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 내가 허리끈을 풀어줄까?2021.11.25.
“그건 그렇고, 그대의 조국을 너무 오래 비워둔 것이 아닌가 우려되는군. 그대의 신관들이 있는 곳으로 이제 슬슬 돌아가보는 것이 어떤가?”
비록 대신관이 황궁에서 신세를 지고 있는 입장이라지만, 이렇게 공개적인 장소에서 대놓고 돌아가라는 말을 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문제였다. 따라서 알렉산드로스의 말을 들은 사람들은 모두 크게 놀랐다.
“황제 폐하께서 직접 대신관님께 돌아가라고 하시다니 놀랍군요!”
“여간하면 그런 말씀을 할 만한 분이 아니실 텐데요.”
하나 알렉산드로스의 푸대접에도 대신관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한 얼굴이었다. 그는 평소와 같은 서글서글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물론 저도 이제 슬슬 그러고 싶지만, 아무래도 누이와 같은 황비 전하가 걱정되어 발을 떼기가 어렵습니다. 두 분 폐하께서도 아시지 않습니까? 황비 전하께서는 아직 많이 어수룩하셔서, 어엿한 제국의 별이라기엔 모자란 점이 많으시지요.”
대신관의 농담 같은 말에 구경꾼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그건 그렇지.”
“황비 전하께서는 공부가 많이 필요하시지.”
“황후 폐하에 비하면 갈 길이 머시지.”
숨죽여 속삭이는 듯했으나, 그 목소리들은 명백히 모두의 귀에 꽂혔다. 아이샤를 깎아내리는 대신관의 농담에 분위기가 조금 풀어졌다. 키득키득 숨죽여 웃는 사람도 있었다. 그 모습을 보는 로벨리아는 썩 기분이 좋지 않았다.
‘대신관은 아이샤의 편이 아니었나? 왜 공개적인 곳에서 아이샤를 깎아내리는 농담을 하는 거지?’
대신관이 아이샤와 많이 친해서 이런 농담도 기분 나쁘지 않게 받아들일 정도인가? 그렇게 생각하기에는, 아이샤는 명백히 기분이 상한 것처럼 보였다.
“…….”
그녀는 붉어진 얼굴을 푹 숙이고 작은 두 주먹을 꾹 쥐고 있었다. 분명 수치심을 참고 있는 것이리라.
‘살다 살다 아이샤를 불쌍하게 느껴보는 건 또 처음이네.’
로벨리아는 생각했다.
‘그렇다고 끼어들어서 그녀의 변호를 해줄 정도로 우리 사이에 의리가 있지는 않지만…….’
이러니저러니 해도, 자신의 암살 사주 혐의의 가장 큰 용의자가 아이샤라는 사실을 로벨리아는 잊지 않고 있었다. 그때였다.
“황비를 혼자 두는 것이 그렇게 걱정이 되는데, 다른 세계에서 온 지 2달밖에 되지 않은 어린 애를 제국에 일 년 넘게 방치해두었다가 찾아왔군그래.”
알렉산드로스는 비꼬는 의도가 다분한 어조로 말했다. 그랬다. 대신관은 언제나 아이샤를 걱정하고 진심으로 아끼는 것처럼 말했으나, 정말 걱정이 된다면 제국으로 보낸 뒤 일 년이나 지난 시점에서 찾아오지는 않았을 것이다. 더더욱이 제국 문화와 내궁부 업무를 거의 익히지 못한 상태로 보내지는 않았으리라.
‘내가 대신관이었고 아이샤를 진심으로 아꼈다면, 적어도 일이 년은 데리고 있으면서 철저한 준비를 시킨 뒤 보냈을 거야.’
로벨리아 역시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허점을 찌르는 알렉산드로스의 말에, 대신관은 드물게도 당황한 것처럼 보였다.
“아, 그. 그건…….”
그가 말을 잇지 못하는 사이에 알렉산드로스가 다시 말했다.
“만일 그대가 제국에서 더 지내고 싶다면, 억지로 돌려보낼 생각은 없어.”
그의 목소리는 평소와 달리, 기묘할 정도로 냉랭하게 들렸다.
“하지만, 앞으로는 처신을 더 잘하는 것이 좋을 거야. 제국의 황실은 지켜야 할 것을 지키기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을 테니.”
“……!”
순간 알렉산드로스와 대신관 사이에 의미심장한 빛이 오고 갔다.
“황제 폐하께서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신 거죠? 지켜야 할 것을 지킨다니요?”
“처신이라니요? 대신관님께서 처신을 잘못 하신 적이 있던가요?”
알렉산드로스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사람들이 수군거렸다. 그 자리에서 알렉산드로스의 경고를 완전히 이해한 사람은, 단 한 사람밖에 없었다. 바로 대신관이었다.
‘황후 시해 사건의 뒷배가 나라는 사실을 눈치챘군.’
외알안경의 뒤에서, 그의 눈동자에 냉랭한 빛이 어렸다. 알렉산드로스는 그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 그는 로벨리아의 어깨를 감싼 채, 그녀를 휴게실로 인도했다.
“황제 폐하와 대신관님께서 말다툼을 하시다니 놀랍군.”
“두 분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던 걸까요?”
의아해진 사람들이 수군거렸지만, 궁금증은 풀리지 않았다. 그들의 관심을 끌던 스캔들 메이커가 사라지자 사람들은 곧 각자의 즐거움을 위해 흩어졌다. 마침내 그 자리에는 아이샤와 대신관, 그리고 그들에게서 떨어질 콩고물을 기대하는 몇 명의 귀족들뿐이었다.
“대, 대신관님……. 괜찮으세요?”
한참이나 눈치만 보던 아이샤가 조심스레 물었다. 그제야 대신관은 미소 지었다.
“그럼요, 잠시 생각해야 할 것이 있었을 뿐이에요.”
“정말요? 다행이에요. 전 대신관님께서 기분이 상하신 줄 알고…….”
아이샤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제가 왜 그 정도로 기분이 상하겠어요. 황실에서 오래 있었던 건 사실이니, 황제 폐하께서 저렇게 말씀하시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죠. 역시 최대한 빨리 업무를 수행하고 돌아가야겠네요.”
“네, 그래요. 저도 열심히 할게요.”
“저, 대신관님. 혹시 저를 기억하십니까? 다름이 아니고 저는 벨프랑 후작가의…….”
대신관에게 말을 걸고자 하는 이들이 많아 아이샤는 잠시 자리를 비켜주었다. 차라리 그편이 아이샤에게는 더 안도가 되었다. 왜냐하면…….
‘대신관님, 입은 웃고 계시는데 눈빛은 얼어붙은 듯이 차가워.’
아이샤는 알고 있었다. 저건 대신관이 화가 났을 때의 표정이었다. 그럴 때 자신은 그에게서 떨어져 있는 편이 나았다. 괜한 불똥을 맞지 않으려면. 한편 대신관은 귀족들과 얄팍하고 쓸데없는 이야기를 나누며 생각했다.
‘황제가 벌써 거기까지 눈치챘을 줄이야.’
언젠가는 들킬 것이라고 예상했지만…… 생각보다 빠르다. 알렉산드로스는 그저 떠본 것이 아니었다. 나름의 확신을 가지고 있는 상태였을 것이다. 그러지 않았으면, 빈틈없는 알렉산드로스가 외교적 결례일 수도 있는 행동을, 심지어 이렇게나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행하지는 않았으리라.
‘역시 쉬운 상대가 아니로군. 앞으로는 좀 더 조심히 행동하는 수밖엔 없겠어.’
누구라도 신뢰가 가는 다정한 미소 뒤에 그런 속셈을 숨긴 채, 대신관은 남몰래 이를 악물었다.
***
“대신관에게 그런 식으로 대해도 되는 거예요? 그는 성국의 원수잖아요. 외교 문제가 되지 않겠어요?”
휴게실 문이 닫히자마자 로벨리아는 숨도 쉬지 않고 말했다. 알렉산드로스는 부드러운 손길로 그녀를 소파에 앉혔다. 다리를 굽혀 그녀와 눈높이를 맞춘 그가 다정하게 속삭였다.
“성국을 대하는 외교 활동에 내가 얼마나 많은 공을 들이고 있는데. 성국과는 오랜 시간 다져온 단단한 외교적 신뢰가 있으니,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좋아.”
‘그러니까 그렇게 공들여 쌓은 신뢰를 이런 식으로 깎아 먹어도 되냔 말이야.’
고민하는 로벨리아의 눈앞에 음료가 들이 밀어졌다. 칵테일 체리가 동동 띄워진 시원한 과일 펀치였다.
“너무 걱정 마. 그대가 두려워할 만한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니.”
“하지만…….”
“오래 말을 해서 목이 탈 테니 좀 마셔두는 게 좋을 거야. 무도회에서 일어나는 사고의 6할은 탈수로 인한 것이지.”
로벨리아는 그제야 잔을 입에 가져갔다. 음료수는 적당히 달았고, 향기로웠으며 한 모금만으로도 칼칼한 목이 부드러워지는 듯했다. 로벨리아는 순식간에 주스 잔을 비웠다.
“많이 피곤해 보이는군.”
어느샌가 그녀의 옆에 앉은 알렉산드로스가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오늘은 무리했으니, 이만 들어가서 쉬는 게 어때?”
“하지만 저의 귀환을 축하하는 행사인데 제가 없으면 곤란하잖아요.”
“그런 건 너무 걱정하지 마. 내가 알아서 할 테니.”
“아니에요, 돌아가고 싶지 않아요. 구두를 벗고 잠시 쉬면 될 것 같아요.”
로벨리아의 단호한 반응에 알렉산드로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대가 원한다면.”
그렇게 말한 그는 그녀의 발에 손을 뻗었다. 그는 몹시 자연스러운 태도로 로벨리아의 구두를 손수 벗겨주었다.
‘황제씩이나 되어서 남의 신발을 벗겨주다니.’
비록 무릎 꿇고 벗겨준 것은 아니었으나 로벨리아는 괜히 민망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그를 무안하게 만들고 싶지도 않았다.
‘에라, 모르겠다.’
알렉산드로스가 이렇게까지 배려해주는데, 아무래도 빨리 푹 쉬고, 빨리 돌아가는 편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좀 더 효율적으로 쉬기 위해, 로벨리아는 스스로 드레스의 허리끈을 풀었다. 로벨리아는 화려한 것을 좋아하지만 활동을 제약하는 옷은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녀가 산 드레스는 대부분 그 화려함에 비해 무척 편한 편이었다. 그래도 아무리 편해봤자, 드레스 특유의 한계는 있었다.
‘옷이 전체적으로 상체를 조이는 느낌이라 더 쉽게 피로해지는 것 같아.’
몸을 조이는 끈을 풀고 휴식을 취한 뒤, 돌아갈 때는 다시 묶으면 되리라. 로벨리아는 그렇게 생각했다. 한편 그녀가 허리끈을 스스로 풀어내리는 모습을 보고 알렉산드로스는 깜짝 놀랐다. 보통 귀족 여성들은 잘 하지 않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는 곧 그녀 특유의 털털한 성정을 떠올렸다.
‘이런 남다른 태도는 그녀의 매력 중 하나지.’
그렇게 생각한 알렉산드로스는 입꼬리가 저절로 호를 그리는 것을 느꼈다. 어느덧 이런 귀족답지 않은 면모도 그녀만의 개성으로 느껴지고, 귀엽고 사랑스럽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로벨리아는 끈을 제대로 풀지 못하는 것 같았다. 끈을 묶는 매듭이 그녀의 등 쪽에 가 있기 때문이었다. 결국 보다 못한 알렉산드로스가 나섰다.
“내가 풀어주어도 되겠나?”
로벨리아는 잠시 그쪽을 흘끗 보았다가, 결국 그를 향해 등을 내밀었다. 알렉산드로스의 긴 손가락이 그녀의 등허리에 와닿았다. 무척 기묘한 기분이었다. 두꺼운 천을 사이에 두고 있음에도, 상대가 닿는 부분이 점점 따뜻하게 열이 오르는 것만 같았다. 알렉산드로스는 로벨리아의 허리에 바짝 밀착한 끈을 느슨하게 만들기 위해, 끈과 허리 사이에 손가락을 조심스레 밀어 넣었다. 손가락 옆으로 길게 느껴지는 로벨리아의 몸은, 그것만으로도 너무나 자극적으로 느껴졌다.
‘정말 다른 의도는 없었어.’
알렉산드로스는 되뇌었다.
‘분명…… 다른 의도는 없었는데.’
한편 로벨리아 역시 난감하기 그지없었다. 의식하지 않으려고 해도 그의 손가락 열 개가 너무나 선명하게 느껴졌다. 그의 손가락은 따뜻했고, 하나하나가 맥박이 들어 있는 것처럼 맥동하는 것이 느껴졌다. 어쩌면 자신과 닿아 있을 때 그의 심장 소리를 들어서 더 그렇게 느껴지는 걸지도 모른다.
‘지금도 그의 심장은 그렇게 뛰고 있을까?’
로벨리아는 침을 삼켰다. 그저 끈을 풀어주고 있을 뿐인데, 어쩐지 그의 심장 소리가 그의 손가락을 통해 그때와 같이 그녀에게 전해지는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