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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6. 진전되는 감정 (106/151)

106. 진전되는 감정2022.01.06.

연말행사를 위해 나는 드레스를 새로 맞췄다. 완성되어 있는 기성복을 구매하는 방식과 다르게 맞춤복을 제작하는 오트쿠튀르 방식은 사는 사람 입장에서도 신경 써야 할 것이 많았다. 오늘만 해도, 나는 가봉 단계에 들어선 드레스를 전부 입어보고 디자이너에게 피드백을 말해주어야만 했다. 언제나 겪어오던 일이기에 특별히 힘들 것은 없었다. 다만 평소와 다른 것이 있다면, 시녀들과 케일럽 외에 알렉산드로스 역시 나를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는 오늘 아침 나의 쇼핑을 구경하고 싶다고 했다. 그것은 놀랄 만한 일이었다. 디자이너가 황후궁에 찾아오는 것도 아니고, 내가 부티크에 가서 쇼핑을 하기로 했기 때문이다. 알렉산드로스는 나와 함께 있기 위해 일부러 부티크까지 따라오겠다고 했다. 그 점이 미안해서 거절하려고 했지만 나와 함께 있고 싶다는 알렉산드로스의 의지는 확고했다.

16549694288805.jpg‘그래, 저렇게까지 말하는데 뭐. 내가 패션에 대단한 조예가 있는 건 아니니 보는 눈이 하나라도 더 많아지면 좋겠지.’

결국 우리는 함께 부티크에 왔다. 나는 드레스를 입은 채로 사람들의 앞에 나와서 모습을 보였다. 드레스는 꼼꼼한 재봉으로 완성된 것이 아니라 형태를 보기 위해 가봉된 것이었으므로, 디자이너의 조수들이 드레스가 뜯어지지 않도록 내 동작을 도와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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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49694288815.jpg“어쩜, 너무 아름다워요!”

16549694288815.jpg“역시 황후 폐하예요. 어떤 색이든 정말 잘 어울리세요!”

시녀들이 상기된 얼굴로 감탄했다.

16549694288805.jpg“입에 발린 말만 하지 말고 도움이 될 만한 의견을 이야기해주렴.”

16549694288815.jpg“입에 발린 말이라니요! 정말 진심인걸요.”

시녀들의 비행기 태우기에 나는 굉장히 민망해졌다.

16549694288805.jpg“케일럽, 너는 어떻게 생각하니?”

16549694288837.jpg“네? 저는 아시다시피 드레스에 대해 잘 몰라서요. 저는 그저…….”

케일럽은 붉어진 얼굴을 푹 떨궜다.

16549694288837.jpg“부족한 저로서는, 그저 너무나 아름다우시다는 생각만을 하고 있었어요.”

시녀들과는 다르게 수줍어하는 듯한 그 태도. 나는 귀여워서 그만 풋 하고 웃어버렸다.

16549694288805.jpg“그래, 고맙구나.”

16549694288837.jpg“저, 정말이에요. 그야말로……. 여신의 모습을 보는 것만 같아요.”

케일럽은 자신은 지나치게 깎아내리는 반면 남들을 고평가하는 버릇이 있었다. 남들에게 보이는 다정함의 반만큼만 자신을 대해준다면 좋겠는데. 나는 기분이 좋아져 그를 향해 따스한 미소를 보내고는, 알렉산드로스에게 물었다.

16549694288805.jpg“당신은요?”

소파에 등을 기대고 앉아 있던 그는 내가 나오자 상체를 앞으로 기울였다. 표정 역시 진지하기 그지없어, 그의 바뀐 자세만큼이나 그가 내게 들이는 주의력의 정도를 짐작게 했다.

16549694317043.jpg“정말 아름답기 그지없군.”

넋을 잃은 듯한 그의 얼굴은 쉽게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내 가슴을 두근거리게 했다. 그의 말에 공연히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것은 다른 이들에게 아름답다는 이야기를 들을 때와는 전혀 다른 기분이었다.

16549694288805.jpg“정말. 도움 될 말도 안 할 거면 됐어요.”

16549694317043.jpg“아니야. 할 말이 있어.”

알렉산드로스는 나를 향해 싱글싱글 웃다가 디자이너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나를 향한 다정함이 한껏 묻어나던 눈이 어찌나 빠르게 차갑게 식는지, 그 과정을 지켜본 내가 깜짝 놀랄 정도였다.

16549694317043.jpg“황후의 머리색에는 더 짙은 색이 잘 어울릴 것 같군. 피부가 희니, 원단은 조금 더 윤이 나는 걸로 해야겠고. 또 체형을 생각한다면…….”

16549694288815.jpg“분부 받들겠습니다.”

디자이너가 알렉산드로스의 지시를 허겁지겁 적어 내려갔다.

16549694288815.jpg“정말 놀랍군요. 황제 폐하께서 드레스에 대한 안목이 그리 높으신 줄 미처 몰랐습니다.”

디자이너의 말에 알렉산드로스가 피식 웃었다.

16549694317043.jpg“드레스에 대한 안목이 높은 게 아니야. 그걸 입을 사람에게 관심이 많은 거지.”

16549694288815.jpg“어머나…….”

16549694288815.jpg“어쩜 이렇게 로맨틱하실 수가!”

그의 말에 시녀들이 황홀한 얼굴을 했다. 나는 괜히 두근거리고 덥게 느껴져서 하녀에게 물을 가져다 달라고 해야 했다. 내가 입고 나오는 드레스들을 계속해서 지켜보며 간혹 피드백을 주던 알렉산드로스는 뭔가 의아한 듯한 눈을 했다.

16549694317043.jpg“그건 그렇고…….”

16549694288815.jpg“예, 궁금한 것이 있으십니까?”

디자이너의 빠릿빠릿한 말에 알렉산드로스는 잠시 고민하는 듯했다.

16549694317043.jpg“아니, 조금 이후에 개인적으로 묻도록 하지.”

16549694288815.jpg“예, 알겠습니다.”

16549694288805.jpg‘디자이너한테 묻고 싶은 거라는 게 대체 뭘까?’

그가 나를 통해서가 아니라 디자이너에게 직접 이야기한다니 괜히 신경이 쓰였다. 별 건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괜히 신경 쓰이는 이 기분은……. 아무래도 내가 그에게 호감이 있다는 걸 인정했기 때문일 것이다.

16549694288805.jpg‘인정하니 이렇게 홀가분한데 왜 계속 부정했을까.’

그가 로벨리아에게 잘못한 것도 사실이었고, 여러 가지 상황적 이유로 내가 그를 믿기 어려웠던 것도 사실이었다. 그때는 그 선택이 내게 최선이었기에 내가 황궁을 도망치거나 그를 밀어낸 일들을 후회하진 않는다.

16549694288805.jpg‘하지만 이렇게 두근거리고 좋을 줄 알았으면……. 조금만 더 진작 그를 받아들이는 건데. 그를 밀어내지 않았다면 그가 상처받을 일도 없었을 것이고…….’

과거를 후회하는 일이 잘 없는 나조차 그런 생각이 들 정도로 그는 내게 정말로 잘해주었다. 내가 도망쳤다가 돌아온 뒤에도 그의 나에 대한 애정은 명확했다. 그러나, 혹여 자신이 내게 부담을 주거나 해서 내가 다시 도망칠까 봐 걱정되는지 그는 꽤 조심스러워 보였다. 하지만, 얼마 전 내가 그에게 호감을 느끼고 있는 걸 인정하자 그는 내게 자신을 어필하는 데 거침이 없어졌다. 오늘의 외출 역시 그 일환일 것이다. 부티크에서의 일정이 끝난 뒤, 나는 곧장 황궁으로 돌아가려 했다. 하지만 알렉산드로스가 다정하게 허리를 감싸며 말을 걸어왔다.

16549694317043.jpg“벌써 돌아가려 하나? 오늘 오후 일정은 특별히 없는 걸로 알고 있는데.”

16549694288805.jpg“하지만 이곳에서는 더 이상 볼일이 없는걸요. 돌아가야지 어쩌겠어요.”

16549694317043.jpg“내가 좋은 곳을 알아놨는데, 저녁 식사를 함께하는 것이 어때. 수도의 아름다운 거리가 내려다보이는, 야경이 무척 근사한 곳이야.”

그런 곳은 대체 언제 알아놨을까? 우리가 같이 쇼핑을 나오기로 한 게 바로 오늘 아침의 일인데 말이다. 하지만 기분이 싫지는 않았다. 사소한 것까지 신경을 쓰는 그의 섬세함을 나는 이전부터 높이 평가하고 있었다.

16549694288805.jpg“그럼 그래요.”

내 대답에 알렉산드로스는 몹시 기쁜 듯 웃었다. 고작 함께 저녁을 먹을 뿐인데, 그것만으로도 원하는 것을 다 가진 것 같았다.

16549694317043.jpg“잘 생각했어, 로벨리아. 최고의 저녁 시간을 만들어주지.”

그렇게 말한 그는 내 손을 잡아들어 몇 번이고 입 맞췄다. 그의 입술이 와닿은 손등은 간질간질했고, 몹시 뜨거웠다.

16549694288805.jpg“거기까지는 걸어서 가나요? 아니면 마차를 타고 가나요?”

16549694317043.jpg“마차를 타고 갈 거야. 자, 이쪽으로…….”

마부가 주차해둔 마차를 이끌고 나오는 사이에 사건은 터졌다. 제국의 하수도 설비는 한국만큼 좋지 않았다. 그래서 차도마다 크고 작은 진흙탕이 곳곳에 형성되어 있었다. 그것은 설령 수도의 번화가라고 해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하필 지나가던 마차가 그 진흙탕 중 하나를 밟은 것이다. 촤악! 검은 구정물이 이쪽을 향해 쏟아졌다. 그것도 하필이면 나를 향해 정면으로. 하나…….

16549694371953.jpg“폐하!”

수행원들이 당황하며 알렉산드로스의 눈치를 살폈다. 알렉산드로스의 값비싼 코트는 온통 진흙 범벅이 되어 있었다. 그는 내가 진흙을 맞지 않도록 지킨 것이다.

16549694317043.jpg“진흙이 튄 곳은 없나?”

자신의 코트가 온통 진흙 범벅이 되었는데도 그는 내게 조금이라도 튀지 않았는지 염려하며 나를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다행히도 내게는 튄 자국 하나 없었다.

16549694317043.jpg“다행이군.”

그제서야 그는 안도한 듯 웃었다. 그런 그의 모습을 보는 나는 뱃속이 울렁거렸다. 그가 나에게 유독 다정하게 굴고 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이렇게 직접 그 다정함을 겪는 건 완전히 다른 일이니까. 한편 수행원들은 조마조마해 보였다. 제국의 황제가 진흙을 맞다니, 이건 대사건이었다. 가뜩이나 알렉산드로스는 상벌에 엄격했고, 당장 수행원들을 엄벌에 처할 만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알렉산드로스는 그들을 벌주지 않았다.

16549694317043.jpg“너무 신경 쓰지 말고 새 코트를 가져오도록.”

16549694371953.jpg“예, 예!”

수행원들이 허겁지겁 알렉산드로스의 더럽혀진 코트를 벗기고 새 코트를 가져와 입혀주었다. 알렉산드로스가 나를 향해 한쪽 눈을 찡긋하는 것을 보고 나는 그가 자비로워진 것도 나 때문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동안 나와 이런저런 일들을 겪어온 그라면, 내가 다른 사람에게 지나치게 벌을 주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을 테니까.

16549694288805.jpg‘그렇게나 고집스러웠던 그가, 나 하나 때문에 이렇게까지 변하다니.’

타인을 바꾼다는 건 정말 기묘한 경험이었다. 하지만 정말로, 싫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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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우리는 함께 알렉산드로스가 말한 식당으로 향했다. 그가 미리 예약까지 해두었는지 우리는 기다리지 않고 단독실로 안내되었다. 식당은 조금 고지대에 있었는데, 그의 말대로 아름다운 거리와 황궁의 정경이 내려다보였다. 어둠이 깔려 분홍색이 되어가는 풍경을 보며 나는 감탄했다.

16549694288805.jpg“정말 아름답네요. 이런 식당이 있는 줄은 몰랐어요. 워낙 외출을 잘 안 하다 보니.”

16549694317043.jpg“그대가 이 풍경을 즐겨줘서 나도 기쁘군.”

알렉산드로스는 내가 앉을 의자를 빼주며 말했다.

16549694317043.jpg“그대와 함께 공유하고 싶었던 풍경이야. 우리가 함께 이룬 도시의 모습이지.”

16549694288805.jpg“우리가…… 함께요?”

16549694317043.jpg“그래. 나는 궁외부의 일, 그대는 궁내부의 일을 하지 않나. 하나라도 없었으면 이 도시가 이렇게 아름답고 부유해지는 일은 결코 없었겠지.”

그의 말에 나는 말문이 막혔다. 이곳에 온 뒤로, 내가 하는 일을 이렇게 인정하는 말은 처음 들어보는 것 같았다. 아무래도 궁내부의 일은 궁외부의 일에 비해 별것 아닌 걸로 취급받기 마련이었다. 심지어 나를 도와 궁내부의 일을 하는 시녀들이나 궁내부장까지도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눈에 보였다. 잘해도 겉으로 그렇게 드러나지 않아 생색을 내기 어렵지만, 못하면 바로 티가 나는 일임을 나는 이전의 파업으로 증명했다. 그런데 알렉산드로스는 내 노고를 인정하고 능력을 높이 평가했다. 그것은 무척 뿌듯하고 기분 좋은 일이었다.

16549694288805.jpg‘이 거리의 반은 내가 이루어낸 것이라고…….’

나는 새삼스러운 기분으로 창밖을 내다보았다. 정경이 아름다운 것은 아까나 마찬가지였지만, 그의 말을 들으니 이 풍경이 괜히 더 사랑스럽게 보였다. 오래 걸리지 않아 코스 식의 요리들이 나왔고, 우리는 풍경과 함께 그것을 즐겼다.

16549694288805.jpg‘정말 놀라울 정도로 섬세하고 다정해졌구나. 세상에 이런 남자가 또 있을까?’

나는 문득 생각했다.

16549694288805.jpg‘솔직히 이대로라면 호감을 넘어 그에게 푹 빠져버리는 것도 시간문제일지도.’

대체 왜 이렇게 되어버린 걸까? 내가 원하는 라이프 스타일은 이런 바쁘고 정신없는 황궁에서 황후로 사는 것이 아니었다. 나는 한가로운 소도시에서 개와 고양이를 한 마리씩 키우며 좋아하는 일을 하며 살고 싶었다. 게다가 분명 알렉산드로스는 내 취향은 아니었다. 나는 이렇게 치명적으로 섹시한 남자보다는 좀 단정하고 수수한 스타일이 좋다. 하지만 그런 취향의 벽 같은 걸 넘어서는 무언가가 그에게는 있었다.

16549694288805.jpg‘하긴 그러니까 로판 남주 같은 것도 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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