끌어당겼다.
“당연하지, 로벨리아. 난 그대에게 숨기는 게 없었으면 하니까.”
그는 내 손을 잡아들고 입 맞췄다. 그 간지럽고 따스한 감촉에 점점 익숙해지는 나 자신이 낯설었다.
“하지만 그건 그대를 위험하게 만들 수도 있는 정보야. 내가 세상 그 무엇보다 중요시 여기는 게 그대의 안전이란 것, 그대 역시 알고 있지?”
“네.”
“그래서 나는 최대한 준비가 된 뒤, 그대의 안전을 확신할 수 있을 때 그대에게 내 목적을 알려주고자 해. 하지만 약속하지. 그때가 되면 그 무엇보다도 그대의 궁금증을 풀어주는 걸 우선으로 할 테니.”
한때 그의 말이라면 무조건 의심하고, 어떤 꿍꿍이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때가 있었는데……. 이상한 일이었다. 지금의 나는 그의 이 말에 묘하게도 안심이 됐다.
‘그리 말했으면, 그리하겠지. 그는 내게 거짓말을 하지 않는 남자니까. 내게 무척이나 충실한 사람이고.’
‘준비가 되면 최대한 빨리 알려주겠다’라는 그의 말은 믿음이 갔고, 또 믿고 싶었다. 그의 약속은 내 가슴 속에 살포시 박혀 들어 작은 온기를 퍼지게 했다. 그래서 나는 아쉬움 없는 미소를 지을 수 있었다.
“그리고 또? 내게 뭐 궁금한 거 없나? 그대에게라면 뭐든 알려주지.”
“아, 그렇게 말씀하시니 생각났어요.”
나는 그를 향해 상체를 돌리며 말했다.
“그게, 어떤 질문이냐면…….”
*** 우리는 즐거운 저녁 시간을 보낸 뒤 황궁으로 돌아왔다. 나는 몸을 씻고 환복한 뒤 침대에 벌렁 드러누워 눈을 감았다.
‘요즘 무척 즐거운 것 같아.’
요즘의 나는 행복하고, 가슴 한구석이 간질간질한 설렘을 매일 느끼고 있었다. 좋아하는 일을 하고, 좋아하는 사람들과 시간을 보내는 일은 무척이나 든든한 충만감을 느끼게 했다. 하지만 이런 와중에도……. 딱 한 가지 신경 쓰이는 것은 있었다.
‘아이샤와 대신관.’
나는 눈을 번쩍 떴다.
‘특히 대신관. 아이샤 쪽은 견제할 가치도 없어 보이지만, 대신관은 보통 사람이 아니야.’
그 사실을 나는 그와의 지난번 대면에서 실감했다.
‘……그는 대체 어떻게 내가 빙의자라는 사실을 알아낸 걸까?’
물론 정말 그의 말대로 신탁이 내려온 것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나는 그의 말이 곧이곧대로 믿기지 않았다. 내게 그는 묘하게 신뢰가 가지 않고, 보이는 것보다 속이 검은 사람으로 보였다.
‘사실 신탁이 아니고서도 내가 빙의자라는 것을 알 수 있는 기회가…… 없지는 않지.’
솔직히 빙의자라는 티는 꽤 났다고 생각한다. 하루아침에 성격도, 습관도, 취향도 완전히 바뀌었으며 그것을 숨기지도 않았다.
‘보통 사람이라면 주변의 어떤 사람의 성격이 한순간에 바뀐다고 해도 다중인격 같은 걸 의심하지 다른 사람의 영혼이 들어왔다고 생각하진 않을 거야. 나 같아도 그랬을 거야. 그래서 나는 더더욱 안심하고 내가 달라진 사실을 숨기지 않을 수 있었던 거고.’
빙의자라는 개념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그럴 것이다. 하지만…… 상대는 대신관이었다. 그 직위가 어느 정도의 정보를 가지고 있는지 나는 모른다. 어쨌든 보통 사람들과는 비교할 수도 없을 정도의 정보 우위에 서 있을 것이다.
‘신탁이든 아니든, 어떻게 알았든 간에 대신관은 내가 빙의자라는 사실을 알고 있어. 게다가 조작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그렇다는 내용의 신탁 기록도 있지.’
그 사실은 내 피를 싸늘하게 식게 만들었다.
‘만일 그가 내가 빙의자라는 사실을 공공연히 발표한다면 난 어떻게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