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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5. 계속 놀고 먹어주었으면 좋겠는데 (95/151)

95. 계속 놀고 먹어주었으면 좋겠는데2021.1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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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작 허리끈을 풀어내는 그 짧은 순간이 한없이 길게 느껴지기도, 한편으로는 조금 더 오래 지속됐으면 싶기도 했다.

16549691748187.jpg‘고작 이 정도로 이렇게 동요하다니 나도 정말.’

로벨리아는 자기 자신이 원망스러울 정도였다.

16549691748187.jpg‘역시 내가 연애를 안 해봐서 그래. 전생에 일만 하지 말고 남자도 좀 만나봤었어야 했는데.’

하지만 이제 와서 어찌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그녀는 모쏠이었고, 그런 그녀에게 상대는 지나치게 자극적이었다.

16549691748187.jpg‘알렉산드로스도 나만큼이나 이 상황을 의식하고 있을까?’

확신이 서지 않았다. 포옹하는 것만으로도 그의 심장이 격렬하게 박동했던 일을 생각하면 그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16549691748187.jpg‘포옹과 허리끈을 풀어주는 일은 조금 다른 일이니까. 그는 정말로 아무런 의도가 없었는데 나 혼자 이렇게 설레발치는 것일지도.’

하지만, 솔직히 그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16549691748187.jpg‘나만 이렇게 신경 쓰이고 두근거리는 거라면, 아무래도 억울하잖아.’

한편, 알렉산드로스는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손가락 사이사이를 파고드는 허리끈과, 두꺼운 천 너머로 느껴지는 그녀의 몸. 허리끈을 풀어주느라 뒤에서 바짝 붙은 그의 코끝에 달콤한 향기가 스쳤다. 향수 향과 분내, 그에 섞인 그녀의 체향. 같은 향수를 뿌리더라도 다른 사람들과는 전혀 다르게 느껴질, 그녀만의 살 내음. 진정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그녀의 뒷목에 코를 박고 모든 향을 남김없이 들이쉬고 싶은 욕망이 솟구쳤다.

1654969174821.jpg‘고작 허리끈을 풀어주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되어버리다니.’

자신의 몸이 뜨거워지는 것을 자각하며 알렉산드로스는 생각했다.

1654969174821.jpg‘나의 이 음험한 욕망을 순진한 그녀는 상상도 하지 못하겠지.’

아직은 감추고 숨겨야만 할 것들이었다. 그녀에게 부담감을 주거나 더 이상의 미움을 사고 싶지는 않았으니까. 이 욕망은 믿을 수 없이 뜨겁고 강렬했지만, 그녀를 위해서라면 참아낼 수 있었다. 이러고 있으니 문득 과거 비서관에게 들었던 말이 떠올랐다.  

16549691748218.jpg‘황제 폐하께서도 이제 혼인하신 지 3년이 되었고 즉위하신지는 4년이 되었습니다. 치세를 안정시키기 위해서는 슬슬 후사 계획을 세우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알렉산드로스는 비서관과 대신들이 사적인 영역에 간섭하는 것을 기꺼워하지 않았다.  

1654969174821.jpg‘내가 어련히 알아서 할 일이다. 그대는 걱정하지 말도록.’

16549691748218.jpg‘아뢰옵기 황공하오나 혹시 그런 쪽의 욕구가 없으신 것은 아닙니까? 이러다 시기를 놓쳐 영영 후사를 보지 못하실까봐 걱정이 됩니다.’

  어처구니 없는 오해였다. 알렉산드로스에게도 욕구는 있었다. 그저 여체를 탐할 시간과 노력마저 아까운 것 뿐이다. 그 시절의 그에게 ‘대업’ 외에 중요한 일은 아무 것도 없었으니까. 그 일을 생각하니 공연히 웃음이 나왔다. 비서관이 걱정할 만도 했다. 자신이 이렇게까지 육욕으로 가득한 인간일 줄 자신조차 알지 못했으니. 이제껏 알렉산드로스는 육욕에 눈이 멀어 어리석은 일들을 저지르는 사내들을 비웃곤 했다. 그런 유형은 그가 제일 이해하지 못하는 인간 중 하나였다. 그 모든 것이 로벨리아를 만나기 전까지의 일이다. 허리끈을 완전히 풀어낸 뒤 알렉산드로스는 아쉬움을 숨기며 말했다.

1654969174821.jpg“다 되었어, 로벨리아. 소파 등받이에 기대어 편히 앉지 그래.”

로벨리아는 그가 말하는 대로 했다. 알렉산드로스는 그런 그녀를 사랑스럽다는 듯이 들여다보며 그녀의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빗어 내렸다.

1654969174821.jpg“편히 쉬도록.”

그 다정한 목소리도, 손길도 도무지 적응이 되지 않았다. 로벨리아로서는 낯선 것들 투성이었다. 그래서인지 심장도 진정이 되지 않았다.

16549691748187.jpg‘이래서는 편히 쉬기는 글렀는걸.’

로벨리아는 한숨을 삼키며 생각했다. 그러는 동안에도 숨 막히도록 다정한 시선은 옆얼굴을 쓰다듬듯 계속해서 쏟아지고 있었다. ***

16549691774427.jpg“어떡하죠? 로벨리아를 죽일 수가 없어요.”

아이샤가 겁에 질린 얼굴로 말했다.

16549691774427.jpg“이전에 비해 호위가 너무 많아졌어요. 그리고, 무엇보다도, 알렉산드로스가 언제나 그 여자의 곁에 있어요! 낮이나 밤이나……. 공적인 자리나 사적인 자리나……!”

아이샤는 핏기없는 얼굴로 손톱을 물어뜯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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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49691774427.jpg“그런 모습을 볼 때마다 미칠 것 같아요. 둘이 꼭 맞는 퍼즐 조각처럼 끈덕지게 붙어 있어요. 그 틈에 제가 파고들 수 있을까요? 너무 걱정돼요. 그리고 무서워요, 대신관님…….”

그녀의 크고 순했던 검은 눈은 질시와 분노로 더럽혀져 있었다. 그런 아이샤의 모습을 대신관은 무심한 얼굴로 내려다보았다.

16549691774448.jpg“그만. 손이 흉하기까지 하면 황제가 당신의 어떤 점이 좋아서 돌아보겠습니까. 제국의 별로서 품위를 지키도록 하세요.”

아이샤는 그제서야 손을 입술에서 떼었다. 대신관이 이어 말했다.

16549691774448.jpg“황비 전하의 말이 맞습니다. 황후를 직접적으로 해치는 길은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어요. 황제의 집착은 하루가 다르게 심해져 가고, 그럴수록 황후를 지키는 보안도 삼엄해지고 있죠.”

16549691774427.jpg“그럼 전…… 대체 어떻게…….”

아이샤가 울상으로 물었다. 대신관은 자신의 턱을 쓰다듬었다.

16549691774448.jpg“잠깐 기다리세요. 그렇다고 우리에게 길이 남아 있지 않다는 말이 아닙니다. 애초에, 황후가 죽은 줄 알았을 때의 황제의 반응을 보면 황후를 죽이는 것이 정답이 아닐 수도 있어요.”

16549691774427.jpg“네? 그…… 그러면요?”

16549691774448.jpg“연적 중 가장 상대하기 어려운 상대는 죽은 사람이라고들 하지요.”

대신관이 담담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16549691774448.jpg“인간은 타인이 지금은 이승에 없다는 이유만으로 더 애틋해 하고 그리워하며 마음속에서 미화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황후가 죽은 줄 알았을 때 황제의 비이성적인 반응을 보면 그 역시 그러할 겁니다.”

16549691774427.jpg“그…… 그럼, 대체 어떻게 해야 하죠? 살아 있는 상태로 둘을 떼어놓아야 한단 말인가요?”

16549691774448.jpg“본인들의 의사와 관계없이 사회와 주변의 영향으로 떨어뜨려 놓는 것은 오히려 그리운 감정에 불을 지필 뿐입니다. 황비 전하께서는 ‘로미오와 줄리엣 효과’라고 들어보셨는지요?”

16549691774427.jpg“그러면 대체…….”

아이샤가 무심코 중얼거린 말에 대신관이 한숨을 쉬었다. 그의 반응에 아이샤는 흠칫 놀랐으나, 대신관은 그 이상으로 그녀를 면박 주거나 하지는 않았다.

16549691774448.jpg“아직도 감이 안 잡히신다면 알려 드리지요.”

대신관이 차분한 태도로 말했다.

16549691774448.jpg“황후가 죽는 것, 그리고 두 사람의 의사와 관계없이 강제로 떨어뜨려 놓는 것보다 황제가 받아들이기 쉬운 방법은, 바로 황후가 스스로 그를 떠나는 방법일 겁니다.”

16549691774427.jpg“하지만……! 로벨리아는 알렉산드로스를 떠나려고 했다가도 다시 제 발로 돌아왔는걸요.”

아이샤가 납득할 수 없다는 듯이 말했다.

16549691774427.jpg“그런 여우 같은 여자를 어떻게 스스로 떠나게 할 수 있겠어요? 그 여자는 결코 떠나려 하지 않을 게 뻔해요. 전부 다 얻었으니까요! 부도, 영향력도, 알렉산드로스의 사랑도……. 전부 다!”

말하다가 감정이 격해진 탓에, 밭은 숨을 헉헉대던 아이샤에게……. 대신관이 입꼬리를 끌어올려 간드러지게 웃어 보였다.

16549691774448.jpg“그것에 대해서는 너무 걱정하지 마시지요, 황비 전하.”

그가 눈꼬리를 휘어 접었다. ‘신이 사랑한 피조물’이란 것이 존재한다면, 이런 모습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아름다운 미소였다.

16549691774448.jpg“제게 다 생각이 있으니까 말이지요.”

  *** 황궁에 돌아온 뒤, 나는 다시 일을 하기 시작했다. 그런 내 모습이 의아했는지 시녀들과 알렉산드로스는 어째서 일을 하는 거냐고 물었지만, 내 대답은 정해져 있었다.

16549691748187.jpg“이제 이혼당하려고 일부러 돈을 쓸 필요도 없고, 저 스스로 당신 곁에 있기로 선택했으니까요. 그리고 아무것도 안 하기에는 몸이 근질근질하고 심심하거든요.”

알렉산드로스는 내가 갑작스레 일을 시작하는 것이 걱정스러운 모양이었다.

1654969174821.jpg“그렇게 고생을 한 지 얼마 안 돼서 바로 업무를 시작할 필요는 없어. 몸에 무리가 갈지도 모르지 않나. 이제껏 그랬던 대로 궁내부 업무는 계속 사람을 고용해 위임하는 게 어떤가? 혹여 추가업무가 생기면 그건 전부 내가 할 테니.”

16549691748187.jpg“아니요. 여기 있기로 선택한 건 저예요. 이깟 서류 업무 좀 한다고 쓰러질 정도로 허약하지도 않고요.”

그의 제안을 나는 딱 잘라 거절했다.

16549691748187.jpg“저의 능력 한도 내에서 책임질 수 있는 일은 제가 하고 싶어요. 아무런 일도 하지 않는 건 아무래도 체질에 맞지 않아서요.”

게다가, 나는 요즘 하는 일이 꽤 즐겁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원래 가만히 있는 건 체질상 잘 맞지 않았다. 그간은 이혼을 목표로 했으니 궁내부 업무를 하는 대신 회계사 공부, 사업 공부 등의 이혼 준비에 집중했는데, 이제는 이혼할 마음을 버렸으니 그런 일은 하지 않아도 되게 되었다. 그 대신 내가 선택한 것이 바로 궁내부 업무였다. 그간 전문가들의 손에 맡겨둔 업무도 상당히 잘 굴러가고 있었으나, 역시 내 취향, 내 가치관대로 직접 무언가를 운영해나가는 일은 남을 시키는 것과 다른 성취감이 있었다. 나는 전생에 행정고시를 통과해 행정공무원으로서 일했다. 황후의 궁내부 업무는 그때 했던 일과도 꽤 비슷했다.

16549691748187.jpg‘결국 전생에 좋아했던 일을 이번 생에도 다시 하게 된 셈이지. 그렇게 생각하면 난 참 운이 좋아.’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만족했지만……. 아무래도, 알렉산드로스는 만족할 수 없는 모양이었다. *** 알렉산드로스는 로벨리아가 일을 시작한 것이 걱정스럽기 짝이 없었다. 과중한 일이 그녀의 건강을 해치거나, 지나친 스트레스를 줄까 봐 우려됐던 것이다.

1654969174821.jpg“정 그렇다면 소일거리처럼 조금의 업무만 하는 것이 어떤가? 하루에 세 시간 정도면 충분할 것 같은데.”

16549691748187.jpg“세 시간을 누구 코에 붙여요? 됐어요. 전 일하는 게 좋아요. 그러니 말리지 마세요.”

그렇게 선언한 로벨리아는 정말로 하루에 최소 8시간은 꼬박꼬박 채워서 일을 하기 시작했다. 골치가 지끈거려왔다.

1654969174821.jpg‘원래 그랬듯 놀고먹고 돈만 펑펑 써도 좋은데, 일이라니! 왜 고생을 사서 하려고 하는 건지.’

로벨리아가 일을 하지 않는다고 해도 알렉산드로스는 정말 조금도 아쉽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의 즐거움이 그의 즐거움이었고, 그녀의 기쁨이 곧 그의 기쁨이었다. 그녀가 놀고먹고 여유를 즐기는 모습을 보면 안 먹어도 배가 부른 듯 흐뭇하던 그였다. 그런데 설마 스스로 일을 하려고 들 줄이야……. 그렇다고 억지로 못 하게 할 수는 없었다. 일을 하고자 하는 것은 그녀의 의지였으니, 그는 그것을 침해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알렉산드로스는 강압적이지 않은 방법으로 로벨리아를 일에서 떼어놓을 계획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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