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 황제 부부의 유명한 금슬2021.05.02.
나는 순간 황당해서 말문이 막혔다. 많고 많은 질문 중에 하필 그 질문을 할 건 대체 뭐란 말인가? 그것도 이 많은 사람들 앞에서! 그 말을 듣는 것만으로도 실수로 성인용품을 샀을 때의 당혹스러움과 부끄러움이 떠올랐다.
‘하지만 그런 것을 티 낼 수는 없지.’
나는 오랜 사회생활로 다져진 포커페이스를 두른 채 말했다.
“……당연히 아니지. 나는 황제 폐하의 지시를 받지 않고 혼자만의 판단으로 라만차의 거리에 갔다. 그러니……. 그 물건들을 구매한 것 역시 나 스스로 한 행동이다.”
“황제 폐하께서 요구하신 것이 아니라 스스로 구매한 것이라면, 역시 정부가 있으신 것이 확실하군요.”
“뭐? 정부?”
“예. 위켄드 오피니언에 보도된 바에 따르면, 황후 폐하의 숨겨진 정부 말입니다.”
‘숨겨진 정부? 이건 또 무슨 소리지?’
나는 위켄드 오피니언이라는 신문을 읽지 않았기 때문에 기자가 하는 말을 이해하는 데 약간의 시간이 필요했다.
“그리고 위켄드 오피니언에 따르면, 황후 폐하의 정부는 경매에서 구매한 노예 ‘케일럽’으로 추측된다고 하더군요.”
순간 내 머릿속에서 ‘정부’라는 단어와 ‘케일럽’이라는 단어가 연결되지 않았다. 그만큼이나 내 머릿속에서 그 두 가지는 완전히 별개의 존재였던 것이다.
‘그러니까 내가 성인용품을 구매했기 때문에 숨겨둔 정부가 있다는 추측 기사가 나왔고, 그 기사에 따르면 내 정부는 케일럽이란 말이지?’
이런 말을 듣고 화를 안 내는 것이 이상했다. 왜냐하면 내게 케일럽은 보살펴주고 싶은 동생 같은 아이였고, 그 루머는 나뿐만 아니라 케일럽의 명예까지 훼손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나를 모욕하는 건 아무래도 상관없지만, 케일럽에게는 그러면 안 되지!’
하지만 나는 화가 난다고 소리 지르는 사람과는 거리가 멀었다. 오랜 사회생활 경력 덕일까, 스스로 감정을 억누르며 착취당한 시간이 길어서일까, 들끓는 감정의 열기로 이성을 뾰족하게 벼려낼 줄 알았다.
“케일럽이 내가 구매한 노예인 것도 맞고, 그 아이를 특별히 귀여워한 것도 맞아. 하지만 나는 어떠한 노예도 나의 정부로 삼지 않았고 앞으로도 그러지 않을 것이야. 다시 그들에게 그런 더러운 모욕을 했다간 그 누구라도 가만두지 않을 줄 알아라.”
확연히 달라진 분위기 때문인지, 아니면 오늘을 위해 또 찐하게 바르고 온 스모키 화장 때문인지, 기자들은 움찔 놀라더니 조금 조용해졌다.
“그래도 황후 폐하께서 그런 물건을 구입하셨다는 건 역시…….”
“그게 아니면 그런 걸 구매할 이유가 없지.”
그렇다고 의심의 시선이 완전히 거두어진 건 아니라서, 기자들은 자기들끼리 쑥덕대며 그런 이야기를 했다.
‘역시 실수로라도 그런 걸 구매하지는 말았어야 했는데. 오해가 부풀고 부풀어서 결국 남들에게 피해를 주잖아.’
나는 그런 생각을 했다.
‘이번 일로 케일럽이 상처받거나, 궁 내에서 따돌림을 당하면 어떻게 하지?’
그런데 그 순간이었다.
“왜 다들 가장 명백한 한 가지의 경우를 외면하는지 모르겠군.”
알렉산드로스의 여유로운 목소리가 공기 중에 울려 퍼졌다.
“기혼자가 정사에 사용하는 물품을 구매했다면, 그 물건을 사용할 상대는 정해져 있지 않나?”
“네?”
기자들은 물론 나까지 입을 떡 벌리는 수밖에 없었다.
‘갑자기 뭔 소릴 하는 거야, 이 인간은!’
“황후 폐하께서 그 물건들을 황제 폐하와 함께 사용했다고 하시는 겁니까? 숨겨진 정부가 아니라요?”
“정부는 무슨. 황후에게는 어떠한 정부도 없다. 그리고 물론, 황후가 그 물건들을 구입한 것은 내가 부탁했기 때문이다. 그게 아니라면 황후와 같은 정숙한 숙녀가 그런 망측한 물건들을 구매할 이유가 없지.”
‘정숙한 숙녀?’
이런 옷을 입고 있는 나를 두고 저런 뻔뻔한 말을 혀에 기름칠 한 번 안 하고 할 수 있다니, 그의 낯가죽 두께가 궁금해질 지경이었다.
‘기자들도 하나 같이 누가 정숙한 숙녀냐고 묻고 싶은 듯한 얼굴이잖아.’
나는 이번 기자회견에서 그의 페이스에 완전히 휘말린 것을 직감했다. 여러 가지 이유로 그의 도움을 받는 것만큼은 피하고 싶었는데…….
‘하지만…… 이번만큼은 어쩔 수 없어.’
나의 자존심만 세우기에는 나 말고 다른 사람들의 명예까지 걸려 있는 일이었다. 결국 나는 그에게 동조하기로 했다.
“……황제 폐하의 말씀이 맞아. 나는 폐하의 요청으로 라만차의 거리에 갔고, 필요한 조사를 했어. 그리고 그 김에 폐하가 부탁하신 물건들까지 구매했지. 그리고…….”
나는 작은 심호흡을 하곤, 말을 이었다.
“……그리고 물론, ‘남녀의 정사에 관여하는 그 물품들’은 황제 폐하와 사용했지. 정부니 뭐니 하는 다른 이가 끼어들 틈은 여기에 없어.”
“이럴 수가!”
“황제 폐하와 황후 폐하의 관계는 좋지 않았던 것이 아닌가?”
“이렇게 되면 두 분의 관계는 어떻게 되는 거지?”
“아무튼 특종이다, 특종!”
기자들이 내가 한 말을 미친 듯이 받아 적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는 생각했다.
‘아, 혀 깨물고 죽고 싶다.’
모쏠 인생 2n년, 남자와의 있지도 않은 뜨거운 밤에 대해 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선언하는 일이 생길 줄이야……. 그것도 그 상대가 다른 사람도 아니고 알렉산드로스라니!
‘진짜 창피해 죽겠네. 이 인간들의 머릿속엔 프라이버시라는 게 없나? 원래 황족들은 늘 이런 일을 겪어야 하는 거야?’
일이 왜 이렇게 됐는지 대충 이해는 됐다. 그러니까…… 조선의 왕들은 상궁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왕비와 동침을 해야 했다고 하지 않던가. 황족이니까 삶의 모든 부분이 지나칠 정도의 관심과 책임에 얽매여 있고, 사생활과 인권에 대한 인식도 부족하고. 그 모든 요소들이 합쳐져서 이런 당혹스러운 상황을 만들어낸 것이다. ……황후가 구매한 성인용품을 누구와 사용했느냐는 주제를 기자들과 진지하게 갑론을박하는 상황 말이지. 나는 당장이라도 혀를 깨물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며 말했다.
“그럼 이것으로 모든 의문은 풀렸겠지? 나와 내 노예들은 그런 불경한 관계가 아니야.”
그러나 아직 모두의 의문이 풀린 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저…… 다름이 아니라, 정말 그 물건들을 두 분께서 사용하신 것이 확실합니까?”
“당연하지. 황제 폐하께서도 저렇게 명확히 말씀하셨지 않나?”
“아니, 그러니까……. 황후 폐하께서도 아시다시피…… 황궁에는 이런저런 소문이 있지 않습니까?”
나는 대강 눈치를 챘다.
‘세간에 알렉산드로스와 로벨리아의 금슬이 별로 좋지 않다는 사실이 알려져 있으니까 의심이 되는가 보구나.’
하긴 그럴 만도 했다. 알렉산드로스가 로벨리아를 냉대한다는 사실이 그렇게 널리 알려져 있는데 이런 것을 쉽게 믿을 수 있겠는가? 차라리 알렉산드로스가 아이샤와 사용했다는 말을 했다면 훨씬 믿기 쉬웠을 것이다. 나는 이마를 찌푸렸다.
‘이 말의 답은…… 나 혼자서 말한다고 신뢰를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야.’
유감스럽게도 알렉산드로스의 도움도 필요했다.
“음, 그게. 그건 그러니까…….”
나는 옆에 앉은 알렉산드로스를 향해 눈치를 줬다. 네가 어떻게 좀 해보라는 뜻의 눈짓이었다. 눈치가 백 단인 그였기에 알렉산드로스는 재빠르게 내 눈짓의 의미를 읽어낸 듯했다. 그가 말했다.
“제군들. 세간에 잘못 알려진 사실이 있어 그대들이 잘못 판단한 듯하군. 세간에 알려진 바와 달리, 나와 황후의 관계는…… 무척이나 좋다.”
그렇게 말하며 그는 내 허리에 팔을 감았다. 나는 괜한 긴장감에 입술을 핥았다.
“그냥 좋은 정도가 아니라, 뜨겁지. 녹아버릴 정도로.”
그의 낮은 목소리가 귓가를 간질이고 로비의 공기를 울렸다. 기자들의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지는 것이 보였다.
“안 그런가, 황후?”
그가 속삭이듯 말하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그렇……죠. 생각보다…… 꽤 뜨겁죠?”
“그렇지. 궁인들 사이에서도 소문이 자자해. 황실 역사상 다시없을 아주 대단한 금슬이라고.”
그의 나직한 웃음소리가 머리를 울렸다. 이상하게 몸이 자꾸 떨렸다. 허리를 감은 손길과 귓가를 간질이는 목소리가 신경 쓰였다. 머릿속에 온통 스팀이 차올라서 무엇을 떠올려도 흐리멍덩하게 느껴졌다.
“지난밤에도…… 어찌나 뜨거웠는지 모른다. 해가 뜰 때까지 그녀의 침실에서 나올 수 없을 지경이었지.”
‘이 인간이 진짜 미쳤나?’
그건 너무 갔다. 오버 그만해! 라는 뜻을 담아서 나는 테이블 아래로 그의 발을 콱 밟아주었다. 옷과 맞춘 15cm 킬힐에 밟힌 그의 발에서 와지끈! 하는 소리가 들려온 듯했다. 내가 발을 밟은 의미를 눈치챘는지 알렉산드로스는 바로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기자들은 이미 기삿거리를 주워 먹을 대로 주워 먹은 것 같았다.
“특종이다, 대박 특종이야!”
“‘황제 폐하, 황후 폐하와의 금슬이 역사상 다시없을 정도라고 밝혀 파문. 세기의 로맨스!’ 좋았어, 헤드라인 나왔다!”
“이렇게 되면 황실의 삼각관계는 어떻게 되는 거지?”
“황후 폐하와 황비 전하 사이의 알력 싸움의 귀추가 주목되는군.”
그들은 이미 알렉산드로스가 던져준 떡밥을 입에 가득 물고, 그가 10을 말했다면 100 정도로 부풀려 쓸 생각으로 가득한 것 같았다. 그제서야 나도 제정신이 좀 돌아왔다. 나는 내 허리에서 알렉산드로스의 팔을 떼어내고 생각했다.
‘미치고 팔짝 뛰겠네. 이래서야 이혼을 대체 어떻게 해야 하지?’
세간에 알려진 그와 나의 관계가 좋으면 좋을수록 이혼에도 다양한 애로사항이 꽃피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어쩔 수 없지. 뜨거웠다가도 한순간에 식어버리곤 하는 것이 남녀 관계니까, 대충 그런 척하지 뭐. 왠지, 갈수록 상황이 복잡해지는 것 같긴 하지만…….’
그런 것을 벌써 걱정해봤자 골머리만 아플 뿐이다. 지끈지끈 아파지기 시작하는 머리를 무시하고, 나는 알렉산드로스와 함께 기자회견을 마무리했다. 의도치 않게도, 기자회견은 기자들의 열띤 호응을 받으며 아주 성황리에 마무리되었다.
*** 나와 알렉산드로스의 대단한 금슬에 대한 기사는 당장 그날 석간신문부터 실리기 시작했다. 온갖 자극적인 헤드라인과 삽화까지 달고 말이다. 심지어 다음날부터는 나와 알렉산드로스의 관계가 좋아진 경위에 대한 추측성 기사들까지 나왔는데, 하나하나가 내가 전생에 열심히 읽어댔던 각종 로맨스 판타지 소설을 방불케 하는 로맨스 스토리로 가득했다. 그러니까 쉽게 말해서, 기사가 아니라 소설이란 말이다.
“무슨 놈의 기사를 이렇게 100% 창작으로 써? 명색이 제국 5대 일간지인데 이런 식으로 써도 되는 거야?!”
솔직히 그 기사들 중 몇 개는 좀 재미있기도 했다. 그러니까, 남주인공 이름에 ‘알렉산드로스’ 그리고 여주인공 이름에 ‘로벨리아’가 들어 있지만 않았다면 말이지……. 뭐, 거기까진 예상한 바이니만큼 감수할 수 있었다. 하지만 한 가지 다른 문제가 있었다.