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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 당신이 미워요 (65/151)

65. 당신이 미워요2021.08.15.

알렉산드로스는 뜨거운 한숨을 토했다. 그녀가 어째서 그런 고민으로 괴로워하는지 알고 있었다. 그것은 모두 자신의 실책이었다. 자신의 무관심이, 오만함이 그녀에게 지워지지 않는 깊은 상처를 남긴 것이다. 자신을 용서할 수가 없었다. 과거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무엇이든 바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자신의 눈앞에 닥친 현실은 상처 입은 로벨리아와 돌이킬 수 없는 잘못을 저지른 자신이었다. 분명 자신은 평생을 후회하며 살아야 할 것이었다.

1654968580469.jpg“이렇게 말하면 그대의 눈에는 내가 염치도 없는 후안무치한 놈으로 보일지도 모르겠지만, 그래, 로벨리아. 3년 전 나는 분명 그렇게 생각했다. 나의 더 강력한 우군이 되어줄 만한 가문의 여자와 혼인할 수 없음을 아쉬워했었지.”

감싸 안은 무릎 위로 녹색 눈이 빼꼼히 나와 이쪽을 보았다. ‘그럼 그렇지, 그럼 당장이라도 헤어져 줄 수는 없는 거냐’라는 의미가 가득한 원망 어린 눈길. 그 눈빛이 가슴을 할퀴었다.

1654968580469.jpg“하지만 로벨리아, 지금의 나는 진심으로, 다른 그 누구도 아닌 그대가 내 아내라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알렉산드로스는 그동안 계속해서 생각해왔던 말을 꺼냈다. 생각하고 또 생각해서 도저히 머릿속에서 잠시라도 잊을 수 없었던 말. 메말랐다고 생각한 이 가슴에 흘러넘쳐서 전하지 않고는 도저히 버틸 수 없는 이 말.

1654968580469.jpg“로벨리아, 지난 시간 동안 나는 그대를 외면해왔고, 황후라는 지위에 걸맞는 대우를 해주지 못했으며, 나의 목표를 이루기 위한 도구로만 당신을 대해왔지.”

알렉산드로스는 다시 한번 깊은 숨을 들이쉬었다. 그의 목소리는 차분했으나, 그의 눈빛만큼은 그 어느 때보다도 들끓는 진심을 전하고 있었다.

1654968580469.jpg“이에 대해서 진심으로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다. 그대를 생각하는 마음이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후회 역시 깊어져서 이제는 도저히 이 죄책감을 떨쳐낼 수 없게 되었다.”

이제껏 그 어떤 짓을 저질러도 한 번의 죄악감도 느껴본 적이 없었던 그였다. 계략과 책략으로 남들을 자기가 원하는 대로 움직이도록 유도하고, 결국 원하는 것을 손에 넣어도. 심지어는 형제자매들을 베어 넘기고 친부를 유폐하여 황위에 오르고도 그에게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다. 그런데 이제 와서, 남의 일이라고만 생각했던 후회라는 감정을 느끼게 되다니.

1654968580469.jpg‘그녀를 향한 이 감정이 무엇이든, 상관없다. 설령 그녀가 내 사죄를 받아 들여주지 않는다고 해도 좋다.’

알렉산드로스는 겸허한 마음으로 각오를 다졌다.

1654968580469.jpg‘그저 그녀의 상처가 조금이라도 덜어지고, 그녀의 마음이 편해질 수 있다면……. 나로서는 충분하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남의 기분을 좋게 하기 위한 빈말이 아닌 진심 어린 사죄를 한 기분은……. 의외로 고통스럽지도, 자존심이 상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후련하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는 홀가분한 마음으로, 그저 로벨리아의 마음속 고통이 조금이라도 누그러지기만을 바랐다. 하지만 로벨리아는 그처럼 담담하게 반응할 수가 없었다. 오히려, 큰 충격이 그녀를 짓눌렀다. 그의 말이 거짓이나 빈말 따위가 아니라는 사실은 그녀 역시 알 수 있었다. 그는 지금, 진심으로, 오로지 그녀만을 위해서 그 높은 자존심을 꺾은 것이다. 로벨리아는 곧 남이 될 알렉산드로스에게 조금의 정도 주고 싶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일부러 더 그의 언행을 나쁘게 해석했고 그를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혈한으로 생각하려 했다. 당연히, 그가 자신에게 호의를 내비치는 것 역시 전부 그의 계산 하에 나온 행동이라고 생각하고 싶었는데.

16549685804726.jpg‘그가 이런 식으로 나오면, 난 대체 그를 어떻게 생각해야 해……?!’

아주 오래 전의 일이 생각이 났다. 계속 잊고 싶었던 일. 일부러 머리 한구석으로 치워놓고 다시 들여다보지 않으려고 했던 일. 가족들과 절연했던 그날, 사실 그녀는 내심 기대하고 있었다. 가족들이 자신을 붙잡아주길 바랐다. 정말 미안하다고, 이제껏 네 소중함을 몰라봤다고. 이제부터는 그러지 않겠다고 해주기를 바랐다. 이제껏 티는 별로 못 냈어도 널 사랑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려주길 바랐다. 만일 그때 그들이 그랬으면, 결국 자신 역시 마음이 흔들렸을지도 모른다. 그랬다면 결국 가족들과 절연하지 않고, 연을 계속 이어갔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그런 마지막 기대조차 저버렸다.  

1654968580473.jpg“우리가 대체 언제 그랬다는 거니?”

1654968580473.jpg“그게 언제 적 얘긴데, 별것도 아닌 걸 아직도 마음에 담아두고 있었어?”

  기대감은 더 큰 상처로 돌아와 가슴을 후볐다. 그런 말을 해주고 싶었다. 그까짓 사과 한마디가 그렇게 어렵냐고. 내 상처보다 당신들의 자존심이 더 중요한 것이냐고. 하지만 그녀는 결국 그러지 않았다. 그럴 가치도 없는 사람들이었으니까. 계속 잊으려 노력했던, 그 비수와 같은 말들이 의식 너머로 떠올랐다. 옛 가족들과 블란쳇 공작가 사람들의 목소리가 뒤섞여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1654968580469.jpg“……로벨리아.”

걱정 어린 목소리가 로벨리아의 상념을 깨었다.

1654968580469.jpg“로벨리아, 괜찮나? 얼굴이 너무 창백한데.”

로벨리아는 눈앞의 사람을 응시했다. 그 큰 손으로 자신의 이마를 짚으며, 진심으로 걱정하는 사람.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는 냉혹하고 무자비하지만 오직 자신에게만은 다정한 사람. 자존심보다 그녀의 마음을 우선시한 사람. 그녀를 위해 자신의 실책을 인정한 사람.

16549685804726.jpg‘……그런 사람이, 왜 하필 이 사람일까?’

태어나서 처음으로 만난 그런 소중한 사람이…….

16549685804726.jpg‘왜 하필 알렉산드로스인 걸까?’

다름 아닌, 그 누구보다도 자신이 피해야 할 사람. 이 소설의 남주인공이라는 사실이, 로벨리아의 가슴을 미어지게 했다.

16549685804726.jpg“당신이…….”

1654968580469.jpg“그래, 로벨리아.”

16549685804726.jpg“당신이 미워요.”

돌아오는 길에 참고 참았던 눈물이, 이제야 터져 나왔다. 언제 마지막으로 흘려봤는지도 기억나지 않는, 그래서 자신의 안에서 메말라 버린 줄만 알았던 눈물이……. 마음 가장 깊은 곳에서부터 솟아 나와 그녀의 뺨을 적셨다.

16549685804726.jpg“왜 하필…… 당신이냔 말이에요? 많고 많은 사람 중에. 왜 하필.”

1654968580469.jpg“로벨리아.”

16549685804726.jpg“당신…… 진짜 미워요. 세상에서 제일 싫어요.”

퍼내도 퍼내도 넘쳐흐르는 원망감이, 홀가분함이. 믿을 수 없게도 이 마음의 빈틈을 채우는 따스함이……. 너무나 선명하게 느껴져서, 로벨리아로서는 그 감정을 막을 수 없었다. 이를 악물고 눈물을 참던 그녀는, 결국 포기하고 소리 내어 울기 시작했다.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곤 목을 놓아 울었다. 좀 더 말하고 싶었다. 왜 이제야 그런 말을 하냐고. 이제 와서 그가 그런 말을 하면 자기는 뭐가 되냐고. 당신 따위 정말 싫다고. 어차피 남의 남자가 될 남주인공 따위 최악이라고. 확 사라져버렸으면 좋겠다고. 하지만 그녀는 그 어떤 말도 입에 담을 수 없었다. 모든 언어는 울음에 묻혀 뭉개져 흩어지고 인간의 말이 아닌 것만 같은 신음과 헐떡임, 울음소리만을 남겼다. 그런 그녀를 괴로운 얼굴로 지켜보던 알렉산드로스가 중얼거렸다.

1654968580469.jpg“내 말이 그대의 마음을 더 아프게 했나. 그런 것만은 아니었으면 좋겠는데.”

주저하던 그는 조심스레 손을 뻗었다. 로벨리아의 잘게 떨리는 어깨를 감싸 쥐었다. 자신의 체온이나마 그녀에게 위안이 되길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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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4968580469.jpg“강한 척하지만 사실은 누구보다도 여린 내 아내.”

그가 속삭였다.

1654968580469.jpg“그대가 얼마나 여리고 또 무른 사람인지는 내가 제일 잘 알지. 강한 척만 할 필요는 없어. 사람은 가끔 연약함을 드러내는 순간도 필요하니까…….”

그 나직한 목소리는 마치 시를 읊조리거나 노래를 부르는 것만 같았다. 로벨리아는 자신이 이제껏 계속 강한 척만 해왔음을 깨달았다. 가족들과 절연하고, 완연한 홀로서기를 하고. 그로부터 오래 지나지도 않아 하루아침에 다른 세계에 떨어졌다. 자신의 것도 아닌 남의 인생을 살면서 황후를 흉내 내고, 악녀인 양 가장했다. 이제껏 계속 과소평가해왔지만, 그것은 분명 쉬운 삶은 아니었다. 그리고 분명 자신은 그러한 삶에 지쳤고, 부담을 느끼고 있었다. 그런 그녀에게 그의 그 말은 기묘할 정도의 위안이 되었다. 마치 자장가 같았다. 그의 나직한 목소리도, 부드럽게 끌어안은 체온도, 계속해서 등을 토닥이는 손길도……. 지칠 대로 지쳐버린 로벨리아는 그만 그의 품에서 잠에 빠져들었다. 알렉산드로스는 그런 그녀를 깨우지 않았다. 다만 그녀를 조심스레 눕혀준 뒤, 이불을 턱 끝까지 올려주곤 계속해서 등을 끌어안고 있었다. 지친 그녀가 어떠한 악몽도 꾸지 않도록. 그 덕분인지 로벨리아는 그 어느 때보다도 깊은 잠을 잤다. 꿈 한 번 꾸지 않은, 더없이 편안한 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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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날 밤.

1654968580473.jpg“아니! 어떻게 이러실 수 있습니까! 이 늦은 밤에 저희를 쫓아내시다니요!”

1654968580473.jpg“숙소도 달리 없는데, 길거리에서 수면을 취하라는 말씀이십니까?!”

황성의 정문 앞에서 기사들과 대항하며 큰소리로 항의하는 남자들이 있었다. 바로 블란쳇 공작과 백작이었다. 황제의 비서관은 그들을 경멸 어린 눈으로 내려다보았다.

16549685864708.jpg“당신들이 길거리에서 자든, 숲에서 자든 내 알 바가 아닙니다. 소란 피우지 말고 어서 돌아가십시오.”

1654968580473.jpg“낮에만 해도 손님으로 맞이해주시더니, 이런 일이 어디 있습니까!”

1654968580473.jpg“황궁에서는 손님 대접을 이렇게 합니까? 이게 황가의 법도입니까?”

16549685864708.jpg“황가의 법도? 하! 그렇다면 3년 동안이나 연락도 한 번 하지 않았던 자식에게 갑자기 금전적 도움을 요구하는 건 블란쳇의 가풍이란 말입니까?”

1654968580473.jpg“뭐, 뭐라고?”

1654968580473.jpg“너 지금 말 다 했느냐? 감히 궁인 주제에 공작에게 그런 무례를……! 관등 성명을 대어라. 내 네놈의 불손한 언행을 상소할 것이다!”

1654968580473.jpg“너 같은 궁인 말고 황제 폐하와 직접 이야기하겠다! 이놈, 블란쳇 공작가가 어딘지는 아느냐! 그 저명한 명문가에 이런 천한 대우를 해? 황제 폐하를 뵈면 네놈의 비행을 샅샅이 고발할 것이다!”

그들은 로버트를 궁인들을 총괄하는 시종장 정도로 알고 있었다. 시종장의 일과 비서관의 일은 경계가 뚜렷하지 않았으므로 그러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때였다.

1654968580469.jpg“이 내가 직접 명한 것이다.”

낮고 무게감 있는 목소리가 밤공기를 울렸다. 그것은 블란쳇 공작, 백작이 그렇게나 오매불망 기다렸던 목소리였다.

1654968580469.jpg“‘블란쳇 공작, 백작에게 어떠한 대접이나 도움도 주지 말고, 빵 단 한 조각도 나누어주지 말고 맨몸으로 내쫓아라. 강제로 쫓아내는 것 외에는 어떠한 대응도 금한다.’”

어둠 속에서 나타난 것은 차가운 비웃음을 얼굴에 걸친 알렉산드로스였다.

16549685890707.jpg“폐, 폐하……!”

1654968580469.jpg“그대들이 바라던 내가 직접 나타났으니 이제 여한은 없겠지.”

블란쳇 공작과 백작은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듯 경악한 얼굴로 입을 벌렸다. 그런 그들의 반응은 안중에도 없다는 듯, 알렉산드로스는 지극히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1654968580469.jpg“그럼, 선택하는 것이 좋을 거다. 황후의 친정으로서 받을 수 있는 최소한의 예우로, 제 발로 황궁을 떠날 것이냐. 아니면 들것에 실려 나갈 것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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