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 왜 저를 황후로 선택했어요?2021.08.12.
그들이 하는 말은 죄다 좋은 말들뿐이었으나 그 말을 듣는 내 기분은 조금도 좋지 않았다.
‘왜일까? 저 말들의 의도가 그렇게 좋게 느껴지지 않아.’
그렇다. 저 말들을 그저 딸을 걱정하는 아버지와 오빠의 순수한 뜻으로 받아들이기에는……. 저 비굴한 표정. 그리고 끊임없이 이쪽의 눈치를 살피는 듯한 눈빛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난 저런 표정을 본 적이 있어. 어디서 봤었냐면…….’
잊으려야 잊을 수 없는 얼굴들이 생각이 났다. 내 전생의 가족들. 매달 부쳐주는 생활비 외에도 가끔 큰돈이 필요할 때 그들은 꼭 저런 표정을 짓고는 했다. 일견 나를 걱정해주는 듯한 그 얼굴에 나는 항상 흔들렸고, 언제나 많은 것을 가져다 바쳤다. 집 리모델링 비용, 오빠 유학비용, 아빠 자동차 대금…….
‘하지만 언제나 그때뿐이었지. 만약 내가 조금 주저하기라도 하면 네가 그러고도 딸이냐며 윽박지르고 화를 내기 일쑤였고.’
그 생각을 하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욱씬거렸다.
‘계속, 계속 잊으려고 노력했던 건데……. 이렇게 다시 생각나 버리다니.’
그런 내 기분을 알 리가 없는 공작과 백작은 계속해서 자기들이 하고 싶은 말을 주워섬겼다.
“처음에는 황제 폐하께서도 그렇게 섬세한 분은 아니시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행여 결혼 생활 중 황후 폐하의 마음을 다치게 하시기라도 할까 봐 무척 걱정했는데, 이제 이리도 사랑을 받고 계시니. 이 오라비는 걱정을 덜었습니다.”
“하고 싶은 말이 뭐죠?”
“예?”
“이렇게 찾아온 데 이유가 있을 것 같은데. 빙 돌리지 말고 본론을 말해보세요.”
“그, 그런 게 어디 있겠습니까. 저흰 그저 황후 폐하를 만나 뵙기 위해…….”
백작이 당황해 말하는 것을 공작이 팔꿈치로 찔러 막았다. 공작은 큼큼 헛기침을 하더니, 사뭇 슬픈 얼굴로 말했다.
“황후 폐하, 마지막으로 공작령에 계셨을 때 저희 가문이 어땠는지 기억하시겠지요? 집안이 무척이나 어렵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지금은 그때보다도 훨씬 더 기울었답니다. 빚을 변제하기 위해 팔던 영지도 이제 별로 남지 않았고, 이젠 아예 성을 팔아야 할 판입니다. 개국공신 때부터 조상 대대로 이어져 내려온 그 성을 말입니다.”
“…….”
“아시다시피 저와 백작은 집안을 일으키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 했습니다. 지난 3년 동안 낮과 밤을 가리지 않고 부단히 일했지요. 그러나 이젠 정말 남은 방도가 없습니다. 이대로는 폐하의 아비와 오라비가 영지를 완전히 잃고, 성마저 잃고 길거리에 나앉게 생겼습니다.”
“황후 폐하, 부디 한 번만 도와주십시오. 황후 폐하의 명망은 많이 들었습니다. 이제 황실에서의 입지도 굳건해지신 듯하고 황제 폐하께도 이토록 사랑받고 계시니, 저희 가문을 좀 도우시는 것은 일도 아니지 않겠습니까?”
백작 역시 간절한 얼굴로 거들었다. 나는 픽 웃고는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결론은 그거였군요. 돈을 달라는 것.”
“그…… 그렇게 생각하실 수도 있겠지만 꼭 그런 것만은 아닙니다. 그저 황후 폐하께서 나신 가문을 잊지 마시고, 성의의 표시를 해주셨으면 좋겠다는 것뿐입니다.”
“그렇습니다. 꼭 현금이 아니어도 좋습니다. 그저 저희의 희망이 되어주십시오. 저희에게 남은 희망은 황후 폐하뿐입니다.”
내 웃음을 희망의 빛으로 본 것일까? 공작과 백작이 더더욱 간절하게 말했다. 그 순간 나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나는 수프 접시를 집어 들어, 백작의 얼굴에 내던지고 말았다.
“으악!”
“헉, 폐하!”
철퍽! 와장창! 쨍그랑! 접시가 바닥에 부딪혀서 깨어지는 날카로운 소리에 새하얀 수프를 뒤집어쓴 백작은 멍청한 눈을 끔뻑였다.
“집안을 일으키기 위해서 하나뿐인 딸을 팔아치운 주제에 그 입을 잘도 놀리는군요.”
나는 내뻗은 손을 채 거두지도 않고 말했다.
“영지가 있었다면 영지를 팔고, 성이 있었다면 성을 팔아 치우지 그랬어요? 그게 딸을 팔아치우는 것보다는 나았을 텐데.”
“폐, 폐하……!”
“하지만, 그건 전부 황후 폐하를 위해서였습니다! 저희가 황제 폐하와 거래를 한 덕에, 황후 폐하도 이렇게 훌륭하고 사랑받는 국모가 되지 않으셨습니까?”
자기도 수프 세례를 맞고 싶은 것인지 공작이 뚫린 입을 제멋대로 놀려댔다. 기가 막힌 일이었다. 그들은 로벨리아를 정략결혼 시킨 것을 ‘로벨리아를 위했던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원작을 읽은 나는 알고 있었다. 그들이 로벨리아를 팔아치운 결과는, 그녀의 비참한 죽음이었다는 사실을.
“웃기는 착각을 하고 있군요. 제가 오늘날 이렇게 된 것은, 오로지 저의 노력 덕택이지 당신들의 덕이 아닙니다. 내가 이렇게 되기까지 얼마나 피나는 노력을 했는지 상상도 할 수 없다면 그 입 닥치는 것이 좋을 거예요.”
“황후 폐하! 어, 어떻게…… 어떻게 아비에게 그런 말을!”
“하나 말해두죠. 블란쳇 공작가가 망하든 말든, 당신들이 길거리에 나앉든 말든 난 아무런 관심도 없어요. 나는 당신들의 가족이 아니라 남이니까요. 나는 이제 블란쳇의 사람이 아니라 황궁의 사람이니까요.”
“황후 폐하! 황후 폐하!”
그렇게 말한 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 자리를 떠났다. 연회장을 떠난 나는 곧장 황후궁으로 향했다. 하고 싶은 말은 다 했지만 난 조금도 통쾌하지 않았다. 환멸이 났다. 모든 게 다. 그리고 가슴이 부서질 것 같았다. 차가운 밤공기에 안겨 엉엉 울어버리면 속이 시원할 것 같았다. 하지만 난 그럴 수 없었다. 황후라는 지위는 너무나 많은 사람들의 시선을 끄는 자리니까. 그래서 나는 입을 꾹 다물고, 눈에 힘을 주고 빠른 걸음으로 걸었다. 방에 도착할 때까지 울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며. ***
“대신관이 내일 제국으로 온다고? 그 전보가 거짓은 아니겠지?”
“전보에는 대신관의 인장이 찍혀 있었습니다. 거짓이 아닙니다.”
비서관의 말에 알렉산드로스의 미간에 주름이 깊어졌다.
“황비의 국혼에도 참석하지 않았던 대신관이 제국에 직접 입국하는 것은 실로 오랜만이로군. 아마 15년 만이었던가?”
“16년 만입니다, 폐하.”
비서관은 더더욱 긴장한 것 같았다. 최대한 침착한 척을 하려고 애썼으나, 그의 얼굴은 창백하기 그지없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지나치게 갑작스러운 방문이니 거절하는 것이 좋을까요?”
“아니, 입국을 허가하도록 해. 그리고 국빈으로서 최고의 예우를 하도록 해라.”
“하지만……! 대신관이 어떤 의도로 오는 것인지 모릅니다. 이런 상황에서 그를 맞아들이는 건 위험 부담이 큽니다. 어쩌면 ‘계획’이 발각될 수도 있고요!”
“적진 한복판에 직접 들어오겠다는데 이 좋은 기회를 놓칠 수는 없다. 기대한 적도 없는 호박이 넝쿨째 굴러들어온 거나 다를 바 없어.”
알렉산드로스는 담담한 얼굴로 말했다.
“‘계획’이 아직 완전히 준비되지 않은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제 곧이다. 대신관이 제국에 있을 때 계획이 완성된다면, 그만큼이나 좋은 일은 없어.”
“하지만 분명 대신관도 경계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호락호락한 상대가 아닙니다.”
“로버트.”
알렉산드로스가 엄한 시선을 주자, 비서관은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그의 얼굴에서 걱정 어린 수심을 지울 수는 없었다.
“혹여 겁이 난다면 일선에서 물러나도 좋다. 지금껏 나를 도운 것에 대한 대가는 철저히 계산하도록 할 터이니.”
“제가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부디 따르게 해주십시오.”
비서관의 말에 알렉산드로스는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그는 먼 곳을 보며 중얼거렸다.
“그래. 지금 같은 때에는 그대와 같이 믿을 수 있는 인재가 한 명이라도 아쉽기 마련이지.”
“…….”
“국빈을 맞이할 준비는 그대에게 맡기겠다. 미리 지시해둔 대로 하도록.”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비서관이 허리를 깊게 숙이고, 서류를 정리해 가지고 나갔다. 알렉산드로스가 다시 연회장으로 돌아왔을 때, 그곳에 있는 건 공작과 백작뿐이었다. 눈치가 좋은 그는 한눈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깨달았다. 박살 난 그릇과 하얀 소스를 뚝뚝 흘리고 있는 백작. 이곳에서 일어난 일은 명백해 보였다. 알렉산드로스는 한달음에 황후궁으로 달려갔다. 궁인들의 말에 따르면, 그녀는 침실에 혼자 있었다. 노크를 했으나 대답이 없자 그는 조심스레 침실로 들어갔다.
“로벨리아.”
환복도 하지 않은 채 침대에 웅크리고 있는 로벨리아가 보였다. 그의 목소리를 들었을 텐데도 그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아마 대답할 기분이 아닐 것이라고, 알렉산드로스는 어림짐작했다.
‘생각보다 로벨리아와 블란쳇 공작가의 사이가 좋지 않았던 모양이군.’
약조도 없이 황제를 대뜸 찾아오는 것은 굉장한 결례였으나, 그가 그들을 맞이하고 귀빈의 대우를 해준 것은 그들이 로벨리아의 친정 가족이기 때문이었다. 알렉산드로스 자신은 가족들과 그리 애틋한 감정을 가지지 못했으나, 그래도 다른 사람들은 보통 가족을 소중히 여긴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로벨리아도 가족들을 어느 정도는 그리워했을 거라고 생각했다.
‘내 실책이다. 정확히 알지 못하면서 셋이서만 함께 있게 하다니. 계속 그녀의 곁에 있었어야 했는데.’
뒤늦은 자책감이 그의 가슴을 쳤다. 그는 조심스레 로벨리아의 옆에 앉았다. 뭔가 위로의 말을 하고 싶었다. 빈말로 할 때는 그렇게나 잘만 나오던 위로의 말은, 진심을 담으려니 오히려 잘 나오지 않았다. 무거운 돌덩이가 목구멍을 막아버린 것만 같았다. 후회와 자책감이라는 이름의 돌덩이가. 슬퍼하는 그녀의 모습이 이토록이나 보기 어려운 것이었다니, 이전에는 미처 알지 못했다.
“로벨리아, 내가 정말로…….”
그가 가까스로 한 마디를 꺼내려던 그때였다.
“당신, 왜 하필…….”
끊어질 듯 말 듯, 가녀린 목소리가 그녀의 끌어안은 무릎 사이에서 새어 나왔다.
“왜 하필…… 저를 황후감으로 선택했어요?”
그것은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의 소리였으나, 그녀에게 모든 신경을 집중하고 있던 알렉산드로스에게는 똑똑히 들려왔다. 그녀의 질문에 알렉산드로스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는 그녀를 기쁘게 하기 위해서 거짓말을 할 수 있었다. 그는 자신에게 그럴 능력이 충분히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비록 가세가 유약해졌다고는 하나, 그대의 가문은 엄연한 개국공신 가문이지. 정통성으로 말할 것 같으면 그 어떤 가문도 따라올 수 없는. 내게는 그게 필요했다.”
알렉산드로스는 한숨을 내쉬고는, 말을 이었다.
“그대도 알다시피 17번째 황비 소생이었으며, 황제에게 선택받아 황태자로 책봉된 것이 아닌 내게 가장 부족한 것이 그 정통성이었다. 그때 당시의 내가 정통성을 조금이라도 손에 쥘 방법은 그것뿐이었어.”
“이제는 3년이나 지났고, 아무도 당신의 정통성에 반기를 들지 않죠. 그럼…… 이제 저도 필요 없는 것이 아닌가요?”
그렇게 말하는 로벨리아의 목소리는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저를 내치고 황비를 황후로 만드는 것이, 훨씬 도움이 되지 않겠어요? 저는 그저 한미한 가문의 여자일 뿐이지만, 황비는 성녀잖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